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나의 집 - 개정판
공지영 지음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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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상대로, '즐거운 나의 집'은 반어법이었다. 그러면서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화자인 '위녕'의 성장소설이자 엄마의 진솔한 고백록인 『즐거운 나의 집』은 자연스럽게 독자의 가정을 돌아보게 한다. 가장 놀랐던 점은 소설이 상당히 자전적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성 다른 세 아이의 엄마, 잘 나가는 소설가지만 집안에서는 상처 많은 여자, 실제와 상상을 오가는 과거가 공지영 자신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뒤늦게 안 뒤 왠지 모를 깨달음이 왔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도 한없이 나약한 인간이구나. 그리고 동시에 위대한 엄마구나.


 132개의 조각들로 나뉘어진 이 장편소설에서 전환점을 꼽으라면, 어찌보면 사소하고 어찌보면 큰 사건인 '코코의 죽음'을 뽑을 것이다. 이혼한 엄마의 행보를 지켜보며 사랑의 영속성에 의문을 가졌던 위녕이 거의 처음으로 온전한 사랑을 줄 수 있었던 존재가 고양이 코코였다. 또한 지극히 보살폈지만 결국 세상을 떠난 코코를 보내주는 과정에서 '사랑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 '좋은 의도가 항상 만족스러운 결과를 불러오지 않는다'는 인생의 진리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왜 '즐거운 나의 집'이 반어적이면서 동시에 맞을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이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말드라마에 나올 법한 화목한 대가족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돈 때문에 다투고, 교육열로 인해 갈등하고, 때로는 단순한 성격 차이로 싸운다. 집 안이 조용할 날이 없다. 그렇지만 나에게 돌아갈 곳은 집뿐이다. 바깥에서 긴 방황을 하고, 낯선 여인숙에서 여러 밤을 보내고 난 뒤, 집에서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으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다. 비록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결국 늘 즐겁다.


 소설가란 작품을 쓰기 위해 천 번을 넘게 고친다. 작중에서 위녕의 엄마가 한 말이다. 나로서는 비슷한 나이대인 위녕보다 그녀의 고백이 더 와 닿았다.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직업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위해 죽도록 노력한 적이 있었던가? 좋아하기에 잘해지는 것이다, 라는 누구나 아는 그 말 속에는 나날의 연구와 수많은 실패가 있었다. 글을 쓰는 것은 단순히 나의 생각을 옮기는 일이 아니다. 그 안에 불멸의 정신이 녹아 있고 치밀한 세계가 형성되어 있다. 에밀 졸라가 만들어 놓은 세상을 누가 감히 무너뜨릴 수 있을까? 공지영의 울림 있는 용기를 누가 무시할 수 있을까?

 

 『즐거운 나의 집』의 중요한 주제는 "나는 누구이기 이전에 나다"라는 선언이다. 가족은 '엄마이기 이전의 그녀', '동생이기 이전의 그'를 인정할 때 비로소 소중해진다. '가족이니까' 넘어가지 말고,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자, 남들에게 그러하듯. 원래 나는 언제나 '나 중심'을 외치는 사람인데, 여기서는 조금 겸손해져야겠다. 이곳은 집이니까. 즐겁지는 않지만 썩 만족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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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의 네트워크
운노 히로시 지음, 이동철 옮김 / 해나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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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세계의 음모론과 미스터리>에 대해 다루는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 영상을 보고, 음모론이 소설이나 인터넷 상에 떠도는 루머에서 대중문화의 일종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 한때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세계의 미스터리를 좀 더 알아보고 싶었다. 『음모의 네트워크』는 20세기 역사의 보이지 않는 실마리를 연결해주고 있어서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현대사, 특히 20세기 미국의 이면을 엿보고 싶은 사람은 이 책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프리메이슨'이라는 비밀결사를 알게 된 계기는 김진명의 『천년의 금서』와 댄 브라운의 『로스트 심벌』이었다. 두 소설 모두 프리메이슨의 음모를 파헤치는 것이 주된 플롯이자 결말이라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러 소설에서 꽤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 터라 나는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가 실존하고 있다는 어렴풋한 확신을 가졌다. 여기서 음모론의 장점이 드러나는데,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이다. 우리의 삶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인간은 호기심을 품고 사는 동물이다. 그래서 음모, 비밀, 거짓 속의 진실이 밝혀지길 원한다. 뒤의 개념들이 다소 추상적이고 개인적이라면 음모는 필연적으로 두 사람 이상이 만들어내는 비밀이다. '음모'를 뜻하는 'Conspiracy'도 '함께 모여 이야기하다'라는 의미라고, 저자는 계속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비밀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수록 그 가치가 떨어지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전파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오늘도 음모론은 진화한다. 음모는 과거형이 되는 순간, 타인의 이야기가 되는 순간 의미를 상실한다. 여전히 우리는 마틴 루터 킹과 케네디 대통령 암살의 배후, 달의 뒷면, 9·11 테러의 진실, 렙틸리언에 대해 무지해야 한다. 때로 진실은 너무나 따분하니까. 온 우주의 유일한 지성이 인간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삶의 목적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니까.


 우리는 의혹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전문가들에 의한 설명도 신용할 수 없다. 그 결과 '진실은 어딘가 저쪽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저쪽이란 우주이고 초고대이며 외계인이다. 이 세계의 종말이 온다고 한 밀레니엄 환상 컬트주의도 그중 하나이다. 인간의 저쪽에서 진실이나 구원을 찾는 것이다. (p594)


 우리가 음모론을 믿는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분명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종교조차 수많은 분파로 나뉘어져 있고, 이단과 사이비가 순진한 젊은이들을 유혹한다. 경제와 정치는 시시각각 변화하고, 개인의 생활에도 수많은 변수가 작용한다. 그날의 날씨와 교통 상황, 다른 사람의 일정, 나의 건강 상태 등 현대인의 생활은 분명한 사실을 보장받을 수 없는 살얼음판이다. 그러니 오히려 "완전한 진실 혹은 완전한 거짓"인 음모론을 믿는 것이 나아 보일 정도인 것이다. 물론 어느 쪽을 선택해도 나의 불확실성은 변함이 없다. 다만 그 속에서 갖는 작은 신념은 변하지 않는다.


 교훈은 언제나 따분하고 획일적이다. 작가들은 언제나 독자들에게 '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이 패턴이 지겨워진 사람들에게 음모론은 말한다. "믿고 싶은 대로 믿어라. 누구도 당신의 선택을 비난하지 않는다." 세상이 음모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음모의 네트워크』를 읽은 나도 따라 외친다. 믿고 싶은 것을 믿어라. 다만 타인에게 말하지는 말라. 그 순간, 당신은 책임져야 하니까. 이런 작은 믿음은 우리 삶에 이정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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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살상수학무기 - 어떻게 빅데이터는 불평등을 확산하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가
캐시 오닐 지음, 김정혜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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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수학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너무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몇 자리의 숫자로 규정된다. 효율성과 편의의 이름 아래 주민등록번호, 신용카드 번호, 전화번호 등으로 '나'라는 인간이 정의되는 것이 당연한 일인 듯인양 여겨진다. 그렇게 사람들은 시스템과 데이터 안에 녹아들어 그것을 지배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희생되기를 기다린다.


 『대량살상 수학무기(WMD)』가 제시하는 현대의 비극은 실로 현실적이다. 인간은 수학을 발명하고 기계를 만들었지만 모두가 그 혜택을 누릴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로 인해 교묘하게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조장되고, 민주주의가 왜곡돼며, 교육이 무너진다. 인간은 각자 다른 사고를 지녔기에, 나는 이 책이 지적하는 WMD의 문제점들 중 하나가 특히 기억에 남았다. 아무래도 학생이다 보니 '데이터의 포로가 된 교육'에 대한 묘사가 꽤 와 닿았다. 교육의 문제가 미국의 국경을 뛰어넘어 우리나라에도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방에 있는 사립고등학교에 다녔다. 입시 결과에 따라 학교의 평판이 달라지는 시스템에 따라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입시 공부를 강요했다. 학생들은 높은 등급에 위치한 대학교에 가기 위해 경쟁했다. 높은 등급의 대학교에 갈 가능성이 높았던 학생들은 선생님들과 아이들한테 주목을 받았고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외면 당했다. 나는 <유에스 뉴스>가 매긴 미국 대학순위나 다른 매체에서 언급되는 대학순위가 이런 차별의 시작이라는 저자의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완전히 신빙성이 없지는 않다. 문제는 그 기준의 정확성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한 자발적 통제다. 


 <유에스 뉴스>와 같은 WMD는 모든 사람이 정확히 똑같은 목표를 따르도록 강제한다. 이는 사람들을 무한경쟁으로 내몰고 이전에는 겪지 않았을 부작용에 시달리게 한다(p.107).


 이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대학 순위와 입시 경쟁의 굴레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데이터와 알고리즘은 대학교 내에서도 만연하고 있었다. 천편일률적인 수능 공부를 마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해야 하지만 대학생들이 주로 수강하는 강의는 거의 정해져 있다. 취업이나 스펙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학과는 인기가 없고, 그와 관련된 교양 수업도 모두 기피한다. 이는 대부분의 대학에서 비슷한 양상을 보일 것이다. 시스템이 학생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막기 때문이다. 결국 치열하게 경쟁에서 살아남아 대학에 간 이들은 또 다시 같은 경쟁에 내몰리고, 그 끝은 모두 똑같은 도착점이다. 그야말로 대중의 정신을' 대량살상' 해버리는 알고리즘이다.


 많은 사람들이 빅데이터의 체계 아래서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간다. 그리고 시스템이 정해놓은 길을 걷고 그 위에서 그들의 명령을 따른다. 대학 순위 상위권에 있는 대학에 가기 위해 경쟁하고, 좋은 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하다 자신의 꿈을 잃는다. 자신의 인생이 숫자 몇 개로 정의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길에 선 누군가가 말한다. "당신이 할 말은 이제 정해져 있다. 당신은 그 길에서 저항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안전과 복지를 보장해 주는 시스템을 누가 벗어나려고 하겠는가?"


 벗어나는 것이 언제나 해답은 아니다. 현대 사회는 유례 없이 발전한 시대고 그 혜택을 굳이 거부할 필요는 없다. 저자인 캐시 오닐도 최선의 해결책은 저항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알고리즘과 수학은 주인이 없다. 즉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이 되는 과정은 경쟁이 아니다. 모두가 참여할 수 있고,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떻게 하면 데이터를 삶의 발전에 쓸 수 있는가를 함께 고민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21세기는 지금도 충분히 빠르다. 남아 있는 불평등을 해소하는 일이 중요하다. 거대한 과제처럼 느껴지겠지만 개인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자신의 '다름'을 보여주는 일이다. 같은 것은 참여할 수도, 나눌 수도 없다. 새로운 세계는 두 다른 세계의 틈에서 만들어지는 법이다. 이제 당신을 보여줘라. 몇 자리의 숫자가 아닌, 알고리즘화할 수 없는 정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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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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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짙푸른 봄이 돌아오면

 따가운 그 햇살 아래서

 만나리라 우리들은

 손꼽아 기다린 날처럼

 만나리라 우리들은

 모두 어제였던 것처럼

 -페퍼톤스, <청춘> 중


 

 나는 제목을 보자마자 이 책이 라틴어를 가르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실제로 『라틴어 수업』은 라틴어 경구를 내세우는 인문학 강의에 가깝다. 한동일 교수는 끊임없이 겸손해 하며, 그 특유의 재치와 지식으로 청중들을 매료시킨다. 그런 그의 모습이 책장 너머 나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그의 대담함과 노력이 다른 교수들한테 영감을 주었다.


 몇 년 전, 나는 '문학의 이해'라는 교양 수업을 수강했다. 아마 그 강의가 내 인생의 첫 번째 대학교 수업이었던 걸로 기억난다. 강의실은 고등학교 시절 상상했던 계단식 대강의실이었고, 나는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았다. 교수님은 강의 시간보다 약간 늦게 들어오셔서 한 학기 동안 어떻게 수업을 진행할 계획인지 설명하신 뒤 "수업 끝!"을 외쳤다. 시작한지 10분만이었다. 나를 비롯한 새내기들이 "이게 대학교구나"라고 떠들고, 재학생들도 기쁨의 미소를 짓는 와중에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이 시간은 여러분에게 그냥 주는 시간이 아닙니다. 대신 밖에 나가서 봄 하늘을 관찰하시기 바랍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사실 원조는 "Prima schola alba est(첫 수업은 휴강입니다)"를 외치던 한동일 교수였다.


 저자는 매 강의마다 우리가 알고 지냈던 가르침을 전해준다. 나의 장점에 얽매이지 않고 단점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공부를 삶의 일부로 여기고 끊임없이 해야 한다.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에 집중하라. 나이에 스스로를 제한하거나 나이로 타인을 평가하지 마라. 이것은 수많은 교훈들 중 내 기억에 남은 그의 메세지이다. 나는 페이지 너머로 그의 열정과 진심을 느꼈고,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조금 냉정하게 생각하면, 내가 기억하는 강사의 문장은 곧 잊힌다. 머릿속에 각인되겠지만 실천하는 법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기억의 저편으로 넘길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현재에 붙잡히는 인간의 한계다. 상처주는 말, 소문은 쉽게 기억되지만 나에게 필요한 말이나 감사 인사는 금방 잊힌다. 그래서 나는 지혜를 말하기보다는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문장을 말함으로써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매체를 보여주고 스스로 깨닫게 만들자는 것이다.


 최근에 『시를 잊은 그대에게』라는 책을 읽었다. 저자의 취지는 그동안 시를 잊고 지냈던 현대인들, 학창 시절 시를 문제로만 접했던 청년들에게 시의 아름다움과 인생에 대한 조언을 전해주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이 책을 통해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나에겐 조금 아쉬웠다. 기억에 남은 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최근 방영된 <시를 잊은 그대에게>라는 드라마에 인용되는 시들이 청자의 마음에 와닿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말에 감정을 이입하는 것보다는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을 이해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고, 그들의 입장에서 시의 내용이 더 절묘하게 연결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시 내가 들었던 '문학의 이해' 수업 얘기로 돌아가자면, 나는 그 수업을 열심히 들었고 좋은 학점도 받았지만 기억에 남는 장면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아까 말했던 "봄 하늘을 보라"는 교수의 메세지였고, 다른 하나는 교수가 보여준 <족구왕>이라는 영화였다. "모두가 가는 길이 정답이 아니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자, 그것이 청춘이다"라는 영화의 주제는 내가 들었던 수업이 지향하는 바였다. 그리고 영화의 끝부분에 흘러나오는 페퍼톤스의 <청춘>, 이것이 전부였다. 다른 말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결국 우리는 망각하는 존재이므로 『라틴어 수업』에서 봤던 라틴어 문구, 이 독후감의 내용, 그리고 저자가 준 감동마저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보여주기를 통해 나의 메세지가 조금이라도 오래 남아 그 사람의 인생에 좋은 영향을 준다면 그것만큼 기쁜 일이 있을까? 내가 보여주려는 방식은 문학이다. 문학은 보여주는 글이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잊지 않고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한다. 봄 하늘을 즐기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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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하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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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그들은 언어 뒤에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고, 기호라는 문자 속에 있는 뜻을 찾아내며, 시간을 뛰어넘는 은유를 만들어 낸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전부를 판단하려는 우리는 이런 천재의 생각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나 역시 천재적인 소설인 『장미의 이름』을 읽으면서 다소 난해하다고 느꼈다. 그래도 이런 도전 앞에서 물러서기도 싫었다. 죽은 천재의 마음을 전부 알 수는 없겠지만, 우선 눈에 보이는 곳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장미의 이름』은 14세기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추리해나가는 미스테리 소설의 형식을 갖고 있다. 윌리엄 수도사와 화자인 젊은 아드소는 우아하지만 의심스러운 수도원에서 일주일을 보내며 미궁 속을 헤치고, 암호를 푸는 등 사건의 실마리를 밝히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지식과 생각과 환상이 충돌한다. 사실 이러한 요소들은 추리소설의 집중력을 흐리는 요소들이다. 그리고 밝혀진 진실은 그다지 매혹적이지도, 충격적이지도 않다. 즉 단순히 장르적 만족감을 주는 일에 이 소설은 집중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움베르토 에코는 왜 우리 시대와 동떨어진 시대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추리소설을 꾸며냈을까?

 

 이 작품이 하나의 은유라면 어떨까? 은유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나는 작가의 창작노트에 적힌 대로 "수많은 해석"들 중 하나를 택하고, 내가 선택한 거울을 통해 진실을 보겠다.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해 보자. 왜 중세의 수도원인가? 『장미의 이름』은 중세 시대의 특징을 모두 담아내고 있다. 교권과 왕권간의 갈등, 교파의 분열, 이교도 탄압과 마녀사냥 등 이른바 '암흑 시대'라 불렸던 중세의 참혹하고 비상식적인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서구권 최대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 작품 속 가상의 수도원은 그러한 만행들이 일어나는 중심지이다. 겉은 화려하고 경건해 보이지만 속은 추악하기 그지없다.

 

 인물들은 어떤가? 화자인 아드소는 견습생답게 전형적인 중세인의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회고하며 최대한 이성과 양심을 지키려 하지만 위선일 뿐이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윌리엄 수도사 역시 처음에는 지적이고 냉철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자신의 지식 속에 갇혀 있는 인물이다. 수도원장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에 급급했고 살해당한 수도사들도 욕망을 채우려다 실패한 자들이다. 수도원, 아니 그 시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신의 이름을 내세우며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자신의 생각을 지키려고만 한다. 이런 모습을 보고 나의 머릿속을 스치고 간 단어가 있었다. 바로 편협함이었다.


 에코는 자신의 신념밖에 보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묵시록을 펼친다. 비극의 시작이 된 호르헤 노인의 맹목을 보자. 그는 웃음이 세상을 파멸에 이르게 한다는 자신만의 상상에 빠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을 숨기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 수도사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물론 이 노인이 살인한 것이 아니다. 등장인물들을 죽인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편협함이었다. 윌리엄도 자칫 그 불길에 휘말릴 뻔했다. 어쩌면 그것은 독자에게 향하는 경고다. "혹시 당신은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지는 않은가? 다른 사람에게 나의 생각을 강요하려고 하지 않는가?"라고 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일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는 일은 훨씬 더 어렵다. 천재들조차 이것에 실패한다. 모든 것을 볼 수는 없다. 다만 잠시 멈춰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돌아볼 수는 있다. 나는 어디에 서 있을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나의 생각이 완전히 옳다고 생각한다면 문턱으로 돌아가야 한다. 편견과 이분법이 없는, 새로운 곳으로 발걸음을 내딛어야 하는 문턱으로 말이다. 그 위에서 새로운 만남을 위해 사랑하는 장미가 있는 별을 떠난 어린 왕자의 용기를 되새겨야 한다. 누구도 당신이 가는 길이 정답이라고 말해줄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어딘가에 있는 외로운 조종사를 만나기 위해 사막을 걸어가야 한다. 그제야 우리는 장미의 이름을 마음껏 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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