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만담 - 책에 미친 한 남자의 요절복통 일상 이야기
박균호 지음 / 북바이북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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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이전에 저자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전작 <그래도 명랑하라, 아저씨>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출판 전문잡지 <기획회의>에 연재되는 독서 칼럼을. 처음 저자의 글을 읽었을 때, 참 독특하다는 생각을 했다. 자연히 저자의 글쓰기 방식에 관심이 갔다. 영리하게도, 저자분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연출'하신다.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이 웃기고 재미있다고 한다지만,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엄청 진지하다. 가벼운 말장난 개그 스타일로 웃기는 것이 아니다. 철저히 미리 세팅해놓은 무대배경에서 차근차근 긴장을 고조시키다가 반전을 일으키는 상황으로 웃긴다. 마치 저자는 자신의 글을 읽어갈 관객의 심리를 미리 알고 밀당을 즐기는 것 같다. 아래처럼.

 

진돗개가 그렇듯 장서는 한 주인만을 섬긴다. 주인을 잃은 장서는 안타깝지만, 애물단지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이런 이유로 헌책이나 희귀본 수집가들에게 최고의 대박 기회는 다른 교양있는 장서가의 죽음이다.

- 본문 20쪽에서 인용.

 

책은 <독서만담>이라는 제목답게 경쾌하게 일상의 책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가의 전작 <그래도 명랑하라 ~ >처럼 가족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기획회의> 칼럼처럼 책 소개로 끝난다. 이 과정에서 아내와 소소한 일로 다투고 삐졌다가 항복하는 에피소드가 많이 나온다. 저자는 스스로를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가부장으로 정해놓고 그런 자신을 궁지로 몰아 스스로 망가뜨려서 독자에게 웃음을 준다. 일부러 옛 왕조의 유물처럼 이 시대 사람들은 일상 생활에 안 쓰는 한자어를 사용하여 서술한다. 그래야 결말에서 상황이 반전될 때 낙차로 인해 그 웃음의 효과가 증대되니까. 이런 점에서 나는 저자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연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상 설겆이하고 빨래 개고 마트에 장 보러 가면서도 저자는 가부장의 권위 운운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는다. 이는 설정이다. 결코 저자가 가부장의식에 찌든 보수 아저씨여서가 아니다. 저자는 이런 허위의식을 간파하는 즐거움까지 독자에게 줄 것을 계산하고 웃음을 준다. 영리하시다. 퇴고를 많이 하시는 걸까, 아니면 타고난 능력일까? 근래에, 이렇게 날  정신줄 놓고 웃게 만들면서 한편 저자의 스타일을 분석해보고픈 학구적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분은 없었다.

 

책 내용 자체도 즐거웠다. 나 또한 독서광이기에. '표지 디자인의 무성의함을 이데올로기로 삼는 까치 출판사(30쪽)'라는 대목과 '만약 꼭 책을 베게로 삼고야 말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글항아리 책들을 권한다. (69쪽)'라는 대목은 아마 어지간한 책벌레라면 다들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셨으리라. 뭐, 까치 책의 표지 디자인이야 30년 동안 변함없지 않습니까? 글항아리야 돌항아리 아니겠습니까? 뿐만 아니다. 책을 사랑하는 방법에 따라 독서인을'육체파'와 '정신파'로 나누는 대목도 정말 공감이 갔다. 저자에 따르면 책에 밑줄 치고 메모하고 침 묻혀 책장 넘겨가며 책을 읽는 사람은 '육체파'이고, 보물처럼 아껴서 책을 소중하게 읽는 사람은 '정신파'라고 한다. 흠, 저는 줄을 빡빡 쳐가며 읽는데다가 특별히 좋아하는 책은 침대 머리맡에 두고 자다가 깰 때마다 쓰다듬어 보는데요? 저는 육체파 + 변태파인가요? 뭐 이런 생각도 읽어가며 하고, 저자가 맛깔나게 소개하는 책 제목을 메모하기도 하고,,, 그렇게 읽어가는데, 어머나,

 

김현의 저작은 눈이 좀 아프더라도 누런 구형 종이 위에 오밀조밀 박힌 글씨로 읽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 것이다. 이제 막 진지한 독서를 시작한 대학 시절이나 초보 직장인 시절에 나왔던 책은 그 시절의 책으로 읽어야 제맛이 느껴진다.

- 33쪽에서 인용

 

내 서재는 나와 함께 늙어갈 터이고 언젠가는 아내나 딸에 의해서 묘지(헌책방)로 실려 가겠지.

- 59쪽

 

위 문단처럼, 통찰력 있고 은근 쓸쓸한 문장들도 리모콘을 들고 쇼파에 누워 티비 채널권을 외치는 가부장처럼 곳곳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놓고 '사랑해요'라는 말을  못 하기에 어버이날에 어머니께 꽃을 달아드리면서 '꽃에 사랑합니다, 라고 적혀 있네요'라고 말한다니,,, 이런이런. 다만 실컷 웃으려고 주문해 읽은 책인데 감동까지 주다니, 이 저자분 스타일, 정말 독특하시다. 정말이지, 다음 책도 기대가 된다.

 

서울애들은 '김밥천국'식당을 줄여서 '김천'이라고 부른다. 그동안 나는 외가가 김천이기에 김밥천국 앞을 지나칠 때마다 외삼촌과 사촌들을 그리워했는데, 이제 다른 남자분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직원이 알아볼까봐 매일매일 다른 츄리닝으로 갈아 입고 김밥천국에 가는 어떤 분 말이다.

 

 

*** 옥의 티.

 

1

그리스인들이 알파벳을 발명함으로써 지식의 대중화를 가져왔다는, 다른 역사서에서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통찰을 서두에서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 책이 단지 서양 역사의 입문서나 요약서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 191쪽

=> 알파벳 발명은 그리스인이 아니라 페니키아인. '그리스 식 알파벳 발명'의 오타가 아닐까 싶다.

(중요한 내용은 아닌데, 그동안 역사책 읽으면서 오류 넣어 쓰는 것이 버릇이 되어서요. 죄송 )

 

2

젊은 날의 초상, 변경, 태백산맥, 장길산 정도만 곱씹어도 짧은 인생이다. 인터넷과 게임 그리고 알바 세대가 쓴 작품이 내가 곱씹어 읽을 정도로 공감과 추억을 줄 리가 없다.

- 58쪽

=> 저자분의 의도는 알겠는데,  좀 생각해보시고 이 문장을 고쳐 보신다면 책의 완성도가 더 높아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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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6 0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유도비 2017-03-06 13:19   좋아요 1 | URL
박선생님, 언짢게 느낄 수도 있는 부분을 흔쾌히 답해 주셔서 제가 더 감사한 마음인걸요. ^^

박균호 2017-03-06 1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마운 배려이신거죠 ㅎㅎ 정말 고맙습니다
 
나는 그곳에 국수를 두고 왔네 - 소박한 미식가들의 나라, 베트남 낭만 여행
진유정 지음 / 효형출판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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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춥고 속은 헛헛하다. 뜨거운 국물이 먹고 싶다. 집에는 국물을 낼 재료가 아무것도 없다. 갑자기 외로워진다. 내 다리뼈라도 하나 뽑아내어 고아먹고 싶은 심정. 이럴 때 외식하러 나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음식에 대한 책을 꺼내 읽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읽은 책.

 

베트남 국수에 대한 단상과 추억, 레시피 등등을 담은 이 책을 펼쳐보니, 일단 국수 자체가 놀라웠다. 내가 그동안 알던 베트남 국수는 쌀국수 '퍼'뿐인데 이렇게나 다양한 국수가 있다니. 심지어 '분옥쭈오이더우(우렁이바나나두부국수)'도 있단다! 알고보니, 베트남에는 우리나라의 '국수'에 해당하는 단어 자체가 없다고 한다. 물어보면 ‘퍼’라고도 하고 ‘분’이라고도 했다가 ‘바인까인’이라 하기도 한다고. 그만큼 많은 수의 국수가 있기 때문일것이다. 눈이 많이 내리는 나라에는 '눈'이라는 단어는 없고 '싸락눈'' 많은눈' '비와 함께 내리는 눈' 등등에 해당하는 단어들이 수십 개 있듯.

 

앞부분은 각각의 국수 맛보기와 소개가 저자의 감상 위주로 서술되고 있고 '그녀의 국수 사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Chapter 4에서는 본격적인 국수 관련 정보를 주고 있다. 국수를 먹는 순서, 면 종류, 주재료, 향채 종류, 조리 방식, 베트남 음식의 특징과 지역별 국수, 국수 맛집 소개 등등. Chapter 5 부분에는 레시피 소개도 있다.

 

읽다보니 저자의 내공이 놀라웠다. 국수에 대한 건조한 정보를 빛나는 문장에 담아내는 내공이. 본문에서 저자는 '국수의 시간'을 말한다. 여행을 떠나려고 차 타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 그 시간이 바로 국수의 시간이다. 국수를 먹을 최고의  시간이다라고 말한다. 그 대목은

 

밥은 조금 무겁고, 빵은  왠지 차갑다.

먼 길을 떠나기 전 헛헛한 마음에 요기가 필요한 그때.

밥과 빵 사이의 적당한 무언가로 마음을 살짝 덥히고 싶은

그 시간이 바로 국수의 시간이다.

- 본문 26쪽에서 인용

 

드디어 여행의 마지막 국수가 나왔다. 나는 천천히 미엔가를 음미한다. 닭고기를 음미하고, 매끈한 당면을 음미하고, 국물을 음미한다. 당면은 마지막까지 국물을 흐리지 않는다.

나의 고향 같은 도시, 호찌민.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한다. 미엔가가 나를 배웅하고 있다.

- 75쪽

 

나를 모르는 사람들 틈에 섞여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쓰고 닦고 다시 썼을 젓가락을 꺼내, 어쩌면 한 세대가 지났을 낡은 테이블 위에서 지나간 시간을 먹는다. 국수 가락처럼 기나긴 인생을 생각하고, 인간은 결국 혼자임을 잠시 생각한다.

- 165 쪽

 

이렇게 시처럼 행갈이한 글이 적절하게 배치된 사진들과 잘 어울려 있다. 과하지 않다. 저자는 문장을 쓰고 덜어내는 습관이 몸에 밴 사람같다. 이거 굉장히 어려운 실력인데,,, 싶어서 저자 약력을 찾아보니 카피라이터이시라고. 음. 책 제목도 독특하다 싶더니만. (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가 생각난다) 편집도 세련되어 보기 편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책의 예상 독자는 베트남 국수 등 무겁지 않고 깔끔한 한그릇 외식을 즐기며 해외 여행에 익숙한 20대 30대 여성? 그렇다면 이 책은 예상 독자의 니즈를 정확히 맞춰가는 저자와 편집자의 팀플레이가 빛나는 책이다.

 

베트남 여행 가방에 넣어가기 좋은 책이다. 어디를 가나 맛있는 국수가 있고, 어디를 펼쳐 읽어도 여행자의 마음에 쏘옥 와닿는 책이 있다면 어딘들 못가랴. 이제 돈만 모으면 된다. 여행가야하니, 내 다리뼈는 그냥 놔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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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삐삐와 닐스의 나라를 걷다 - 문화와 역사가 함께하는 스웨덴 열두 도시 이야기
나승위 글.사진 / 파피에(딱정벌레)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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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마 라겔뢰프의 <닐스의 모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닐스의 여정을 따르는 저자의 동선에 맞게 사진과 지도가 적재적소에 잘 들어가 있어서 좋았다. 원작의 여정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철새인 기러기의 여행 경로를 따라 닐스는 스웨덴 가장 남쪽 지방인 스코네 부터 가장 북쪽 지방인 라플란드까지 전국을 여행하지만 저자는 달라르나 지방 이남까지 닐스의 전체 여정 3/4 정도. 스웨덴 지도로 봐서는 반 정도 여행하기 때문이다. 

 

나는 <닐스의 모험>을 아주 좋아한다. 어려서 계몽사본으로 읽고 나이들어 완역본을 구입해 다시 읽었을 정도다. 내가 좋아하는 역사와 문화, 지리 이야기가 각 지역의 구비전설과 동물들, 사람들 이야기와 잘 어울려 있다. 100년전 작가의 글인데도 약자에 대한 편견이 없어서 더욱 좋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으면서, 스코네의 글리밍에후스 성, 칼 11세와 로젠봄을 만나는  칼스 크로나 해군 기지, 전설의 섬 미네타가 떠오르는 고틀란드 바닷가,,, 등등 <닐스의 모험>을 읽으면서 설렜던 그곳의 이야기를 실제 사진과 함께 보면서 읽는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셀마 라겔뢰프의 고향 베름란드 방문기와 작가의 서재를 재현한 방이 있는 박물관 방문기도 반가웠다.

 

이 책에는 닐스 외 스웨덴 관련 이야기도 꽤 많다. 삐삐 이야기,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미국 이주한 스웨덴인의 근대사, 스웨덴의 성냥산업과 성냥왕 이바르 크뤼예르, 알메달렌 정치 축제 이야기, 바사 대왕과 구스타브 아돌프 2세 이후 스웨덴 역사, 스웨덴의 공무원 제도와 복지 제도가 어떻게 발전되어 갔는가, 등등. 그리고 스웨덴의 국부로 칭송받는 페르 알빈 한손 총리 시절의 명암을 둘다 서술하기도 한다. 그런데,,, 좀 피상적 서술이 많은듯하다.

 

세계최초로 우생학연구소를 설립하고, 당파와 상관없이 모든 정당들이 이를 지지했으며 불임정책을 가차없이 실행할 수 있었던 나라가 바로 스웨덴이었다는 사실에 섬뜩함이 느껴졌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런 섬뜩한 면들이 오늘날 스웨덴의 모습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그 이유가 섬뜩한 면들의 섬뜩함보다 아름다운 면들의 아름다움이 현재 더 돋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스웨덴 역사는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런 섬뜩함이 필요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오늘날 복지국가 스웨덴을 키우고 지탱하는 힘의 근원이 바로 이런 섬뜩한 면에 있는 게 아닐까?

- 본문 273  ~ 274쪽에서 인용

 

위 문단은, 1921년에 세계 최초로 우생학 연구소 설립하여 나치보다 먼저 인종 차별을 시작하고, 유전자를 남겨서는 안될 사회 성원들을 골라내어 (댄스홀에 자주 간다는 이유로 10대 여성에게도! 이런 식으로1975년까지 스웨덴 정부는 6만 3천명에게 불임수술을 행했다고 한다.)  불임정책을 실시했던 스웨덴 과거사를 비판한 부분이다. 그런데, 나는 이 저자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위 문단을 여러 번 읽어봐도 모르겠다.

 

저자와 출판사 편집팀에서 책의 목적과 예상 독자를 정확히 정하고 그에 맞는 내용을 책에 담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닐스 여정과 당시 시대 설명 위주로 기행수필로 가든지, 스웨덴 현대사까지 담아 인문 에세이적 성격으로 가시려면 정확하고 깊은 정보와 사고에 바탕을 둔 비판을 하시든지,,, 아예 언급을 안 했더라면 모를까, 위 문단의 섬뜩함 운운 처럼 피상적 인상 비평 부분이 많아 아쉬웠다. 닐스를 워낙 좋아하기에 아쉬웠을까. 기획은 참 좋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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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레드 에디션, 양장) -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우리에게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백영옥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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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에서 앤이 하는 말에 대해 작가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구성한 책이다. 읽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앤'이 보이고, 좀 더 읽으면 '작가'가 보이고, 다 읽고 나면 '나'가 보인다.

 

조증 환자일까 싶을 정도로 에너지가 넘치는 앤은 어떤 나쁜 상황에서도 긍정적 의미를 발견한다. 그건 그렇게 생각해서라도 견디어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작가 역시 어린 시절에 책과 애니메이션으로 접했던 앤의 말을 되새김질하며 의미를 발견한다. 그건 성인이 된 후 직장인으로서 작가로서 그렇게 생각해서라도 버티어야할만큼 힘든 일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앤의 말은 다 옳기만 한 것이었을까.

 

살아보니 앤의 말이 다 맞는 건 아니었다. 그건 소녀 시절의 나와 어른이 된 내가 같지만 다른 사람이기도 하단 반증이었다. 그러나 앤의 말은 내게 언제나 '간절히 !' 맞길 바라는 말이다. 앤과 지금까지 함께 나누었던 말들은 어쩌면 이 두번의 인생과 깊이 관련 있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 328쪽

 

작가는 앤의 말과 함께, 앤이 말 이상 나아가 쓴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작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 쓴 육아일기같아 보인다. 앤의 책과 자신의 책, 앤과 함께 했던 어린 시절과 어른이 되어 다시 함께하는 지금의 삶. 그래서 작가는 '두 번의 인생'이라 표현한 것일까.

 

과거와 미래에서 자유로워지면, 자신에게 주어진 이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된다. 공원에 가득 핀 목련을 보면서, 다음 날 해야 할 집안일을 걱정하는 일이 줄어드는 것이다.

- 34쪽

 

이제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멸의 역작을 쓰길 바라기보다, 차라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매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매일 쓰고, 매일 읽는 사람이게 해달라고 말이다.

- 60쪽

 

위처럼 곱씹어볼 부분이 많아 좋았다. 그런데 신기하다. 작가는 단문으로 수식언을 별로 사용하지 않고 담담한 문체로 서술하는데 읽다보면 자꾸 목이 꺽꺽 막히게 만드는 문장을 만나게 된다. 찡하다. 나와 같은 시대를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며 살아가는 내 나이 또래 작가들의 글을 읽으면 무진장 공감하게 되는 뭔가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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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같은 글쓰기 - 프레데리크 이브 자네와의 대담
아니 에르노.프레데리크 이브 자네 지음, 최애영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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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동료 작가 프레데리크 이브 자네와 메일로 대화한 내용을 엮은 책이다. 주로 자네가 질문하고 에르노는 답한다.  

 

아니 에르노는 20년전에 책세상 출판사에서 나온 <아버지의 자리>를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 이후 <어떤 여자><단순한 열정><탐닉>을 읽었다. 에르노는 자신의 삶을 글쓰기의 소재로 삼는 데 적극적이다. 정치적으로 좌파이고 페미니스트이며, 부모의 삶이나 연인과의 성애를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냉정하게 기술한다거나 하는 점때문에, 보수적이고 남성중심적 견해를 가진 평단과 독자의 공격을 받기도 한다. 저자는 독특한 문체를 구사한다. 초기작인<아버지의 자리>에서 내세운 글쓰기 입장을 시종여일 지키고 있다. 절제하는 문장 그리고 정확하고 첨예하게 진실을 허구의 바깥에서 탐구하는 입장 말이다. 이런 작가에게 프레데리크 이브 자네는 아니 에르노만의 작품 색깔을 결정짓는 것은 무엇이며 왜 그러한 글쓰기 형태를 추구하는 건지? 등등을 질문한다.   

 

아니 에르노는 답한다. 자신의 삶과 글쓰기에 대해. 파리 외 지방 하층 계급 출신으로 신앙심 깊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카톨릭 기숙 학교를 다니던 성장기. 두 아이를 낳고 20대에 이혼. 교사로 일하며 가사와 육아를 혼자 해결하며 글쓰기. 2시간만도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웠던 환경. 불법인공유산의 경험. 여성 작가에 대한 편견,,,, 담담히 읽어 내려가다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아니 에르노는 참으로 여러 가지와 싸우며 글을 써 왔구나.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구나.

 

내겐 글쓰기가 칼처럼 느껴져요. 거의 무기처럼 느껴지죠. 내겐 그게 필요해요.

- 47쪽

 

정치적으로 좌파인 저자는 문학교사로 작가로 안정적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이 출신 계급을 배반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한 삶을 속죄하는 방법으로 글쓰기를 한다고.

 

속죄의 다른 방법은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대한 지배적인 관점들을 전복시키는 데 기여하는 것입니다.

- 69쪽

 

'당신은 자신을 여성작가라고 생각합니까?'라는 후진 질문에는 ‘남성적 글쓰기라는 분류는 없다. 유독 여성들에게만 해당된다고 명쾌히 답하며 아래와 같이 덧붙인다.

 

하지만 난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역사를 통해 형성되었으며, 그 역사가 글쓰기 속에 살아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러니까 가족소설, 출신 환경, 문화적 영향, 그리고 물론 성과 관련된 조건이 그 속에 포함되겠지요. 내 내면에는 여성으로서의 역사가 있어요. 그런데 그 역사가 한 순수한 작가만을 내 작업대 앞에 남기고 사라져 버리는 기적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어요? 게다가 그 순수라는 개념이 참 묘하잖아요.

129  ~130쪽

 

내 출신성분이 피지배 사회계층이라는 사실과 여자아이들에게 인위적으로 주어진 조건이 부과하는 이중적 무게가 내게는 무척 무거웠다는 사실을 힘주어 말하고 싶군요. 거의 파탄 지경까지 이르렀던 적도 있답니다. 그리고 보부아르를 만나게 되었지요. (<2의 성> 읽은 이야기가 이어진다)

- 133쪽

 

외설적이라는 비판을 받은 <단순한 열정>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남성들이 쓴 텍스트에 대해서는 그런 비난을 가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그들 작품 속 남근중심주의적 형태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남성 시각의 성애물에 익숙한 것이라는 말일 것이다. 작가는 이어서 말한다. 

 

사람들이 흔히 여성의 글에서 기대하는 로맨스’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그 책이 성적인 외설인 셈이었던 거죠. (중략) 내가 속해 있는 성에 내 존재를 빗대 이야기하는 아주 부당한 이중적 비방이었어요. 이렇게 말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좌파라고 일컫는 자들이었답니다.

- 143쪽

 

이런 식으로 '여성' 작가로서 프랑스에서조차 받아내는 공격과 비난에 대해 아니 에르노가 당당히 말하는 대목이 특히 인상 깊었다. 저자나 질문자나 다른 프랑스 작가나 작품, 프랑스의 문화 풍조 등등을 광범위하게 인용하며 말하지만 이 관련해서 책 뒤에  주석 설명이 잘 되어 있어 그리 정신없지는 않다.

 

참, 아니 에르노는 단순과거시제는 거리를 두려는 태도처럼 느껴져서 복합과거시제를 사용한다고. 프랑스어의 복합과거시제는 과거에 일어난 사실의 결과나 여파가 현재까지 미칠 때 사용하는데, 이거 원서가 아니라 번역본을 읽으니 그 차이를, 맛을 모르니,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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