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족, 뒷담화의 탄생 - 살아있는 고소설, 2014 세종도서 선정 도서
이민희 지음 / 푸른지식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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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니 소설의 의미가 더 확연히 다가온다. 

저자는 이 뒷담화가 경제에 기초한 지식권력이며, 조선후기에 소설이란 상품을 발전시켰다고 했다(5쪽). 듣고 보니 그도 그렇겠다 싶다. 하지만 소설이 어디 조선후기에만 국한시켜 발전 했겠는가? 소설은 어느 시대고 뒷담화는 지식권력으로 삼아 발전해왔을 것이다. 즉 뒷담화의 공론화가 소설에선 가능해졌다는 말일게다.
  뒷담화가 무엇인가? 뭐 꼭 사전적 의미를 갖다 붙이지 않더라도 모든 '카더라'의 총칭이며, 사담의 공인화며, 인간 욕망의 실체가 아니던가? 최근 뒷담화 하지 말자는 캠페인도 있지만, 이 뒷담화처럼 인간을 사로잡는 것이 또 있을까? 물론 할 때는 모르겠는데 하고난 후 뒷끝은 영 안 좋다.
  그런데 이야기를 잘 관리하고 조정할 수 있는 사람들, 일명 스토리텔러들은 이 뒷담화에 자기네들의 특정 욕망을 심어 놓는다. 그것도 아주 조직적이고, 대범하게. 아니, 위대하게 은밀하게가 맞으려나? 그래서 이것이 소설이란 형식을 빌어 재탄생되면 그것은 공인화가 되며, 힘을 갖는 것이다. 대단히 멋진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자가 연구한 것만하더라도 17세기 조선후기를 헤아리니 결코 짧지 않은 역사를 지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 책의 제목이 뒷담화를 소설로 보고 '탄생'이란 시효의 의미를 붙이고 있는데, 우리나라에 소설이 탄생된게 과연 17세기 무렵부터 였을까? 잘 모르겠다. 더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그 이전에도 뒷담화란 형태의 소설은 존재하지 않았을까? 물론 저자가 그렇게 보는 것은 허균의 <홍길동전>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이고 그것이 17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은 얼핏보면 페미니즘을 표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맞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의 모든 제도나 법이 남성위주인 것을 보면 그나마 현대 사회는 여권신장이 어느만큼 되있지만 중세 봉건주의의 조선사회는 더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우리가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는 이상 어느 것도 단정지을 수는 없다. 즉 그 시대도 나름  시대를 깨우기 위한 몸부림은 있지 않았을까?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으니 뭐라고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 시대가 그렇게 봉건적이고, 폐쇄적일까에 나는 의문을 갖는 것이다.
  오늘 날,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데는 참으로 많은 문화적 행태들이 동원된다. 이를테면 출판물을 비롯해, 연극, 영화, 노래, 그 밖의 여러 형태의 포퍼먼스 등. 하지만 17세기 그 시대는 무엇을 동원할 수 있었을까?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가 그나마 가장 보편적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것을 소설로 발전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소설은 확실히 예나 지금이나 남자 보다는 여자의 선호품임엔 틀림없다. 17세기가 그렇게도 봉건적이고 폐쇄적인 사회라면 또 그것에 적응하는 것이 여자라고 한다면 그 사회는 그리 발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왜 여자만 이래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저항과 그것의 의식 변화를 주도하는 것만이 그 사회를 견디는 것이라면 여자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방한림전>의 발견은 확실히 획기적이고도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여자가 남장을 해 출사를 하고, 그 남장을 유지한 채로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입양해 키운다. 과연 놀랍지 않은가?

 

  내가 이 책을 보고 놀랐던 건, 과연 우리나라에 이런 소설이 있었단 말인가 하는 것이었다. 앞서 말한 <방한림전>도 그렇지만, <운영전>이니 <김안국 이야기> 같은 이야기는 거의 처음 듣는 이야기 같다. 하긴, 우리나라 고소설이 그다지 주목받는 분야가 아니고 보면 이 이야기들도 일부러 찾아 보려고 하지 않으면 쉽게 접할 수 없는 것이다.
  걱정이다. 이런 고소설은 버젓이 존재하는데 알려고 하지 않으니. 그것을 알아야 이야기의 원류를 할 수 있고, 욕망의 원형을 알 수 있는 법인데 자료를 쉽게 접할 수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그나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전, 이를테면 심청전이나 장화홍련전 같은 이야기는 영화로, 드라마로 새로운 해석으로 새롭게 옷을 입고 대중과 만나고 있으니 다행이다. 어떤 사람은 원전과 달라서 불쾌감을 표할지 모르겠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뭘 모르는 고루한 사람일 것이다. 책에서도 지적했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이야기들도 사실은 정석이 아니라 이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당시 세책(책을 세 놓는다는 의미로 요즘의 도서대여)을 위해 필사하는 과정에서 필사자가 임의로 이야기를 다르게 변형시켜 놓기도 한단다. 물론 가끔 누가 필사한 어떤 작품이 발견됐다 뭐 그런 얘기가 있긴 하지만, 그건 역사학자의 몫이다. 그러니 이야기를 개발시켜야 하는 스토리텔러에게 원본 논란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최근 <춘향전>의 새로운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방자전>은 얼마나 발칙하면서도 인간의 욕망을 잘 표현했던가? 이렇게 이야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은 기존의 이야기를 변형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과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그런 것처럼 저자 역시 바로 이런 것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 역시 <춘향전>의 해석이 눈에 띄는데, 영화 <방자전>은 방자가 주인공인만큼 방자의 시각에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저자의 <춘향전>의 해석은 철저히 춘향의 관점에서 해석된다. 
  우린 흔히 그 이야기를 여자의 절개를 상징한다고 보는데 저자는 신분상승의 욕구를 표현한 이야기로 보는데 과연 그렇구나 싶다. 이렇게 그것이 이해가 되면 인식의 변화가 오기도 하는데 이것이 <대학장구>에 나오는 쾌족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쾌족이란, 남이 나를 알아줌으로써 얻는 행복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유쾌한 만족이라고 하는데 이를테면 유레카 같은 것은 아닐까? 그런데 저자는 그것을 소설의 불온한 일탈성에서 맛보는 희열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저자가 다룬 <심청전>과 <장화홍련전>의 해석이 조금은 아쉬워 내 나름의 문제점를 재기해 볼까 한다. 물론 이 두 작품에 대한 저자의 해석은 나름 탁월하다.
  효를 강조하는 유교 사회에서 심청전만큼 그것을 대중에게 전파하고 쇄뇌시키기에 가장 좋은 이야기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아버지가 자신을 부담스러워 해 어느 대가집 양녀로 가는 기뻐했다고 했다(아, 물론 심청전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 그대로다. 단지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진다는 사실을 아버지께 그대로 전할 수 없으니 어느 집 양녀로 가게 되었다는 그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심청은 아버지에 대한 배신과 그로인해 자신에 대한 의식을 깨우치는 과정을 이야기 한다. 이를테면 효도 중요하지만 자신을 잃어버린 (무조건적인)효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반문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조금 부족한 해석이라고 보여진다. 즉 이것은 심청의 아버지 심학규를 이해해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심학규가 심청을 부담스러워 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보통 사람도 자식 하나 키우는 게 쉽지가 않은데, 하물며 눈이 멀어 자식을 키운다는 게 쉬운 일인가? 그런데 어느 대가집 마님의 양녀 입적 제의가 반가웠다면 어떤 종류의 반가움이었겠냐는 건 따져볼 일이다. 건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반가워 했다면 그건 정말 파렴치하다.
  조선 중기 사회에서 15세 전후를 이미 성인으로 본다고 했다. 그러니 그 나이에 부모봉양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게 딸이 장성하고, 자신이 봉사라해서 무조건 딸의 봉양을 아버지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였을까? 정상적인 아버지라면 부녀만 사는 집에서 적어도 딸이 시집 갈 때까지 자신은 바깥 일을 하고, 딸은 안 살림만을 맡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심학규는 비록 양반 가문이긴 했지만 가난했다. 딸이 가난한 아버지 밑에서 살다 시집 가기 보다 어느 대가집 양녀가 되서라도 번듯한 집 규수가 되어 시집 가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더구나 동냥젖을 먹여가며 애지중지 키웠는데 그저 그런 기회가 왔다고 아무런 생각없이 마냥 좋아만 했겠는가? 이건 내가 심학규라고 해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아비의 마음도 몰라주고 그뜻을 곡해했다면 오늘 날 <심청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장화홍련전>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저자의 해석이 타당한 해석이라고 본다. 왜 옛날부터 계모는 악한 사람으로 묘사가 되는 것일까? 게다가 외모까지도 흉악한 것으로 묘사한다. 또한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 그렇다. <신데렐라>의 계모가 어떻게 나오는지 말할 필요도 없다.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새로운 해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내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건, 그렇게 계모는 나쁜 사람으로 묘사하길 좋아하면서, 계부는 웬만해서 어느 작품에도 잘 다루지도 않는다. 이건 확실히 가부장의 가정에서 외부에서 계모가 들어와 한 가정의 질서를 파괴할까 우려하여 그런 인물 배치를 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장화홍련>도 그렇지만 그런 <신데렐라>나 <콩쥐팥쥐>에 나오는 아버지는 거의 언급이 없다. 없는 것으로 봐서 나약하거나 무능한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런 것일까? 특히 <장화홍련>에서의 아버지는 계모에 대해 전혀 사랑이 없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니 없다 못해 곡해까지 하려 한다. 그렇다면 왜 아버지는 애정도 없는 여자와 재혼을 했던 것일까? 그것에 대한 해석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사실 이 책은 앞서도 말했지만 고소설을 소개하기도 하지만 페미니즘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게 저자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페미니즘을 무조건 옹호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여성의 권익을 상당히 끌어 올려주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한 두 가지 예처럼 지나치게 경도된 페미니즘은 자칫 남자와 여자가 조화하지 못하는 패단을 낳을 수도 있기 때문에 경계하는 것이다. 
  앞서 말한 <방한림전>도 여성 스스로가 지위를 얻는 여성 영웅을 그린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해석하기에 따라선 동성애를 옹호하는 것으로 읽힐 수도 있다. 요즘엔 동성애를 옹호하면 꽤나 앞선 의식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건 정말 위험한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남장을 해서 지위를 얻은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여성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물론 이야기의 정황은 알겠지만 말이다. 
  결국 학문도 그렇지만 소설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휴머니즘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남자와 여자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경도된 페미니즘이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남자와 여자가 조화하지 못해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회가 무슨 건강한 사회겠는가? 
  사회적 의미에서의 뒷담화는 분명 안 좋은 것이긴 하지만 저자가 왜 소설을 뒷담화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사실 인간이 자꾸 뒷담화를 하는 건,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는 것을 확인 받고 싶어하는 욕망 때문이 아니겠는가? 소설이 바로 그런 것이다.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그것을 글로 써서 독자들에게 자꾸 확인 받고 싶어서 소설을 쓰는 것이다. 또한 그 독특함이 보편 타당함을 얻어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쓰는 것은 아니겠는지.
  저자의 작품해석도 좋고, 우리가 몰랐던 고소설을 알게해 준 것도 반가운 일이긴 한데, 아쉬운 건 이 책은 평론에 가까운 에세이쯤으로 읽힌다는 것이다. 욕심을 내자면 소개된 작품의 새로운 현대적 버전으로 읽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냥 알게된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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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4-08-01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의 서평을 읽다보니 루쉰 선생의 소설사 강의가 떠 오르네요 유교 사상에 찌든 중국 고전 문학을 재 해석하여 많은 학생들에게 강의를 했었는 데 그런 강의가 새로온 시각으로 해석을 하며 많은 호평을 얻었어요 ㅎ
스텔라님의 서평도 읽으며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예수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에 굉장히 스스로 자신감을 얻고 있습니다. ㅋ
간디 루터 킹으로 이어지는 정신의 계보를 무척이나 저도 좋아합니다 제대로 된 루터 킹의 전기가 나왔으면 하는 생각도해요 진정한 종교인은 진정한 생활인이라 믿거든요 자신의 생활 속에서 종교적 가르침을 원리로 그것이 단순한 편향된 사고 방식이 아닌 진정 남을 사랑하고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삶 글구 설사 저급한 남에게 실망하는 일을 본다고 해도 지치지 않고 나갈 수 있는 사람
전 그게 진정한 종교인이지 않나 싶어요 ㅎ
전 그러나 야동도 너무 좋아하고 성실하자도 못하고 ㅠ
스스로 실망할 때가 많아요 하하하
그래도 스스로 포기는 하지 않아요 ㅋ 지나칠 정도의 자기 사랑이랄까? 흠 이게 인류애로 바뀌어야 하는 데 ㅡ..ㅡ

stella.K 2014-08-01 17:46   좋아요 0 | URL
ㅎㅎ 야동도 너무 좋아하고! ㅎㅎㅎ
괜찮아요. 그게 루쉰P님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데 그다지 방해가
될 것 같지 않습니다.ㅋ
루쉰P님이 루쉰을 좋아하실 거라는 건 저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루쉰님은 종교인 보다 종교인의 본래의 의미를 더 잘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날의 종교인은 본래의 의미에서 너무 많이 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 자신도 여기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 모르겠구요.
신앙인이 된다는 건 어떤 명예도 권력도 아닌데 이걸 권력화하고 사유화 하는
걸 보면 정말 마음이 아프다 못해 쓰려요. ㅠ

이 책은 시도는 좋은데 깊이 면에선 좀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저자가 비교적 젊은 분 같은데, 그래도 전 우리가 몰랐던 고전을
이렇게 다뤄줬다는 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루쉰P 2014-08-02 21:46   좋아요 0 | URL
아 스마트폰으로 쓰다보니 야동을 너무 좋아한다고 썼네요..그게 아니라 그냥 어쩌다 기회가 될 때 본다는 뜻이었어요. 하하하하하;;;
그렇다고 천박한 성지식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고, 구성애 강사님의 성교육을 보며 올바른 성 관념을 지니고 저런 것들을 안 보는 노력을 하고 있어요. -..- 아 민망하여라....
안 볼 거에요. 예수님 같은 삶을 살아야죠. 이건 아닌 듯...

근데 기사에 나오는 종교인들이 비리나 부정이 많아서 그렇지 분명 현실 속에서는 옳게 그리고 정말 그 분이 말하신 데로 살아갈려고 하는 분들이 있을거라고 여겨요. 예수님 클라스가 있는 데 그런 막돼 먹은 종교인들만 나오겠어요? 전 분명 존재하시리라 봅니다. ㅎ

신앙인이라는 거 자체가 권력에 저항하고 사유화가 아닌 공유화의 화신이라 불리는 것인데 그것이 내면의 악에게 잡아먹히며 권력화 되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전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 이런 건 참 좋아하거든요. 전문적인 공부는 하지 못 했지만 민중 속으로 더 낮은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신학이 진정한 신학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성경이나 예수님에 대한 관심은 많지만 믿음보다는 인간에 대한 궁금함이라고 할까요? 인간으로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란 경외감 같은 것이랄까?
반 고흐의 평전을 읽는 데 그의 삶이 예수남을 본받아 살려고 했고, 그가 즐겨 읽는 책들이 르낭의 예수의 생애라든가, 천로역정 이런 거라고 하더군요.

전 스님이나 목사가 될 체질은 아니지만 수행자의 삶은 무척이나 존경하거든요.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욕망은 버릴 수가 없으니 그것을 컨트롤 하여 선을 향해 나아가는 것...욕망은 사실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을테니, 욕망이란 건 진보를 위한 발걸음이 되기도 하거든요. 최대한 선을 향해 가도록 컨트롤 하는 싸움. 그런 거 꿈꿔요.
그렇다고 제가 뭐 도를 아십니까 이런 건 아니고요. ㅋㅋ

왠지 종파 하나 설립할 기세네요.. 제가;;; 아...저도 좀 광신적인 기질이 있나봐요. ㅎ
더운 폭염이에요 스텔라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 ㅎ

stella.K 2014-08-03 13:41   좋아요 0 | URL
맞아요. 믿음을 지키며 선하게 사는 사람도 많은데
언론은 이게 전부 다인 양 하는 경향이 있죠.
언론의 공정성과 선별해서 듣는 안목도 필요한 것 같아요.

날씨가 너무 더워졌어요. 루신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