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텍 SF 어워드 수상작품집 No.1 - 2021_2022
김한라 외 지음 / 아작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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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이 압도적으로 발전한 이 시대에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나요?"

 한 학생이 물었다. 평소에 과학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학생이어서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의외였다. 나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묻고 싶구나. 문학은 무엇을 해 왔을까? 그것이 어떤 대단한 업적을 이룬 적이 있을까?"

 "결정적으로 기여한 적은 없죠. 언제나 보조하는 역할이었어요." 

 역사에 관심이 많은 다른 학생이 끼어들었다. 

 "딱히 반박하지는 못하겠구나. 그동안 문학은 과학이랑은 전혀 상관없는 분야로 여겨졌거든. 문학은 증명하려고 하는 순간, 그 의미를 잃는 학문이야. 반대로 과학은 증명하고 인정을 받아야만 가치를 얻어. 그렇기 때문에 과학에 비해 문학이 쓸모없어 보일 수도 있어.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내가 대답했다. 어느새 모든 학생들이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시중에 과학소설들이 참 많이 출판되었어. 내가 최근에 읽은 책은 포스텍 SF어워드에서 수상한 단편소설집인데, 너희에게 소재를 소개할게. 머리 이식, 차원실험연구소, 자동 노동, 우주 청소기, 가상 세계, 언어고고학자, 외딴 섬 뉴런, 이세계로 통하는 구멍, AI 면접, 축소 기계, 광합성을 하는 인간. 어때? 재미있어 보이지 않아?"

 "몇 개는 처음 듣고, 몇 개는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아요." 

 처음에 질문했던 학생이 대답했다. 

 "바로 그거야. 우리는 어느새 과학소설의 소재에 익숙해져 있어. 세상이 그만큼 인간의 상상대로 움직였기 때문이야. 조만간 차원실험, 자동 노동, 우주청소기, 그리고 온라인 면접에 대해 논의하는 시기가 오겠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참 작가들이 유쾌하다는 거였어. 기술의 발전이 언제나 바람직한 현상만 가져오지는 않잖아. 소설들은 그 양면성에 대해 무겁게 다가가기보다 때로는 아름답게,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접근해. 그래서 오히려 더 생각할 거리를 주지." 

 "선생님은 아름다운 게 좋아요, 웃긴 게 좋아요?"

 "나는 전달에 너무 힘을 주면 부담스럽더라고. 심사평에도 나왔지만, 이야기는 설득하려거나 논평하려 하는 게 아니라 그대로 보여질 때 가장 효과적인 법이야. 그래서 「잇츠마인」이랑 「리버스」가 기억에 남아. 두 작품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기숭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야. 처음에는 그 효용성과 부작용에 대해 걱정해서 시도하지 않다가, 주변 사람들이 모두 사용하니까 덩달아 쓰게 되거든. 나중에 가서는 자동 노동 서비스와 제2의 인생을 사는 가상 세계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이 시대에 뒤처진 사람으로 취급 받아. 변화하는 시대에 휩쓸려야 하는 게 우리의 숙명일까? 이런 생각이 되게 많이 들었어." 

 "의외네요."

 역사를 좋아하는 남학생은 무미건조하게 반응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휴대전화가 없어도 친구들과 잘 어울렸어. 이제는 스마트폰이 없으면 친구들과 노는 건 물론, 일상생활에도 지장이 많지. 어린 학생들도 기술에 의지해야 숙제를 해 올 수 있고, 다른 학생들과 효율적으로 소통할 수 있어. 이게 나쁘다는 게 아니야.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그 변화가 부담스러운 사람들도 있겠지만, 혼자 외딴 섬처럼 떨어져 있으면, 그대로 고립되고 말아."

 "시간이 멈춘 사람들처럼요?" 

 "그렇지." 

 나는 처음 질문했던 학생에게 대답하고 나서 잠시 멈칫했다.

 "「어떤 사람의 연속성」을 읽은 거야?" 

 "아뇨. 차원실험연구소라는 단어를 듣고 나니 다양한 생각이 났어요. 분명 시간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겠다, 추측이 되더라고요."

 "과학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아?"

 "시간과 차원에 관한 영상을 우연히 봤어요. 갑자기 궁금해지더라고요."

 "「어떤 사람의 연속성」은 차원실험을 하다가 시간이 정지한 재난에 대한 이야기야. 주인공은 4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존재고. 알고 보니 시간이 멈춘 게 아니라, 더 높은 차원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3차원인 이 세상의 입장에서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인 거래. 차원에 대한 접근이 정말 흥미로운 소설이었어."

 "그런 소설들이 현실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대화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은 나와 이 학생뿐이었다. 

 "놀랍겠지.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꽤 단순하게 묘사돼. 놀랍도록 멍청하게. 하지만 현실은 복잡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대응할 거야. 이 소설들은 단지 가능성만 보여줄 뿐이야. 유쾌한 상상을 우리가 이루는 순간, 변화는 시작돼. 설령 증명하지 못하더라도." 

 "그냥 상상만 해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단 말이에요?" 

 "확대 해석은 금지야. 문학은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천차만별이야. 위대한 이야기는 없어. 위대한 독자만 있지. 너는 어떻게 할래?" 

 "도전해 볼게요. 읽은 책이 많지 않아서 자신은 없어요."

 "그래, 이제 공부해라."

 수업 시간이 거의 끝나갔다. 딱히 후회는 없었다. 앞으로도 이런 질문을 받으면, 성심을 다해 대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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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에서의 죽음‧토니오 크뢰거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6
토마스 만 지음, 김인순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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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뛰어난 소설가의 기준은 무엇일까? 대답은 저마다 다르다. 대체적으로 훌륭한 작가의 기준은 현실을 얼마나 그대로 반영했는지, 또는 사회의 문제에 대해 어떤 대안을 제시했는지, 아니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했는지로 결정된다. 토마스 만의 작품은 마지막 특성에 있어서 독보적인 영역을 지닌다. 자전적 체험과 평소에 지닌 생각들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섬세하고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이루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공감 또는 감정의 해방(카타르시스)을 경험하며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은 마음속에 있는 응어리에 대한 '끌어내기'의 작업을 정교하게 설계한다. 그의 세계에 진입하는 이는 마음을 비우기만 하면 작가의 개인적인 체험이 자신의 의식으로 전이되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토니오 크뢰거』 역시 좋은 작품이지만, 처음으로 읽었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이 나에게는 조금 더 인상 깊었다. 두 작품 모두 예술가의 숙명적인 고민을 다루고 있지만, 후자가 한층 더 보편적인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예술가에 한정된 토니오 크뢰거의 갈등은 보편성을 저해하는 것으로 보였다. 반면, 『베네치아의 죽음』은 사랑하는 자의 마음을 끈질기게 추격하여 어떤 인상을 남기는 데에 성공했다. 더구나 콜레라가 주는 불길한 인상과 다가오는 재난 등은 여전히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전염병의 존재를 애써 숨기려는 당국과 사람들에게 서서히 퍼지는 불안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잠시나마 생각나게 했다. 


 『토니오 크뢰거』의 대표적인 장면은 "문학은 절대 직업이 아니라 저주"라는 토니오의 선언이다. 토마스 만은 모든 작가들이 거쳤던 딜레마를 서슴치 않게 내뱉는다. 시민성과 예술성의 대립은 단순히 '상업성'과 '작품성' 사이의 고민을 뛰어넘는 무엇이다. 이를 테면, 작가는 남들과 어떻게든 구별되어야 하며 그것을 위해 외로움이나 가난함 따위는 얼마든지 감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말이다. 어떤 작가는 자신 속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 스스로를 세상과 격리하거나 단념하고, 어떤 이는 사회와 타협하다 못해 처음에 지녔던 의식을 상실한다. 대부분의 창작자는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겨내야 한다. 이것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필연적인 긴장감과 두려움을 저주의 굴레로 간주하는 사람도 있다. 토마스 만은 조금 더 솔직한 마음을 택하지 않았나 싶다. 어떻게 자신의 상처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할 수 있을까? 작가는 치유받기 위해 글을 쓰는 법이다. 고통이 없으면 시작도 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나는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서사를 보면서 지나친 자의식은 독이라는 생각도 했다. 아셴바흐는 전염병에 의해 죽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잡아먹혔다. 그에게는 충분히 베네치아를 떠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타지오가 없는 삶은 그에게 죽음과도 같았다. 과도한 지식은 인간을 병들게 한다. 차라리 그가 아무 것도 몰랐더라면, 잃을 것이 없었다면 조금 더 적극적일 수 있었을 텐데. 그가 사랑이라 믿었던 것이 사랑이 아닐 수도 있는데, 그는 스스로의 생각에 갇혀 있었다. 타지오와 대화를 몇 마디라도 나누었다면, 아셴바흐가 가진 집착은 사그라졌으리라.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사랑받는 자의 마음속에 신을 들어갈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결국 그 작가는 스스로를 넘어서지 못했다. 


 섬세하고 여린 두 작가의 이야기가 보편성을 확보하려면, 끌어내기의 과정에 동참해야 한다. 예전에 나는 어떤 책을 읽을 때, 특히 소설을 읽을 때 특정한 교훈을 얻기 위해 부던한 노력을 해왔다. 그 교훈 한 줄이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라고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작품 안에 나의 감정을 담아내거나 끌어내는 작업 자체가 유의미함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글쓰기를 통해 치유되는 존재는 작가 자신임을 인지한 순간부터였다. 소설을 읽는 순간 머리를 스치는 찰나의 깨달음과 느낌도 시간이 지났을 때 나를 바꾸는 원동력이 되곤 한다. 독서와 창작은 고통을 수반한다. 누군가의 세계에 침투하는 것도,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도 쉬운 여정은 아니다. 하지만 피와 눈물을 흘리고 나서 돌아보았을 때, 내가 걸었던 길은 누군가가 잘 따라올 수 있게 잘 닦여 있기 마련이다. 그 기쁨이 모든 시름을 능가하기에, 나는 기어이 아픈 길을 걷고자 하는 것이다.

인식은 타락일세. 그래서 우리는 단호하게 인식을 배척하고, 오로지 아름다움, 다른 말로 표현ㅇ하자면 단순함과 위대함과 새로운 근엄함, 제2의 자연스러움과 형식만을 얻으려고 줄곧 노력할 뿐일세. - P135

너처럼 푸른 눈을 가질 수만 있다면. 토니오는 생각했다. 너처럼 모든 세상과 잘 지내며 행복하게 어울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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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피노키오 - 1911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카를로 콜로디 지음, 엔리코 마잔티 그림, 이시연 옮김 / 더스토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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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때 읽었던 대부분의 동화는 원작과 큰 거리를 둔다. 많은 곁가지 이야기들이 삭제되거나 수정되고, 행복한 결말은 과장되기 마련이다. 안데르센, 이솝, 그림형제의 신비한 이야기들은 현실의 잔혹한 면을 동반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피노키오』는 이러한 괴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피노키오가 겪은 모험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고, 선행의 보답과 우정, 착하고 정직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 등은 아이들을 위해 읽히기에 적당하다. 하지만 원래 이 이야기는 목각인형이 교수형에 처해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독자들의 갖은 항의로 원작자인 카를로 콜로디는 푸른 요정을 등장해 피노키오를 위기에서 구한다. 물론 이후의 이야기에도 작가의 냉철한 시선은 남아 있다. 푸른 요정이 피노키오에게 버림받아서 여기 누워 있다는 묘사, 피노키오를 당나귀로 만들어 서커스에 내보내는 상인 등은 아이들의 동화로만 읽기에는 무거운 내용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주제의식은 기존의 동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거나 다리가 짧아진다는 발칙한 상상은 피노키오라는 목각인형을 통해 우스꽝스럽게 현실이 된다. 세상을 모르는 피노키오는 진실된 미숙함 속에서 성장한다. 그래서 푸른 요정이 그를 소년으로 만들어주었을 때, 피노키오는 더 이상 어리숙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자아를 간직하는 것이라고 소설은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피노키오』 내내 강조되는 진실된 태도는 사랑과 우정을 완성시키는 것이 솔직하고 진중한 마음임을 제시한다.


 작품 내의 모든 에피소드를 다 열거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다만, 상어가 삼킨 제페토 할아버지를 피노키오가 구한다는 거대한 이야기의 틀 안에는 수많은 인간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학교에 간 피노키오가 해변에서 놀기 좋아하는 아이들과 맞서는 장면이었다.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는 피노키오의 모습 때문에 선생님에게 낙인이 찍히고 그를 괴롭히다가 제풀에 다치는 아이들의 모습은 웃기면서도 안쓰럽다. 또한, 피노키오의 책을 뺏어서 해치려다가 도리어 경찰에게 오해받는 모습 등은 피노키오라는 이방인을 다른 대상에 적용했을 때, 인간 사회에서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이질적인 존재에 거부감을 느낀다. 그리고 집단에 속해 있을 때는 내가 그 존재를 억압하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착각에 빠진다. 실제로 대면했을 때 그의 어리석음과 부족함이 나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음을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소설 속에서는 순진한 아이들이 그랬지만, 책장을 벗어나면 자신이 피노키오보다 더 성숙하다고, 더 인간답다고 믿는 어른들이 타인을 억압한다. 


 소설가의 의무는 인정하기 싫은 진실을 드러내는 일이다. 동화를 쓰는 작가들은 대부분 미래의 세대들이 어른의 실수와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렇게 한다. 안타깝게도, 현실 세계에서는 거짓말을 한다고 상대방의 코가 길어지지 않는다. 진실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진실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피노키오는 미숙한 존재로서 세상에 던져진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를 교수형에 처하고, 튀김으로 만들고, 속여서 상품으로 팔기에 바쁘다. 피노키오가 소년이 되었다고 해서, 그가 이전보다 성장했다고 해서, 세상이 그에게 우호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똑바로 선다고 사회도 바르게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희망을 만들고 있다. 2년간 상어 뱃속에서 살아남은 제페토처럼, 한없이 아이들을 품어주는 푸른 요정처럼,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소년이 된 피노키오는 타락과 희망 중 어떤 길을 걸어갈까? 다음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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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범우문고 259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김진욱 옮김 / 범우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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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절과 상관없이 눈으로 덮여 있는 공간이 있다. 아니, 그렇게 기억되는 공간이 있다. 사방이 하얗게 덮여 모든 소리까지 얼어버린 땅에 설 때면 괜시리 숙연해진다. 『설국』에 처음 방문한 여행자들은 눈에 대한 저마다의 인상을 간직한 채 입장한다. 누군가에게 눈은 어린 시절의 순수한 기억이요, 또 다른 이에게 눈은 악몽의 전조일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눈은 따뜻함의 다른 표현이다. 눈이 내릴 때가 그칠 때보다 훨씬 따뜻하다는 통념 때문만은 아니다. 환경이 추운 곳일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따뜻해진다는 막연한 믿음 때문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일본 문학을 시도한다. 일본의 감성이 맞지 않다거나, 수준이 낮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냥' 손이 가지 않았다. 그나마 히가시노 게이고나 하루키 등의 유명한 현대 작가들의 소설들은 가끔 읽었지만,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오랫 동안 사랑받는, 이른바 고전을 읽어보겠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대표작인 이 소설을 읽고 나니 마음속에 간직해 왔던 숙원을 해소한 기분이다. 


 소설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은 아름답게 비어 있다는 것이었다. 온천장에서 머무는 시마무라와 그가 만나는 게이샤들은 그들을 둘러싼 설국만큼이나 하얗다. 아름다우나 어딘가 비어 있다. 인물 간의 대화들이 특히 그렇다. 눈이 펑펑 내리는 길을 혼자 걸을 때 느끼는 적막과 쓸쓸함이 묻어 있다. 소설 말미에 누에고치 창고에서 불이 나는 순간에야 설국은 생동감을 확보한다. 고마코와 시마무라의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대화는 "공허한 벽에 부딪히는 메아리와도 같은 소리"이다. 고마코가 좋은 사람이라는 시마무라의 말에는 어떤 진심이 담겨 있었을까? 독자는 추측할 뿐이다. 어쩌면 그것도 빈말일 수도 있고. 


 그리하여 드디어 흰 지지미를 다 바랬을 때 아침해가 떠올라 붉게 비치는 광경은 무엇에도 비유할 수가 없다. 남쪽 따뜻한 고장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다고 옛사람도 적어놓았다. 또한, 지지미 바래는 일이 끝난다는 것은 눈고장에 봄이 가까웠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으리라(171).


 『설국』을 읽을 때는 색채가 주는 인상을 기억하면 편리하다. 하얀색이 아닌 다른 색은 설국을 변화시키기 마련이다. 겨울이 하얀색이라면, 봄은 빨간색이다. 온천장에서 난 화재는 봄을 앞당기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봄이 온다는 것은 시마무라가 떠나야 하며, 고마코와의 사랑도 끝남을 의미한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존재한다.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그 자리에 계속 머물 수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 아름다움이 있어야 할 자리가 온통 비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환상으로 살아가는 나그네라면 떠남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 


 은하수는 아름답게 비어 있는 것을 대표한다. 별과 은하수는 아름답게 빛나지만, 결코 닿을 수 없다. "은하수는 또 이 대지를 안으려고 내려오는 것 같았"지만,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았을 때 아름다운 법이다. 아름답다고 해서 별에 가까이 다가가면 그 온도에 타버리고 만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은 사실 공포의 속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어떤 것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을 때, 색깔에 반응한다. 낯선 색은 거부감을 일으키고, 눈에 익은 것은 차라리 아름답다고 믿는다. 그렇게 자신을 속이는 것도 괜찮다. 어떻게 우리가 본질에 닿을 수 있겠는가? 우리도 아름다우나 비어 있는 존재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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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생 열린책들 세계문학 275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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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듯한 교육을 받고, 반듯한 직장과 가정을 가진 남자가 있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인생에 대해 무난하다, 평범하다, 혹은 성공하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의 삶에는 치명적인 균열이 있다. 남들이 절대 감지하지 못하는 비밀로 인해 그는 무너진다. 남자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유년 시절에 목격했던 폭력들이 자신에게 영향을 끼쳤음을 인정한다. 평범하지 않은 요소가 자신을 침범할것이 두려워 도망쳤지만, 이미 폭력은 남자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시대 상황 역시 그러한 인식을 바꿔놓았음도 드러난다. 물론 카렐 차페크는 이 작품에서 남자의 내면을 그리는 데에 더 집중한다. 


 『평범한 인생』을 평범하지 않게 만드는 지점은 20장부터이다. 지극히 평범하다고 여겨진 남자의 삶에 균열이 시작되고, 또 다른 자아가 나타나 그동안의 삶에 대해 질문한다. 먼저 "평범한 인생이 대체 무엇인가?"이다. 20장이 시작하자마자 서술자는 "궁극적으로는 인생의 올바르고 유일한 목표란 가능한 한 출세하여 자신의 명예와 지위에 기뻐하는 것"이라고 쓰고, 바로 그 부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자서전을 쓰고 있는 남자는 철도 공무원에서 시작하여 고위 관료의 지위까지 얻는다. 하지만 승진, 나아가 인생의 목표를 달성한 사건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어쩌면 남들보다 우월해지고 싶다는 단순한 욕망 때문에 높은 지위를 향해 달려갔던 것일까? 


 액자 소설 속의 주인공은 분명 남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 철도 공무원이라는 안정적이고 명예로운 지위를 가졌고, 역장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사랑과 사회적 평판을 모두 얻었다. 평범하다는 말에는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 함축되어 있다. 즉,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어떤 이에게 평범한 인생은 과분하고, 또 다른 이에게 평범한 인생은 모욕이다. 서술자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그토록 노력했지만, 결국 특별한 것이 없는 인생으로 생각할까? 아니면 괴물과도 같은 사람이었으나 세상 속에 어떻게든 조화롭게 지낸 사람으로 여길까? 적어도 또 다른 자아와 싸우는 장면만 보면 후자로 보인다.


 카렐 차페크는 후기를 통해 형제애와 다양성을 외쳤고, '나'가 아닌 '우리'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평범한 인생』은 분명 따뜻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액자의 바깥에는 정원이 있고 담당 의사는 진심을 다해 상대를 이해하려고 한다. 나에게 있어서는, 세상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SF 문학의 대가로 여긴 카렐 차페크의 새로운 면이 담긴 소설이기도 하다. 특별한 소재가 없어도, 인간의 내면을 치열하게 파고드는 그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여겼다. 한편으로는 여러 모로 씁쓸한 면이 남는다. 유년 시절의 어긋난 기억이 끝내 개인을 괴롭히는 모습이 그렇고, 또 다른 자아가 마치 완벽한 타인처럼 남자를 얽매는 묘사들이 그렇다. 그것이 평범한 인생이라면, 인간의 삶은 얼마나 더 절망적이어야 할까?


 타인을 이해하는 시작점은 결국 자신에게 있는 법이다. 아무리 감정을 이입하고 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린다 해도, 상상력의 한계가 존재한다. 자신을 배제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우리' 안에는 반드시 내가 있다. 나를 뺀다면 '너희'나 '그들'일 뿐, '우리'가 아니다. 자신이 아무리 미워도, 타인에 비해 부족한 사람으로 보여도 어떻게든 자신과 함께 가야 한다. 내가 싫어하는 타인의 모습이 곧 나의 일부이다. 누군가를 항상 용서할 필요는 없어도, 그들의 모습을 통해 스스로를 본다면 그것만으로 가치가 있다. 삶이란 두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이니까. 그 싸움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려면 자신에 매몰되어서는 안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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