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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권보드래 지음 / 돌베개 / 2019년 3월
평점 :
이 책은 내가 속한 온라인 독서 모임에서 3월 한 달 동안 읽었던 책이다. (그곳은 무조건 정해진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면 책을 찾아가 함께 읽는 것이다.) 왜 이 책을 읽었는지에 대해선 책 제목이 말해주고 있으니 굳이 설명이 필요할 것 같지 않다.
권보드래. 이름이 독특하다. 저자에 대해선 문학평론가면서 대학교수 외엔 특별히 알려진 게 없다. 굳이 추가한다면 최근까지 왕성한 저술 활동을 했다는 정도? 건조한 문장에 한자어를 많이 사용해서 어느 나이 지긋한 남자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책 중간쯤 읽다 아무래도 저자가 궁금하여 찾아봤더니 여성이다. 이럴 수가.
이 책은 지난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서 나온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을 쓰기 전 저자가 3.1운동에 관한 책을 낼 거라고 하자 주위에서 좀 의아스러운 눈으로 보더란다. 역사 전공자가 아니고 문학평론가 그런 책을 내겠다고 하니. 하지만 실패를 하든 성공을 하든 뚝심을 가지고 밀어붙인 결과라고 한다.
저자는 문학을 전공한 만큼 당대 문학가 내지는 문필가들에 다소 집중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전혀 가치가 없거나 편파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역사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봐야 하기 때문에 그 나름의 성과가 있다고 보아진다. 그런데 역사 학자만이 논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면 그거야말로 사대주의 아닌가. 다양한 전공자들이 (그것이 비록 일반인일지라도) 저마다의 시선을 가지고 새롭고도 다양한 해석할 수 있어야 발전할 수 있다. 또 그래서 말인데, 혹시 이 방면에 관심이 있다면 아울러 장석주의 빛나는 저작 <20세기 한국문학의 탐험> 1권을 참조해 보는 것도 추천한다.
그런데 이 책에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어 잠시 소개할까 한다.
“ 이들 중 누구도 일본어 글쓰기를 최종적으로 선택하지 않았다. 이광수는 1910년대에 <매일신보>와 <청춘>을 무대로 '조선어로 쓰는 조선 문학'을 적극적으로 개척했고, 주요한은 1918년경부터 일본어 시 창작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 우리말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염상섭은 일본에서 지방지 기자로 사회적 이력을 시작했으나 <동아일보>의 초빙을 받고 귀국했으며 김우진은 3.1 운동 직전의 분위기 속에서 일본어 대신에 한글로 일기를 적기 시작했다. 김기진 역시 1923년 <개벽>에 '프롬나드 상티망탈'을 발표하면서 정력적으로 평민과 소설을 써 나가기에 이른다. 이들은 문학청년 시기에 한때 일본어로 글을 썼고 일본 문단 진출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3.1 운동 전후 한글 쓰기에 정착한다. 근대 한글 글쓰기는 이들을 통해 비로소 새로이 규범적이고 미적인 영역을 개척했다. 이윽고 1920년대를 통해 놀라울 정도로 풍성해진 공식어로서의 한글은 "조선말로 미문을 쓸 수 없다."던 시대에서 "특수한 학문상 술어 이외에는 조선말로 쓰지 못할 말이 없도록"까지 비약했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바 독자적 자국어의 밀도를 갖추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1919년 3.1 운동 이후 민족어 글쓰기의 공간이 대폭 확대됨으로써 가능케 된 상황이었다. ” (456p)
이른바, 일제 치하 36년. 물론 굴욕의 세월임엔 틀림없고, 이 기간 동안 한글을 사용할 수 없고, 일본어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게 어떤 의미였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과연 한 세대 이상을 남의 나라말을 사용해야 한다면 정말 모국어를 잊어버리게 되는 상황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1913년 당시의 조선인 사이에 일본어 해독률은 0. 61%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1930년대가 되면 10%를 돌파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일본어는 20% 정도 밖엔 구사하지 못했다고 한다.
다시 생각해 보면, 당시 일본어를 꼭 사용해야만 하는 곳은 학교나 관공서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우리나라 문맹률은 상당히 높았고, 학교에 갈 수 있는 사람도 소수에 불과했으니 상대적으로 일본어의 사용 빈도는 그리 높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어를 쓰나 일본어를 쓰나 감시하는 것도 한계는 있었을 것이다. 물론 당대 지식인들 중엔 문맹률을 낮춰야 하는 것에 공감을 했을 것이다. 글을 읽어야 무지를 깨칠 수 있고, 나라를 빼앗긴 것도 알고 보면 백성들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탓이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차치하더라도 어쩌면 당시 문맹률이 높았던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란 생각도 해 본다.
나는 저 글에 언급된 지식인들이 일본어를 의도적으로 탈피해서 조선어로 문학 활동을 했다는 게 대단하고 역시 지식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것이 해방도 되기 이전 1920년대 놀라울 정도로 풍성해진 공식어가 됐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해방의 조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앞서 진행되고 있었다는 걸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식민 경험이 있는 다른 나라는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런 문학의 조상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세월이 한참 흐른 후, 작년(2024년)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타면서 사람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노벨문학상 작품을 원어로 읽는 호사를 누린다고 입을 모았던 거 아니겠는가?
사실 우리는 모국어가 너무 익숙해서 공부할 게 뭐가 있나 싶을 수도 있지만, 한 달 전쯤이던가? <유퀴즈...>란 TV 프로에 어느 한국말을 유창하게 잘하는 외국인 교수가 나와서 자신은 지금도 한국어 공부를 10시간씩 한다고 해서 놀란 적이 있다. (원래 남의 나라말은 어려운 것이고, 그건 그 교수의 남다른 한국어 사랑이거나 성격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 원어로 읽는 호사란 말이 안 나오겠는가?
또 하나 생각할 건,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신 건 정말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백번 다 감사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당시 한글이 확 퍼져나갔던 건 아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창제된 것이지만 지난 몇 세기 동안, 한 번도 글을 깨우치지 못하고 죽어간 사람이 글을 깨우치고 죽은 사람 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러니 대왕님께서 이런 건 만들어 뭐하나 성과 없는 일이라고 해도 뭐랄 사람이 없다. 하지만 대의는 늘 실용주의 보다 앞서야 한다.그게 몇백 년, 몇 세기가 흐르든지 간에.
세종 대왕님께서도 몰랐을 것이다. 그 몇 세기가 흐른 후,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비로소 한글이 우리나라에 퍼지기 시작했다는걸. 그 시절 선교사들은 빨리 조선어를 익혀서 성경을 조선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선교와 교육을 해야 했다. 그러니 평민 이하의 사람들이 성경과 우리 모국어를 깨우치는데 선교사들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그러니까 역사는 그렇게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새삼 놀랍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역사에서 '개화기'란 바로 이런 것이고, 그 중심에 3.1 운동이 있었겠구나 이 책을 보며 새삼 깨닫고 정리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