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란을 날려라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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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엽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실로 중요하지 않다. 그것으로 인해 고든 콤스톡과 로즈메리가 결혼 이후 첫 말다툼을 했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된다. 엽란은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있다. 그러한 유형의 말다툼은, 돈은 적으나 숨길 것이 많은 부부라면 시대와 국가를 불문하고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사소한 언쟁과 실존하는 아이 앞에서 모든 환상은 현실로 돌아가는 법이다. 


 이 소설은 조지 오웰이 책방에서 일했던 경험을 기반으로 쓰였기 때문에 자전적인 소설로 해석될 수 있지만, 고든 콤스톡은 조지 오웰의 어두운 자아에 가깝다. 가난과 계급사회와 제국주의에 대한 사유 뒤편에 자리잡은, 뛰어난 작품을 발표하여 세간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 있다. 물론 조지 오웰을 돈과 명예에 집착하는 이로 해석하는 것은 그의 생애에 대한 모독이다. 영국 문학사에서, 아니 세계 문학사를 통틀어 오웰만큼 실천적인 작가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책방 점원 시절이 묘사되어 있지만, 작품의 주 무대는 서점 밖이기 때문에 자전적인 소설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무엇보다 그의 추태를 보고 있자면, 소위 말해 좀 '깬다'. 


 『엽란을 날려라』의 단순한 줄거리 속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을 꼽자면, 고든이 미국 문예지에서 받은 50달러를 탕진하는 날이었다. 그 장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큰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돈의 신에 굴복하기 싫다면서 잘 나가는 카피라이터 일을 그만두고 책방 점원이 되기를 선택한 고든이, 막대한 돈을 얻자마자 조력자인 래블스턴과 연인인 로즈메리에게 자랑하듯 돈을 막 쓰는 모습은 우스우면서도 서글프다. 고든은 지속된 가난으로 피해의식과 자기혐오에 빠져 있다. 그래서 래블스턴의 호의를 가난한 자신에게 베푸는 동정으로 간주해 왔고, 여자들은 가난한 남자와 결코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녀에게 적대적으로 대한다. 두 사람은 성인군자처럼 고든을 챙겨주었지만, 10파운드를 하루만에 날리고 만취하여 경관을 폭행한 고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작가가 비슷한 경험을 했다면, 정말 대단한 용기를 지녔다고 말하고 싶다. 고든에게 있어서 그 날은 삶에서 지우고 싶은 순간일 것이다.


 통속소설 같은 갈등의 해소, 평면적인 인물 관계, 다소 늘어지는 심리묘사 등의 단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흥미롭게 읽히는 까닭은, 인간 내면의 모순과 드러나는 추악함을 적나라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작가 스스로도 실패작이라고 인정했지만, "역시 조지 오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과 돈, 자본주의 체제가 어떻게 인간의 내면을 망가뜨리는지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모두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대영제국의 위대함과 제국주의의 정당함을 부르짖을 때, 조지 오웰은 밑바닥 세계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그들과 동화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그러한 시절을 함께 감당했다. 그가 이 작품을 다시는 출판하지 말라고 부탁했던 까닭도, 오로지 '돈'을 위해 창작을 했음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아무렴 어떤가, 절실함이 없으면 창의력이 솟아나지 않는 것을. 만약 시간을 돌린다 해도, 그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고든이 로즈메리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는 결말은 다분히 해피엔딩이다. 그는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환상은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을 돕지 않는다. 


 현실이 언제나 환상보다 나은 것은 아니다. 어떤 환상은 다양한 이름으로 변신하여, 세상을 바꾸는 데에 기여한다. 물론 그것은 현실에 적절한 방식으로 접목했을 때의 일이다. 작가를 꿈꾸었으나 훌륭한 카피라이터가 된 남자가, 그 일을 하면서 부끄러워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현실은 언제나 환상을 배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현실이 더 구체적인 환상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조지 오웰이 자전적인 이야기를 쓰는 데에 그쳤다면, 그저 사실적인 묘사에 탁월한 르포르타주 작가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불멸의 우화와 다가올 미래에 대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작품들을 기꺼이 기억한다. 조지 오웰의 삶과 작품은 우리가 환상에서 현실로, 현실에서 환상으로 유연하게 사고를 바꾸어야 함을 일깨워 준다. 

식당 안에는 정확히 셀 수 없을 정도로 엽란이 많았다. 그것들은 찬장 위에, 마룻바닥에, 보조 탁자 위에 등 식당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창문 쪽에 여러 개의 화분이 놓여 있는 스탠드가 서 있는데 빛을 차단하고 있었다. 사방에 엽란이 둘러싸고 있는 어둑어둑한 방에 들어오면 마치 수중화의 따분한 잎들에 에워싸인, 햇빛 없는 수족관 안에 있는 느낌이 든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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