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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자 잡혀간다 ㅣ 실천과 사람들 3
송경동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12월
평점 :
일단 송경동은 글을 잘 쓴다.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가슴이 아리다.
하지만 나는 노동 문제에 대해 잘 몰라서일까? 솔직히 이런 글이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를 잘 모르겠다. 분명 내가 몰랐거나 단편적으로만 알았던 것에 대해 알게는 됐지만 그것 이상으로 내가 뭘 해 줄 수 있는 지 잘 모르겠다.
그의 낮은 목소리엔 잃어버린 자의 설움이 베어 있기는 하나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한은 없는 듯하다. 그래서 인간적이긴 하다. 하지만 그의 글을 읽고 우리나라 노동 현실을 무조건 동정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도 함께 노동 현실을 직시하고 같이 편들어 줘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이럴 땐 적당히 동정하고 마음 아파해 주고 그래야 인간다운 사람으로 인정 받지는 못해도 적어도 몰인정한 인간이 되지 않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한 건가? 그러기엔 좀 위선스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가? 괜히 쭈볏거리게 만든다.
너무 솔직했다 뭇매를 맞는 건 아닌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할 수 없다. 난 솔직히 이책은 읽고 싶지 않았다. 당연 인간의 불편함을 드러냈으니 읽는 사람 역시 불편하달 밖에. 그런데 적어도 새마을 운동 이전까지는 몰라도 새마을 운동 이후의 노동 문학은 한번도 행복을 말한 적이 없다. 당연하다. 그 이전에 노동 문학이 있을 턱이 없고, 가난하고 못 사는 것이 흉이 아니었다. 그것도 삶의 일부려니 하고 끌어 안고 살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이 확연히 들어나면서 그것을 객관화해서 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노동 문학 또한 생겨나지 않았을까? 하지만 노동 문학은 한번도 행복을 말하지 않았다. 원래 노동 자체가 불행하게 태어나서인 것인지 어쨌든 행복을 말하지 않는다. 하긴, 우리나라가 역사적으로 노동 또는 노동하는 사람을 좌시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분명 그들의 고혈을 빼 오늘 날 그처럼 화려한 도시를 이룩했음에도 노동은 하찮 것, 무시해도 되는 것처럼 취급되어 왔다. 이렇게라도 말하는 것은 불과 반세기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분명 문학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작품이긴 하지만 그 작품 조차 행복을 말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노동 문학은 아직도 그 길이 멀어 보인다. 언제까지 노동은 송경동처럼 아픔만을 얘기하고, 우린 언제까지 그들의 낮은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정부를 믿지 말았으면 좋겠다. 대기업을 믿지 말았으면 좋겠다. 자꾸 그들에 대한 기대가 있으니 이런 낮은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항상 믿었다 당하는 쪽은 노동쪽이었다. 그냥 그저 힘을 키우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의 자리를 찾고 그 자리를 확장시켜 나가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의 정당을 세우고, 그들의 정책을 실행하며 그들의 행복과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찾아 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들의 문화를 만들고 우리에게도 나눠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송경동의 문학도 지금 보단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지금까지 노동계라고 하는 곳은 데모하고, 사람을 선동하는 그런 것으로 인식되어져 왔다. 가득이나 역사적으로 노동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있는데 엎친데 덥친격이란 느낌이다. 데모하고 선동하는 것만이 사람의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것인가? 80년대는 그것이 먹혔을 것이다. 사측은 언제나 점잖을 떨어왔다. 교묘한데가 있다. 돈이면 뭐든지 다할 수 있다고 믿는 족속들 아닌가. 그러나 애석하게도 노는 그것이 전부 다가 아님을 증명하고 인간적이 되기를 말하기 보다 사측이 누려야할 평안과 복락을 누리지 못해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자들로 보였다(그것을 완전히 부인하지는 못하리라. 자고로 인간이라면 정에도 끌리지만 돈에도 끌리는 법이니까) 오히려 사측이 화를 북돋으면 그에 따라 과격해 지는 건 노측이었다. 그리고 그 불을 끄는 건 사측이고. 심정적으로 사람은 평화적이고 점잖은 쪽을 선호하지 선동하는 것은 안 좋아한다. 즉 내 말은 이제 노동운동. 노동문학도 달라져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보다 문화적인 것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노동현장에 있는 사람일테고 그들 스스로가 변화를 주도해 가야만 한다. 그래서 이 책은 맨뒤에 'CT 85호와 희망버스'를 배치해 놓은 것 같기도 하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다른 말로 하면 '노동자는 살 수 없는 나라'라는 말이다.(241p) 이말이 참 나의 가슴을 찌른다. 어쩌다 우리나라는 이런 자평의 말을 들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세계화를 쫓는 것만이 이 나라가 살 길인가? 세계 강대국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만이 가치있고 진정 이 나라가 살 길인가? 묻고 싶다. 강대국이 어디로 가든 우리나라는 내실을 다지고 서민과 노동자를 먼저 살려내면 안 되는 것인가. 10년 전, 20년 전만해도 우리가 그렇게도 닮고 싶어하는 나라는 미국이었다. 하지만 지금 미국은 어떠한가? 저 고고한 유럽이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평가절하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경쟁하고 닮고 싶어하는 나라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우리가 더 이상 비교를 거부하리만치 잘난 것이냐면 그렇지도 않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와 경쟁하며 힘을 키워가야 하는 것이냐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안으로는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데 외부적으로 누구와 경쟁하여 이기면 뭐하겠는가.
노동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문학이 그것을 증명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문학 특유의 해학이 있었으면 좋겠고, 노동하는 사람들 그들이 불행한 것마는 아니라고 말했으면 좋겠다. 그들의 웃음 소리를 들어보고 싶다. 이런 우울한 것 말고. 그런 점에서 난 이책에 대한 별점을(이건 꼭 매겨야 하는 것이냐?) 세 개 이상 줄 수 없다. 그것은 작가의 문학이 이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노동문학은 앞으로 변화 무쌍할 것이다. 그에 따라 작가의 글도 달라질 것이다. 그것을 기대하고 싶은 것이다.
황유미 씨의 죽음은 나 역시 가슴이 아프다. 앞으로 제 2, 제 3의 황유미 씨 같은 죽음이 없었으면 좋겠다. 다시 한 번 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