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이 영화 보다가 완전 뒤집어졌다. 

물론 이 영화 절대로 웃긴 영화 아니다. 보고나면 정말 우울해지는 칙칙한 영화다. 


원래 드라마의 법칙 중 하나가 밝고 환하고, 잘나고 잘 사는 사람이 나와줘야 한다. 그래야 관객의 돈이 아깝지 않다. 이렇게 칙칙하고 우울한 것이 통하는 장르가 있는데 그건 소설일 것이다. 그런데 가끔 그 반대되는 영화가 나와줘도 용서가 되는 영화가 있다. 물론 흥행과는 상관이 없다. 그래도 이 영화가 상영되었을 때 나름 성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밀레니엄 전후로 우리나라에도 여성 감독이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던 것으로 아는데 그 명단 거의 첫줄에 올릴만한 감독이 임순례 감독은 아닐까 한다. 


솔직히 남자 감독들도 살아남기 어려운 영화판에 무슨 영화를 만들었을까 싶은데, 1990년대 중반부터 최근까지 임 감독은 뚝심과 부지런함으로 영화를 만들어왔다. 다른 건 몰라도 <리틀 포레스트>와 <제보자> 정도는 웬만한 사람은 알지 않을까. 그걸 임순례 감독이 만들었다는 걸 함께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런지.


아무튼 나도 분명 이 영화를 본적이 있긴 하다. 상영관에서 봤는지 아니면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 봤는지 아니면 tv에서 봤는지 기억은 잘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상영시기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봤던 걸로 기억한다. 그땐 보고나서 어찌나 떨떠름 했던지. 워낙 영화에 대한 찬사 때문에 함부로 욕은 못하겠고, 그렇다고 좋았다고 말하면 거짓말하는 것이니 대략남감이었더랬다.


솔직히 난 남자들이 삶에 쩔어 가지고 술 먹고 꼬장 부리는 거 딱 질색인데 이 영화는 거의 95% 이상이 그렇다고 봐도 될 것이다. 그나마 편집이 마음에 들었다면 그런데로 봐 줄만하다고 용서를 했을지도 모른다. 장면 넘어가는 게 너무 아마추어적이라 그것도 마땅치 않았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나와 비슷한 또래의 다른 삶을 보여줬다는 게 공감을 얻지 못했던 것 같다. 나야 워낙 온실속의 화초처럼 젊은 시절을 살아가고 있었으니 물론 뭐 이런 삶도 있구나 하면 되는거긴 하지만 크게 공감할만한 요소는 없었다.


그리고 20년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볼 생각을 거의 안하고 있었다. 어젠 조금 보다 말려고 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이 영화 장난 아니다. 코미디 영화는 이미 웃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정말 나를 웃겨줄 수 있나, 웃긴다면 얼마나 웃겨줄 것인가를 지켜보겠지만,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빵 터지고 말았다. 그건 와이키키 브라더즈의 4인방들이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다. 고등학생으로 어렵게 어렵게 동년배의 여학생들과 친구가 되어 바닷가에서 노래를 부르며 한창 분위기가 좋았다. 그런데 선배들이 끼어 들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와이키키 4인방은 뭐 씹은 기분이 되어 한쪽에 찌그러지는 형국이다. 그러다 기분이 나빴던지 누군가 술에 취해 결국 선배들을 받았고 결국 한판 뜨게 된다. 그걸 보는데 얼마나 웃기던지. 정말 배꼽이 빠지는 줄 알았다.


물론 이건 나만의 웃음의 포인트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이 그 장면을 보면 뭘 그렇게까지...? 라며 오히려 벙쩌하거나 나를 좀 이상하게 볼지도 모르겠다. 나도 이 영화에 그런 장면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어쨌든 난 이제야 이 영화의 진가를 발견한 셈이다. 그때부터 중간중간 보면서 얼마나 웃었던지. 지금도 비실비실 웃음이 난다. 이런 영화가 정말 잘 만든 영화다. 누구는 그러지 않았나, 드라마는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이걸 가장 잘 수행한 몇 안 되는 영화중 하나는 아닐까 싶다. 


그래도 의문이 남는다. 처음 봤을 때는 하나도 웃기지 않았던 영화가 이제 다시보니 이렇게 웃기다니! 도대체 이걸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나의 비극은 누구에겐 희극이 될 수 있어서일까? 아니면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나와 비슷한 나이의 배우들이 인생의 한 시기를 통과해 가고 있었구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서일까. 지금의 중견 배우들이 이제 막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을 때 찍은 영화다. 박해일이 아역 배우로 나온다는 걸 그때는 몰랐는데 두번째로 보니 알겠다. 황정민 못지 않게 박원상이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는 것도 이 영화를 보니 알겠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성우 역을 맡은 이얼이란 배우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나는 이 배우를 언제부터 알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최근 4, 5년전에야 비로소 조금씩 알기 시작해서 S 본부의 드라마 <스토브리그>에서야 비로소 확실히 각인되었던 것 같다. (그 보다 <라이브>란 드라마가 먼저다.) 그때 거의 스러져가는 야구 감독의 역을 맡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연기를 곧잘해서 연극판을 한동안 굴렀겠구나 했다. 그런데 아깝게도 지난 5월 식도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향년 58세다. 이 영화에선 상당히 참하게 나오는데 역시 보고 좀 놀랐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세상에 80% 이상이 남자 이야기다. 이 남자 이야기를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른 느낌이긴하다. 보통 남자 감독이 남자의 이야기를 하지만, 드물게는 여자가 하기도 한다. 여자 감독이 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확실히 그 질감이 다르긴 하다. 남자 감독은 당연히 거친 느낌이지만 여자하면 글쎄, 이렇게 웃프게 표현할 수도 있다니! 감독이 좀 탁월하다는 생각이 든다. 뚝심 하나로 만들었겠구나 새삼 존경심이 느껴진다. 지금의 MZ 세대는 잘 공감하지 못하겠지만 5, 60대는 옛날을 추억하며 볼 수 있는 영화다. 추억을 팝송도 들을 수 있고. 지금은 밴드라고 하지만 예전엔 그룹사운드라고 했다. 그 시절의 영화다. 

참, 배우 류승범의 앳된 모습도 볼 수 있다. 새삼 우리나라에 탈색머리의 역사가 깊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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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10-15 21: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크흐 이 영화 좋아하면 연식 나오는건데 말이죠. 저도 좋아해요. ㅎㅎ 웃프고요. 노랑머리 류승범 지금은 코로아티아에선가 멋지게 살고 있더군요. 박해일 파릇한 얼굴도 나오고요. 이얼 배우 참 안타까워요. 누드로 서서 기타 치며 노래하는 장면 ㅠ 마지막에 오지혜가 부른 사랑밖에 난 몰라 좋아합니다. ㅎㅎ 수안보 온천 개발 초기 때라 시위하는 사람들이며 그런 시대 배경도 슬쩍 담은 임 감독^^

stella.K 2022-10-16 18:47   좋아요 0 | URL
사실은 웃긴데 슬픈것이 아니고 슬픈데 웃기죠.
유승범 나이들어가면서 멋져지는데 왜 연기를 안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직 한창인데. 결혼해서 잘 사나 모르겠어요. 이얼 배우 그 장면 정말 처연하죠? 아까운 배우여요. 😢

바람돌이 2022-10-15 21: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말씀처럼 연식 나오는 영화. ㅎㅎ 며칠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한 임순례 감독님 사진을 보는데 뭔가 변하지 않은 그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요.
이 영화 본지 오래 됐는데 다시 찾아보고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글이에요. ^^

stella.K 2022-10-16 18:24   좋아요 0 | URL
임순례 감독이 왔군요. 오래오래 감독했으면 좋겠어요. 이런 스산한 기을에 보기 좋은 영화죠. 함 보세요. 새로운 걸 발견하게될지도 몰라요.ㅋ

나와같다면 2022-10-15 23: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늦가을 이였을거예요. 씨네큐브에서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보고 나와서 광화문을 걸었던 그 날이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오지혜의 ‘사랑밖에 난 몰라‘ 가 계속 맴돌던 그 날.

stella.K 2022-10-16 18:30   좋아요 1 | URL
앗, 그렇다면 나와같다면님 연식이...? ㅋ 엔딩이 그렇게 끝날 줄 몰랐어요. 그렇게 끝나는 것도 괜찮구나 싶더군요.^^

책읽는나무 2022-10-16 07: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영화 평이 좋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한 번 봐야지~ 했었는데 여적 못봤어요.
임순례 감독님 영화였었군요?
그래서 유명했었나 보군요!
저는 <리틀 포레스트>는 재미나게 보았어요.
계속 봐도 질리지 않는...^^
이얼 배우를 잘 몰라서...그런 일이 있었군요?
<라이브> 드라마도 오래 전에 참 재미나게 봤었는데??
기억이 안나네요.ㅜㅜ
앗!!! 금방 검색해서 봤는데 얼굴을 보니 알겠어요!!! 에궁~ㅜㅜ
참 친근감있게 연기하신 분이었는데..안타깝네요.ㅜ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stella.K 2022-10-16 18:35   좋아요 1 | URL
이거 꼭 보세요. 리틀포레스트는 뭐 워낙 원작이 좋으니. 아무래도 임순례가 좀 더 잘 만들지 싶어요. 울나라 음식 가지고 만들어 일까요? 암튼.^^

호우 2022-10-16 09: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너무 유명해서 익숙한 느낌인데 보지는 못 했네요. 2001년이면 한창 육아 전쟁을 치르면서 일도 하고 살아내느라고 주변을 잘 못 돌아 볼 그런 때 였네요. 영화 한 편으로 인해 또 나를 돌아보게 되네요. 한 번 봐야겠어요. 스텔라님, 감사해요~~^^

이얼 배우는 <인사동 스캔들>에 나왔던 역할이 기억에 남았어요. 우정 출연인데도 내공이 느껴져 아주 강렬했었는데.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stella.K 2022-10-16 18:39   좋아요 1 | URL
와, 그럼 호우님 자녀분 지금 다 컸겠네요. 이제 함 보세요. 여유롭게.
이얼 배우 인사동 스캔들에 나왔다는데 전 기억이 없어요. 나중에 다시 봐야겠어요.^^

북프리쿠키 2022-10-16 14: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영화제 수상작 위주로 챙겨보는데, 얼마전 봄날은 간다를 보며 느낀게 유지태가 엄청 앳되게 나와서 놀랬습니다. ㅎㅎ
우리도 리즈 시절이 있었겠지요 ?? ㅎ

stella.K 2022-10-16 18:45   좋아요 2 | URL
아, 봄날은 간다 정말 좋죠. 이때까지만해도 유지태 좋아했는데 그후 악역을 해서일까 좀 싫더라구요. 그러다 작년에 유키즈에 나와서 노는 모습 보니까 나쁘지 않더라구요. 제가 무려 이럽니다. ㅎㅎ 근데 쿠키님은 그 악명 높은 악령도 완독하시고 영화제 수상작도 챙겨 보시고. 대단하세요.👍

희선 2022-10-17 00: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리틀 포레스트> 영화가 있다는 건 아는군요 임순례 감독 이름도 들어봤는데, 그 영화 만들었다니... 시간이 지나고 나서라도 저 영화를 보시고 예전과 다른 걸 느끼는 것도 괜찮겠지요 영화뿐 아니라 책도 그렇겠습니다 그때 함께 느끼면 좋지만, 꼭 그러지 않아도 괜찮겠지요


희선

stella.K 2022-10-17 10:25   좋아요 0 | URL
그럼요. 전에 보지못했던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건 즐거운 일이죠. 리틀 포레스트 함 보세요. 희선님도 좋아하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