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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용 나의 현대사 2 - 전쟁의 땅 혁명의 땅 ㅣ 강원용 나의 현대사 2
강원용 지음 / 한길사 / 2003년 6월
평점 :
내가 이 책을 읽고자 하는 것은 요즘 같이 기독교가 비판 받는 세상에서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서 의미 있는 사람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판을 하는 쪽이나 비판을 받는 쪽이나 간에 말이다.
물론 나는 기독교인이니까 이 글을 쓰면서 저자인 강원용 목사를 두둔하는 글을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적어도 같은 편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건 별로 의미없는 일일 것이다. 사실 이 분이 지금도 살아 계셨으면 같은 기독교 진영 안에서도 비판을 받을 소지가 커 보인다. 왜냐하면 이 분은 나름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어디나 보수는 진보를 그다지 안 좋아하지 않는가? 그건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보수는 보수기 때문에 갖는 약점이 있다. 그건 본질 보단 비본질 다시 말해 전통이나 껍질 가지고 자꾸 시비를 걸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로, 사실은 저자만큼 보수적인 기독교인도 드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북 출신에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전파된 첫 세대에 속하신 분이니 얼마나 깐깐하게 예수를 믿었겠는가? 술, 담배를 금하는 것을 철저하게 따랐던 분이다. 그런 분이 미국 유학에서 기독교인이 술, 담배를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더니 아예 그것을 즐기게 되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그것이 주는 즐거움을 버리지 않았다.
그렇다. 술을 마신다고 해서 구원 받을 것을 못 받고, 술을 안 마신다고 해서 구원 받을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이든 본질을 지키고자 비본질이 너무 강조가 되면 주객이 전도가 되고만다. 저자는 그렇게 기독교 신앙안에서 자유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미국 유학에서 배웠던 것이다. 말하자면 본질을 알면 그 안에서 자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런데 나 개인적으론 기독교인 만이라도 술 담배를 경계하는 전통은 그대로 유지를 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다. 도무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이런 것에서라도 좀 차이가 나야하지 않는가? 또 그런 표피적으로 나타난 것을 가지고 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물론 기독교인이 술, 담배를 안하는 것은 우리나라 기독교인만의 고유한 것이긴 한데 거기엔 옛 기독교 신앙 선배들이 몸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라 하여 거룩하게 지킬 목적의식이 생긴 것이다. 또한 자신을 거룩하게 주님 쓰실 도구로 드리겠다는 일종의 신앙적 결기의 표현이 었던 것이다.
저자인 강원용 목사가 별세한 것이 2006년인가 그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나라가 오늘 날 담배 소비와 주류 소비가 높은 걸 생각하면 그렇게 현실참여 의식이 강하신 분이셨으니 아무리 그런 것에서 자유하다고 해도 나부터라는 생각에 다시 금주와 금연을 실천하지 않았을까?
저자는 한때 정치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기독교에선 곱지않은 시선이 있었고, 본인 스스로도 오래 전에 정치를 떠났지만 정치계에 끊임없는 러브콜을 받았다. 결국 그것이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전신인 기독교 사회문화 연구소를 세우게 되는 계기도 했다. 여기서 저자을 보더라도 기독교의 현실참여를 기독교인은 어떻게 보는가 그 차이를 보게 되기도 한다.
나는 기독교의 현실참여가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 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본다. 나는 오히려 기독교의 현실참여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즉 기독교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종교다. 사실 예전의 기독교는 현실참여의 종교였다. 사회와 민족을 구원해야 한다는 대명제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날의 기독교가 비판을 받는 것은 세상의 변화를 선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끌려간다는 그것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것이 아닌가? 말하자면 소금의 짠 맛을 잃은 기독교라는 것이다. 그나마 선행을 많이하는 종교로 기독교가 뽑혔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것인지 좀 애매해지는 상황이다.
그는 확실히 앞서간 선각자였다. 그는 왜 여자가 목사가 될 수 없으며, 예배 중 대표기도를 하면 안 되는 것인가를 문제 삼기도 했다. 그게 60년대 일이니 무려 30년이 앞선 생각이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오늘 날 우리나라에 여자 목사가 있는 것이겠구나 싶다. 그때 당시엔 문제 제기만 했을뿐 시기상조라하여 묻혀지기도 했단다.
특별히 1권에서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가족과 이별해야 하는 아픔을 신앙으로 이겨내는 저자의 진솔한 고백에 읽는 나도 숙연했었다. 그런데 2권에서는 사랑하는 막내 아들을 어린 나이에 먼저 천국으로 보내야 하는 아비로서의 아픔이 절절하다. 어찌 가족을 잃는 아픔도 모자라 자녀를 잃어야 하는 아픔을 또 겪어야 하는 것인지 저자의 운명도 참 기구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하나님은 감당할만한 아픔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런 아픔을 주시는 것도 뜻이 있기 때문은 아니겠는가.
2권에서는 조봉암과 박정희의 저자 나름의 조명이 눈에 띈다. 특별히 저자는 박정희가 정권을 잡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 대통령이 될 운명 때문이었을까? 박정희는 저자에게 자문을 구했고 그것은 그대로 적중했다고 하니 저자의 혜안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대목이다.
또한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그의 유학이 결정적인 이유는 아닐까 싶다. 그래서 큰 물고기는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닌 듯 싶다. 보고 배우는 것이 있어야 그만큼 잘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배우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 자신 부끄럽고, 작아지는 느낌이다.
1권에 이어 내가 이 책을 즐겨 읽는 건 기독교적 관점으로 본 한국 현대사가 흥미롭기 때문이고, 저자의 실존적 고민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라기는 고민하고, 행동하는 저자를 통해 우리나라 기독교의 나아갈 바를 알아 갔으면 좋겠다. 품절이란 게 여전히 안타깝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