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에서 죽기 싫다 - 살면서 괴로운 나라, 죽을 때 비참한 나라
윤영호 지음 / 엘도라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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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좀 극단적이란 생각을 했다.
한국도 이제 살만해졌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한다. 적어도 예전에 비하면 말이다.
하지만 이 살만해졌다는 것은 또 무엇을 근간으로 두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는 따져 볼 일이다. 예전엔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다면 적어도 요즘엔 굶어 죽는 사람은 없으니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일 게다.  
하지만 사람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됐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잘 먹고, 잘 살기도 해야겠지만 잘 죽기도 해야한다. 
바로 이 책은 우리나라가 그동안 얼마나 잘 죽게 되었는가에 대한 보고서로 읽힌다. 
물론 책을 읽어보면 웰다잉, 즉 잘 죽는 분야에 대해서는 아직도 우리나라가 가야할 길은 다소 멀어보인다.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온 게 어디냐 싶기도 하다.

한국도 동양에 속한 나리고, 동양은 특히 서양에 비해 죽음에 대한 사관이 긍정적이지가 못하다.
그래서일까? 아직도 연명치료에 의존하는 일이 많고, 의식적으로 죽음을 밀어내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다고 해서 죽음이 우리 곁은 오지 않는 것이 아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죽음이 우리를 잠식해 버린다.
청년 때 노후를 대비해야 하고, 부자일 때 가난하게 될지도 모를 때를 대비해서 재산을 잘 관리해야 하는 것처럼, 우린 건강하게 살아 있을 때 죽음을 대비해야 한다. 이것을 대비하지 못해 건강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을 우린 얼마나 많이 보는가?
가족 중 누군가를 떠나 보내고 실의에 빠져 우울증에 시달리고, 같이 따라 죽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언제까지 죽음에 대해 쉬쉬하고, 밀어만 둘 것인가? 이제는 죽음에 대해 말할 때다. 

슬픔도 익숙해지면 견딜만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하더라도 가족이나 친척 중 전장이나 피난길에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될까? 그땐 죽는 일이 다반사여서 산 사람의 눈에선 눈물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 죽는 일이 그리 흔한 일인가? 
더구나 책에 씌여진 대로, 예전엔 집에서 죽음을 맞은 경우가 많아 자녀들은 물론이고, 손자들도 죽음을 보게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것이 병원 장례식장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린 손자가 죽음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고 단절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로인해 아이들은 삶만을 생각하지 죽음은 생각하지 못한 채 성인이 되는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나는 내 나이 26살이 될 때까지 죽음을 본적이 없다. 그리고 그 나이되도록 죽음을 목도하지 못한 것에 대해 나름 안도와 뭔지 모를 감사함을 가지고 살았다. 누군가의 임종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괴롭고 슬픈 일일까를 생각하면 이 익숙치 않은 것을 할 수만 있다면 길게 유예받고 싶었다. 하지만 내 나이 26살 때 맞닥트려야만 했던 아버지의 죽음은 슬프기도 하지만 충격적이기도 했다.
어떻게 이렇게 아무런 대책도 없이 아버지를 잃어버린 수가 있을까? 더구나 나는 신앙을 가졌음에도 아버지가 기적적으로 낫게 되기만을 기도했지, 아버지의 남은 삶의 나나을 위해 또는 고통을 위해 기도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무런 방비없이 맞은 아버지의 죽음은 생각했던 것 보다 뒤통수를 후려치는 뭔가가 있었다. 

그리고 22년만인 작년에 오빠의 죽음을 마주해야만 했다. 물론 그 사이 죽음의 소식을 듣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은 다 병원 장례식장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충격은 좀 덜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 전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하였음에도 오빠의 죽음 역시 내겐 익숙한 것 아니지만 임종을 대하는 건 아버지 때와는 좀 달라졌던 건 사실이다.

우선, 당연히 오빠의 쾌유를 빌었겠지만 혹시 죽게 되더라도 살아 있는 동안 만큼은 평안하기를 빌었고, 죽을 때 너무 고통스럽지 않기를 빌었다. 그랬더니 그나마 아버지 때 보단 조금은 담담하게 오빠를 보내 줄 수가 있었다. 
또한 오빠가 임종을 맞기까지 아버지와 달랐던 건 임종 장소였다. 아버지는 당시 입원하고 계셨던 병원에서 임종을 맞았지만, 오빠는 강릉에 있는 갈바리 의원이란 곳에서 임종을 맞았다. 갈바리 의원은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호스피스 전문 병원이다. 
사실 이곳이 1965년에 개원했다고 하니 그 역사가 꽤 된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오빠의 임종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 그만큼 우리가 몰랐거나 안 알려진 것이다.
만일 22년 전에 알았더라면 아버지를 그쪽으로 모셨을까?
아니다. 그래도 못 모셨을 것이다. 당시 엄마 때문에 아버지가 암에 걸린 것도 아닌데, 친가 특히 고모들과 할머니가 서슬이 시퍼래서 무조건 그곳으로 가는 것을 반대했을 것이다. 죽음을 부정한다고 해서 죽을 사람이 사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만큼 또 그 시절은 죽음에 대해 무지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호스피스 전문 병원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 갈바리 병원도 얼마만에 찾아 낸 곳이던가. 그동안 오빠가 입원해 있었던 병원에서는 오빠가 어서 퇴원해 주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그 병원은 3차 진료기관이니 오빠 같은 환자는 장기로 입원해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였다. 이해 못할 것은 없지만, 당시로는 섭섭하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었다. 다리품 팔아 알아봤지만 오빠 같은 중환자가 가 있을만한 곳은 마땅치 않았다. 우리는 병원에서 오빠한테 할 짓 못할 짓 다해놓고 이제 희망이 없으니 더 이상 책임지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런 큰 병원에서 호스피스 시설이 없어,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환자를 강제 퇴원시키려 한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가급적 버텨볼 때까지 버텨 볼려고 했다. 까짓 거, 우리가 우리 돈 내고 환자를 안전하게 보호하겠다는데 자기네들이 무슨 권리로 퇴원하라 마라냐고 하면서 말이다.
거기엔 이해상반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병원측에선, 원래 병원이 균이 많은 곳이니 면역력이 떨어진 환자가 위험할 수 있으며, 정서적으로도 오래 있는 건 안 좋다는 것이다. 그건 또 맞는 이야기이긴 하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지만, 갈바리 의원은 거의 악전고투 끝에 발견한 곳이고 오빠를 그곳으로 내려보낼 때까지도 그곳이 호스피스 병원이란 걸 말하지도 못했다. 그때까지도 오빠가 자신이 왜 호스피스 병원을 가야하는 것이냐고 반발하거나 충격을 받으면 어쩌나 겁이나서 말을 못했던 것이다. 그냥 암환자들을 위한 요양원이라고 했다.

이 책에도 바로 이와 비슷한 점을 다루고 있다. 이젠 각 대학병원에서도 호스피스 시설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장례식장은 그렇게 크게 지어놓고, 죽으면 오라고 해 놓고(이것도 알고 보면 얼마나 모순된 말인가?) 왜 임종대기 환자에 대해선 나몰라라 하는 것인가? 물론 그나마 오빠 같은 경우는 운이 좋아 그곳에서 임종을 맞았지만 그것도 대기자가 많아 까닥하면 가보지도 못하고 임종을 맞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곳은 강릉에 있다. 서울에서 강릉. 건강한 사람이라면 거뜬히 갈 수 있는 곳이지만 환자가 가기는 역시 쉽지 않은 곳이다. 그때 뭐 때문인지 구급차 이용도 용이하지가 않아 대신 승차감이 좋은 차를 빌렸다. 더구나 오빠가 그곳을 갈 때는 적지 않은 비도 내렸다. 정말 자칫하면 그곳에 가기도 전에 객사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왜 이렇게 죽을 곳 찾아 가기가 이토록 힘들어야 하는 것인가?
입원했던 병원이 호스피스 시설도 함께 운영했다면 그런 힘든 일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병원이 호스피스 시설까지 갖추고 있는 줄만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병원과 친하지 않으니 몰랐던 것이다.   

또한 환자에게 죽음을 말할 것이냐지, 아니냐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평소 건강하고, 제 3자의 입장이라면 당연히 환자에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나의 문제가 되면 얘기는 달라진다. 차마 입이 안 떨어지는 것이다. 담당 의사는 그런 보호자의 입장을 생각해 자신이 말해주겠노라고 해서 믿다가 뒤통수를 맞았다. 왜냐하면, 나중에 무슨 대화를 하다가 오빠가 그때까지도 자신이 그냥 위험하고, 중한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지 몇 개월 후면 죽을 거란 걸 몰랐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도 의사는 어느 때가 되면 환자 본인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들도 환자에게 차마 확실한 얘기를 못하는 것이다. 이건 확실히 직무유기란 생각이 들었다. 오빠 같은 환자를 한 두 번 다뤄 보는 것도 아닐 텐데 그렇다면 매번 이런 식일 것 아닌가? 책에 의하면, 선진국에선 의사가 이 부분을 밝히도록 법으로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비해 우리나라에서 아직도 이 문제가 첨예한 건, 환자가 알아서 더 나빠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다. 의사가 알리고 싶어도 보호자가 못하도록 막는 경우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환자가 알았다고 해서 일시적으로 나빠지는 경우는 있어도 대체로 결과는 긍정적이라고 한다. 그래야 스스로 자신의 마지막을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빠도 마지막엔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마지막에 이를 때까지 이것을 쉽게 받아 들이지 못한 채 두려웠을 것이다. 그것에 대해 우리 살아있는 사람이 충분한 위로와 안정을 주지 못한 건 지금도 두고 두고 후회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의사나 가족만 원망할 수는 없다. 의사는 생명을 담당하고 있으니 책임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자신의 삶도 자신의 것이듯, 죽음도 자신의 것이다. 그러니 (물론 용기가 필요하겠지만)내 생명이 얼마나 남은 거냐고 물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을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지 상담(컨설팅) 받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또 그러기 위해선 평소 죽음에 대해 삶 만큼이나 자주 말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빠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나는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됐다.
오빠의 죽음은 아버지 때와는 또 달랐다. 아버지 때는 무조건 슬프기만 하고, 인생이 그저 허무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나이가 들어선지 굉장히 현실적이 됐다. 
나 역시 오빠처럼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죽을 수도 있다. 그럴 때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의사나 가족들이 어려워 할 것을 생각해 내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물어봐야 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은 치료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본다. 
물론 연명치료 같은 건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다. 하루라도 더 살아 보겠다고 몸에 바늘 꽂고, 호흡기 꽂고 그렇게 내 몸을 혹사시키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벗어버릴 몸이지만 가급적 갈 때까지 깨끗하게 있다 벗어버리고 가고 싶다.  
무엇보다 의사은 환자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처음엔 여러 가지 가능성을 들어 적극적인 치료를 권한다. 미리부터 단정 짓기도 뭐하지 않는가? 처음부터 비관적으로 몰고 가는 것도 부담스럽고. 또한 이런 자본주의 세상에서 어느 정도 병원에 이익도 내야겠으니 유도를 하는 것이다
보호자 역시 안타까운 마음과 의학에 대해 아는 바도 없으니 의사가 권하는 것은 무조건 다 해 달라고 한다.   
그러니 환자 본인과 보호자가 어떻게 할 건지를 결정하고 주도적이 되야 이런 모든 것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죽음에 맞서 싸우는 것도 용기지만, 죽지 않겠다고 바둥거리는 것도 얼마나 불편한지 알지 않는가? 이건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지만 그 결과는 엄청나다. 그래서 이러한 책이 필요한 줄도 모르겠다.

책은, 꼭 자신이 죽기 전에 버킷 리스트를 만들라고 권한다. 그것은 나도 오빠 죽음 이후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다.
무엇보다 난 내가 죽은 후 남아 있는 사람이 나의 삶의 흔적을 치우게 하고 싶지 않다. 내 주위에 가족이 하나도 없어 전문업체에서 해 주는 거라면 모를까. 빨리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치울까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건 저 책무더기가 아닐까 싶다. 살면서 가장 놓지 못하고, 나의 유일한 소유물이며, 사치품인 책을 가족들이 치우게 하면 너무 힘들게 하는 것 같아 편치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오빠의 마지막 모습 중 기억에 남는 건, 오빠가 응급실에서 병상이 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때 잡았다던 엄마의 손이다. 물론 난 그걸 엄마에게서 얘기로만 들었는데, 그건 평소의 오빠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이다. 모르긴 해도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이 두렵기도 했거니와 그 순간만큼은 자신을 낳아 준 엄마의 손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때 손을 잡지 않는다면 또 언제 엄마의 손을 잡아 볼지 알 수 없는 일이고, 그 조차 하지 않는다면 떠나는 자신이나 남아 있을 엄마에게 너무 아쉬울 것 같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평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해야 한다. 하지만 우린 그러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책에 나온 내용대로 가족과 친지들에게 사랑의 메모를 남겨둘 일이다. 그리고 남아 있을 가족들에게 내가 지금 떠남이 꼭 슬픈 것은 아니라고 말해둬야할 것 같다. 남아 있는 가족들에겐 이별이지만, 난 이제 그동안 헤어져있던 먼저 간 가족들을 만나러 가니 좋다고 말해 주므로 그들을 위로하고 싶다. 
그 밖에 나의 버킷 리스트는 뭐가 있을까? 

오래 전, 미국의 어느 저명한 목사님이 자신이 죽기 전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하고, 장례식 때 들으라고 하곤 세상을 떠났단다. 가족들은 고인의 말대로 장례식 때 고인의 녹음한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는데, 평소 유머 감각이 뛰어난 고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히려 장례식장이 웃음 바다가 됐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삶은 이렇게도 완성이 되는 거구나 싶기도 했다. 

내가 왜 지금 죽어야 하는 거냐고 따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래도 급사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할 수 있는 건 나름의 복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국가의 책임은 이런 의지가 있는 개인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행복하게 태어나게 하는 것도 국가의 몫이지만, 만족하게 죽을 수 있게 하는 것에도 국가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덕목이란 말이다. 
경제적으로 잘 사는 것만이 선진국의 조건은 아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고, 얼마나 잘 태어나, 얼마나 잘 살게 해 줄 것이며, 얼마나 잘 죽게 해 줄 것이냐가 선진국의 조건인 것이다. 
아마도 태어나는 문제와 죽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OECD국가 중 우리나라가 최하위인 것마는 분명해 보인다. 영아유기의 문제, 자살의 문제 등이 이토록이나 해결이 안 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서 책의 표현대로 한국은 '살면서 괴로운 나라요, 죽을 때 비참한 나라'임에 틀림없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막상 책을 읽어보면 지난 수십 년간 이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는 나름의 흔적들이 보여 아주 비관스럽지마는 않다. 아마도 저자가 이 분야를 연구해 온 사람으로 겸손해서 그런 제목을 쓰지 않았나 한다.
책은 비교적 어떻게 임종을 맞을 것인가에 대해 상세하게 나와 있다. 분명히 길은 있다. 보기엔 화려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맞는 좋은 삶의 마무리의 길은 찾아보면 있다. 너무 국가에만 의존하거나 기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제 정부가 국민을 만족시킨 일이 있었는가?
개인적으로 잘 마무리하고, 잘 죽는 방법 중 추천하고 싶은 건 신앙을 가지라고 권하고 싶다. 아무래도 그것이 그나마 정부가 베풀어 주는 그것 보단 조금은 낫지 싶다. 죽음을 비교한 여러 문건 중에, 신앙이 있는 죽음이 없는 죽음 보다 훨씬 평안하고 안정적이라는 보고는 이미 오래 전에 보도된 바 있다. 
실제로 나의 오빠도 살아 있을 땐 비신앙인체로 살다 죽기 바로 전에 하나님을 영접하고
평안한 임종을 맞았다. 

이 책은 읽기에 따라선 약간 건조하고 딱딱할 수도 있지만 읽어 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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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 - 조심하라, 마음을 놓친 허깨비 인생!
정민 지음 / 김영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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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시끄럽다. 나라가 시끄러우니 주변이 시끄럽다. 주변이 시끄러우니 내 마음도 시끄럽다. 하지만 이도 맞는 얘긴지 모르겠다. 내 마음 하나 바로 세우지 못하면서 주변을 험담하고, 나라가 시끄럽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 하나가 바로서면 내 가정이 바로서고, 내 이웃이 바로서고, 마을이 바로서고, 나라가 바로 서는 것 아니겠는가? 예수님도 말씀 하셨다. 무릇 지킬만한 것 보다 내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고.

 

고래로 바른 것을 가르치고,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은 늘 있어왔다. 그러나 그 말을 나 자신이 기꺼이 들으려 했는지 반성해 본다. 교과서 같은 말이라고, 이상은 좋으니 현실성은 없다고 외면하고, 경쟁에 떠밀리고, 싸구려 자본주의에 물들어 살아 보니 좋은가? 

 

왜 우리나라가 얼마 전부터 인문학에 끌리고, 들끊는지 모르겠다. 이게 일시적인지 아니면 오래 갈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이 현상은 환영해 본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으로 진입하고 있는데, 그 선진국의 조건이 경제의 성장에만 있겠는가? 그 나라가 얼마나 사화적으로 건전한가, 복지가 얼마나 잘 되있는가, 국민 의식이 얼마나 성숙한가 등이 고루 반영이 돼야 하는 일이라면 이것의 근간이 되는 교육과 학문이 바로 서야한다. 우리나라는 교육은 어느만치 뒷받침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정한 학문을 바탕으로 한 전인교육은 아직 바로서지 못했다. 이것을 인문학이 해결해 주지 않을까 해서 우리는 그토록 인문학에 목숨거는지도 모르겠다. 또 그러다 보니 미뤄뒀던 우리나라 고전 내지는 한문학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이런 더운 여름 날 이런 책을 읽는다는 건 좀 특별하긴 하다. 물론 일부러 이런 여름에 이 책을 읽으려 했던 건 아니다. 어찌하다 보니 초여름에 읽기 시작한 책을 벌써 여름의 3분의 2를 보내버린 싯점에서 마감을 했다. 그동안 사회적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얼마 전부터 군대내의 폭력 문제가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이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사람만 갈아치운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닐 텐데 매번 사람만 바뀔 뿐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책을 읽다보니 '차역인자(此亦人子)'란 말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은 도연명이 자식에게 보낸 짧은 훈계의 편지에서 나온 말이라 한다.

네가 날마다 쓸 비용마저 마련키 어렵다 하니 이번에 이 일손을 보내 나무하고 물 긷는 너의 수고로움을 돕게 하마. 그도 사람의 자식이니라. 잘 대우해야 한다(220p). 즉 도연명이 그의 아들을 도와 줄 하인을 보내면서 썼던 말이다.    

 

'그도 사람의 자식이니라. 잘 대우해야 한다' 이 말이 어찌 여기에만 해당이 되겠는가? 상관과 말단 군인에게도 해당되는 말이고, 직장 상사와 회사원, 노사간에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하다못해 고아일지라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이 말을 군에서 열심히 가르쳤다면 오늘 날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까? 나는 그 소식을 접하는 순간 주입식에, 경쟁적으로만 공부해 왔던 그 썪어빠진 열매들을 보는 것은 아닌가 해서 씁쓸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자신을 돌아보는 강한 반성이 필요할 때다. 조금만 건드려도 폭발할 것만 같은 시한폭탄 같은 감정과 정서를 가지고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잘못을 하고도 오히려 잘못한 것이 없다고 고개를 꼿꼿하게 드는 것을 보면 후안무치를 넘어 짐승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려버리게 된다. 내 탓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물론 그 속을 캐고캐면 반드시 그 혼자만의 잘못이라고도 말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안의 잘잘못을 밝히는 정의도 필요하지만, 누구 한 사람이라도 내 탓이라고 말하는 겸손한 사람을 만나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더구나 이것이 군중심리와 만나면 그건 정말 집단적인 악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평소에 자신을 낫추는 자세를 길러 둠이 필요하다.

 

특히 우리나라는 '갈 때까지 가보자', '너 죽고, 나 죽자', '싹 다'라는 말을 너무나 잘한다. 뭐 그만큼 뒷끝 없고 화끈해서 좋을지 모르지만, 그것처럼 배려없고, 미련한 말이 또 있을까? 그때 내 눈에 들어 온 말은 궁민즉설(弓滿卽抴)이 눈에 들어왔다. '활을 너무 당기면 부러진다'는 말이란다. 말은 다해야 맛이 아니고, 일은 끝장을 봐서는 안 되며, 봉창에 가득한 바람을 편가르지 말고, 언제나 몸 돌릴 여지는 남겨두란다. 청나라의 석성금이 했던 말이란다(172p)

 

지난 날 나도 일을 하면서 얼마나 많이 화를 내고, 상대를 공격해 왔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해진다. 이 말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겸손하고 현명한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왜 나는 내가 남에게 어떻게 했는지는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남이 나에게 어떻게 해 왔는지는 그리도 많이 따지고 계산하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바다 밑을 떠도는 미처 다 구조되지 못한 혼령들과, 최대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아이들, 비명횡사 했다던 사건의 책임자를 생각하면 내 일이 아닌데도 자꾸 부끄러워지면서, 한국은 거대한 미스터리 공화국은 아닌가 생각한다. 어디서 잘못됐는지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하긴, 그런 것은 따져서 또 무엇하겠는가? 나부터 조심하고, 수신을 바로하길 힘써야 한다. 그러기 위해 옛것에서 배우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지 않던가?   

 

난 언제부턴가 '조심'이란 단어가 좋졌다. 몸조심 해라. 조심해서 잘 다녀와라. 조심해서 가라 등등. 써 놓고 보니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남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정민 교수는 마인드 콘트롤, 즉 바깥을 잘 살피라는 뜻으로 조심을 썼다. 안 그러면 마음은 툭 하면 달아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나에게 당부하는 '조심'이다.

 

내가 저 위에 썼던 예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 하나 붙잡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조심은 읽고, 또 읽어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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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족, 뒷담화의 탄생 - 살아있는 고소설, 2014 세종도서 선정 도서
이민희 지음 / 푸른지식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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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니 소설의 의미가 더 확연히 다가온다. 

저자는 이 뒷담화가 경제에 기초한 지식권력이며, 조선후기에 소설이란 상품을 발전시켰다고 했다(5쪽). 듣고 보니 그도 그렇겠다 싶다. 하지만 소설이 어디 조선후기에만 국한시켜 발전 했겠는가? 소설은 어느 시대고 뒷담화는 지식권력으로 삼아 발전해왔을 것이다. 즉 뒷담화의 공론화가 소설에선 가능해졌다는 말일게다.
  뒷담화가 무엇인가? 뭐 꼭 사전적 의미를 갖다 붙이지 않더라도 모든 '카더라'의 총칭이며, 사담의 공인화며, 인간 욕망의 실체가 아니던가? 최근 뒷담화 하지 말자는 캠페인도 있지만, 이 뒷담화처럼 인간을 사로잡는 것이 또 있을까? 물론 할 때는 모르겠는데 하고난 후 뒷끝은 영 안 좋다.
  그런데 이야기를 잘 관리하고 조정할 수 있는 사람들, 일명 스토리텔러들은 이 뒷담화에 자기네들의 특정 욕망을 심어 놓는다. 그것도 아주 조직적이고, 대범하게. 아니, 위대하게 은밀하게가 맞으려나? 그래서 이것이 소설이란 형식을 빌어 재탄생되면 그것은 공인화가 되며, 힘을 갖는 것이다. 대단히 멋진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자가 연구한 것만하더라도 17세기 조선후기를 헤아리니 결코 짧지 않은 역사를 지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 책의 제목이 뒷담화를 소설로 보고 '탄생'이란 시효의 의미를 붙이고 있는데, 우리나라에 소설이 탄생된게 과연 17세기 무렵부터 였을까? 잘 모르겠다. 더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그 이전에도 뒷담화란 형태의 소설은 존재하지 않았을까? 물론 저자가 그렇게 보는 것은 허균의 <홍길동전>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이고 그것이 17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은 얼핏보면 페미니즘을 표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맞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의 모든 제도나 법이 남성위주인 것을 보면 그나마 현대 사회는 여권신장이 어느만큼 되있지만 중세 봉건주의의 조선사회는 더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우리가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는 이상 어느 것도 단정지을 수는 없다. 즉 그 시대도 나름  시대를 깨우기 위한 몸부림은 있지 않았을까?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으니 뭐라고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 시대가 그렇게 봉건적이고, 폐쇄적일까에 나는 의문을 갖는 것이다.
  오늘 날,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데는 참으로 많은 문화적 행태들이 동원된다. 이를테면 출판물을 비롯해, 연극, 영화, 노래, 그 밖의 여러 형태의 포퍼먼스 등. 하지만 17세기 그 시대는 무엇을 동원할 수 있었을까?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가 그나마 가장 보편적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것을 소설로 발전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소설은 확실히 예나 지금이나 남자 보다는 여자의 선호품임엔 틀림없다. 17세기가 그렇게도 봉건적이고 폐쇄적인 사회라면 또 그것에 적응하는 것이 여자라고 한다면 그 사회는 그리 발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왜 여자만 이래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저항과 그것의 의식 변화를 주도하는 것만이 그 사회를 견디는 것이라면 여자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방한림전>의 발견은 확실히 획기적이고도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여자가 남장을 해 출사를 하고, 그 남장을 유지한 채로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입양해 키운다. 과연 놀랍지 않은가?

 

  내가 이 책을 보고 놀랐던 건, 과연 우리나라에 이런 소설이 있었단 말인가 하는 것이었다. 앞서 말한 <방한림전>도 그렇지만, <운영전>이니 <김안국 이야기> 같은 이야기는 거의 처음 듣는 이야기 같다. 하긴, 우리나라 고소설이 그다지 주목받는 분야가 아니고 보면 이 이야기들도 일부러 찾아 보려고 하지 않으면 쉽게 접할 수 없는 것이다.
  걱정이다. 이런 고소설은 버젓이 존재하는데 알려고 하지 않으니. 그것을 알아야 이야기의 원류를 할 수 있고, 욕망의 원형을 알 수 있는 법인데 자료를 쉽게 접할 수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그나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전, 이를테면 심청전이나 장화홍련전 같은 이야기는 영화로, 드라마로 새로운 해석으로 새롭게 옷을 입고 대중과 만나고 있으니 다행이다. 어떤 사람은 원전과 달라서 불쾌감을 표할지 모르겠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뭘 모르는 고루한 사람일 것이다. 책에서도 지적했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이야기들도 사실은 정석이 아니라 이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당시 세책(책을 세 놓는다는 의미로 요즘의 도서대여)을 위해 필사하는 과정에서 필사자가 임의로 이야기를 다르게 변형시켜 놓기도 한단다. 물론 가끔 누가 필사한 어떤 작품이 발견됐다 뭐 그런 얘기가 있긴 하지만, 그건 역사학자의 몫이다. 그러니 이야기를 개발시켜야 하는 스토리텔러에게 원본 논란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최근 <춘향전>의 새로운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방자전>은 얼마나 발칙하면서도 인간의 욕망을 잘 표현했던가? 이렇게 이야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은 기존의 이야기를 변형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과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그런 것처럼 저자 역시 바로 이런 것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 역시 <춘향전>의 해석이 눈에 띄는데, 영화 <방자전>은 방자가 주인공인만큼 방자의 시각에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저자의 <춘향전>의 해석은 철저히 춘향의 관점에서 해석된다. 
  우린 흔히 그 이야기를 여자의 절개를 상징한다고 보는데 저자는 신분상승의 욕구를 표현한 이야기로 보는데 과연 그렇구나 싶다. 이렇게 그것이 이해가 되면 인식의 변화가 오기도 하는데 이것이 <대학장구>에 나오는 쾌족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쾌족이란, 남이 나를 알아줌으로써 얻는 행복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유쾌한 만족이라고 하는데 이를테면 유레카 같은 것은 아닐까? 그런데 저자는 그것을 소설의 불온한 일탈성에서 맛보는 희열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저자가 다룬 <심청전>과 <장화홍련전>의 해석이 조금은 아쉬워 내 나름의 문제점를 재기해 볼까 한다. 물론 이 두 작품에 대한 저자의 해석은 나름 탁월하다.
  효를 강조하는 유교 사회에서 심청전만큼 그것을 대중에게 전파하고 쇄뇌시키기에 가장 좋은 이야기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아버지가 자신을 부담스러워 해 어느 대가집 양녀로 가는 기뻐했다고 했다(아, 물론 심청전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 그대로다. 단지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진다는 사실을 아버지께 그대로 전할 수 없으니 어느 집 양녀로 가게 되었다는 그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심청은 아버지에 대한 배신과 그로인해 자신에 대한 의식을 깨우치는 과정을 이야기 한다. 이를테면 효도 중요하지만 자신을 잃어버린 (무조건적인)효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반문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조금 부족한 해석이라고 보여진다. 즉 이것은 심청의 아버지 심학규를 이해해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심학규가 심청을 부담스러워 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보통 사람도 자식 하나 키우는 게 쉽지가 않은데, 하물며 눈이 멀어 자식을 키운다는 게 쉬운 일인가? 그런데 어느 대가집 마님의 양녀 입적 제의가 반가웠다면 어떤 종류의 반가움이었겠냐는 건 따져볼 일이다. 건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반가워 했다면 그건 정말 파렴치하다.
  조선 중기 사회에서 15세 전후를 이미 성인으로 본다고 했다. 그러니 그 나이에 부모봉양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게 딸이 장성하고, 자신이 봉사라해서 무조건 딸의 봉양을 아버지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였을까? 정상적인 아버지라면 부녀만 사는 집에서 적어도 딸이 시집 갈 때까지 자신은 바깥 일을 하고, 딸은 안 살림만을 맡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심학규는 비록 양반 가문이긴 했지만 가난했다. 딸이 가난한 아버지 밑에서 살다 시집 가기 보다 어느 대가집 양녀가 되서라도 번듯한 집 규수가 되어 시집 가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더구나 동냥젖을 먹여가며 애지중지 키웠는데 그저 그런 기회가 왔다고 아무런 생각없이 마냥 좋아만 했겠는가? 이건 내가 심학규라고 해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아비의 마음도 몰라주고 그뜻을 곡해했다면 오늘 날 <심청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장화홍련전>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저자의 해석이 타당한 해석이라고 본다. 왜 옛날부터 계모는 악한 사람으로 묘사가 되는 것일까? 게다가 외모까지도 흉악한 것으로 묘사한다. 또한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 그렇다. <신데렐라>의 계모가 어떻게 나오는지 말할 필요도 없다.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새로운 해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내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건, 그렇게 계모는 나쁜 사람으로 묘사하길 좋아하면서, 계부는 웬만해서 어느 작품에도 잘 다루지도 않는다. 이건 확실히 가부장의 가정에서 외부에서 계모가 들어와 한 가정의 질서를 파괴할까 우려하여 그런 인물 배치를 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장화홍련>도 그렇지만 그런 <신데렐라>나 <콩쥐팥쥐>에 나오는 아버지는 거의 언급이 없다. 없는 것으로 봐서 나약하거나 무능한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런 것일까? 특히 <장화홍련>에서의 아버지는 계모에 대해 전혀 사랑이 없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니 없다 못해 곡해까지 하려 한다. 그렇다면 왜 아버지는 애정도 없는 여자와 재혼을 했던 것일까? 그것에 대한 해석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사실 이 책은 앞서도 말했지만 고소설을 소개하기도 하지만 페미니즘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게 저자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페미니즘을 무조건 옹호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여성의 권익을 상당히 끌어 올려주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한 두 가지 예처럼 지나치게 경도된 페미니즘은 자칫 남자와 여자가 조화하지 못하는 패단을 낳을 수도 있기 때문에 경계하는 것이다. 
  앞서 말한 <방한림전>도 여성 스스로가 지위를 얻는 여성 영웅을 그린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해석하기에 따라선 동성애를 옹호하는 것으로 읽힐 수도 있다. 요즘엔 동성애를 옹호하면 꽤나 앞선 의식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건 정말 위험한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남장을 해서 지위를 얻은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여성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물론 이야기의 정황은 알겠지만 말이다. 
  결국 학문도 그렇지만 소설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휴머니즘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남자와 여자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경도된 페미니즘이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남자와 여자가 조화하지 못해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회가 무슨 건강한 사회겠는가? 
  사회적 의미에서의 뒷담화는 분명 안 좋은 것이긴 하지만 저자가 왜 소설을 뒷담화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사실 인간이 자꾸 뒷담화를 하는 건,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는 것을 확인 받고 싶어하는 욕망 때문이 아니겠는가? 소설이 바로 그런 것이다.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그것을 글로 써서 독자들에게 자꾸 확인 받고 싶어서 소설을 쓰는 것이다. 또한 그 독특함이 보편 타당함을 얻어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쓰는 것은 아니겠는지.
  저자의 작품해석도 좋고, 우리가 몰랐던 고소설을 알게해 준 것도 반가운 일이긴 한데, 아쉬운 건 이 책은 평론에 가까운 에세이쯤으로 읽힌다는 것이다. 욕심을 내자면 소개된 작품의 새로운 현대적 버전으로 읽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냥 알게된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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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4-08-01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의 서평을 읽다보니 루쉰 선생의 소설사 강의가 떠 오르네요 유교 사상에 찌든 중국 고전 문학을 재 해석하여 많은 학생들에게 강의를 했었는 데 그런 강의가 새로온 시각으로 해석을 하며 많은 호평을 얻었어요 ㅎ
스텔라님의 서평도 읽으며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예수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에 굉장히 스스로 자신감을 얻고 있습니다. ㅋ
간디 루터 킹으로 이어지는 정신의 계보를 무척이나 저도 좋아합니다 제대로 된 루터 킹의 전기가 나왔으면 하는 생각도해요 진정한 종교인은 진정한 생활인이라 믿거든요 자신의 생활 속에서 종교적 가르침을 원리로 그것이 단순한 편향된 사고 방식이 아닌 진정 남을 사랑하고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삶 글구 설사 저급한 남에게 실망하는 일을 본다고 해도 지치지 않고 나갈 수 있는 사람
전 그게 진정한 종교인이지 않나 싶어요 ㅎ
전 그러나 야동도 너무 좋아하고 성실하자도 못하고 ㅠ
스스로 실망할 때가 많아요 하하하
그래도 스스로 포기는 하지 않아요 ㅋ 지나칠 정도의 자기 사랑이랄까? 흠 이게 인류애로 바뀌어야 하는 데 ㅡ..ㅡ

stella.K 2014-08-01 17:46   좋아요 0 | URL
ㅎㅎ 야동도 너무 좋아하고! ㅎㅎㅎ
괜찮아요. 그게 루쉰P님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데 그다지 방해가
될 것 같지 않습니다.ㅋ
루쉰P님이 루쉰을 좋아하실 거라는 건 저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루쉰님은 종교인 보다 종교인의 본래의 의미를 더 잘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날의 종교인은 본래의 의미에서 너무 많이 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 자신도 여기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 모르겠구요.
신앙인이 된다는 건 어떤 명예도 권력도 아닌데 이걸 권력화하고 사유화 하는
걸 보면 정말 마음이 아프다 못해 쓰려요. ㅠ

이 책은 시도는 좋은데 깊이 면에선 좀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저자가 비교적 젊은 분 같은데, 그래도 전 우리가 몰랐던 고전을
이렇게 다뤄줬다는 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루쉰P 2014-08-02 21:46   좋아요 0 | URL
아 스마트폰으로 쓰다보니 야동을 너무 좋아한다고 썼네요..그게 아니라 그냥 어쩌다 기회가 될 때 본다는 뜻이었어요. 하하하하하;;;
그렇다고 천박한 성지식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고, 구성애 강사님의 성교육을 보며 올바른 성 관념을 지니고 저런 것들을 안 보는 노력을 하고 있어요. -..- 아 민망하여라....
안 볼 거에요. 예수님 같은 삶을 살아야죠. 이건 아닌 듯...

근데 기사에 나오는 종교인들이 비리나 부정이 많아서 그렇지 분명 현실 속에서는 옳게 그리고 정말 그 분이 말하신 데로 살아갈려고 하는 분들이 있을거라고 여겨요. 예수님 클라스가 있는 데 그런 막돼 먹은 종교인들만 나오겠어요? 전 분명 존재하시리라 봅니다. ㅎ

신앙인이라는 거 자체가 권력에 저항하고 사유화가 아닌 공유화의 화신이라 불리는 것인데 그것이 내면의 악에게 잡아먹히며 권력화 되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전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 이런 건 참 좋아하거든요. 전문적인 공부는 하지 못 했지만 민중 속으로 더 낮은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신학이 진정한 신학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성경이나 예수님에 대한 관심은 많지만 믿음보다는 인간에 대한 궁금함이라고 할까요? 인간으로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란 경외감 같은 것이랄까?
반 고흐의 평전을 읽는 데 그의 삶이 예수남을 본받아 살려고 했고, 그가 즐겨 읽는 책들이 르낭의 예수의 생애라든가, 천로역정 이런 거라고 하더군요.

전 스님이나 목사가 될 체질은 아니지만 수행자의 삶은 무척이나 존경하거든요.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욕망은 버릴 수가 없으니 그것을 컨트롤 하여 선을 향해 나아가는 것...욕망은 사실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을테니, 욕망이란 건 진보를 위한 발걸음이 되기도 하거든요. 최대한 선을 향해 가도록 컨트롤 하는 싸움. 그런 거 꿈꿔요.
그렇다고 제가 뭐 도를 아십니까 이런 건 아니고요. ㅋㅋ

왠지 종파 하나 설립할 기세네요.. 제가;;; 아...저도 좀 광신적인 기질이 있나봐요. ㅎ
더운 폭염이에요 스텔라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 ㅎ

stella.K 2014-08-03 13:41   좋아요 0 | URL
맞아요. 믿음을 지키며 선하게 사는 사람도 많은데
언론은 이게 전부 다인 양 하는 경향이 있죠.
언론의 공정성과 선별해서 듣는 안목도 필요한 것 같아요.

날씨가 너무 더워졌어요. 루신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
 
버리는 글쓰기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차윤진 옮김 / 북뱅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근래에 글쓰기에 관한 책들이 정말 많이 나왔다. 불과 10년 전 또는 20년 전만 하더라도 이 분야에 관한 책들이 이렇게 많이 나올 줄은 몰랐다. 전에는 어느 특정인 그러니까 대학에서 문학이나 창작을 가르치는 교수나 강사만 이런 책을 내는 줄 알았다. 그 옛날 소설가 지망생치고 휘트 버넷의 '소설작법' 한 권 안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는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창작을 가르치는 교수다. 하지만 이 책을 완독하기는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렇게 창작을 가르친다는 건 전문인의 몫인 양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사정이 너무나 많이 달라졌다. 이제 이 분야는 그런 가르치는 자의 몫이 아닌 것이다. 그건 오히려 그렇게 상아탑에 갇혀 이론만을 가르치는 자의 몫이 아니라 문학 현장에서 직접 뛰는 실무자의 것이란 말이다. 실무자라고 하니 다소 거창해 보이긴 하는데 말하자면 소설, 시, 에세이 등을 쓰는 자의 몫이라는 것이다.

  작가 또는 작가지망생들에게 있어 산맥과 같은 분야가 있으니 그것은 작가의 삶에 관한 책과 책 읽기에 관한 책과 글 쓰기에 관한 책은 아닌가 싶다. 특히 글 쓰기에 관한 책은 치명적인 중독성이 있어서 거의 얼마만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읽어줘야만 할 것 같다. 그러면 뭔가 영양주사를 맞은 것만 같고, 그래. 아무리 유명한 작가도 처음엔 다 어려움이 있었어. 그들이 겪었던 어려움들을 곱씹으며 나도 용기를 내서 다시 쓰리라 다짐도 해 본다. 이 책도 나에겐 그런 영양주사를 맞는 기분으로 펼쳐든 책은 아닌가 한다. 

  작가는 모름지기 엉덩이의 힘이라고 했다. 누가 더 오래 자신의 엉덩이를 책상 의자에 붙이고 있느냐에 따라 작가의 탄생과 소멸을 가늠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난 그 말에 일견은 동의 하지만 또 한편으론 동의하지 않는다. 나 같이 책상 의자에 오래 버티고 앉아 있을까? 물론 진짜 오래 붙어 앉아 있는 사람이 있으면 비웃겠지만 그래도 나도 한 엉덩이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도 효율이란 측면을 온전히 대변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요즘엔 앉아서도 할 수 있는 일이 글 쓰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요즘 작가치고 블로그 활동을 하지 않는 작가가 거의 없다. 그 블로그에 정기적으로 업데이트를 해 줘야 하고, 아는 블로거들이 무슨 글을 올리나 댓글은 안 달아도 글은 읽어줘야 한다. 신기라도 있어서 책상에 앉아 있기만 하면 일필휘지로 써대면 그나마 신이 날 텐데 그렇지도 못하다. 나도 요즘엔 매일 글을 쓰려고 연습 중인데(아, 이건 정말 너무 괴로운 연습이다. 몇 번을 실패하다 또 도전하고를 반복하고 있다) 쓸 때마다 외줄을 타는 기분이다. 이렇게 쓰는 게 맞나? 글을 쓰다가 길을 잃으면 어쩌나? 그런 불안과 함께 순간 순간 끼어드는 잡생각에, 그날 그날의 컨디션도 이런 나의 작업을 방해한다. 그러니 엉덩이로 오래버티기가 얼마나 효율성이 있다고 보는가?

  얼마 전 새롭게 안 사실이 있는데,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도 글을 쓰는 원고의 빈 공간에 자신의 재정상태를 낙서처럼 써놓기도 했다고 해서 새삼 웃음었다. 그러니까 그런 대문호도 글이 안 써지면 짬짬이 딴짓을 한다는 것이다. 도스토예스키가 자신의 놀음빚을 갚기 위해 글을 썼다는 건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매번 글 쓰기에 무너지는 나 자신을 보면서 나도 도스토옙스키처럼 무일푼이 되어 보아야 글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한 생각이다. 우리나라의 문학현실은 척박해서 글 써서 돈을 벌기 전에 아사할 확률이 높다. 온전히 글만 써서 돈을 버는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 보는가? 작가는 한마디로 명예직이나 사이드잡 정도지 목숨을 걸만한 직업은 못된다고 본다. 

  이 책에도 보면 저자가 자신의 첫 번째 소설을 쓸 때의 상황을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때 자신의 직업은 교사였으며 하루에 점심시간 35분을 할애에 매일 같이 글을 썼으며 방학 때는 아이들을 보모에게 맡기고 주 4일 동안 매일 세 시간씩 썼다. 뭐 대충 이런 이야기. 지금은 온전히 작가로서 글만 쓰고 있는 줄 아는데, 작가가 첫 소설을 쓸 때만해도 작가의 직업은 교사였다. 온전히 글만 써서는 돈을 벌 수 없다는 거다. 이렇게 본업이 있으면서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하루에 35분이든, 일주일에 4일이든 글을 온전히 쓸 수 있는 것이다.

  뭐 그런 삶도 나쁘진 않아 보인다. 글 쓰는 일도 언젠간 슬럼프를 겪게 될 수도 있는데 그 슬럼프로 일을 놔버리면 먹고 사는 문제를 어디서 해결할 수 있겠는가? 예전에야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했다지만 지금은 취미가 일이고, 일을 취미인 세상이고 보면 글 쓰는 일에 순정을 바치는 건 확실히 지혜롭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작가가 명예롭기는 해도 경제적으로 대우 받는 직업은 아니라는 건 우리를 서글프게 만든다. 

  보통은 슬럼프는 일하는 사람에게만 오는 것 같지만 꿈꾸는 중에도 온다는 것을 아는가? 꿈꾸는 사람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매진하느라 그런 건 그 단계에선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글 쓰기는 주도면밀한 사고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글을 쓰면서도 끊임없이 나를 괴롭게 만드는 작업이다. 작가들 중엔 자기 얘기를 그대로 쓰거나 변주해서 쓰기도 하는데 그 글을 쓰는 과정에서 참 여러 가지 감정일 수 있다. 이를테면 밝은 느낌의 이야기를 쓰면 작가도 행복한 느낌이지만, 대개의 소설은 인간의 어둡고 음습한 면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되면 작가도 괴로워 몇 번이고 글을 놔버리고 싶을 때가 많고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이럴 때 나는 역시 작가는 될 수 없는 걸까? 자책하고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꿈을 이루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지속 가능한 꿈이요, 일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내가 처음 글 쓰기를 배웠을 때 나의 글 쓰기 사부는 자기 점검부터 시켰다. 자기 안에 분노가 있는가? 그리고 글을 다 쓴 후 그 다음에도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후자는 이해가 가겠는데 첫 번째 질문 왜 분노를 얘기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나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말하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다. 거기에 작가는 이야기꾼이니 같은 얘기를 해도 어떻게하면 듣는 사람의 혼을 쏙 빼버릴만큼 잘할 것이냐가 관건이다. 이 의지와 감각이 있는 사람이 작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 얘기는 차마 너무 아파서 말할 수 없다고 얘기한다면 그건 작가가 될 팔자가 아닐 수도 있겠다. 자기 얘기를 잘 할 수 없는 사람이 남의 얘기는 얼마나 잘 할 수 있다고 보는가? 진실을 통찰할 수 없으면 작가가 될 수 없지 않은가? 

  그러니 글 쓰기는 어느 정도 치유의 효과는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딱 그만큼의 거리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좋다고 본다. 글 쓰기가 고통스럽다면 그 고통과 맞서 싸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내려놓은 것도 방법은 아닐까? 사람이 우선 살고 봐야지 어떤 의무감이나 사명감 때문에 자신의 영혼을 다치게 하면서까지 글을 쓸 필요는 있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도 글 쓰기는 버리는 것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글 쓰기는 여러 과정을 겪게 만드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 요물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그 고통뒤에 기쁨과 희열을 맞볼 수도 있고, 그러다 권태가 올 수도 있다. 이렇게 글 쓰기에도 파도타기는 필수인만큼 그것을 잘 타는 사람이 글 쓰기를 오래 할 수 있지 않을까? 매도 자꾸 맞으면 매집이 좋아진다고, 글 쓸 때의 갈등과 고통에 자꾸 나 자신을 갖다 대면 거기서도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리라고 본다.  
 
  나는 대충 이 단계까지는 온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아직도 가야할 길이 험난해 보인다. 무엇보다 고독을 견디는 일. 무관심을 견디는 일이 쉽지가 않다. 이것을 견딜 수 있어야 진정한 작가가 될 수 있는 건 아닐까? 내가 그렇게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떠들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다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 때도 나는 지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을까? 시끄럽다고 비난 받을 때에도 나는 여전히 같은 소리를 내며 나의 의지를 관철 시킬 수 있을까? 다 자신 없어 보이긴 하다. 하지만 이제 겨우 한 가지 깨닫는 건 간혹 가다 내 글이 좋은 평을 받지 못해도 그것 때문에 글 쓰기를 포기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글은 쓰면 쓸수록는다.  

  작가의 책이 호불호가 갈리는 것 같다. 작가의 이전작도 대체로 좋은 반응이긴 했지만 간혹 혹평을 했던 독자도 있었다. 나는 굳이 이 책에 혹평을 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좋았던 것도 아니다(솔직히 내가 글 쓰기에 관한 책을 많이 읽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읽어 본 중엔 가장 지루한 책이 아닌가 한다). 내가 작가에게 바란다면 그냥 글 쓰기에 관해서는 이 정도로 하고 원래 본업인 소설 쓰기에 치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꼭 저자의 책이라서가 아니라, 솔직히 이런 책 많이 읽는 것도 그다지 좋을 건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보통은 글 쓰기가 자신 없는 사람이 차선으로 이런 책을 읽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글 쓰기를 정말 잘하고 싶다는 것과 동시에 두려움이 교차해서 이런 글 쓰기에 관한 책을 선택하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오히려 맞서야 할 것을 맞서지 않고 시간만 낭비하는 꼴이 된다. 이 분야의 책을 왠만큼 읽었다면 저자가 하는 말은 다른 사람도 어디선가 했다. 단지 그 방법과 배경과 경험이 조금 달를 뿐이다. 맞서야 할 것이라면 빨리 맞서 승부를 보는 것이 낫다. 즉 한 자라도 더 써서 빨리 두려움을 정복하고 경험을 쌓으라는 말이다. 물론 초두에 말했던 것처럼 머리도 식힐겸 읽겠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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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롯 -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였다” 20년간의 연구로 복원한 인간 예수를 만나다
레자 아슬란 지음, 민경식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기독교인이거나 비기독교인이라도 '예수'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게 되지 않을까? 

책소개에 논란이 많았다고 겁부터(?) 주던데, 막상 읽어보니 

작정하고 신성모독을 하거나 비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원래 예수에 대한 연구는 끊임없이 이어져 왔던 거고, 그중 하나로 보면 되는 것 같다.

단지 대중을 겨냥했다는 거 하나가 특이사항이라면 특이사항이랄까?

물론 좀 뭔가 확실하지 않는, 고개를 갸웃거릴만한 미온적인 것들이 눈에 띄긴 한다.

그거야 그냥 작가 개인의 주장이나 취향 정도로 받아들이면 되는 거지 

작가가 그런 주장을 했다고 해서 예수를  의심하고 신앙이 흔들릴 정도는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신앙은  의심할 것이 아니라 점검할 대상이기 때문에 

저자가 주장하는 것 때문에 예수를 의심한다면 그건 지극히 미숙한 단계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지적했던 대로 역사에서 보는 예수와 기독론으로서의 예수는 다소 다를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이 다소 논쟁의 여지는 있을 수 있으나  이 책을 읽음으로서 오히려 예수가

좀 더 명확히 보이는 면들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는 다분히

신앙적 관점에서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역사적 배경으로서의 예수를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역사적 관점에서의 예수는 신성 보다는 인성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그것을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피하고 갔던 건 아닌가 생각한다.

 

예수 시대의 정치적이며 사화적인 배경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위험하고 

훨씬 복잡한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자신이 메시야라고 하는 것 자체 역시 위험한 것이다.

그러니 또 초대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지켜나간다는 게 얼마나 어려웠을까?

 

저자의 이력이 흥미롭다. 이슬람교를 믿다 기독교로 개종하고 다시 이슬람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슬람교도가 기독교인이 되는 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그래서 그런지 젤롯으로서의 예수를 묘사하는 게 실감있고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자신은 이슬람으로 돌아갔으면서 자녀는 교회에

보낸단다.  참 독특하다 싶다. 

그런 사람이라면 예수를 좀 더 객관적으로 서술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적어도 기대를 배반하지는 않았다. 

 

예수를 서술하고 연구한 책들은 많다. 기왕이면 여러 자료를 섭렵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고,  앞서도 말했지만 이 책은 그런 책 중 하나라고 보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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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4-07-04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싶긴 했지만 톨스토이가 나의 종교에서 말했듯이 예수가 역사적으로 존재 하였느냐가 핵심이 아니라 그의 가르침이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느냐가 걸려서 읽지를 않았어요 ㅎ
전 기독교를 믿지 않지만 예수님은 좋아하거든요 인간적으로 ㅎ
저런 인생을 어떻게 살 까? 인간으로 저렇게 살 수 있을까? 놀라곤 하죠 ㅎㅎㅎ
마틴 루터 킹 박사를 정말 존경하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도 존재하는 것 같아요 ㅎ
르낭의 예수의 생애와 천로역정 글구 캠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요 세 권은 읽고 싶은 책이에요 ㅎ
저도 놀러왔어요 ㅎ

stella.K 2014-07-04 12:42   좋아요 0 | URL
와우, 제 서재에서 루쉰님 보니까 반갑네요.ㅋ
저는 요즘 이재철 목사님의 설교집을 읽고 있는데
그분도 링컨 보다 루터를 더 높이 사더군요.
왜 그런가 했더니, 링컨도 훌륭하긴 하지만 그는 무력으로
노예를 해방한 거고, 루터 킹은 순전히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사람들을 설득한 거며, 그는 흑인과 백인이 나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걸 원했다고 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구나 싶어요.
무저항 비폭력! 간디 이후 가장 훌륭한 사상가가 아닐까 싶어요.
아, 루쉰님도 예수님 좋아하시는구나.
왠지 루쉰님은 훌륭한 사람이 될 것 같아요.ㅋㅋ

덥네요. 더위에 지치지 말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14-07-06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학교에 들어가기 전 어릴 때 교회를 다닌 적은 있죠.) 성경엔 관심이 있어서 공부할 목적으로 성경 책을 사서 읽었어요. 얼마나 좋은 구절이 많던지 밑줄을 그으며 읽었어요. 마태복음에 있는 글이 특히 좋았어요.
그 성경 책은 글자가 크고 가로줄로 되어 있어서 그 시대엔(십 몇 년 전) 획기적인 책 같았어요.
그걸 사 놓고 뿌듯했던 기억이...

문학을 공부하려면 종교와 철학의 공부는 필수인 것 같아요.

그동안 글을 많이 올리셨군요. 좋은 성경 구절도 소개해 주시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
일화와 섞어 쓰시면 좋은 페이퍼가 될 텐데, 하는 생각... ^^
을 하고 갑니다.

stella.K 2014-07-06 18:22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이어요. 근데 제가 책을 좀 버겁게 읽어서
인용하기가 좀 그렇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간단하게 쓴다 해서 이렇게 쓴 거여요.
널리 양해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