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날씨가 다시 조금 추워졌다. 


1. 책 보다 TV를 보는 때가 더 많아지는 것 같다. 주일 날 밤 나의 TV 시청은 한국방송공사 일명 KBS일 경우가 많다. 거기서 괜찮은 프로를 연속으로 방송해 준다. 이를테면 역사저널 <그날>을 본다. 이게 방송된지가 몇년된 것으로 아는데 그동안은 잘 안 봤다. 그러다 요근래에 비교적 관심을 갖고 보는데 근건 아무래도 여기저기서 경쟁적으로 역사 관련 에듀테인먼트 프로그램을 하다보니 그런 것 같다.  

암튼 그게 끝나고나면 <예썰의 전당>이란 프로를 하는데, 역사적으로 예술이나 문학 방면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이것 역시 나의 흥미를 끈다. 출연 게스트도 대체로 좋고 다 좋은데 단점이 있다면 난 이 프로를 보다 잠이 들어 언제 끝나는지도 모르게 끝난다는 것. 내가 이러려고 이 프로들을 보는 게 아닌데 난 왜 꼭 이모냥인지 모르겠다.


2. 나의 습관은 잠들기 전에 화장실을 한번 다녀온다는 건데 그게 밤 11시무렵이다. 물론 그런다고 바로 잠을 자는 것도 아니다. 불을 다 끄고 TV를 조금 더 보다 잠을 잔다. 그런데 엇, 이게 웬일인가. 며칠 전, 책읽는나무님 말씀하셨던 전영애 교수가 나오는 거다. 관심이 가서 무슨 프로냐고 물었더니 책나무님도 정확히 말씀을 못 하셨다. 정확한 프로그램 명칭은 <다큐인사이트>다. 순간 잠이 확 깼다. 그렇지 않아도 이걸 찾아 봐야할텐데 하고 있는데 이걸 손 안 대고 코 푼다고 해야하는 건가? ㅋ 타이틀은 '인생정원-일흔 둘 여백의 뜰'이다.


           

와, 근데 이 분 장난 아니다. 작가 박경리 선생이 평생 글 쓰며 흙 일구며 사셨다는데 또 이런 분이 계실까 싶었는데 계셨다. 괴테 연구의 권위자로 대학 강단에 섰다 은퇴 후 경기도 여주에 '여백 서원'을 짓고, 괴테 전집을 번역할 것을 목표로 살고 있다. 그 넓은 땅을 홀로 일구며, 주말이면 손님을 맞는다. 어찌보면 제2의 박경리 선생 같고, 타샤 튜더를 연상케도 한다. 정원은 또 얼마나 예쁘던지. 버려진 식물들을 모아다 심었다는데 식물들의 고아원이라나.

무엇보다 이 분의 함박미소가 기가 막힌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늙으면 꼭 이 분 같지 않을까. 어찌나 해맑고 예쁘던지. 

무엇보다 괴테 연구자라는 게 놀랍다. 파우스트 번역자가 어디 한 둘이겠냐마는 듣도 보도 못한 교수님이 이 악마적인 작품을 번역하셨다니 새삼 놀라웠다. 새삼 오래 전 문동에서 독자 모니터에 참여해서 이 책을 받은 기억도 떠올랐다. 

그때 내가 모니터 했던 게 바로 이 책이었다. 10대 말이었나, 멋모르고 아니 겉멋에 쪄들어서 <파우스트>를 읽었다. 내용 중 단 한 줄도 제대로 이해한 것도 없이 그냥 꾸역꾸역 읽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세상에 못 읽을 게 파우스트구나 했다. 

독자 모니터에서 내가 받은 교정지는 1권인가 2권인지 아무튼 한 권만 받았는데 그렇게 모니터를 하면 나중에 정식으로 책이 나올 때 내 이름이 들어간다. 뭐 이름 석자 남기겠다고 한 건 아니고, 나이들어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면 혹시 좀 잘 읽게되지 않을까 싶고 이렇게 반강제적이 아니면 못 읽을 것 같아 기꺼이 받았다. 하지만 역시 파우스트는 나에게 조금도 자리를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난 그저 오자 잡아내느라 혈안이 되었을뿐, 나중에 내 이름이 들어간 책을 받았는데도 언젠간 읽겠지 하다 결국 못 읽고 책장이 더 누렇게 변색되기 전에 동네 주민센터 도서관에 기증해버리고 말있다. 지금도 문동판 파우스트를 사면 독자 모니터 명단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다 TV에서 전영애 교수의 번역본을 봤다.

예쁜 녹색 하드커버 벽돌책이다. 지난 2019년에 나왔다. 놀라운 건 젊을 때 이 책을 읽고 원본만 40번인지, 40년간인지(기억이 가물가물 ㅠ)를 읽고 번역에 착수했단다.  

그러니 10대 말에 이 책을 읽고 세상에 못 읽을 게 책이라고 혀를 내둘렀던 나는 얼마나 가소로운가.

문득 고전은 무조건 하드커버로 사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건 꼭 겉멋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요즘 책이 워낙 탄탄하게 잘 나와 여간해서 흐트러지는 법은 없지만 기왕 거듭해서 읽을 생각이라면 하드커버가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 분의 번역본이 탐나게도 생겼다.

아, 이분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 그 넓은 공간과 마당을 괴테 자료와 나무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은 책상과 전기요 하나 펼칠만한 공간이 전부다. 그리고도 뭐가 좋아 저리 어린아이처럼 방실방실 웃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걸 보고 정말 잠을 자려고 TV를 껐는데 한참 동안 잠을 쉬 이루지 못했다.

내가 이런다니까. 아놔.ㅠ 


2-1. 전영애 교수가 무슨 말 끝에 그런 말을 한다. 사람이 정직하게 살면 손해 본다고 하는데 살아 보니까 꼭 그렇지만도 않더라고. 정직하게 살아도 살만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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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1-03 17: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진속의 전영애 선생님 진짜 미소가 너무 좋네요. 와 진짜 저렇게 나이들어서 저렇게 웃고싶다는 생각을 막막하게 만드네요. 이분 에세이도 여러분들이 추천하던데 올해는 꼭 읽어야지 결심도 살짝 합니다. ^^
스텔라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stella.K 2023-01-03 17:54   좋아요 2 | URL
아, 바람돌이 님, 오랜만에어요. 진작 나타나셨으면 제가 먼저 새해 인사했을 텐데ᆢ고맙습니다. 바람돌이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분 에세이도 있군요. 저도 읽고 싶네요. ^^

mini74 2023-01-03 18: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진짜 웃는 모습이 소녀같아요. 2-1의 말 그 분이 하신 말이라서인지 믿음이 갑니다 ~~

stella.K 2023-01-03 18:59   좋아요 3 | URL
미니님 이 프로 안 보셨군요.
나중에 한 번 꼭 보세요.
저 사진 보다 더 방긋 웃으시구요,
정말 힐링하는 느낌이었어요.^^

모나리자 2023-01-03 22: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은발의 교수님 정말 소녀 같으시네요.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도 부럽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날들 엮어가시길 바랄게요. stella.K님.^^

stella.K 2023-01-04 10:08   좋아요 2 | URL
그렇죠? 어쩌면 그리도 소녀 같으신지…!
고맙습니다. 모나리자님도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hnine 2023-01-03 22: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전영애 교수를 <집이 사람이다>라는 책에서 처음 만났어요. 특별한 집에서 특별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취재한 책이었어요.
위의 방송도 우연찮게 봤는데 영상물이다보니 책에서보다 더 자세히 그분의 삶과 철학이 보여지는 듯 했어요. 정직하게 살면 손해 본다고 하는 말도, 살아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더라는 말도, 모두 생각해볼 말이네요.

stella.K 2023-01-04 10:14   좋아요 0 | URL
아, h님도 보셨군요. 그런 책이 있군요.
내용도 좋지만 촬영을 정말 잘 했더라구요.
참 인상 깊었어요. 저렇게 정직을 말씀하시는 분이
계셔야 우리도 따라 갈수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보고 쉽게 잠을 못 자겠더군요. 나중에 한 번 더
봐야할 것 같아요. ^^

책읽는나무 2023-01-04 07: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보셨네요? 좋죠??^^
<다큐 인사이트>인가요? 전 그날 저 프로를 처음 봐서 <인간 다큐> 제목이 그런 줄 알았습니다ㅋㅋㅋ
앞으로 종종 챙겨봐도 좋을 프로인 듯한 생각이 들었어요. 전영애 선생님 편이 너무 좋았거든요^^
전 선생님도 우리들 곁에 오래 오래 계셨음 싶네요. 저도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보니 괜찮더란 말을 너무 겸손하게 하시는 그 모습이 계속 뇌리에 남았습니다.
기회가 되면 여백서원에 한 번 가보고 싶네요^^

stella.K 2023-01-04 10:18   좋아요 1 | URL
네. 사실 KBS가 공영방송답게 괜찮은 프로를
많이하죠. 다 챙겨 볼 수가 없어서 그렇지. ㅠ
그러게요. 저도 여백서원 함 가보고 싶더라구요.
전에 프레이야님도 가고 싶다고 하셨는데
언제고 알라딘 동창회 거기서 한번하죠. ㅎㅎ

yamoo 2023-01-04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우스트....아주 유명하죠. 근데 전영애 역자분은 저도 첨 들어봤는데, 길출판사본 번역하신분이네요! 저도 첨 알았습니다. 근데, 악마적인 작품이라 표현한 점이 재밌습니다..ㅎㅎㅎ 악마적..ㅋㅋ

다큐인사이트...저도 가끔 봣는데, 유익한 프로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대체로 번역하시는 분들이 저 교수분과 같이 사시더라구요...여유있는 삶이 부럽긴 합니다..ㅎㅎ

stella.K 2023-01-04 14:10   좋아요 0 | URL
ㅎㅎ 사실 악마적이란 말은 거의 저의 트레이드마크죠. 아마 저의 글속에서 많이 발견하실 거예요. ㅋ
저도 전영애 교수는 이번에 책나무님 통해 첨 알았는데 책이 좀 탐나게 생겼더군요. 근데 책값이 장난 아니에요. 꼭 읽어야 할 거라면 사겠는데 무턱대고 살 수도 없고. 그냥 그러고 있습니다.😂

희선 2023-01-05 0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괴테 연구하시는 분이군요 이 분 이름을 다른 분 서재에서도 본 것 같네요 자연과 함께 하고 사람을 만나기도 하시는군요 괴테 글을 마흔번이나 보시다니 그것도 대단합니다

stella.K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하게 지내세요


희선

stella.K 2023-01-05 09:53   좋아요 1 | URL
40년간인지, 40번인지 헷갈리는데 그게 그거겠더군요.
파우스트가 꽤 두껍고 독일어 원본으로 읽으셨다면
일년에 한 번 읽기도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러니 제가 10대 시절에 한 번 읽고 깨갱거린 건 정말 말도 안되는 거죠.
세상엔 이런 분도 계시네요.

고맙습니다. 희선님도 새해 시작 잘하고 계시는 거죠?^^

2023-01-10 0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10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10 16:4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