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이영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현재 국내에 마루야마 겐지의 에세이가 6권 나와 있다. 그 중 5번째로 읽었는데, 이전의 4권(그러니까 <소설가의 각오><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나는 길들지 않는다>)와 분위기가 좀 다르다. 가장 최근작이어서 그런가? 기세 등등한 패기는 여전히 밑바닥에 깔리지만, 오만과 독설의 분위기가 없다. 묵묵히 정원이나 채마밭을 가꾸는 선승같은 분위기다.  

 

1월 버릴 수 없다면 정원사가 되지 마라
2월 사철 내내 꽃을 피울 수는 없다
3월 한 마리 새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별별 일을 다 겪는다
4월 성장하고 싶다면 가지를 쳐내라

5월 봄의 들놀이가 수만 권을 읽는 것보다 낫다
6월 존재하는 것들의 유일한 명제는 오로지 살아남는 것이다

7월 꽃을 돌아보지 마라
8월 당신을 타락시키는 유혹은 언제나 당신으로부터 시작된다
9월 예술의 진정한 힘의 원천은 생명체 간의 투쟁 그 자체다
10월 단풍에 취한 찰나로도 충분하다
11월 현실과의 투쟁을 피할 수 있는 생명체는 없다

12월 가장 아름다운 장미는 바람에 단련된 것이다
후기 무죄 선고를 받은 피고인처럼 

 

위의 목차에서 한 눈에 알 수 있듯, 책은 각 달별로 저자가 정원을 가꾸면서 생각하고 깨달은 내용을 담고 있다. 다달이 자연의 변화를 정밀하게 묘사한 12폭 병풍을 보는 기분이다. 저자의 정원과 함께, 정원을 손질하며 같이 다달이 흔들리고 변화하다,,, 다시 중심을 잡는 저자의 생활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이번 에세이집은 저자의 기존 작품으로 말하자면, 독설 가득한 에세이와 산문시같은 소설의 중간 정도 성격이다.

 

장미와 바람, 그 둘은 바로 삶 자체를 상징한다. 이 둘의 싸움이야말로 현세를 넘어선 생명 본연의 자세를 시사하는 것이다. 이 쓰라린 세상이 단순히 우연과 인연의 연속에 불과하다고, 혹은 망각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세상이라고, 혹은 자기 자신을 저주할 수밖에 없는 끔찍한 지옥이라고 단정하기 전에, 좋아하는 장미 한 송이를 생각해 보자. 때와 장소에 엄격히 제약받는 그 장미가 어떻게 가혹한 바람을 견디며 꽃을 피우는지를.

-130쪽에서 인용

 

아, 그래서 여성스런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이분이 표지에 장미를 실었구나. 뜻밖에 예쁜 표지와 달리, 이번 에세이집에서도 마루야마 겐지는 변함없이 자신과 세상과 대결하는 자세를 강조한다. 그런데, 뒤로 더 읽어가니 이런 대목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우연에 의해 주어진 이 삶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필요할 정도까지 중히 여길 것도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한다. 이런 유연한 마음이 화창한 봄날 오후의 숲을 거니는 것 같은 기분에 젖어들게 한다. 지금까지 내 삶을 육십 몇 차례 지나간 봄이다. 언제까지나, 가능하면 생애 마지막 호흡을 할 때까지 이 기분이 계속되길 바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정원과 소설에 딱 맞는 몸과 마음으로 노년기를 맞이한 게 행운이 아니라면 대체 뭐가 행운이란 말인가."

이런 유익한 조언을 또다른 나에게서 듣는다.

- 139 ~ 140쪽에서 인용

 

오오! 이 분! 전에 읽었던 에세이보다 좀 착해지셨다. 유해졌다. 하지만 나는 <소설가의 각오>에서 소설을 시작하며 불안해하던 몇 십 년 전의 문장들을 읽고 기억하기에, 자신이 원하던 모습 그대로 나이든 저자에게 미소를 보내게 된다. 이런 말 웃기지만, 이 분, 잘 늙으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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