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병시대의 재구성 -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시대의 내밀한 이야기
존 켈리 지음, 이종인 옮김 / 소소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나는 어렸을 떄부터 치명적인 전염병에 관심이 많았다. 사람이 사람에 의해 감염되어 고통 속에 죽는 것이 마치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총을 겨누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난 현대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재앙 중 하나를 역병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문명을 무너뜨리는 것에서 나아가 인간을 분열시키기 때문이다. 내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눈여겨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가 재앙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시하고 있으니까.

 

 중세의 유럽인들은 지금껏 겪지 못했던 대재앙을 맞았다. 흑사병은 전체 인구의 3분의 1 이상을 앗아갔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흑사병 시대의 재구성』은 흑사병의 기원이나 결과보다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흑사병이 왜 그렇게 치명적이었는지 과학적으로 분석하기보다는 사회적 문제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유럽인들은 전염병 이전에 최악의 대기근을 맞았거나 쓰레기장 같은 위생 시설 속에서 지냈다. 마치 페스트는 그들의 추악한 생활에 따르는 신의 처벌처럼 보였다.

 

 흥미로운 점은 각 나라마다 페스트에 대한 대처가 달랐다는 점이다. 이탈리아는 도덕성과 건강 모두가 무너졌지만 프랑스는 연대했고 영국은 문명을 수호했다. 유럽은 유대인을 처형하고 그 중 독일은 채찍질 고행파의 성지가 되었다. 이 책은 재앙 앞에 선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그려내는 데 집중했고 그것에 성공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삶은 계속되었고 각자마다 다른 결과가 나타난 사실은 여전히 역사의 신비함으로 남아 있다. 물론 이 전설 속에서 과정이 섞여 있겠지만 재앙의 시대를 견뎌낸 이들은 분명 성장했으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종종 아무도 없는 폐허 속을 홀로 걷는 상상을 한다. 모든 질서가 붕괴된 종말을 목격하고 싶다는 단순한 바람 때문이다. 그렇지만 종말 이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해 보면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요,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믿을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떠돌아야 하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모든 것이 무너진 세상에서 내가 왜 살아남아야 하는지 의문이 들 것이다. 어쩌면 종말 이후의 삶은 세상이 아닌 자신과의 싸움일지도 모르겠다.


 『로드』의 부자가 그토록 살기 위해 투쟁한 까닭을 살펴보기 전에 작품의 제목인 로드(Road), 즉 길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름 모를 두 남자는 어떤 위협이 있을 때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추위가 닥칠 때마다 길에서 벗어나 몸을 피했다. 남자가 '나쁜 사람'들이라 부르는 낯선 무리들도 모두 길 위를 지나갔다. 이처럼 길은 파괴된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위험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러나 주인공들은 길을 통해 목적지로 나아가고 길 위에서 새로운 공간을 발견한다. 언제나 그곳에서 그들은 새로운 만남을 이어간다. 즉 길은 두 사람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시련의 공간인 동시에 희망의 지표인 것이다.

 

 익명의 부자가 살아남으려 했던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잿빛으로 가득한 땅, 부식된 건물들과 녹아버린 시체들로 채워진 도시, 희망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기대를 철저히 삼켜버린 검은 바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정적의 시대이다. 무엇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코맥 매카시는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우주적 묘사를 통해 태양의 폭발로 인한 재앙이 일어났음을 암시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멸망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이다. 희망을 찾을 수 없지만 그들은 계속 걷는다. 그것은 아마 서로를 위한 투쟁일 것이다. 만약 남자 혼자 살아남았다면 그는 길 위에 주저앉았을 것이다. 남자의 힘과 행운, 그리고 타인을 향한 소년의 자비가 그들을 또 다른 희망으로 이어주었다. 이미 불조차 죽은 세상이기 때문에 죽음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문득 남아 있는 자들의 삶에 대해 떠올려 본다. 우리에겐 어떻게 죽을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지가 훨씬 중요한 문제이다. 선택은 여러 가지다. 남자의 사랑, 소년의 순수함, 아니면 또 다른 생존자들이 추구하는 가치, 이들 중 어떤 것을 택하든 그것은 본인의 자유다. 하지만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세상에서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답을 창고 속에서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길 위에서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서 있는 세상은 코맥 매카시가 제시한 흑백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훨씬 많은 색깔이 존재할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S 다큐멘터리 동과 서 - 서로 다른 생각의 기원
EBS 동과서 제작팀 외 지음 / 지식채널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동양과 서양의 세계관 차이는 낯선 소재가 아니다. 나는 EBS 다큐멘터리가 나오기 전에도, 또 나온 이후에도 이 두 세계의 세상을 보는 상반된 관점에 관한 글을 많이 보았다. 대표적인 예가, 고대 그리스인과 중국인의 사고관 차이이다. 고대 중국인은 사회적 관계를 중시한 반면, 고대 그리스인은 사물 자체를 중시한다는 지문을 문제집에서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윤리 시간에 배우는 동양과 서양의 자연관에서도 차이는 뚜렷이 나타난다. 서양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반면, 동양은 자연과 인간을 조화하려 한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다. 이렇게 동서양이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과 서』는 다양한 실험과 인터뷰를 통해 그 이유를 찾으려 했다.

 

 동서양의 비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익히 보았던 내용이고, 예상할 수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이 차이에 대한 태도이다. 이 차이를 허용할 것인가, 아니면 좁히려 노력할 것인가? 차이를 내버려 두면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는 요즘, 큰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고, 좁히려 노력하는 일은 구체적인 방법이 없다. 언어, 인종, 문화가 모두 다른데 어떻게 그 차이를 좁힐 수 있단 말인가? 불가능에 가깝다. 대표적인 예가 책에 소개되어 있다.

 

지난 2007년 미국 버지니아공과대학에서 발생한 총기 살인사건의 범인은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이에 대해 일부 한국인들이 보여준 반응은 서양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들은 이 사건이 한국인들 모두의 책임이라 여기고 국가적 차원에서 미국에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한 미국 대사관 앞에서는 애도와 사과의 의미를 담은 촛불집회가 열렸다. 인터넷에서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게시판이 만들어졌고 한국의 대통령은 세 차례에 걸쳐 유감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지는 정신적 문제가 있는 한 개인의 잘못일뿐 한국인들이 나서서 사과할 문제가 아니니 더 이상 사과하지 말아달라는 사설을 게재했다. 이처럼 동양에서는 개인과 집단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p.226)

  이것은 최근에 일어난 마크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에서는 한 개인의 범죄로 그 사건을 해석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하여 공연을 하며 사과하지 않았던가. 적어도 『동과 서』의 관점을 따르자면, 그 행동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우리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그들의 처지를 생각한, 오해에서 비롯된 해프닝에 가깝다(물론 피격 사건은 범죄지만).

 

  결국은 관용의 태도가 필요하다. 내가 너의 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너도 나의 문화를 소중히 여겨달라. 이것이 동서양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 그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너와 나는 달라. 하지만 우린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이런 열린 마음이 동서양이 상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여기까지가, 『동과 서』의 저자 김명진의 입장이었다. 물론 관용의 태도는 내가 다른 곳에서 빌려온 개념이었다. 잠시 나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미 저자가 오해의 여지가 있을 거라고 우려했고, 또 책의 의도가 그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음을 알지만, 나는 세상을 동 아니면 서로 나누는 이분법을 비판한다. 이분법은 위험하다.

 이분법을 통해 지배자와 피지배자, 동과 서, 너 아니면 나. 세상을 편리하게 볼 수 있겠지만, 결국 편협한 시선이다. 언제나 이분법의 함정에서 벗어난 공간, 문턱 위에서 생각하라. 동과 서의 문턱은 위치적 개념이 아니다. 여기서 문턱이란 관용을 말한다. 인종, 피부, 언어, 직업, 국적, 성별이 모두 다른 사람들을 모아놓고 함께 살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이 각자 생활하게 내버려둘까, 아니면 하나의 기준을 정해서 거기에 맞출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를까? 내 주장은, 선택에 맡기라는 것이다. 책임 역시 그들의 것이다. 문턱은 선택의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역시 선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동과 서', '선과 악' 같은 이분법에서 벗어나려면, 분명 노력이 필요하다. 당신은 동쪽인가, 서쪽인가? 아니면 서쪽이면서 동쪽인가? 동쪽이면서 서쪽도 아닌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살림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죽음이 커다란 파장을 만들어 마침내 타인끼리 서로를 위해 눈물을 흘리도록 만들 수 있을까....... 모리는 자신의 죽음까지 삶으로 받아들인 사람이다. 그 작은 진리들이 모여 감동이 탄생한다. 물론 나는 모리의 죽음보다 더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지만, 지금은 이것으로 묻어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섭지만 재밌어서 밤새 읽는 과학 이야기 재밌어서 밤새 읽는 시리즈
다케우치 가오루 지음, 김정환 옮김, 정성헌 감수 / 더숲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이 책에서 새롭게 얻은 과학 상식에 대해 즐거움을 느끼기보다는, 과학 기술의 이면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과학은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인간을 진보시키거나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과학이 주는 진정한 공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