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 효과'라는 원제 그대로였다면, 양육이나 인구 문제 도서로 오해했을 뻔하다. 더퀘스트 출판사 편집진은 "다정함"이 부상하는 코로나 블루 시대에 어울리는 제목을 달았다. [다정함의 과학]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와 나란히 입소문이 뜨거운 책이다. 저자 켈리 하딩은 정신의학 교수이다. 건강의 의미 그리고 개인과 공동체 모두 더 건강해질 가능성을 진료실 밖에서도 찾아 왔다. 오랜 고민과 연구 끝에 그녀가 도달한 결론을 집약한 표현이 바로 '토끼 효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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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 토끼 모델'의 실험 대상 토끼들은 수 개월 간 동일한 고지방 사료를 먹었다. 예측한 대로 콜레스테롤 수치는 모든 토끼에게서 상승했다. 그러나, 토끼 한 무리의 동맥 혈관 내부에는 지방 성분이 다른 토끼들의 60%였을 뿐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이 결과를 설명할 수 없었다. 유사한 사례를 하나 더하자.
27주만에 태어난 조산아 제이미는 의료진과 부모의 노력에도 불구, 사망 판정을 받았다. 엄마는 숨을 멈춘 아가와 살갗을 맞대고 말을 걸었고, 아가는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위 미스테리한 사례의 토끼들에게도 역시, 토끼를 안아주고 애정을 듬뿍 준 헌신적인 연구원이 있었다.

저자가 토끼 연구 사례를 내세워 이 책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은 명료하다. '건강은 사회적, 정치적, 환경적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 1) 따스함, 웃음, 존경, 신뢰, 배려, 환대, 지지 등을 통한 사회적 연결은 개인을 그리고 공동체를 건강하게 한다. 2) 건강을 위한 노력은 진료실 밖에서도, 즉 공동체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1)번에 격렬히 공감한다. 2)번도 마찬가지. 그러나 2)번 '공동체 차원' 부분에서 한숨이 나왔다. 실현이 쉽지 않을 터이니 무력하고 막막하게 느껴진다. 친밀한 관계에서의 다정함은 개인 차원의 각성과 노력으로 발현될 수 있다. 하지만 '다정한 개인'의 합집합이 '다정한 공동체'로 이어지진 않는다. 설사 다정함이나 친절이 취약점(약자의 무기)로 평가절하되지 않는 사회분위기를 형성할지라도, 건강에 영향을 주는 정치적 사회적 환경적 요인들, 인간의 본래적 편향성과 혐오 등의 요소는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이 책의 5장 '교육'을 예로 들어보자. 캘리 하딩은 100세를 넘겨서도 건강한 삶을 사는 아이젠버그 박사의 열렬한 지식욕구를 칭송하며 건강과 교육 간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통계를 제시한다.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는 환자가 당뇨 걸릴 확률이, 대학교 졸업하지 않은 여성이 비만일 확률이, 자녀가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부모가 수명이 더 짧을 확률이' 높다는 식이다. 물론, "배움"을 통한 자기성장 노력이 건강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 같다. 돈이 상대적으로 덜 드는 교육의 창구들을 활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의 최종학력은 삶의 목적의식과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복합적인 변수들의 영향을 받는다. 개인이 제 아무리 다정하거나, 배움의지가 뚜렷할지라도 그것이 교육의 총량과 직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배우려고 노력해야(더 교육받아야) 더 건강하다'는 진술에 쉽게 동의할 수 없다.
토끼들을 제 아무리 쓰다듬고 아껴준 들, 실험실 안에서 사료 받아먹으며 몇 달 더 생존할 운명의 토끼라면, 다정함은 무슨 소용일까? 삶의 조건들이 너무나 가혹한 데, 결코 사회적 시선이 우호적이지 않은데, 다정함의 가치를 실천하며 산들, 그는 얼마나 더 건강할까? 켈리 하딩의 고무적인 제안이 왜 내게는 버겁게 느껴지는가? 분자화도 모자라 원자화 시키는, 사람들 간 결합력을 약화시키는 사회에서 '사회적 연결'이라는 끈을 붙들어 매야 너와 공동체가 산다는 제안은 왜 슬프게 들릴까?

리뷰, 다시 읽어보니 불만 많은 염세주의자의 투덜거림 같다. [다정함의 과학]을 작정, 디스하려는 뉘앙스도 느껴진다. 전혀 그렇지 않다. [다정함의 과학] 고개 끄덕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었다.
다정한 손길, 눈짓, 인사, 함께 함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건 의학박사 학위 없어도, '토끼효과'같은 전문 용어 몰라도 우리가 살면서 깨치는 기본이다. 그러나 '다정함'의 가치를 새로 발견하고 있는 이 시대가 역설적으로 이 사람간 아날로그적 결합력이 얼마나 약화된 세계에 우리가 사는지 반증한다고 생각하기에 슬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