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소한 삶, 아름다운 나이듦 - 개정판
소노 아야코 지음, 김욱 옮김 / 리수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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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난 요즘 내 엄마가, 주위 어르신들이 이해가 안된다. 이제 가족 부양의 의무를 다 내려 놓았는데, 더이상 살림이나 돌봄 노동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데, 왜 가족들이나 주위 사람들과 편하게 잘 지내지 못하고 그렇게도 심술이신지. 한편 마흔 넘어 주위 언니나 친구들을 보아도 점점 이상한 노인이 될 싹이 보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들이 보면 나도 그렇게 보이겠지? 무서운 노릇이다. 반성하는 한편, 책을 읽는다.

 

그래서 만난 저자가 <나는 이렇게 나이들고 싶다 : 계로록>으로 유명한 소노 아야코. <~ 계로록>의 경우 구체적 실천 방법이 자기계발 실용서적으로 항목이 나열되어 있는 반면, 이 책은 노년기에 가져야할 정신적 각오나 자세 위주다.

 

'고령자는 젊은 세대의 양보와 헌신을 그들보다 훌륭해서라고 착각해서는 곤란하다.(29쪽)' 이런 대목은 내가 한 말인줄 알았다. 나는 정말, 나이는 가만 있어도 저절로 먹는 것인데 왜 나보다 나이 많다고 해서 무작정 남을 존경해야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 하지만. 1931년생인 저자가 70대에 한 말이니 독자들이 수긍하지, 지금 나이의 내가 한다면 몰매맞기 십상이다. )

 

운명의 절반은 스스로 만든다. 타고난 절반은 그렇다 쳐도 남은 절반에서 항시 조절하고 지속적으로 훈련하지 않으면 결국 실패한다. 난 위대한 인물이니까 누구에게든지 폐를 끼쳐도 상관없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훈련과 절제를 통해 타인을 배려하는 삶을 몸에 익히는 것이 인간으로 태어난 사명이다.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서 활약한 내가 청소기를 돌리고, 냉장고와 헛간에 뭐가 있는지를 기억해야 하는가, 라고 말하는 그 때가 노망의 시초라고 본다.

- 46쪽에서 인용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다. 내 말은 먹히지 않으니, 이 책을 엄마에게 선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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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의 길
마루야마 겐지 지음, 조양욱 옮김 / 현대문학북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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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현재 품절이지만, 마루야마 겐지에게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꼭 한번 읽어볼만한 책이다. 저자의 자전적 에세이인 <소설가의 각오> 이전에 나온 에세이인데, 작가의 개인적 정보가 많이 나와있다.

 

어린 시절 이야기, 중고교 시절, 직장에 들어가고 어떻게 소설가가 되었으며 어떻게 도코를 떠나 북알프스에 정착하게 되었는지의 이야기가 <소설가의 각오>나 다른 수필집 보다 더 자세하게 나와있다. 모터사이클과 사륜구동차를 타고 달리던 폭주족 시절 이야기는 이 책에만 있는 것 같다. 머리를 50에 삭발하게 된 사연도 이 책에서 처음 읽었다.

 

전체적으로 흥미롭게 보이는 것은, 이 사람의 '차남콤플렉스'이다. 장남은 가업을 이어받고 차남은 창업한다. 장남은 아버지의 나라를 지키지만 차남은 혁명하여 새 나라를 건국한다. 시골 고등학교 문학 교사 아버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작가는 '이토록 많은 책을 읽어도 고작 이 정도 사내밖에 못 되는가. (43쪽)'며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마더콤플렉스'도 없다. 대리만족을 위해 장남의 교육에 자신의 인생까지 다 거는 어머니를 천박하게 생각한다. 차남에 서자였다가 국왕이 되는 홍길동은 그래도 아버지의 인정과 사랑을 구하기는 했는데, 이 저자는 그런 면도 없다. 부모 역시 저자에게 별 기대가 없었던듯, 저자가 신인상을 받자 표절을 의심한다. 결국 저자의 형은 아버지처럼 시골 고교 문학 교사가 되고, 저자는 일본 문단에서 인정받는 소설가가 된다. 저자는 그냥 아버지도 형도 선배도 없이 자기 생각대로 살고 글쓰는 사람이다. '네 고집대로 하는 게 좋아. 모범이 될 만한 선배가 없으면 네 자신이 모범이 되도록 해!(149)' 결국 제목인 <산 자의 길>은 죽은자, 살아도 죽어 있는자인 자기 아버지와 반대로 살려 하는 자신의 길을 말한다. 아, 난  동서고금 문학사에서 이렇게 강력한 차남 작가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매우 흥미롭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혹시 마루야마 겐지의 차남 콤플렉스를 논한 책이 이미 일본에 나와 있지 않을까?

 

그밖에, 어린 시절에 갑자기 마음에 구멍이 뚫리고 그곳으로 찬바람이 드나드는 경험을 서술한 부분을 읽고는 좀 놀랐다. 나도 그런데. 저자는 어떻게 그 구멍을 데리고 살고 있을까. 나이들면 좀 나아지나?

 

늙음의 입구가 보이게 되어 인생의 끝에 실재하는 죽음이 생생함을 더하게 되자, 가치관에 다소 변화가 생기는 게 당연하리라.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 뻥 뚫린 바람구멍이 어느 결에 막혀버렸다는 뜻은 아니다. 변함없이 거기에는 허무의 찬바람이 불어닥치고, 동시에 그에 대항하기 위한 열정의 폭풍이 휘몰아친다.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회오리바람으로부터 잇달아 새로운 소설이 튀어나오고 있다.

변함없이 나는 나인 채로 있다.

- 본문 235~ 236쪽에서 인용

 

예술도 과학도 철학도 의학도 종교도 정치도, 제아무리 용을 써보았자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일시적인 위안 정도에 불과하며, 인간을 진짜로 구원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구원받지 못하는 부자유한 존재이니까 더욱 드세게 자유를 찾아 싸우고, 그것을 갈구할 때 튀는 불똥이야말로 현실에 뿌리내린 진정 살아 있는 사람의 감동이라는 것이 아닐까. 구원받지 못할 몸이니까 더욱이 이 세상을 살아갈 힘과 가치가 생겨나는 게 아닐까.

- 본문 179쪽에서 인용.

 

아, '변함없이 나는 나인 채로 있다.', ' 구원받지 못할 몸이니까 더욱이 이 세상을 살아갈 힘과 가치가 생겨나는 게 아닐까',,, 라니요!  겐지 오빠, 왜 진작 내게 나타나서 이 말을 들려 주지 않으신거에요? 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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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소녀시대 지식여행자 1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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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960 ~ 64년까지 체코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에 다녔던 저자가 소녀시절을 같이 보냈던 반친구들을 30년만에 찾아가는 이야기다. 그리스인 망명객의 딸 리차, 루마니아 공산당 특권층의 딸 아냐, 유고슬라브 외교관의 딸 야스나. 이들 친구들과 같이 보낸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와 추리소설처럼 단서를 찾아가는 현재 이야기, 30년간 친구들에게 일어난 일과 동유럽의 역사변화 등등, 숨가쁘게 개인사와 역사가 얽혀 들어간다. 그러면서도 놀랍게도 따뜻하다.

 

마치 일본 요리 만화에서 초밥 하나 입안에 넣고 과장된 맛 표현하는 말풍선 읽는 것 같아, 무슨무슨 상 받았다는 심사평 따위는 안 믿는 편인데, 이 책에서는 심사평을 내 리뷰에 인용하고 싶다. 딱 내가 이 리뷰에서 하고 싶은 말이기 때문이다.


“두려운 작품, 스피드 있게 한 순간에 인간 데생을 하면서도, 행간에서 인물들의 영혼까지 느끼게 해준다. 질투를 일으킬 만큼 대단한 표현력이다.”
- 오야 소이치 논픽션상 심사평

 

10년전, 프라하 직항편이 생기자마자 프라하에 갔었다. 내게 프라하는 카프카의 도시였다. 그런데 몇 년 후 프라하 행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은 카프카의 <성>이 아니라 요네하라 마리의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읽고 간다는 말을 들었다. 궁금해서 책을 들춰 보았지만 영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미친듯 술술 읽힌다.  역사, 민족, 이데올로기, 운명, 우정,,,, 생각할 거리도 많고, 문장 쓰는 것과 이야기 전개 방식 등 주목할 점도 많다. 무엇보다, 과거 내가 책을 고르고 읽는 방식에 편견이 참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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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이영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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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재 국내에 마루야마 겐지의 에세이가 6권 나와 있다. 그 중 5번째로 읽었는데, 이전의 4권(그러니까 <소설가의 각오><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나는 길들지 않는다>)와 분위기가 좀 다르다. 가장 최근작이어서 그런가? 기세 등등한 패기는 여전히 밑바닥에 깔리지만, 오만과 독설의 분위기가 없다. 묵묵히 정원이나 채마밭을 가꾸는 선승같은 분위기다.  

 

1월 버릴 수 없다면 정원사가 되지 마라
2월 사철 내내 꽃을 피울 수는 없다
3월 한 마리 새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별별 일을 다 겪는다
4월 성장하고 싶다면 가지를 쳐내라

5월 봄의 들놀이가 수만 권을 읽는 것보다 낫다
6월 존재하는 것들의 유일한 명제는 오로지 살아남는 것이다

7월 꽃을 돌아보지 마라
8월 당신을 타락시키는 유혹은 언제나 당신으로부터 시작된다
9월 예술의 진정한 힘의 원천은 생명체 간의 투쟁 그 자체다
10월 단풍에 취한 찰나로도 충분하다
11월 현실과의 투쟁을 피할 수 있는 생명체는 없다

12월 가장 아름다운 장미는 바람에 단련된 것이다
후기 무죄 선고를 받은 피고인처럼 

 

위의 목차에서 한 눈에 알 수 있듯, 책은 각 달별로 저자가 정원을 가꾸면서 생각하고 깨달은 내용을 담고 있다. 다달이 자연의 변화를 정밀하게 묘사한 12폭 병풍을 보는 기분이다. 저자의 정원과 함께, 정원을 손질하며 같이 다달이 흔들리고 변화하다,,, 다시 중심을 잡는 저자의 생활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이번 에세이집은 저자의 기존 작품으로 말하자면, 독설 가득한 에세이와 산문시같은 소설의 중간 정도 성격이다.

 

장미와 바람, 그 둘은 바로 삶 자체를 상징한다. 이 둘의 싸움이야말로 현세를 넘어선 생명 본연의 자세를 시사하는 것이다. 이 쓰라린 세상이 단순히 우연과 인연의 연속에 불과하다고, 혹은 망각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세상이라고, 혹은 자기 자신을 저주할 수밖에 없는 끔찍한 지옥이라고 단정하기 전에, 좋아하는 장미 한 송이를 생각해 보자. 때와 장소에 엄격히 제약받는 그 장미가 어떻게 가혹한 바람을 견디며 꽃을 피우는지를.

-130쪽에서 인용

 

아, 그래서 여성스런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이분이 표지에 장미를 실었구나. 뜻밖에 예쁜 표지와 달리, 이번 에세이집에서도 마루야마 겐지는 변함없이 자신과 세상과 대결하는 자세를 강조한다. 그런데, 뒤로 더 읽어가니 이런 대목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우연에 의해 주어진 이 삶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필요할 정도까지 중히 여길 것도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한다. 이런 유연한 마음이 화창한 봄날 오후의 숲을 거니는 것 같은 기분에 젖어들게 한다. 지금까지 내 삶을 육십 몇 차례 지나간 봄이다. 언제까지나, 가능하면 생애 마지막 호흡을 할 때까지 이 기분이 계속되길 바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정원과 소설에 딱 맞는 몸과 마음으로 노년기를 맞이한 게 행운이 아니라면 대체 뭐가 행운이란 말인가."

이런 유익한 조언을 또다른 나에게서 듣는다.

- 139 ~ 140쪽에서 인용

 

오오! 이 분! 전에 읽었던 에세이보다 좀 착해지셨다. 유해졌다. 하지만 나는 <소설가의 각오>에서 소설을 시작하며 불안해하던 몇 십 년 전의 문장들을 읽고 기억하기에, 자신이 원하던 모습 그대로 나이든 저자에게 미소를 보내게 된다. 이런 말 웃기지만, 이 분, 잘 늙으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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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사이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커뮤니케이션 강의 지식여행자 12
요네하라 마리 지음, 홍성민 옮김 / 마음산책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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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요네하라 마리의 에세이. 이 책은 통역, 번역 이야기 위주다. 전체 구성은 아래와 같이 4부분.

 

사랑의 법칙

이해와 오해 사이

통역과 번역의 차이

국제화와 글로벌리제이션의 차이

 

앞부분만 남녀에 대한 이야기이고 뒤는 전부 통역 번역 이야기다. 통역 번역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언어에 대한 성찰 부분 이야기도 유익하다. 역시나, 마리 여사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 주신다. 성모 마리아가 처녀인 채 예수를 잉태해 출산했다고 믿는 건 오역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맨 처음 헤브라이어로 쓰인 성서에는 단순히 '결혼하지 않은 여자'라는 의미였는데, 이것을 라틴어로 옮길 때 '처녀'라고 번역해버려서 생긴 일이라고. 또 일본의 국제화는 영어에 치중, 미국화를 지향하는데 이건 진정한 글로벌리제이션이 아니라고 저자는 비판한다. 그런데 마리 여사는 이렇게 영어에 치중하고 미국에 빠지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고 썼다. 아, 마리 여사도 우리 나라 현실까지는 모르셨구나.

 

그래도 내겐 통역 번역 이야기보다 첫 부분인 '사랑의 법칙'부분이 더 흥미로웠다. 문학소녀 시절의 마리는 세계 문학이란 작품을 읽을수록 화가 치밀고 불쾌해졌다고 한다. 세상에, 나도 그랬는데!

 

소설의 전성기는 19세기라서 내가 읽은 작품들은 19세기에 쓰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모리 오가이, 나쓰메 소세키, 나가이 가후, 이반 투르게네프, 미하일 레르몬토프, 오노레 드 발자크, 빅토르 위고 같은 작가의 소설을 읽고 왜 화가 났느냐 하면, 일단 주인공은 남자고, 대개 남자의 눈으로 본 세상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추남이거나 속수무책에 구제불능인 남자 등 여러 타입의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반면 그들의 연애 상대, 즉 낭만적 감정의 대상이 되는 여자는 하나같이 젊고 아름답다. 젊은 추녀나 젊지 않은 여자는 대상이 되지 않는다. 아주 한정적이다. (중략) 그럼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자는 남자를 어떻게 선택할까? 여자는 남자가 일하는 모습이나 성실한 성격, 혹은 섹스를 잘한다 못한다 하는 식으로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질 여지를 남겨준다. 남자는 구제받을 여지가 있는 것이다. 소설의 경우 19세기 작품은 대개 그렇고, 20세기 후반이나 되어야 겨우 아름답지 않은 여자나 젊지 않은 여자도 연애를 하는, 이런저런 가능성이 나오기는 한다. 그래도 소설의 본류는 여전히 19세기라서 그 시기에 만들어진 틀을 완전히 깨기는 어렵다.

- 본문 16 ~ 17쪽에서 인용

 

야, 이렇게 문학과 시대 배경, 역사적 맥락을 함께 이야기하는 거,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방식인데! 마리 여사는 당당하게 문제제기한다. 사랑을 다루는 명작 고전은 남자가 주인공일 경우 겐지 이야기나 돈 후안처럼 여자들을 모아 전부와 섹스하는 전개인데, 여자가 주인공인 경우 공주가 남자를 모아서 기예를 겨루게 하여 제일 뛰어난 남자와 결혼하는 전개라고. 그뿐이냐, 여자가 주인공인 소설은 대개 한 남자만을 사랑해야 명작이 된다고, 심지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씩씩한 스칼렛 역시 나중에는 레트 버틀러 한 남자만 추구하지 않냐고. 오, 섹스니 어쩌니하고 이렇게 대 놓고 신나게 말씀해 주시다니, 읽으면서 진정 통쾌했다.

 

전체적으로, 한 현상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이 재미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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