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빈치 코드 - Illustrated Edition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이창식 감수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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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댄 브라운의 소설을 처음 접한 것은 『인페르노』였다. 그 소설에 제시된 수수께끼와 치밀한 전개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다 빈치 코드- Illustrated Edition』을 읽고 작가의 재능이 예전부터 단련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파리와 런던의 명소를 오가며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는 퀴즈를 푸는 로버트 랭던의 여정은 매력적이었다. 이 소설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 빈치 코드』에서 나타난 기호학과 예술의 향연은 작가의 철저한 조사를 엿볼 수 있게 했다. 비판적 관점을 배제하고 그의 소설을 접한다면 허구적인 요소마저 충분히 납득이 될 정도였다.


 다만, 거대한 축 속에서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는 '스승'과 '제자'의 당위성이었다. 물론 모든 인물들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는 좋았지만, 그 관계가 지나치게 긴밀한 탓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스승과 제자 외에도 로버트 랭던의 보조적 역할을 하는 인물들의 정체도 예상이 가능했다. 그리고 브쥐 파슈에 대한 서사는 불필요할 정도였다. 초반부에는 지나치게 강압적으로 등장하고, 나중에 가서야 그의 행위를 옹호하는 것은 인물을 소모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내가 이 소설을 높이 사는 것은 등장인물이 저마다의 신념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 빈치 코드』에 언급된 성배의 정체와 시온 수도회의 역사에 관해 논쟁하지만, 나에게 그것의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진실을 알기 위한 욕망은 인물의 행동의 당위성을 제공한다. 그리고 개인의 신념과 그 결과는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자크 소니에르는 단순한 피해자인가, 아니면 진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포기한 사람인가? 로버트 랭던을 계속 옹호할 수 있을까? 그 역시 자신의 편리를 위해 불법적인 방법을 계속 택하지 않았는가? 실라는 분명 범죄자이지만, 한편으로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향해 나아갔을 뿐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새로운 모습이 보인다. 이는 티빙 경과 레미, 그리고 아링가로사 주교도 마찬가지다. 모든 인물이 신념과 진실 앞에 자신의 목숨도 불사한다. 그 정면충돌 속에서 끝에 도달한 사람만이 외경심에 북받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정을 함께 한 독자 역시 함께 감동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선을 그었다. 아무리 진실이 중요한다 한들, 사람의 목숨보다 중할 수는 없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타인의 믿음을 억누르면 안 된다. 존중이 없는 믿음은 고집과 독단으로 이어진다. 실라와 스승의 살인과 협박이 정당화될 수 없는 이유다. 누구에게나 사연이 있다. 아마 이 소설에서 가장 복합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인물은 은행장 베르네가 아닐까 싶다. 옳다고 믿는 것을 향해 나아가다가 주저하고, 실수하고, 실패하지만, 다시 나아가는 그의 모습은 다분히 희망적이다. 댄 브라운은 인류의 역사를 갈라버리는 사건을 묘사하면서도 그 사건이 한 평범한 인물에 의해 결정될 수 있음을 제시한다. 진실은 우리가 무심결에 지나가는 작은 잔에 담겨 있다고 암시한다. 그 여백, 그 투명함 속에 우리는 세월의 지혜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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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순 - 2014년 제3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편혜영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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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2014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돋보이는 '상상력'의 확장에 칭찬을 표하고 싶다.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몇 편 읽어왔는데, 전체적으로 '난해하다'는 인상이 강했다. 물론 이번 수상작들이 읽기 쉽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다만, 이전의 일부 수상작들에서 발견된 지나친 단조로움은 상당히 제거되었다. 나는 『몬순』을 통해 한국 단편문학의 지평을 조금 더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되었다. 앞으로 우리나라 현대 단편소설을 읽을 때 조금 더 많은 기대를 품고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작품이 가장 우수했느냐는 심사위원의 견해일 뿐이다. 대상 수상작은 물론이요 유력한 후보작이었던「빛의 호위」나 「쿤의 여행」도 뛰어난 상징과 창의력이 돋보였으나,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프레디의 사생아」와 「기억을 잃은 자들의 도시」도 뛰어났다. 전체적으로 소재에 대한 작가들의 이해도가 높음도 알 수 있었다. 기린불, 헬게 한센, 파충류의 유전자 등에 대한 내용은 독자의 흥미를 유발할 만큼 섬세했다. 작가들은 가상의 존재를 창조하는 일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현실처럼 잘 구현해 내었으며 소설의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시켰다.


 아홉 작품 속에서 나를 가장 매혹시킨 단편은 김숨의 「법 앞에서」였다. 이 작품은 위에서 설명한 수상작들의 장점이 한데 모여 있다. 아돌프 아이히만과 열 손가락,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기로에 선 '나'는 '357'의 홀수와 '10'의 짝수 사이에 놓인 처지였다. 거의 대부분이 '나'의 의식의 빗발치는 흐름으로 되어 있는 이 소설은 내가 한국의 현대문학에서 느꼈던 인상을 새롭게 보여준다. 문장을 끝맺지 않으려는 의지와 기묘한 반복, 그리고 언어의 사소한 유희가 선을 넘지 않게 조절되어 있었다.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내는 작가의 집요한 상상력 덕분에 작품을 읽는 내내 나도 주인공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수'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법'과 '사회'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법 앞에서 '나'의 부부에겐 '1'이었던 아이(유일한 자식)가 '5'의 아이(다섯 번째 가해자)로 변한다. 4701개의 레고는 16개가 결여되어 있다. 1인시위자가 대규모 군중으로 변한다. 홀수는 위치를 바꾸고, 시계의 숫자는 시시각각 변해간다. 소설이 진행될수록 숫자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드러난다. 


 세는 것과 헤아리는 것이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지 깊이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그에게는 없다. 아들이 법의 심판을 앞두고 있는 마당에 그러한 것까지. 그렇지만 어항 속 금붕어의 개수를 세는 것과 헤아리는 것은, 한 주먹 움켜쥔 동전의 개수를 세는 것과 헤아리는 것은, 죽어가는 나무에 매달린 잎사귀 개수를 세는 것과 헤아리는 것은, 같으면서 얼마나 다른가. (p.115)


 「몬순」과 「법 앞에서」는 주제에 있어서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한 좌절이다.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았으면, 자신의 주변 사람에게 닥치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이 구현된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의 삶을 변화시킨다. 인간이 만물을 설명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은 얼마나 헛된 것인지 새삼 깨닫는다. 특정한 숫자로 설명하려 하기보다, 말로 누군가를 이해시키려 하는 일보다 침묵을 지키는 일도 필요하다. 법 앞에서 가해자는 몇 년이라는 숫자를 구형받게 될까? 아니, 그보다 그 자는 제자리에서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해, 제자리를 통과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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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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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간 여행은 언제나 관찰된다. 시간 여행은 언제나 특정한 방향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떤 지점, 즉 현재에서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과거로 향하거나 미래로 나아갈 뿐이다. 그렇기에 현재에 얽매인 인간은 시간이 주는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는 시간 여행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 이율배반을 허용한다. 과거의 변화가 곧 미래의 변화로 직결되며, 그때마다 등장인물의 운명이 뒤바뀌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홉 번이나 시간 여행을 한 엘리엇은 독백한다. 그 시절이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고.


 나에게 가장 아이러니하게 다가온 순간은 일리나가 골든 게이트에서 몸을 던졌을 때였다. 엘리엇은 운명이 어떻게든 그들을 파멸로 이끈다고 좌절하지만, 모든 것을 관조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시간 여행자가 조금만 더 솔직했더라면, 그리고 젊은 의사가 연인에게 진실한 태도를 보였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처럼 보인다. 어찌 됐든 두 주인공은 생사를 뛰어넘어 재회한다. 원래 2007년 1월 이후로 그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어야 했지만, 열 차례의 시간 여행 끝에 그들은 다른 미래를 겪게 된다. 작가는 이미 엘리엇의 독백을 통해 '다중 세계'를 암시했다. 어떤 세계에서 일리나는 1976년에 죽지 않았고, 어떤 세계에서 엘리엇은 1976년에 죽었으리라. 그 모든 세계를 다 보여줄 필요는 없다. 선택된 세계의 장면들만 적절히 배치하면 된다.


 한 명의 관찰자로서 평하자면, 시간 여행은 이른바 운명이라 불리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경험이다. 죽음이라는 절대적 선고를 뛰어넘어 생명이 만나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그리하여 모든 시간 여행자는 특별하다. 미래의 자신과 만났으며, 이것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제공한다. 시간 여행자가 여행 이전에 죽는 일은 시간의 모순에 의해 불가능하니까. 어쩌면 그것은 참으로 즐거운 상상이거나 끔찍한 저주이리라. 


 나는 글을 쓸 때, 시간 여행을 차용하지 않는 편이다. 공간의 이동은 종종 일어나지만, 과거로 어떤 물질이 역행하는 것은 세계의 질서를 통째로 뒤바꾸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공에게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을 주는 일은 익숙하다. 그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든 커다란 힘은 그에게 고통을 선사한다. 결국 주인공은 그 능력을 기꺼이 포기하거나 자신이 선택한 길을 기어코 걷는다. 그러니 '운명'이라는 세계의 규칙이 잘 통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운명이 인격체였다면, 캄보디아 노인이 준 알약을 이용해 자신을 열 차례나 농락하는 시간 여행자들에게 격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엄청난 비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았으리라. 


 마침내 일리나와 엘리엇, 엘리엇과 매트는 엇갈린 절반의 생애를 지나 다시 만난다. 세 사람 모두 똑같은 공간, 똑같은 시간에 만나 평행선을 걸어 왔지만 마침내 종착점에서 만난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는 알 도리가 없다. 관찰자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나는 그저 이런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을 불사하고 만나려고 했던 여인보다, 하룻밤 보낸 여인 사이에서 난 딸이 더 소중하다는 진실. 인간이 의도한 것은 언제나 간단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각 장 앞머리에 달린 인용문이 정신을 맑게 해 준다. 작가의 역량에 감사드린다.

 

당신 앞에 여러 갈래 길이 펼쳐지는데, 어떤 길을 선택할지 모를 때, 무턱대고 아무 길이나 택하지 마라. 차분히 앉아라. 그리고 기다려라. 기다리고 또 기다려라. 꼼짝하지 마라. 입을 다물고 가슴의 소리를 들어라. 그러다가 가슴이 당신에게 말할 때, 그때 일어나 가슴이 이끄는 길로 가라. -수잔나 타마로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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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크래프트 전집 1 러브크래프트 전집 1
H. P. 러브크래프트 지음, 정진영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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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브크래프트의 책을 구매한 계기는 순전한 호기심이었다. 다양한 매체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을 들었고, 크툴루 신화에 관련된 보드게임도 하고 나니, 도대체 이 작가가 어떤 작품을 썼길래 사망한 지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영향력이 지대한지 궁금했다. 그가 소설에서 정면으로 내세운 '미지'의 공포는 설명이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현실과의 연결성이 끊어지고 말기에 전집을 읽기 전까지는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6권에 달하는 그의 전집 중 단 한 권만 읽었지만, 러브크래프트가 구축한 세계가 얼마나 방대하고 깊은지 이해하게 되었다.


 여기서 나는 그의 세계에 심취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쓴 것들은 대부분('모조리'가 아니다) 허구지만, 단편들이 공유하는 세계관은 한결같다. 단편들에서 얻어낸 조각들로만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은 분명 대단한 능력이다. 우리의 세계와 비슷해 보이면서도 어쩐지 다른, 뉴잉글랜드의 어딘가에 위치할 것 같지만 절대 존재하지 않는 '사일런트 힐(Silent Hill)' 같은 아컴과 인스머스는 이미 독자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 그가 묘사한 마을의 상세한 모습과 분위기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러브크래프트는 어떤 설명이 읽는이의 상상력을 극도로 자극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최근에 본 공포영화에서 깨달은 사실이 그의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하나는, 호기심이 위험하다는 것. 미지의 세계를 향한 호기심은 여행자 혹은 주변인의 운명을 파멸로 이끈다. 두 번째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공포를 만나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러브크래프트의 개인적인 삶으로부터 광기의 묘사를 이끌어내는 평론가들도 있지만, 공포라는 것은 겪어본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전달될 수 없는 감정이다. 공포는 때로는 감정의 경계를 넘어서 인간의 정신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크툴루, 아자토스, 요그소토스와 같은 존재들은 지성의 영역 저편에 있기에, 그것의 개념을 만들어낸 사람조차 묘사할 수 없다. 마치 그것이 인간의 한계라는 듯이.


 작가가 단편들 속에 숨겨놓은 단서들은 이제 찾을 수 없다. 작가는 진실을 알고 있는 인물들을 모두 미치게 하거나 잔혹하게 살해했다. 심지어 자신조차 죽어버렸으니, 그가 만든 미지로 가득한 공포의 세상은 후대의 인물들에게 탐구의 대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허버트 웨스트가 살린 리빙 데드(living dead)의 행방, 네크로노미콘의 내용, 인스머스의 해변 등은 영원한 호기심으로 남으리라. 설령 확인한다 해도, 진실을 알게 된 이는 살해당하거나 미칠 것이다. 그러니 모르는 게 약일지도 모른다. 

 

 나를 가장 무섭게 한 단편은 단연 현관 앞에 있는 것」이었다. 작품을 내내 관통하는 음산한 기운은 모든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극대화된다. 두 인간의 영혼을 바꾸려는 상상을 넘어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영혼을 잡아먹는 상상은 보는 이들에게 공포를 준다. '명석한 두뇌에 의지는 허약한' 인간을 노리는 악마의 이야기와 절친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서술자의 이야기가 공존하며 묘한 씁쓸함을 남긴다. 러브크래프트의 대부분의 작품이 그렇듯이, 완벽한 평화란 없다. 현상 유지이거나 도피일 뿐이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 악몽이 반복될 것이라는 불안은 페이지를 뚫고 미래로 흘러간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들이 아직까지 재생산되고, 해석되는 이유이리라. 


 나는 미지의 세계로의 초대를 기꺼이 환영한다. 내가 만들고자 하는 세계는 그와는 조금 다르지만, 충분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나는 범위가 닿는 곳까지만 갈 것이며, 그 이상은 시도하지 않겠다. 호기심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깨달았기에, 공포가 어떻게 인간을 무너뜨리는지 목격했기에. 나는 다시 한 번 책의 말미에 수록된 크툴루의 눈을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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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연습 - 세상에 생명을 주는 영적 훈련
카일 데이비드 베넷 지음, 정옥배 옮김 / IVP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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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책모임을 가져서 유익한 시간이었다. 다른 일정으로 인해 정해진 날짜에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공동체의 행사로 인해 모임이 취소되는 경우도 있었다. 여러 가지 사정이 겹치다 보니 10장도 안 되는 책 한 권을 다 읽는 데에 거의 5개월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한 장 한 장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었다고 할까? 귀찮음에 대한 변명처럼 들릴지 몰라도, 함께 소리내어 책을 읽으며 탐사하는 느낌을 주기 위해 책을 미리 읽어오지 않았다. 덕분에 책모임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나눔 위주로 진행하던 기존의 모임과는 달리, 정말로 낭독하고 글자의 소리를 들으며 그 자체로 나눔을 하는 방식이어서 새롭기도 했다. 


 『사랑 연습』이라는 책 역시 메세지는 간단했지만, 울림이 깊었다. 먼저 나를 자극시킨 것은 서론, '영적 헤로인'이었다. 저자는 수련회나 금식이라는 특별한 훈련으로 신앙을 단련하고, 거기에 그치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자신만을 위한 훈련을 멈추고, 이웃을 위해 삶에서 신앙을 보여주기를 촉구한다. 카일 데이비드 베넷의 진심은 한 문단 속에 정확히 담겨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개인적 만족이 넘쳐흐르거나 '긍정적인' 느낌을 듬뿍 누리는 삶이 아니다. 그것은 자극이나 흥분의 세례를 받는 삶이 아니다. 그것은 '황홀감'과 '한 방'이 연속되는 삶은 확실히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성부의 계획, 성자의 모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개혁되고 변혁된 생활 방식이다. 그것은 화해와 회복과 갱신의 삶이다. 그것은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삶이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소유하고, 생각하고, 먹고, 교제하고, 말하고, 일하고, 쉬는 것 같은 활동들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보이고 세상에 생명을 가져오는 방식으로 행하는 삶이다. (p.42)

 

 또한, 저자가 '악'이라는 말을 최대한 피하고 '기형적'이라는 표현을 쓰려는 것 역시 배려심이 돋보였다. 잘못된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악한 사람'으로 일반화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들 역시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의 일부이며, 그 방식은 언제든지 고쳐질 수 있음을 암시하기 위해 이러한 표현을 쓴 것처럼 보인다. 확실히 그렇다. 기독교인들이 저지르는 흔한 실수 중 하나가 선악, 또는 이타심과 이기심이라는 이분법의 논리 아래 세상을 구별하려는 경향이니까. 그것을 판단하는 존재는 자신이 될 수 없음에도, 기독교인은 쉽게 결론을 내린다. 나 역시 이기적으로 행동할 뿐만 아니라, 이기적으로 생각하기에 그 덫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음을 인정한다.

 

 사랑 연습은 그러니까, 이타적으로 살아가라는 것 이상이다. 내가 모르는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연습이다. 정말 말도 안 되고 무모해 보이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처럼(Just Like Jesus) 살아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 불가능한 길을 기쁘게 나아가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연습은 지극히 사소한 것에서 출발한다. 나머지 장들은 그것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2장은 소유에 대한 내용이다.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연인처럼 살라는 것은 현실성 없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예수님도 그것을 원하시지 않으신다. 단지 기형적 소유 방식인 낭비벽과 탕진하기를 멈추고, 절약(여기서 말하는 절약은 당연히 일반적인 절약의 개념과 다르다. 단순히 돈을 아끼는 것을 넘어서, 이웃이 그것을 필요로 할 때 베푸는 것까지 포함한다)해야 한다는 것이 이 장의 요지이다. 다른 장들도 이런 식으로 나아간다. 기형적 방식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 말이다. 그 과정에서 흔한 개념의 재정의가 등장하고, 일상에서 실현할 수 있는 단계가 등장한다.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웃을 위해서라도 행동의 변화가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나는 아직 생각의 단계에 머물고 있다. 나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보다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 그리고 하루 중 시간을 내어서 이웃을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가치 있는 시도이지만, 여기서 멈춘다면 곤란하다. 다만, 매사에 최선을 다하려 하고 있다. 내가 속해 있는 다양한 그룹에서 일관되게 말이다. 때로는 버거워도, '섬긴다'는 말의 무게를 알고 있기에, 마음을 다잡는다.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 섬김은 일의 한 형태다. 그것은 수고하는 것과 실행하는 것을 포함한다. (…) 누군가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 혹은 그 사람을 위해 그 일을 해 주는 것이다. 우리가 종종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베푼 친절한 행동에 대해 어떤 보답이나 보상이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p.219)


 이타심을 넘어선 희생, 참 멋진 목표다. 그러나 자신이 없다. 당장은 그렇다. 그러니 연습해야 한다. 상처받더라도 먼저 다가가기, 손해를 보더라도 진심을 전하기. 그 아이가 이루었듯이, 나도 그래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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