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신화 속 신들은 시대에 따라 변신한다"
그리스 신화의 이해
이진성 지음 / 아카넷 / 560쪽 / 1만8000원

“제우스는 헤라와의 사이에서 아레스를 낳았고, 레토와의 사이에서 아폴론을 낳았어요. 프리아모스의 아들인 파리스는 메넬라오스의 아내였던 헬레네와 결혼해서….”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그리스 신화(神話)에 나오는 신(神)과 영웅들의 계보를 줄줄 읊는 것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진성 연세대 불문과 교수가 최근 출간한 ‘그리스 신화의 이해’는 벌써 몇 년째 계속되는 그리스 신화 붐을 보며 “이제 신화라는 ‘고전(古典)’을 제대로 읽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절실한 필요성을 느낀 결과물이다.
“그동안 그리스 신화 관련 서적은 대개 오비디우스의 ‘변신’이나 토마스 벌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등을 참고한 에피소드 중심의 서술이 많았습니다. 이런 방식은 독자들의 흥미를 돋우긴 하지만 ‘신화의 숲’을 보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됐죠.”
그보다 먼저 도대체 왜 우리나라에서 ‘그리스 신화 붐’이 일어났을까? 이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생활이 윤택해지고 문화가 발전할수록 지적 호기심이 늘어나게 됩니다. 외국여행의 기회가 많아졌고 서구와의 왕래도 흔한 일이 됐죠.
그런데 서양 문화의 원류인 그리스 신화를 모르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서양 문명 자체를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초창기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왔던 대학생들이 이제 부모가 된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그리스 신화를 읽힌다는 것은 당연하다는 얘기다.
단지 그것뿐일까? “또 있죠. 그리스 신화에는 아이들이 열광할 만한 ‘재미’가 있습니다!” 신화에는 다른 문학작품에선 찾아볼 수 없는 환상성과 초현실성이 존재한다는 것. “600만불의 사나이나 수퍼맨 같은 SF 수퍼 히어로들은 모두 그 원형이 헤라클레스나 테세우스 같은 ‘영웅 신화’에 있단 말입니다.”
앞서 나온 ‘신화의 숲’ 이야기로 돌아가자. 19세기 중반에 미국에서 나온 벌핀치의 책은 당대의 베스트셀러였지만 몇 십년 전 우리말로 그 책이 번역됐을 땐 그렇지 못했다. “우리가 서양의 고대사와 지명·인명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신화의 총체적인 이해’를 노린 일종의 개론서다. 말이 ‘개론서’지 분량은 600페이지에 가깝다. 신화의 성격과 특징, 형성 과정을 먼저 제시한 뒤 ‘창세 신화’ ‘올림포스 신화’ ‘영웅 신화’의 3개 장으로 구분해 신화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뒤 그리스 신화의 역사적 변모와 연구사까지 소개했다.
“서구 문화가 세계성을 확보하게 된 원인이 바로 그리스 신화에 담겨져 있어요. ‘개념 중심’의 고전이 힘을 얻은 동양에 비해 서양은 리얼리티를 묘사하는 ‘작가적 상상력’에서 앞서 있었습니다. 바로 이 상상력이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용되고 반복되면서 서구 문화를 꽃피웠던 것이죠.” 예를 들어 중세 유럽에서 제우스 신은 십자가를 든 배불뚝이 수도승으로 표현되기도 했는데, 이는 ‘당대의 가장 도덕적인 인물’의 형상화였다는 것이다.
불문학을 전공한 이 교수가 그리스 신화에 관심을 가진 것은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몽펠리에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던 시절로 올라간다. 유학생인 그의 눈에 비쳤던 유럽문명은 온통 그리스 신화에 침잠되고 채색된 듯한 모습이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밀로의 비너스’,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라오콘’,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의 ‘비너스의 탄생’…. 서양문명 공통의 고전이라고 할 그리스 신화를 모르고선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그리스 오르페우스 신화를 소재로 ‘신화 및 신비주의적 발상’이란 제목의 박사논문을 써서 학위를 받았다. 이후 파리 10대학 신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있으면서 ‘신화 탐구 역정’을 계속됐다.
“새학기에 책 제목과 같은 교양강의를 개설했어요. 수강생이 300명 가까이 몰리는 걸 보고 젊은 학생들이 신화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걸 실감했죠. 강의실이 넘쳐 많은 학생들이 그냥 돌아갔습니다만….” 이 교수는 그리스 신화 중 가장 감명깊은 부분을 묻자 “인간의 욕망·질투·명예와 온갖 전쟁·영웅담이 펼쳐지는 트로이 전쟁이야말로 그리스 신화의 백미”라고 말했다.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