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의 길
마루야마 겐지 지음, 조양욱 옮김 / 현대문학북스 / 200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현재 품절이지만, 마루야마 겐지에게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꼭 한번 읽어볼만한 책이다. 저자의 자전적 에세이인 <소설가의 각오> 이전에 나온 에세이인데, 작가의 개인적 정보가 많이 나와있다.

 

어린 시절 이야기, 중고교 시절, 직장에 들어가고 어떻게 소설가가 되었으며 어떻게 도코를 떠나 북알프스에 정착하게 되었는지의 이야기가 <소설가의 각오>나 다른 수필집 보다 더 자세하게 나와있다. 모터사이클과 사륜구동차를 타고 달리던 폭주족 시절 이야기는 이 책에만 있는 것 같다. 머리를 50에 삭발하게 된 사연도 이 책에서 처음 읽었다.

 

전체적으로 흥미롭게 보이는 것은, 이 사람의 '차남콤플렉스'이다. 장남은 가업을 이어받고 차남은 창업한다. 장남은 아버지의 나라를 지키지만 차남은 혁명하여 새 나라를 건국한다. 시골 고등학교 문학 교사 아버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작가는 '이토록 많은 책을 읽어도 고작 이 정도 사내밖에 못 되는가. (43쪽)'며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마더콤플렉스'도 없다. 대리만족을 위해 장남의 교육에 자신의 인생까지 다 거는 어머니를 천박하게 생각한다. 차남에 서자였다가 국왕이 되는 홍길동은 그래도 아버지의 인정과 사랑을 구하기는 했는데, 이 저자는 그런 면도 없다. 부모 역시 저자에게 별 기대가 없었던듯, 저자가 신인상을 받자 표절을 의심한다. 결국 저자의 형은 아버지처럼 시골 고교 문학 교사가 되고, 저자는 일본 문단에서 인정받는 소설가가 된다. 저자는 그냥 아버지도 형도 선배도 없이 자기 생각대로 살고 글쓰는 사람이다. '네 고집대로 하는 게 좋아. 모범이 될 만한 선배가 없으면 네 자신이 모범이 되도록 해!(149)' 결국 제목인 <산 자의 길>은 죽은자, 살아도 죽어 있는자인 자기 아버지와 반대로 살려 하는 자신의 길을 말한다. 아, 난  동서고금 문학사에서 이렇게 강력한 차남 작가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매우 흥미롭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혹시 마루야마 겐지의 차남 콤플렉스를 논한 책이 이미 일본에 나와 있지 않을까?

 

그밖에, 어린 시절에 갑자기 마음에 구멍이 뚫리고 그곳으로 찬바람이 드나드는 경험을 서술한 부분을 읽고는 좀 놀랐다. 나도 그런데. 저자는 어떻게 그 구멍을 데리고 살고 있을까. 나이들면 좀 나아지나?

 

늙음의 입구가 보이게 되어 인생의 끝에 실재하는 죽음이 생생함을 더하게 되자, 가치관에 다소 변화가 생기는 게 당연하리라.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 뻥 뚫린 바람구멍이 어느 결에 막혀버렸다는 뜻은 아니다. 변함없이 거기에는 허무의 찬바람이 불어닥치고, 동시에 그에 대항하기 위한 열정의 폭풍이 휘몰아친다.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회오리바람으로부터 잇달아 새로운 소설이 튀어나오고 있다.

변함없이 나는 나인 채로 있다.

- 본문 235~ 236쪽에서 인용

 

예술도 과학도 철학도 의학도 종교도 정치도, 제아무리 용을 써보았자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일시적인 위안 정도에 불과하며, 인간을 진짜로 구원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구원받지 못하는 부자유한 존재이니까 더욱 드세게 자유를 찾아 싸우고, 그것을 갈구할 때 튀는 불똥이야말로 현실에 뿌리내린 진정 살아 있는 사람의 감동이라는 것이 아닐까. 구원받지 못할 몸이니까 더욱이 이 세상을 살아갈 힘과 가치가 생겨나는 게 아닐까.

- 본문 179쪽에서 인용.

 

아, '변함없이 나는 나인 채로 있다.', ' 구원받지 못할 몸이니까 더욱이 이 세상을 살아갈 힘과 가치가 생겨나는 게 아닐까',,, 라니요!  겐지 오빠, 왜 진작 내게 나타나서 이 말을 들려 주지 않으신거에요? 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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