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가는 길은, 아이들을 만나는 건 언제나 설레는 일이죠. [문학] 수업을 참관할 수 있는 기회를 책덕후가 놓칠 리가요. 냉큼 신청하였습니다. 마침, 참관일이 아이들 발표일이었어요. 선택한 문학작품을 읽고 "성찰"한 내용을 3분 발표하는 구성이었습니다.
[1984] [날개] [죽음의 수용소에서]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마침 발표 목록에 오른 책 중 1/2 가까이 제가 최근 2-3년 사이에 읽거나 다시 읽은 책이었습니다. 문학 선생님께서는 모르셨을 거예요. 이 수업에 대한 기대감으로 짜릿짜릿 전율 느끼는 어른 학생이 교실 안에 있다는걸.
아이들의 발표는 상상 이상으로 훌륭했고, 발표하는 아이들 역시 사랑스러웠습니다. 칭찬이 열 마디로도 모자랄 지경이었어요. 동시에, 반복되는 경향성을 보았습니다. 바로, 기존의 권위 있는 해석이나 익숙한 키워드로 문학작품 해석을 그대로 가져오는 경향 말입니다.
예를 들어, 이상의 [날개] 발표자는 마지막 문단을 지식인이 무기력 상태를 초극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무려 난해한 [1984]를 발표한 친구는 발표 내내 "Big Brother is Watching You"와 만연한 CCTV의 감시망을 언급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문학 참고서를 통해서 익혔거나 평론을 찾아 읽어 기억하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저는 '문학' 잘 모릅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게 됩니다. 해석문제라는 맥락에서 [샬롯의 거미줄]을 다시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이 초등필독서는 "우정"을 키워드로 더 잘 알려져 있죠. 샬롯이라는 거미와 윌버라는 돼지 사이의 우정 말입니다. 검색해보면, [샬롯의 거미줄] 리뷰마다 "찐 우정"을 언급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네다섯번 읽다 보니 샬롯과 윌버, 둘의 관계성은 성장이 빠른 새끼 돼지 윌버의 성숙과 더불어 미묘하게 변하더라고요. 초반기 샬롯과 윌버의 관계성은 "우정"이라기보다는 "돌보는 자- 돌봄 받는 자," 더 구체적으로는 마치 "엄마-아들"과도 같았습니다. 적어도 제가 볼 때는요.
예시 장면을 하나 들어볼까요? 작품에서 윌버는 농축산물 품평회에서 1등을 하면, 햄 베이컨 신세를 면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품평회에 참여합니다. 그동안 윌버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윌버를 돕느라 애써온 샬롯에게 윌버는 이번에도 도와달라고 말하죠. '내가 어려운 순간에 네가 날 저버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라는, 명령보다 더 무서운 친절한 기대감으로 말입니다. 사실, 샬롯은 임신한 거미입니다. 곧 알을 낳아야 하죠. 품평회장에서 알을 낳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런데, 어린 윌버는 품평회장에서 알을 낳으면 "재미있을" 거라며 샬롯의 동행을 재촉합니다. 처음에는 "알 낳기"를 우선순위에 두었던 샬롯이 그 청을 거절했지만, 윌버를 지켜주기 위해 동행합니다. 이 부분에서 보이는 관계성은 대등한 관계의 우정이라기보다는 "(아낌없이 베푸는) 엄마 - (그 사랑을 당연하게 받아 가는) 아들"의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물론 제 해석이 옳다는 의미로 적은 글은 아닙니다. [샬롯의 거미줄]을 "우정" 키워드에 갇혀서 생각하면 놓치는 부분이 생기게 마련이라는 의도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상의 "날자" 문구가 무기력한 지식인의 생의지로 "=' 환원되고, 그 어렵고도 치밀한 [1984]가 "Big Brother is Watching You"와 등치 되었을 때, 풍성함을 놓칠 수 있겠구나 싶어요.
세상에 둘도 없는 멋진 '문학' 수업을 진행해 주신 선생님과 그만큼이나 훌륭한 아이들, 모두에게 고맙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