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살상수학무기 - 어떻게 빅데이터는 불평등을 확산하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가
캐시 오닐 지음, 김정혜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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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수학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너무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몇 자리의 숫자로 규정된다. 효율성과 편의의 이름 아래 주민등록번호, 신용카드 번호, 전화번호 등으로 '나'라는 인간이 정의되는 것이 당연한 일인 듯인양 여겨진다. 그렇게 사람들은 시스템과 데이터 안에 녹아들어 그것을 지배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희생되기를 기다린다.


 『대량살상 수학무기(WMD)』가 제시하는 현대의 비극은 실로 현실적이다. 인간은 수학을 발명하고 기계를 만들었지만 모두가 그 혜택을 누릴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로 인해 교묘하게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조장되고, 민주주의가 왜곡돼며, 교육이 무너진다. 인간은 각자 다른 사고를 지녔기에, 나는 이 책이 지적하는 WMD의 문제점들 중 하나가 특히 기억에 남았다. 아무래도 학생이다 보니 '데이터의 포로가 된 교육'에 대한 묘사가 꽤 와 닿았다. 교육의 문제가 미국의 국경을 뛰어넘어 우리나라에도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방에 있는 사립고등학교에 다녔다. 입시 결과에 따라 학교의 평판이 달라지는 시스템에 따라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입시 공부를 강요했다. 학생들은 높은 등급에 위치한 대학교에 가기 위해 경쟁했다. 높은 등급의 대학교에 갈 가능성이 높았던 학생들은 선생님들과 아이들한테 주목을 받았고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외면 당했다. 나는 <유에스 뉴스>가 매긴 미국 대학순위나 다른 매체에서 언급되는 대학순위가 이런 차별의 시작이라는 저자의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완전히 신빙성이 없지는 않다. 문제는 그 기준의 정확성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한 자발적 통제다. 


 <유에스 뉴스>와 같은 WMD는 모든 사람이 정확히 똑같은 목표를 따르도록 강제한다. 이는 사람들을 무한경쟁으로 내몰고 이전에는 겪지 않았을 부작용에 시달리게 한다(p.107).


 이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대학 순위와 입시 경쟁의 굴레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데이터와 알고리즘은 대학교 내에서도 만연하고 있었다. 천편일률적인 수능 공부를 마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해야 하지만 대학생들이 주로 수강하는 강의는 거의 정해져 있다. 취업이나 스펙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학과는 인기가 없고, 그와 관련된 교양 수업도 모두 기피한다. 이는 대부분의 대학에서 비슷한 양상을 보일 것이다. 시스템이 학생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막기 때문이다. 결국 치열하게 경쟁에서 살아남아 대학에 간 이들은 또 다시 같은 경쟁에 내몰리고, 그 끝은 모두 똑같은 도착점이다. 그야말로 대중의 정신을' 대량살상' 해버리는 알고리즘이다.


 많은 사람들이 빅데이터의 체계 아래서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간다. 그리고 시스템이 정해놓은 길을 걷고 그 위에서 그들의 명령을 따른다. 대학 순위 상위권에 있는 대학에 가기 위해 경쟁하고, 좋은 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하다 자신의 꿈을 잃는다. 자신의 인생이 숫자 몇 개로 정의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길에 선 누군가가 말한다. "당신이 할 말은 이제 정해져 있다. 당신은 그 길에서 저항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안전과 복지를 보장해 주는 시스템을 누가 벗어나려고 하겠는가?"


 벗어나는 것이 언제나 해답은 아니다. 현대 사회는 유례 없이 발전한 시대고 그 혜택을 굳이 거부할 필요는 없다. 저자인 캐시 오닐도 최선의 해결책은 저항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알고리즘과 수학은 주인이 없다. 즉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이 되는 과정은 경쟁이 아니다. 모두가 참여할 수 있고,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떻게 하면 데이터를 삶의 발전에 쓸 수 있는가를 함께 고민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21세기는 지금도 충분히 빠르다. 남아 있는 불평등을 해소하는 일이 중요하다. 거대한 과제처럼 느껴지겠지만 개인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자신의 '다름'을 보여주는 일이다. 같은 것은 참여할 수도, 나눌 수도 없다. 새로운 세계는 두 다른 세계의 틈에서 만들어지는 법이다. 이제 당신을 보여줘라. 몇 자리의 숫자가 아닌, 알고리즘화할 수 없는 정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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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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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짙푸른 봄이 돌아오면

 따가운 그 햇살 아래서

 만나리라 우리들은

 손꼽아 기다린 날처럼

 만나리라 우리들은

 모두 어제였던 것처럼

 -페퍼톤스, <청춘> 중


 

 나는 제목을 보자마자 이 책이 라틴어를 가르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실제로 『라틴어 수업』은 라틴어 경구를 내세우는 인문학 강의에 가깝다. 한동일 교수는 끊임없이 겸손해 하며, 그 특유의 재치와 지식으로 청중들을 매료시킨다. 그런 그의 모습이 책장 너머 나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그의 대담함과 노력이 다른 교수들한테 영감을 주었다.


 몇 년 전, 나는 '문학의 이해'라는 교양 수업을 수강했다. 아마 그 강의가 내 인생의 첫 번째 대학교 수업이었던 걸로 기억난다. 강의실은 고등학교 시절 상상했던 계단식 대강의실이었고, 나는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았다. 교수님은 강의 시간보다 약간 늦게 들어오셔서 한 학기 동안 어떻게 수업을 진행할 계획인지 설명하신 뒤 "수업 끝!"을 외쳤다. 시작한지 10분만이었다. 나를 비롯한 새내기들이 "이게 대학교구나"라고 떠들고, 재학생들도 기쁨의 미소를 짓는 와중에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이 시간은 여러분에게 그냥 주는 시간이 아닙니다. 대신 밖에 나가서 봄 하늘을 관찰하시기 바랍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사실 원조는 "Prima schola alba est(첫 수업은 휴강입니다)"를 외치던 한동일 교수였다.


 저자는 매 강의마다 우리가 알고 지냈던 가르침을 전해준다. 나의 장점에 얽매이지 않고 단점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공부를 삶의 일부로 여기고 끊임없이 해야 한다.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에 집중하라. 나이에 스스로를 제한하거나 나이로 타인을 평가하지 마라. 이것은 수많은 교훈들 중 내 기억에 남은 그의 메세지이다. 나는 페이지 너머로 그의 열정과 진심을 느꼈고,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조금 냉정하게 생각하면, 내가 기억하는 강사의 문장은 곧 잊힌다. 머릿속에 각인되겠지만 실천하는 법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기억의 저편으로 넘길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현재에 붙잡히는 인간의 한계다. 상처주는 말, 소문은 쉽게 기억되지만 나에게 필요한 말이나 감사 인사는 금방 잊힌다. 그래서 나는 지혜를 말하기보다는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문장을 말함으로써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매체를 보여주고 스스로 깨닫게 만들자는 것이다.


 최근에 『시를 잊은 그대에게』라는 책을 읽었다. 저자의 취지는 그동안 시를 잊고 지냈던 현대인들, 학창 시절 시를 문제로만 접했던 청년들에게 시의 아름다움과 인생에 대한 조언을 전해주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이 책을 통해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나에겐 조금 아쉬웠다. 기억에 남은 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최근 방영된 <시를 잊은 그대에게>라는 드라마에 인용되는 시들이 청자의 마음에 와닿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말에 감정을 이입하는 것보다는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을 이해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고, 그들의 입장에서 시의 내용이 더 절묘하게 연결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시 내가 들었던 '문학의 이해' 수업 얘기로 돌아가자면, 나는 그 수업을 열심히 들었고 좋은 학점도 받았지만 기억에 남는 장면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아까 말했던 "봄 하늘을 보라"는 교수의 메세지였고, 다른 하나는 교수가 보여준 <족구왕>이라는 영화였다. "모두가 가는 길이 정답이 아니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자, 그것이 청춘이다"라는 영화의 주제는 내가 들었던 수업이 지향하는 바였다. 그리고 영화의 끝부분에 흘러나오는 페퍼톤스의 <청춘>, 이것이 전부였다. 다른 말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결국 우리는 망각하는 존재이므로 『라틴어 수업』에서 봤던 라틴어 문구, 이 독후감의 내용, 그리고 저자가 준 감동마저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보여주기를 통해 나의 메세지가 조금이라도 오래 남아 그 사람의 인생에 좋은 영향을 준다면 그것만큼 기쁜 일이 있을까? 내가 보여주려는 방식은 문학이다. 문학은 보여주는 글이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잊지 않고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한다. 봄 하늘을 즐기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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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하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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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그들은 언어 뒤에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고, 기호라는 문자 속에 있는 뜻을 찾아내며, 시간을 뛰어넘는 은유를 만들어 낸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전부를 판단하려는 우리는 이런 천재의 생각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나 역시 천재적인 소설인 『장미의 이름』을 읽으면서 다소 난해하다고 느꼈다. 그래도 이런 도전 앞에서 물러서기도 싫었다. 죽은 천재의 마음을 전부 알 수는 없겠지만, 우선 눈에 보이는 곳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장미의 이름』은 14세기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추리해나가는 미스테리 소설의 형식을 갖고 있다. 윌리엄 수도사와 화자인 젊은 아드소는 우아하지만 의심스러운 수도원에서 일주일을 보내며 미궁 속을 헤치고, 암호를 푸는 등 사건의 실마리를 밝히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지식과 생각과 환상이 충돌한다. 사실 이러한 요소들은 추리소설의 집중력을 흐리는 요소들이다. 그리고 밝혀진 진실은 그다지 매혹적이지도, 충격적이지도 않다. 즉 단순히 장르적 만족감을 주는 일에 이 소설은 집중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움베르토 에코는 왜 우리 시대와 동떨어진 시대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추리소설을 꾸며냈을까?

 

 이 작품이 하나의 은유라면 어떨까? 은유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나는 작가의 창작노트에 적힌 대로 "수많은 해석"들 중 하나를 택하고, 내가 선택한 거울을 통해 진실을 보겠다.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해 보자. 왜 중세의 수도원인가? 『장미의 이름』은 중세 시대의 특징을 모두 담아내고 있다. 교권과 왕권간의 갈등, 교파의 분열, 이교도 탄압과 마녀사냥 등 이른바 '암흑 시대'라 불렸던 중세의 참혹하고 비상식적인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서구권 최대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 작품 속 가상의 수도원은 그러한 만행들이 일어나는 중심지이다. 겉은 화려하고 경건해 보이지만 속은 추악하기 그지없다.

 

 인물들은 어떤가? 화자인 아드소는 견습생답게 전형적인 중세인의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회고하며 최대한 이성과 양심을 지키려 하지만 위선일 뿐이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윌리엄 수도사 역시 처음에는 지적이고 냉철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자신의 지식 속에 갇혀 있는 인물이다. 수도원장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에 급급했고 살해당한 수도사들도 욕망을 채우려다 실패한 자들이다. 수도원, 아니 그 시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신의 이름을 내세우며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자신의 생각을 지키려고만 한다. 이런 모습을 보고 나의 머릿속을 스치고 간 단어가 있었다. 바로 편협함이었다.


 에코는 자신의 신념밖에 보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묵시록을 펼친다. 비극의 시작이 된 호르헤 노인의 맹목을 보자. 그는 웃음이 세상을 파멸에 이르게 한다는 자신만의 상상에 빠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을 숨기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 수도사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물론 이 노인이 살인한 것이 아니다. 등장인물들을 죽인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편협함이었다. 윌리엄도 자칫 그 불길에 휘말릴 뻔했다. 어쩌면 그것은 독자에게 향하는 경고다. "혹시 당신은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지는 않은가? 다른 사람에게 나의 생각을 강요하려고 하지 않는가?"라고 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일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는 일은 훨씬 더 어렵다. 천재들조차 이것에 실패한다. 모든 것을 볼 수는 없다. 다만 잠시 멈춰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돌아볼 수는 있다. 나는 어디에 서 있을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나의 생각이 완전히 옳다고 생각한다면 문턱으로 돌아가야 한다. 편견과 이분법이 없는, 새로운 곳으로 발걸음을 내딛어야 하는 문턱으로 말이다. 그 위에서 새로운 만남을 위해 사랑하는 장미가 있는 별을 떠난 어린 왕자의 용기를 되새겨야 한다. 누구도 당신이 가는 길이 정답이라고 말해줄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어딘가에 있는 외로운 조종사를 만나기 위해 사막을 걸어가야 한다. 그제야 우리는 장미의 이름을 마음껏 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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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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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기 전에 꽤 긴장했다. 단순히 과학에 대한 나의 무지와 책의 두께 때문이 아니라, 칼 세이건이라는 저자가 가진 권위가 무겁게 느껴졌다. 또한 cosmos(우주)라는 거대한 체계에 대해 다루는 책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의심이 되었다. 그런데 『코스모스』는 TV 시리즈를 기반으로 쓰인 글답게 진입 장벽이 생각보다 낮았다.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과학적 설명에 저자의 문학적 상상력, 흥미를 돋우는 문체까지, 이 책이 고전으로 불리는 이유를 단번에 깨달았다. 나한텐 『과학 콘서트』를 읽었을 때보다 과학이 쉽고 재미있다는 생각이 더 분명하게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코스모스』는 우주를 모험하려는 과학자들을 위한 우주선이 아니다. 인간이 어떤 세상에 속해 있고, 어떤 세상을 만들어가야 할지 보여주는 안내서이다. 이 여정은 우주의 기원에서 시작하여 차원과 은하, 고대의 신화를 거쳐 핵전쟁에 대한 우려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갈망으로 끝을 맺는다. 이 책에서 입체적으로 선보이는 우주 서사시를 읽고 나면 두 가지 생각이 든다. 하나는 우리가 그동안 무심코 올려봤던 하늘의 위대함이며, 다른 하나는 우주 안에서 세포보다 못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나'의 하찮음이다.

 

 분명 인간은 우주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끝없이 팽창하는 우주, 빅뱅 이전의 세계, 블랙홀 안에 담긴 에너지를 인간이 헤아릴 수 있을까? 기껏해야 '그럴 것이다'라는 추측이 전부이다. 다른 생명을 찾기 위해 빛의 속도로 떠나는 여정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 좌절된다. 많아야 100년 가까이 사는 인간의 삶은 하늘 너머의 세계를 파악하기에는 너무 짧다. 우리는 그 짧은 삶을 영위하면서, 이 지극히 작은 행성 안의 보잘것없는 가치 때문에 싸우고, 죽이고, 원망한다. 저자인 칼 세이건도 외계 문명이 인류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한심하게 여길지 걱정했다. 또한 인간이 전쟁을 통해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일을 두려워 했다. 이 공포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대로이다. 인간은 여전히 위태롭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생각을 바꿔보자. 잠시 몇 억 광년 저편에 있는 세계나, 우리 모두가 걱정하는 문제를 내려놓자. 대신 내가 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생각해 보자. 『코스모스』를 절반만 읽은 독자는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내가 노력한다고 이 거대한 우주가 바뀌겠어?" 맞는 말이다. 혼자서는 바꿀 수 없다. 현재로서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하늘을 향해 작게나마 발걸음을 내딛을 뿐이다. 미래의 누군가가 그 발자국을 따라가길 바라며.

 

 밀턴 휴메이슨과 허블, 피타고라스, 아인슈타인 등 과학사를 빛낸 수많은 사람들도 결국 우리와 같은 마음에서 출발했다. 우주는 그런 점에서 놀라운 지혜를 전수한다. 우주 앞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누구나 세상을 바꿀 자격이 있다. 그 방식이 꼭 과학이 아니어도 된다. 누군가는 꿈을 위해 열심히 수레를 끌 것이고, 누군가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토론할 테고, 누군가는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 위해 글을 쓸 것이다. 각자 다른 역할을 하는 세포들이 모여 하나의 인간이 되듯이, 인간이 힘을 합쳐 어떤 것을 이루고자 하면 그 빛은 반드시 지구를 뛰어넘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하늘을 향해 도약해야 하는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앎은 한정되어 있지만 무지에는 끝이 없다. 지성에 관한 한 우리는 설명이 불가능한, 끝없는 무지의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작은 섬에 불과하다. 세대가 바뀔 때마다 그 섬을 조금씩이라도 넓혀나가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다. -토머스 헉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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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영화개봉 특별판) - 조선의 마지막 황녀
권비영 지음 / 다산책방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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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너를 지켜줘
힘겨워지면 나를 기억해줘
간절히 원했어 잠시 멈춰서 
날 바라봐주기를

멈출 수 없어 나는 두려워 
가눌 수 없는 난 어떻게 해야해
날 바라봐줘 날 기억해줘 

  -디어클라우드, 'remember' 중-


 덕혜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버텼을까? 그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기에 오랜 세월을 침묵했을까? 스스로가 무너지지않게 노력했지만 누구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았다. 결국 덕혜가 생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나를 기억해"라는 외침 하나였을까?


 감정은 인간의 한계인 동시에 축복이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상처받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만 감정이 있기에 삶은 아름답다. 문학을 만드는 사람이라 그런지 몰라도 이성만 남아 있는 세상은 너무 삭막하고 차가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감정 때문에 우리는 약해지지만 또 강해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수많은 감정 중 가장 탁월한 감정을 꼽으라면 나는 '공감'을 택할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말하면, 타인을 이해하려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 간단하지만 우리는 거의 그렇게 하지 못한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이기심과 무지가 공감의 요소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기적으로 살기엔 인간은 너무 나약해서 이타심을 계속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기억하게 하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 바로 예술이다.

 

 이성적인 관점에서 『덕혜옹주』는 조선 마지막 황녀의 삶에 각색을 입힌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덕혜의 감정을 이해하는 순간 이 책은 역사를 뛰어넘어 현실로 넘어온다. 황녀로서의 기품을 지키기 위해 그녀가 겪었던 시련을 함께 느끼고, 강제로 결혼한 뒤 가족한테 버림받았을 때 느낄 여성으로서의 아픔을 이해하고, 모두에게 잊힌 마지막 황족의 절망에 공감하면 『덕혜옹주』는 메세지를 얻는다. 당신이 이 비극적인 삶을 산 여인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말이다.


 왜 작가는 덕혜의 이야기 외에도 그녀를 끝까지 보필하는 복순과 박무영, 기수의 이야기를 넣었을까? 단순히 이야기의 흥미를 높이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을까? 그렇지 않다. 덕혜를 비롯해 이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조선인은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무얼 할 수 있나?"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풀죽은 목소리로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에 자조 어린 표정이 서렸다. 

 "그럴수록 뭔가를 해야지. 불가능하다고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으면 패배를 거듭할 뿐이야." (p.356)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향해 도전하라. 이것이 덕혜가 침묵하며 감추었던 꿈이며, 삶 그 자체였다. 비록 정신병자로 몰리고 조국에게 버림받았지만 그녀는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아직 꿈이 남아 있다. 부디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기억해달라고, 모든 것이 끝나고 절망으로 가득 찬 순간에도 이루고자 하는 것을 위해 노력하라고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다. 마침내 나와 그녀는 같은 마음을 품었다. 나는 그녀에게 공감했다.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의 마음을 나의 삶에 가져올 수 있는 힘, 이것이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주신 큰 축복이다. 그러니 좋은 사람이 되어라.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돌아갈지라도 기억되는 순간, 노력은 걷잡을 수 없는 기적이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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