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5월 23일, 하루를 꼬박 [관통당한 몸]을 읽으며 보냈다. 4-5시간 집중하면 완독할 두께였는데, 늦은 밤에서야 작가 에필로그에 이르렀다. 두 가지를 깨달았다.

*

첫째, 나는 (관련 자격증 및 학위도 없거니와) 상담 관련한 일에 부적격자일 것이다. [관통당한 몸]을 읽어나갈수록 타인의 고통이 전해져서, 가슴은 뻐근해지고 머리가 뜨거워졌다. 잠시 책 읽기를 멈추고 셀프 마사지와 심호흡 하기를 수 차례. '활자'라는 성긴 체로 걸러낸 증언을 읽기만 해도 가슴이 뻐근해오는데, 몸으로 기억하는 당사자들은 어떻게 견뎠을까? 아니나 다를까 많은 생존자(혹은 희생자)와 그 가족은 심적 고통으로 인해 건강을 잃거나 제2의 죽음을 호소했다.

*

두 번째 깨달음. [관통당한 몸]을 먼저 읽은 친구분들의 충고를 새겨 들었어야 했다. 그분들은 내게 호흡 조절해가며 읽으라 충고했다. 하지만 욕심을 앞세웠던 나는, [관통당한 몸]을 하루 만에 다 읽었다. 예민한 손끝을 통해 '타인의 고통'이 심장까지 타고 올라왔다. 맑은 공기가 필요했다. 산에 올랐다. 읽다가 힘들어지면 하늘 한 번 올려 보기를 반복하며 오후를 채웠다.

 


5월 24일.

다음 날 꿈에서도 나는 [관통당한 몸]을 두고 사람들들과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대학 구내식당의 백색 소음을 배경으로한 채, 나는 탁자 맞은편편 상대들에게 "문제는 젠더 폭력이잖아요!"라고 쏘아 붙였다. 꿈에서 깨자마자 바로 자기 검열한다. 아니다. 젠더 폭력 이상이다. 전시 강간은 본질적으로 "인간 존엄을 모욕하는, 인간에 대한 폭력"이다.


Cortona Rape of the Sabine Women

Pietro da Cortona,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크리스티나 램(Christina Lamb)은 30여년 차 분쟁지역 전문 기자이다. 그녀는 전쟁이란 이름 아래 행해지는 "느린 살인"(강간 폭력)은 극악해지는데 왜 근절책은커녕 현황 파악조차 더디게 이뤄지는지 파헤치고 싶어했다. 그래서 쓴 책이 <관통당한 몸>이다. 이 책에는 인간 존엄을 구이용 새처럼 꼬챙이로 관통하고, 찢고, 태우는 '호모 사피엔스'의 야만적 시도가 생생히 그려진다. 동시에, 그런 비인간화에 저항하며 '사람'으로 다시 일어서고, 다음 세대나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저항도 보여준다. 저항의 장엄함을, 크리스티나 램은 겸손하게 뒤로 물러나 묘사하지만, 실은 그 자신이야말로 용감한 저항 자기장의 중추이다.

 

Európa Pont,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램은 비인간성을 파헤치는 자신의 직업을 거리두기하며 성찰한다.

"사람들이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런 일을 하거나 그런 이야기를 지어낼까 생각했다. 혹시 트라우마가 너무 심해서 무엇이 진짜인지 더는 알지 못하는 것일까?...그리고 우리는 어떤가. 조금 더, 조금 더 끔찍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어떤 괴물을 키우도록 부추기고 있는 건 아닌가? 포위됐던 콩고 동부에서 막 구출되어 비행기에 가득 태워진 벨기에 수녀들에게, '여기에 강간당했고 영어 할 줄 아시는 분 계세요?'라고 외쳤다는 그 텔레비전 리포터와 우리는 정말 다를까? (114쪽)  

"우리(전쟁지역 기자)는 정말 다를까?"

 .물음표로 끝낸 저자의 질문에, 독자로서 감히 "다르다"라고 대신 답하고 싶다. 5월 23일을 오롯이[관통당한 몸]에 헌신하고도 그 날 밤 꿈, 또 다음날에도 "그들의 전쟁터Their Battlefield"에서 연약한 유기체 과녁이 된 여성(Our Bodies)을 생각하는 까닭은, 크리스티나 램의 균형잡힌 시선 덕분이다. 30여 년간 현장에서 숱한 사람들을 만나고 참상을 목격하고, 글로써 증언해온 램의 인공위성 시야는 "관통당한 몸"을 여러 층위에서 생각하게 해주었다. 실로, 성숙한 저널리스트요, 신뢰 가는 인격이다 .



램의 인공위성 시야는 독자에게 여러 갈래 생각을 유도한다.

"관통"의 주체와 객체/ "몸"의 개별성과 복수성 / 가해자와 피해자, 다시 피해자와 생존자 / 인간(성)과 비인간(성) / 생명의 밭으로서 재생산력 vs 파괴의 과녁이 된 재생산력 / 구호단체(구호자)의 위선과 선의 / '피(혈통)의 순수성' 신화가 빚어내는 야누스 효과/ 무지한 대중과 각성된 활동가는 한 끗 차이 / 오명 씌우기와 이름의 정치학 /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의 연대 / 채굴할 실물 자원지도와 강간 고위험 지역 지도의 겹침 등등


상당한 메모를 했건만 말끔한 정리가 어려운 이유는 [관통당한 몸]을 읽은 정서적 충격 때문이라고 변명하겠다. 이 혼란스러운 마음- 인간의 잔혹함에 대한 역겨움과 동시에 인간 회복력에의 경이, 폭력 앞에서 본능적 공포와 불안 반응,복수심,그리고 복수심의 과녁을 돌려 생산적 힘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교육받은 목소리 등- 이 정리되면, [관통당한 몸] 리뷰를 다시 쓰겠노라, 숙제를 남긴다.


글을 마치며 짧게 내 '분노의 대상' 변화를 돌아본다. [관통당한 몸] 초반부에는 여성의 몸을 전쟁터 삼는 개별 가해자들에게 복수심을 느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 램의 목소리리를 따라가다 보니, 바둑판 위 개별 돌들에 분노를 집중해서는 바둑판을 읽을 수 없다는 걸 이내 깨달았다. 예를 들어 저자는 두 차례나 "머리에 꽃을 꽂은 여인"에 현혹되어, 로힝야 사람들을 "천천히 태우는 제노사이드(106쪽)"을 외면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Foreign and Commonwealth Office, OGL v1.0OGL v1.0, via Wikimedia Commons


또한, 램은 보스니아 내전 당시 강간 당했던 여성들이 목숨을 걸고 증언을 한들, 그들에게 전해졌어야 할 기부금은 "학회와 호텔 숙박비"(209쪽)로 유용되고, 약자를 도우러 파견되었다는 인도주의적 단체 직원들이 현지 여성들에게 저질러온 역겨운 성범죄를 폭로한다. 


 

[관통당한 몸]을 읽고 나니, 칸 영화제에서 출현한 "Stop Raping Us" 시위자를 다룬 기사가 곱게 보이지 않는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온 몸으로 절규하는 시위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위선적이어서 싫다. 라스베가스 누드 쇼 구경하듯 희롱하는 시선으로 훑는 턱시도, 그 옆에는 '내 몸이 아닌 그들의 몸에나 일어날 예외적 사건'이라는 거리두는 화이트 드레스.

위선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기에, 뜨끔하고 아프다. 그렇지 아니한가?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새파랑 2022-05-23 15:0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 엄청 두껍던데 하루만에 읽으셨다니 대단하십니다~!!
중간에 얄라님 특유의 넵킨 메모 사진은 멋지고, 마지막 사진은 너무 고통이 느껴지네요 ㅜㅜ

얄라알라 2022-05-23 16:56   좋아요 4 | URL
ㅎㅎ 그러게요. 저 점심도 커피와 쿠키로 때웠어요. 이 책 읽다가 ㅋ


2022-05-23 1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persona 2022-05-23 15:1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꿈에서조차 분노하고 계셨군요. ㅠㅠ 개뱔 돌들이 집중하다간 바둑판을 읽을 수 없다는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저역시 돌에만 집중해 개별적으로 분노하느라 판을 못 읽는 사람인 거 같아요. ㅠㅠ

얄라알라 2022-05-23 16:55   좋아요 4 | URL
그리스 신화, 우리가 명작이라고 배워온 많은 그림 속, 지나온 인간의 시간 속에 유사한 폭력이 얼마나 지독하게 계속되어 온걸까 생각하면....
그냥 막 심장이 아파요.

persona님, 무슨 그런 겸손한 말씀을요.
저는 분노도, 공감할 수 있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연대 무기라 생각해요. 같이 분노해요^^

singri 2022-05-23 16:1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아직 끝이 안났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더 힘들어요 흑 😭

얄라알라 2022-05-23 16:54   좋아요 3 | URL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크리스티나 램의 얼굴을 찾아보았어요.
제가 상상했던 굳어있고, 직선형의 표정이 아니라, 온화한 곡선형의 표정이라
작가의 정신적 단련됨과 내공을 짐작했지요.

저는 책 읽는 내내 인상을 얼마나 썼던지....

제가 아직 갈길이 멉니다. singri님, 힘내서 꼬옥 꼬옥 완독하시길 응원드려요

거리의화가 2022-05-23 16:1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얄라알라님의 마음 이해할 것 같아요 본문 보면서 저절로 주먹이 쥐어지는ㅠㅠ 개인을 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시스템을 개선하고 바꾸지 않는 한 분노로만 그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됩니다 읽느라 고생하셨어요!

얄라알라 2022-05-23 16:52   좋아요 3 | URL
예, 거리의 화가님

저는 무엇보다도, 콩고의 영유아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상상조차 불경한지라 제 심장을 제가 어쩌지 못하겠더라고요.

HIV/ADIS 관련해서 영유아강간을 (그 ‘낙후된‘ 지역 ‘도덕관념‘ 떨어지는 사람들의) ˝cleansing myth˝때문이라는 식으로 개인 가해자를 비난하는 논리가 있잖아요? 하지만, 콩고에서 영유아가 집중 당하는 지역이 왜 하필 희소한 자원 밀집분포지와 겹치는지, 너무나 분노해서 지금도 자판을 두드리기가 힘들지경입니다...

coolcat329 2022-05-23 18: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미리보기로 읽다가 중단했습니다. 힘든 책이에요 ㅠㅠ

얄라알라 2022-05-24 10:54   좋아요 3 | URL
먼저 읽으신 분들께서 다들 쉬엄 쉬엄, 힘드셔서 호흡 고르고 읽으셨던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coolcat님 그래도 꼭 이책 완독하시기를 응원드립니다!

페크pek0501 2022-05-24 16:4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책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보기 힘든 게 있더라고요. 이런 책 완독은 무지 힘들 것 같습니다.
마음을 잘 다스리며 읽어야 할 듯요. 몰랐다가 밝혀지는 진실 중에는 잔인한 것이 많은 법이죠.

얄라알라 2022-05-25 13:08   좋아요 3 | URL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요즘 <고잔동 일기>, <가장 외로운 선택>...마음이 무거워지는 책들을 읽게 되네요.
그래도, 피하지 말고 저자분들께 감사한 마음으로 읽으려합니다

청아 2022-06-03 21:5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얄라알라님 이 페이퍼를 이제야 읽었습니다.ㅠ.ㅠ
우크라이나에서 전시강간이 일어나고 있다는 기사를
보면서 이 책이 생각나곤했어요.
읽는 것 자체가 힘든 책이지만 고통받은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것. 그런 연대와 귀기울임이
작게나마 치유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마지막 사진과 문장...너무 공감됩니다!!
수고하셨어요ㅠ.ㅠ

mini74 2022-06-04 12: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알라님 고생많으셨어요. 너의 몸은 전쟁터란 바바라크루거의 문장이 생각났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