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란을 날려라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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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엽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실로 중요하지 않다. 그것으로 인해 고든 콤스톡과 로즈메리가 결혼 이후 첫 말다툼을 했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된다. 엽란은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있다. 그러한 유형의 말다툼은, 돈은 적으나 숨길 것이 많은 부부라면 시대와 국가를 불문하고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사소한 언쟁과 실존하는 아이 앞에서 모든 환상은 현실로 돌아가는 법이다. 


 이 소설은 조지 오웰이 책방에서 일했던 경험을 기반으로 쓰였기 때문에 자전적인 소설로 해석될 수 있지만, 고든 콤스톡은 조지 오웰의 어두운 자아에 가깝다. 가난과 계급사회와 제국주의에 대한 사유 뒤편에 자리잡은, 뛰어난 작품을 발표하여 세간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 있다. 물론 조지 오웰을 돈과 명예에 집착하는 이로 해석하는 것은 그의 생애에 대한 모독이다. 영국 문학사에서, 아니 세계 문학사를 통틀어 오웰만큼 실천적인 작가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책방 점원 시절이 묘사되어 있지만, 작품의 주 무대는 서점 밖이기 때문에 자전적인 소설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무엇보다 그의 추태를 보고 있자면, 소위 말해 좀 '깬다'. 


 『엽란을 날려라』의 단순한 줄거리 속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을 꼽자면, 고든이 미국 문예지에서 받은 50달러를 탕진하는 날이었다. 그 장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큰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돈의 신에 굴복하기 싫다면서 잘 나가는 카피라이터 일을 그만두고 책방 점원이 되기를 선택한 고든이, 막대한 돈을 얻자마자 조력자인 래블스턴과 연인인 로즈메리에게 자랑하듯 돈을 막 쓰는 모습은 우스우면서도 서글프다. 고든은 지속된 가난으로 피해의식과 자기혐오에 빠져 있다. 그래서 래블스턴의 호의를 가난한 자신에게 베푸는 동정으로 간주해 왔고, 여자들은 가난한 남자와 결코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녀에게 적대적으로 대한다. 두 사람은 성인군자처럼 고든을 챙겨주었지만, 10파운드를 하루만에 날리고 만취하여 경관을 폭행한 고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작가가 비슷한 경험을 했다면, 정말 대단한 용기를 지녔다고 말하고 싶다. 고든에게 있어서 그 날은 삶에서 지우고 싶은 순간일 것이다.


 통속소설 같은 갈등의 해소, 평면적인 인물 관계, 다소 늘어지는 심리묘사 등의 단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흥미롭게 읽히는 까닭은, 인간 내면의 모순과 드러나는 추악함을 적나라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작가 스스로도 실패작이라고 인정했지만, "역시 조지 오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과 돈, 자본주의 체제가 어떻게 인간의 내면을 망가뜨리는지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모두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대영제국의 위대함과 제국주의의 정당함을 부르짖을 때, 조지 오웰은 밑바닥 세계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그들과 동화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그러한 시절을 함께 감당했다. 그가 이 작품을 다시는 출판하지 말라고 부탁했던 까닭도, 오로지 '돈'을 위해 창작을 했음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아무렴 어떤가, 절실함이 없으면 창의력이 솟아나지 않는 것을. 만약 시간을 돌린다 해도, 그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고든이 로즈메리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는 결말은 다분히 해피엔딩이다. 그는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환상은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을 돕지 않는다. 


 현실이 언제나 환상보다 나은 것은 아니다. 어떤 환상은 다양한 이름으로 변신하여, 세상을 바꾸는 데에 기여한다. 물론 그것은 현실에 적절한 방식으로 접목했을 때의 일이다. 작가를 꿈꾸었으나 훌륭한 카피라이터가 된 남자가, 그 일을 하면서 부끄러워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현실은 언제나 환상을 배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현실이 더 구체적인 환상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조지 오웰이 자전적인 이야기를 쓰는 데에 그쳤다면, 그저 사실적인 묘사에 탁월한 르포르타주 작가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불멸의 우화와 다가올 미래에 대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작품들을 기꺼이 기억한다. 조지 오웰의 삶과 작품은 우리가 환상에서 현실로, 현실에서 환상으로 유연하게 사고를 바꾸어야 함을 일깨워 준다. 

식당 안에는 정확히 셀 수 없을 정도로 엽란이 많았다. 그것들은 찬장 위에, 마룻바닥에, 보조 탁자 위에 등 식당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창문 쪽에 여러 개의 화분이 놓여 있는 스탠드가 서 있는데 빛을 차단하고 있었다. 사방에 엽란이 둘러싸고 있는 어둑어둑한 방에 들어오면 마치 수중화의 따분한 잎들에 에워싸인, 햇빛 없는 수족관 안에 있는 느낌이 든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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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랜드
천선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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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선란 작가에 대해서는 입소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국내소설에, 아니 요즘은 문학 전체에 관심이 통 없던 나에게 한국형 SF 소설의 대가가 나타났다는 것이 신문 기사를 통해, 영상을 통해 전해졌다. 그 당시에는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는데 얼마 전에 그녀의 신작 단편집이 출간되었다는 말을 듣고 불현듯 구매했다. 제목인 『노랜드』에 대한 첫 인상은 "방황하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일까, 였다. 그리고 모든 작품을 읽고 난 뒤 든 느낌은 "no homeland"에 대한 이야기, 그러니까 스파이더맨 시리즈로 비유하자면 <노 웨이 홈(no way home)>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작품 중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묘사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기에 떠나야 했던 자들의 심정이니까. 

 

 나는 이 작가의 소설들을 처음 읽어보았는데, 전체적인 감상평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필립 K. 딕의 스타일에 자신만의 주제를 덧붙여 한국의 정서에 성공적으로 접목시켰다"는 것이다. 종말 이후의 이야기 또는 종말론적 분위기에 지배되고 있는 세계관은 앞서 언급한 작가를 연상시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21세기 SF 문학의 대표적인 추세이므로 딱히 흠 잡을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색채를 얼마나 고유하게 녹여내었느냐인데 나는 그녀가 그것을 잘 해냈다고 본다. 우선 갑자기 얻은 명성을 의식해서 작품에 힘을 준 흔적이 없는 것이 좋았다. 그냥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는 인상, "소설이 다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조소 섞인 분석 등이 그렇다. 자신이 만든 세계에 갇히지 않고 차분하게 하지만 재치 있게 주제를 풀었다. 그리고 가볍게 한 말이 곱씹어 보면 작품들을 관통하는 단어라는 것도 쉽게 알 수 있다. 이유 없이 살아가자. 문학, 그중에서도 SF 문학은 장르의 특성답게 부연 설명을 참 좋아한다. 사실이든 허구든 도구를 동원하여 인물의 동기를 설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정말 대담한 시도는 해야 할 말에 대해서 침묵하는 일이다.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는다는 구차한 변명 대신, 정말 거기서 이야기를 끝내는 도전 말이다. 


 대표적인 예시가 「-에게」다. 이름을 불리기 전까지 이승에 남아야 하는 존재라니, 얼마나 할 이야기가 많은가? 유령으로서 비슷한 처지에 있는 자들을 구원하고 마침내 이름 세 글자가 불리는 순간의 감동을 충분히 재현할 수 있다. 천선란은 주인공의 이름에 대해 침묵했다. 대신 단서를 남긴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될 만한 이름을 가진 모두의 이야기로 말이다. 그 절제가 이야기의 보편성을 확보한다. 오히려 너무 흔한 소재가 되어버린 좀비를 기이한 마을의 분위기와 접목시켜 심리 스릴러처럼 그려낸 「이름 없는 몸」이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한 것은 아이러니이자 작가의 의도가 다분히 담긴 구성이다. 이 작품이야말로 제목과 가장 부합하지 않을까 싶었다. 공간은 있지만, 사람이 없기에 더 이상 고향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비극이 아닐까? 물리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등장인물들은 수없이 언급되었으나 정신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의 이야기는 소수이다. 고향에서 도망쳐왔다가 귀환한 자들에게 환영 인사는 없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순수한 상상력이 빛난 단편이었다. 바로 「두 세계」였다. 소재부터 전개까지 모두 매혹적이었다. 독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설 속의 세계에 풍덩 빠져들고 싶은 욕망을 품어봤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실현시켜 주는 프로그램이 개발되다니! 심지어 온몸을 알집에 가두고 요란하게 흔들리는 기계 따위가 아니라, 마그네틱 버튼을 관자놀이에 붙이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획기적이고 기발한가! 게다가 작품 속 등장인물들과 상호작용할 수도 있으니, 이보다 신나는 게임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러한 애서광들에게 천선란은 예상 밖의 대답을 던진다. 그렇게 문학을 사랑하던 당신은, 당신이 그토록 아낀 등장인물에 의해 잡아먹혔다. 우리는 아락스와 신규영 사이에 어떤 대화가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아락스는 가상현실 밖의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습득한 지식을 총동원하여 규영을 설득했을 것이다. 규영은 순수한 것인지, 무모한 것인지 절대 해서는 안 될 거래를 했다. 현실에서든 프로그램에서든 몸을 죽이면 영혼도 소멸하는, 굉장히 단순하지만 소름끼치는 설정이 압권이다. "아락스가 죽었다"는 문장은 이 소설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대목이다. 인공지능과 함께 떠나는 신나는 모험은 씁쓸한 여운을 남기며 마무리된다. 


 어쨌든 여기서 만족할 수는 없다. 만약 천선란의 작품에 매력을 느낀 독자라면, 다른 작품을 구매해서 읽고 싶은 욕망이 생길 것이다. 특히 이렇게 인상적인 한국형 SF소설은 존재만으로 반갑다. 하지만 잦은 모험을 떠난 이들이라면 느낄 것이다. 나를 완벽하게 기쁘게 하는 소설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소설가가 된 이들은 어쩌면 더 큰 목적을 찾아 끊임없이 방랑하는 '노랜드' 속 등장인물들과 같을지도 모른다. 설명할 수 없는 맹목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한다. 그들은 돌아갈 곳을 파괴하면서까지 기꺼이 먼 길을 떠난다. 누군가는 고작 글자들의 나열일 뿐이라고 말리지만, 그 안에서 엿보는 새로운 세계에 한 번 감동한 자는 이전과 같은 생활을 누릴 수 없다. 그 환희를 위해 아락스는 살아간다. 별다른 이유 없이도 말이다.

유라는 원래부터 책 관련 일을 하고 싶었다. 책을 많이 읽거나 글을 직접 쓰는 건 아니었지만, 그저 책이라는 물질 자체가 좋았다. 그래서 학생 시절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서점에 찾아가 아무 책이나 샀다. 구매한 책을 전부 다 읽지는 못하더라도 글자와 글자가, 단어와 문장이 서로 얽혀 독자적인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게 늘 신기했다. 유라에게 책은 소비재라기보다 소장품에 가까웠다. 그래서 되도록 어떤 형태든 책이 주가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했다. -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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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9-08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려요. 추석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thkang1001 2022-09-08 0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tarover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하고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starover 2022-09-10 0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
 
지성에서 영성으로 - 2017 신판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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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설거지는 재밌고 유익한 일이다. 그래서 "설거지는 가사노동 중 가장 불명예스러운 일로, 그것은 소비와 부패에 관련되는 일입니다. 설거지에는 아주 작은 비전이나 상상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라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명예 따위는 관심도 없다. 설거지를 하는 과정 속에는 널브러진 그릇과 식기를 씻는 자신만의 체계가 있고 미리 세운 계획대로 진행될 때, 더러운 것들이 씻겨나갈 때의 기쁨이 서려 있다. 나는 매사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집안일에 대한 생각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매번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는 설거지에 대해 고통의 상징 내지는 절망의 노동이라고 이름 붙일 필요는 없다. 일상은 문학의 소재가 될 뿐, 실현되는 공간이 아니다.


 2. 영어영문학과 전공 수업을 들으면, 반드시 접하게 되는 구절이 있다. "Carpe diem(Seize the day). Memento mori(Remember to die)." 호라티우스의 시구에서 가져온 이 라틴어 구절들은 르네상스 이후의 사조에 종종 등장하는 주제이다. 죽음은 언제나 인간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르기에 모든 인간은 지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동일한 상황에서 대처하는 방법은 또 천차만별이다. 저자는 신과 죽음에 대해 알지 못했던 여섯 살의 시절부터 이어진 '메멘토 모리'를 한민족의 차원으로 확장한다. 이때는 왜 한국인의 특성을 그토록 강조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3. 한참 뒤에야 한국인의 특성을 강조한 이유를 이해했다. 가족주의의 온정과 효를 지선의 가치로 삼아온 한국인들은 가족이 중심이라는 시각으로 성경을 해석하곤 한다. 그래서 자기 자식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하는 구약의 인물들이나 자신의 어머니께 "여자여"라고 하는 예수님의 언행에 반발한다. 하지만 그것은 중립적인 호칭이며, 마리아를 한 사람의 어머니가 아니라 모두의 어머니로 만드는 선언이었다. 혈육으로 맺어진 가족은 물론 소중하지만, 기독교인은 그 이상의 도전이 필요하다. 문득 자기 가족이 아니면 무섭도록 무관심하다는 <인터스텔라>의 한 대사가 떠오른다. 요지는 "너의 가족만 사랑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나의 원수나 약한 사람들까지 품을 수 있느냐는 그 물음에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4. 보들레르의 짧은 시구를 보며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고 생각했다. 용서는 가장 강력한 형태의 사랑이라고 했는데, 나는 스스로를 사랑하기 어려운 상태일까? 사실은 그렇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기도로 용서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수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존재로 기억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기에, 내가 그런 존재로 다른 이에게 인식되는 것이 여전히 두렵다. 그렇게 될 때 나 자신을 용서할 자신이 없으니까. 그러므로 나는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야 한다. 언제나 우리를 향해 다가오지만, 매번 우리는 돌이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돌아온다. 기적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기적으로, 가슴이 굳은 자들에게는 사랑으로, 마음만 앞서는 자들에게는 말씀으로. 


 5. 그래서 나는 though보다는 therefore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이어령 씨는 오랫동안 글을 써 왔지만, "작가가 글을 쓰는 심정도 대개는 다 그럴 것입니다"라는 말로 타인을 쉽게 오해했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절망을 기록하거나 저항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저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작업이 즐거워서, 그 안에 자유롭게 내 생각을 담아내고 싶어서였다. 나의 삶을 고백하기보다 더 큰 상상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다루는 내용이 꽤 달라졌지만, 글쓰는 과정 속에서 내 생각을 털어놓고 마음을 비우는 경험은 다른 어떤 활동보다 유익하고 소중하다. 현재의 목표는 나를 지금 이 자리에 이끌어주었던 소중한 사람들의 삶과 마음을 소설에 기록하는 것이다. 어렵지만, 차근차근 해보려고 한다.


 6. 신기하게도 나 역시 '문턱'이라는 소재에 오래 전부터 매료되었다. 이어령 씨는 문지방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왠지 모르게 반가웠다. 하지만 두 개념은 비슷한 듯 다르다. 저자의 표현은 전환점의 또 다른 말이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넘어가는 문지방에는 두 가지 선택지뿐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문턱은, 이분법의 갈래가 아닌 또 다른 방안에 대한 은유다. 문턱에 서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거나, 왔던 길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있다. 이때 문턱에 머무르는 것은 우유부단함이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논리가 아닌 새로운 관점에서 답안을 모색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도 문턱 위에 서 있다. 이를 테면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분명한 이원론에 대한 솔직한 생각이다. 나는 내가 천국에 가든 지옥에 가든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두려워하기보다는 지금 주어진 소명에 충실하고 싶다. 


 7. 지인의 선물로 받은 책이다. 『지성에서 영성으로』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고 언젠가 읽어 보아야지, 라는 마음을 품었다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선물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있지만, 똑같은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어령 씨의 시 쓰는 방식이 나에게 거부감을 준 탓일까? 그의 진솔한 고백이 설거지에 대한 편협한 생각으로 왜곡되었기 때문일까? 어쩔 수 없는 생각의 차이가 거리감을 줄이지 못한 이유일까? 뭐가 됐든 몇몇 생각이 맞닿은 것은 반갑다. 하지만 이 책을 다시 꺼내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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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0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arover 2022-05-11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 될 것이다
정영욱 지음 / 부크럼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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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틀그라운드를 같이 플레이하는 학교 후배가 생일이라고 이 책을 선물해줬다. 생일 이틀 전, 우리는 경쟁전에서 치킨을 먹었기 때문에 (1등을 했다는 뜻이다) "엊그제 치킨 먹은 우리에게 어울린다"는 말과 함께 받은 이 책의 의미는 더욱 선명해졌다. 우리는 배틀그라운드를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 될 것이다"라니, 이것보다 든든한 격려가 어디 있을까? 4인으로 경쟁전에 들어가면 순위 방어까지 하지만, 대부분 작은 실수 또는 결정적인 실수로 팀원이 죽거나 전멸하여 치킨을 놓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서로에게 철저하게 피드백을 해 가며 운영과 실력을 보완해 왔다. 그리하여 후배가 선물한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 될 것이다』는 배틀그라운드를 할 때마다 되뇌이는 주문이 되었다. 


 나에게 배틀그라운드란, 쉽게 말해서 '인생 게임'이다. 2017년에 출시되었을 때는 군 복무 중이라 즐길 기회가 없었다. 2018년에 휴가를 나와서 친구들과 함께 처음 배틀그라운드를 접했을 때의 신선함과 즐거움이란! 그때는 운영도, 조준 실력도 형편없었지만, 그래서 내가 왜 죽는지도 모르고 상황 판단이 매우 느렸지만, 가상의 세계 속에 동료들과 소통하고 교전에서 승리할 때의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얼마 후, 나는 실력을 쌓기 위해 솔로 모드를 돌렸고 수많은 실패 속에서 스스로를 보완했다. 특히, 사람이 얼마 남지 않는 후반전에서 느끼는 긴장감과 집중력에서 오는 감정은 다른 어떤 게임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솔로 모드에서도 치킨을 먹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치킨을 먹으면서 배틀그라운드에 대한 이해도는 계속 높아졌다. 


 시간이 흘러 2022년, 여전히 실력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게임을 보는 눈은 어느 정도 생겼다. 적어도 남의 도움에 의존하는 운영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플레이를 만드려고 한다. 물론 그것이 욕심이 되어 팀 전체를 전멸시킬 때도 있지만, 돌이켜보면 과감한 결단이 좋은 결과를 낳은 적이 더 많았다. 고작 30분 남짓의 시간 동안 실시간으로 전략을 수정한다는 점에서, 이 게임은 FPS보다는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RTS와 비슷하다는(배틀그라운드 이전의 인생 게임이 바로 스타크래프트였다) 생각을 종종 한다. 2018년에 느꼈던 소중한 기억들, 예컨대 길리 슈트를 입은 적을 찾지 못해 유리한 상황에서 치킨을 놓쳤다거나 구급상자 먹는 법을 몰라서 경밖사(자기장에 불타 죽는다)하는, 서투르지만 그것조차 즐거웠던 추억들은 이제 재현될 수 없음을 안다. 그리고 게임도 늙어서 고인물(오래된 유저)과 핵(불법 프로그램)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유저들의 수도 초창기 같지 않다. 무엇보다 주변에서 배틀그라운드를 즐기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 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치킨에 대한 갈망은 남아 있다. 이 게임은 생존이 목적이다. 적을 많이 죽인다고, 좋은 아이템을 보유한다고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점수를 많이 획득하거나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질 뿐이다. 때로는 적을 죽이지 않아도 승리를 획득하기도 한다. 스쿼드 모드에서는 전투 능력이 탁월한 팀원을 보조하기만 해도 1인분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전장에 투입되는 100명의 인원은 모두 한 가지의 목표로 참여한다. 바로 '치킨'이다. 한 명, 또는 한 팀이 우승하기 위해 다른 모든 이들은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치킨을 먹지 못하면 언제나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아예 초반에 교전을 하다가 죽으면 미련없이 다음 판으로 가겠지만, TOP10(생존자 10명) 이하에서는 작은 실수나 판단 오류가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 때문에 자책을 하기 쉽다. 그럴 때마다 다시 한 번, 이 책의 제목을 주문처럼 되새겨야 한다. 너는 배틀그라운드를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 될 것이다. 치킨을 먹지 못하더라도, 과거에 느꼈던 감정들을 기억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점검하며 팀원과 함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서평은 안 하고 왜 게임 이야기만 하냐고? 이 책은 말하자면, 랜덤 스쿼드와 같은 것이다. 우연히 만난 유익한 동료다. 하지만 매치가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았든, 아무렴 관심이 없다. 만나게 된 이상 치킨을 향해 정진하고 실패하든 성공하든 헤어질 인연이다. 그러니 나는 무미건조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랜덤 스쿼드의 본질이 그런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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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4
메리 셸리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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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리 셸리의 기념비적인 소설 『프랑켄슈타인』이 주는 의미는 참으로 다양하다. 역자가 해설에서 밝혔듯이, 소설에 등장하는 가공의 괴물은 과학기술과 문명에 대한 경고이자 메리 셸리의 파란만장한 삶을 비추는 역할을 수행한다. 처음에 내가 주목하고 싶었던 것은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존재가 인간으로 볼 수 있는가의 여부였다. 만약 인간으로 볼 수 있다면, 인간을 정의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인간이 아니라면, 감정과 사고를 지닌 기이한 존재를 만든 빅토르는 왜 칭송받지 못하고 비극을 맞이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괴물의 이름을 창조자의 이름으로 착각하는 것은 단순히 괴물의 이름을 작가가 설정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복수심에 불타 자신의 삶을 파멸로 몰아넣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누가 괴물인지 구별이 잘 가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라는 괴물"이라는 소재는 문학에서 자주 애용되는 소재이다. 오이디푸스 왕이 스핑크스라는 괴물을 물리칠 때, 괴물이 제시한 정답이 인간이라는 점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인간이야말로 쉽게 괴물이 될 수 있는 존재이며 종종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이 그렇게 된다. 괴물은 자신의 비극을 합리화하며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정당하다고 여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파괴로 몰아넣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그래서 빅토르가 만든 괴물이 인간인지 아닌지는 작품의 말미에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씩 죽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창조자는 생명체와 자신 중 반드시 한 쪽이 파멸해야 하는 시합을 열었기 때문이다. 괴물이 증언하듯이, 그의 광기는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했다. 괴물은 옆에서 발명가의 행보를 항상 지켜보았고 그(여자 괴물을 원했기에)의 눈에 프랑켄슈타인은 겉모습을 제외하면 자신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프랑켄슈타인』이 가진 명성에 비해 상당히 늦게 이 소설을 접했다. 내용이 고전문학에서 쉽게 다루지 않는 것임에도 19세기 영국 소설의 중요한 계보를 담당하고 있는 것은 당대의 풍조에 기꺼이 어긋나기를 택한 천재의 결단에서 비롯되었다.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일종의 새로운 신화를 만드는 작업이었지만, 메리 셸리는 그 안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과 생애를 담았다. 내가 포착하고 싶었던 것은 그러한 사소한 장면들이었다. 괴물이 드 라세의 오두막에서 읽은 고전에 대해 감상을 남기는 부분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시점을 계속 변화해가며 어느 한쪽이 편향된 시선으로 이야기를 해석하는 사태를 예방했다. 프랑켄슈타인의 비극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괴물 역시 사연이 있었으나 결코 옹호될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이 소설의 결론이다. 이 단순한 입장을 밝히기 위해 작가는 주변 인물을 설명하는 데에 많은 힘을 쏟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독자로서, 제3자로서 작가의 입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감정적으로 몰입되는 부분도 있었다. 엘리자베트와 결혼을 약속했으나 밝은 미래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던 빅토르의 심정도 이해가 된다. 그리고 그녀가 괴물에 의해 살해되었을 때 그가 느낀 충격을 상상하니 마음이 참으로 아팠다. 동시에 그를 옹호하는 대신 그녀의 죽음에 그가 일조했다는 냉정한 생각이 한편에 자리잡았다. 가상의 이야기, 또 하나의 세계에 몰입하여 그들의 삶과 생각을 따라가는 일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영역을 상상하고 준비하게 만든다. 문학이 일종의 교육이라면, 그리고 교육이 삶 전체에 걸쳐서 일어나야 하는 일이라면 나는 기꺼이 또 다른 세계를 찾아 헤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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