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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 - 장대한 동슬라브 종가의 고난에 찬 대서사시
구로카와 유지 지음, 안선주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2월
평점 :
오늘도 러시아의 공습으로 우크라이나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났다는 기사를 보았다. 올해 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지도 모른다는 뉴스가 들려왔을 때 '설마 전쟁이 일어날까?' 안이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2월 24일 침공을 시작으로 8개월이 흐른 현재, 전쟁은 장기화 양상을 보이고 있고 러시아는 핵 사용 가능성을 보이며 전 세계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이번 전쟁으로 우크라이나를 떠난 난민이 600만이 넘었고 무고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전쟁 하면 늘 떠오르는 질문이다.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우크라이나 주재 일본 대사와 니혼 대학 국제 관계학부 교수 등을 지내고 현재 우크라이나 연구회를 이끌고 있는 구로카와 유지(1944~ )가 2002년에 발표한 책이다. 저자는 1996년 우크라이나 대사로 임명되면서 '농업국에 부임한다는 생각으로 우크라이나로 향했'(p.5)으나 대사로 일하면서 우크라이나는 '매우 복잡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대국'(p.5)임을 실감하고 자신의 그 '발견'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에 이 책을 썼다고 머리말에서 밝힌다.
이 책은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우크라이나 땅을 둘러싼 역사의 관점에서 풀어냈'(p.9)는데, 그 역사는 기원전 8세기 '기마와 황금의 민족 스키타이족'까지 거슬러 올라가 10~12세기 키예프 공국을 거쳐1991년 소련으로부터의 독립 후 까지 다룬다.
우크라이나 역사를 이야기하는데 키예프 루스 공국을 빼놓을 수 없다. 흔히 공국이라고 하면 작은 나라를 떠올리지만 키예프 루스 공국은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중세 유럽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대국이었다.'(p.41) 키예프 루스 공국이 13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종말을 맞이하고, 우크라이나 땅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지배를 받다가 17세기 코사크가 중심 세력으로 자리를 잡는다.
한편 키예프 루스 공국이 쇠퇴해 가던 시기, 우크라이나 동북쪽에 위치한 모스크바 공국은 강대해지기 시작한다. 1453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모스크바는 자신들을 '제3의 로마'이자 '전全 루스의 군주'라 칭하며 키예프 루스 공국이었던 땅을 차지하기 위해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싸워 조금씩 영토를 확장해 나간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모두 자신들이 '키예프 루스 공국의 직계 후계자'(p.42)라고 주장한다.
러시아의 논리는 키예프 공국이 멸망한 후, 우크라이나 땅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지배를 받아 나라 자체가 소멸해 계승자가 없었으나, 모스크바 공국은 단절되지 않고 존속하여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제도와 문화를 계승해 훗날 러시아 제국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반면 우크라이나의 주장은 당시 모스크바는 민족도, 언어도 달라 16세기가 되어서야 슬라브어를 사용했고, '15세기의 모스크바는 키예프 루스 공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비非슬라브 부족의 연합체'(p.44)였으며,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치,사회,문화는 몽골에 의한 붕괴 이후에도 '서우크라이나 지역에 번성한 할리치나·볼린 공국으로 계승'(p.44)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국격에 관련된 중요한 문제'로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통 계승자 여부에 따라, 자기 나라가 1000년 전부터 이어온 영광의 역사를 가진 나라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러시아의 한 지방에 불과했던 단순한 신흥국인지를 가늠하는'(p.44)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우크라이나 역사를 이야기할 때 키예프 루스 공국 다음으로 코사크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코사크는 15세기 경부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 스텝 초원지대에 거주하던 자치적 무장집단으로 16세기에는 드네프르강 하류에 자포로제 시치를 건설한다. 코사크는 헤트만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조직으로 이들의 삶을 로맨틱하게 그린 것이 니콜라이 고골(1809~1852)의 <타라스 불바>(1835)이다. 율 브리너가 주연을 맡은 영화 <대장 부리바>로도 유명하다.
17세기 폴란드의 지배를 받던 코사크는 크림 타타르와 동맹을 맺고 폴란드와 대적해 왔는데, 1651년 다시 시작된 폴란드와의 전투에서 타타르군이 배신을 하는 바람에 전쟁에서 지게 된다. 당시 코사크의 헤트만이었던 보흐단 흐멜니츠키(1595~1657)는 폴란드에 대항하기 위해 외국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모스크바와 보호협정을 맺는데, 이것이 바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에 두고두고 문제가 되는 1654년의 페레야슬라프 조약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하나의 독립국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일부로 보는 것도 바로 이 조약을 근거로 하는데,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그저 '단기적 군사 동맹일 뿐 흐멜니츠키도 코사크도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모스크바에 영구히 맡겼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p.128)는 것이다.
아쉽게도 조약 원본이 남아 있지 않아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러시아 주장에 따르면 이 조약에 '코사크와 우크라이나인은 차르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이라는 내용이 있다고 하니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되었든 '페레야슬라프 조약은 우크라이나에게는 결과적으로 파멸의 첫걸음이 됐지만 모스크바에게는 제국으로의 길을 내딛는 큰 한 걸음'(p.130)이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크라이나는 '대국이 될 수 있는 잠재력'(p.279)을 가진 나라이다. 면적은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넓고 인구도 5000만 명으로 프랑스에 필적한다. 세계 흑토의 30퍼센트를 차지해 '21세기에 세계가 식량 위기에 처할 경우, 위기에서 구해낼 잠재력을 지닌 나라'(p.279)이다. 철광석은 유럽 최대 규모의 산지를 자랑하고 과학 기술의 수준도 높다.
또한 유럽과 러시아, 아시아를 잇는 통로로 지정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수세기에 걸쳐 많은 세력이 우크라이나 땅을 탐냈고 저자는 이를 두고 '풍요로운 땅을 가진 자의 비극'(p.218)이라고 말한다.
천 년에 걸친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개괄하고 나니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내재해 있는 근본적인 갈등의 원인을 알 듯 하다. 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하는지, 왜 키예프가 아닌 키이우로 불러 달라고 하는지, 동슬라브의 종가(宗家)로서 '루스'라는 이름마저 러시아에게 빼앗긴 우크라이나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자신들의 언어, 종교, 문화를 지켜온 우크라이나. 더 이상은 이 풍요로운 땅이 강대국에 의해 유린 당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저자는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유지하고 안정되는 것은 유럽, 더 나아가 세계의 평화와 안정에 있어 중요하다'(p.280)고 말한다.
부디 하루속히 전쟁이 끝나길 바란다.
1962년 영화 《대장 부리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