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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잡아라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9
솔 벨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평점 :
<오늘을 잡아라 Seize the Day>는 솔 벨로(Saul Bellow 1915~2005)가 1956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솔 벨로는 자신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대도시의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그렸는데, 이 소설 역시 대도시 뉴욕 맨해튼을 배경으로 물질주의 사회에서 삶의 위기에 처한 토미 윌헬름이라는 한 남자의 하루를 그린 소설이다.
주인공 윌헬름은 뉴욕 맨해튼의 글로리아나 호텔에 사는 44세의 유대인이다. 이 호텔에는 토미의 아버지인 애들러 박사도 사는데, 그는 은퇴한 의사로 잘생긴 외모에 돈도 꽤 가지고 있는 능력 있는 노인이다. 그러나 부자 사이는 좋지 않다. 아버지는 나이 40이 넘도록 자기 앞가림 하나 못하는 아들이 부끄럽고 한심하다. 반면 아들은 자식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커녕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아버지가 야속하다.
토미의 현 상황은 참으로 암담하다. 회사의 부당한 처사에 자존심이 상해 사표를 던지고 나와 무직 상태이고, 아내와도 별거 중이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지만 아내는 양육비를 청구하며 절대로 이혼해주지 않는다. 당장 내야 하는 호텔 숙박비도 없어서 아버지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상황이지만 애들러 박사의 태도는 단호하다.
"너한테 줄 돈은 없다. 내 등에 업히지 말란 말이야!" (p.81)
애들러 박사가 토미에게 이렇게 매정한 이유는 그가 자신의 뜻대로 의사가 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다가 결국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도움만 바라는 아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모두 명문 대학을 나왔지만, 과거 토미는 어떤 사기꾼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영화배우가 되겠다며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할리우드로 떠나 7년 동안 엑스트라를 전전하다 실패하고 돌아왔으니 성공한 아버지 입장에서는 얼마나 한심한 아들이겠는가...
그 후 토미는 직장과 가정에서도 모두 실패하여 현재의 상태에 이른 것인데, 문제는 닷새 전 또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 같은 호텔에 거주하는 퉁방울눈의 대머리 탬킨 박사(인지 사기꾼인지)에게 속아 마지막 남은 전재산을 선물 시장에 투자한 것이다. 이쯤 되면 내가 부모라도 참 속상하고 화가 날 거 같은데, 이런 숱한 실수로 점철된 토미 인생의 특징 중 하나는 늘 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 결국엔 그것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고민하고 망설이고 심사숙고한 끝에 하필 무수히 퇴짜를 놓았던 바로 그 방향을 선택하기 일쑤였다. 그의 인생 역정은 그런 오판이 열 번이나 거듭된 결과였다. 할리우드로 가는 것은 크나큰 실수라는 결론을 내렸으면서도 결국 그곳으로 향했다. 아내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면서도 결국 야반도주를 하다시피 결혼해버렸다. 탬킨 박사와 함께 투자하지 않겠다고 결정했으면서도 결국 수표를 내놓았다. (p.36)]
성공한 아버지 입장에서는 토미 같은 아들이 부끄럽고 답답해 보일 수 있다. 내가 토미의 아버지였어도 좋은 말이 안 나왔을 거 같긴 하다. 그러나 독자인 나는 토미의 생각과 심리를 통해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마음의 도움'(p.83)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토미에게 동정심을 갖게 된다. 물론 물질적으로 도와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토미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아버지의 지지와 따뜻한 말 한마디인 것이다.
아버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의지할 곳이 없는 토미는 같은 호텔에 거주하는 정체불명의 탬킨 박사의 도움을 받고자 한다. 이 소설의 제목 '오늘을 잡아라'는 사기꾼 탬킨 박사가 토미에게 항상 강조하는 말로 탬킨 박사는 과거의 실패와 미래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혀 있는 토미에게 "진짜는 현재뿐이야. '지금 여기'뿐이라고. 오늘을 잡아야지"(p.97)라고 충고한다.
의지할 곳이 없는 토미는 탬킨 박사가 의심스러우면서도 혹시나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의 말을 경청한다.
거대한 도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기에는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토미이지만 이런 그에게도 지키고 싶은 가치는 있다. 어느 날 야구 경기 입장권을 사러 지하도를 지나다가 순간 문득 어두운 터널 속 사람들을 보고 인류애를 느낀다. 자신이 비록 못난 인간이지만 이렇게 사랑함으로써 그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한다. 토미는 그날을 떠올리며 오늘 '심판의 날'에 그때의 마음가짐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다짐한다.
토미는 사회적 성공의 잣대로 보면 분명 실패한 인간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인간의 삶에 돈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 토미는 지하도를 걸어가는 '불완전하고 핼쑥한 사람들'(p.122)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느낄 줄 아는 인간이다. 서로 연대하고 이해하는 세상을 꿈꾸는 토미를 향해 '넌 인생의 낙오자야!'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마지막 장에서 자신의 돈을 떼어먹고 사라진 탬킨 박사를 찾으러 길거리를 헤매던 토미는 우연히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장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관에 누워 있는 낯선 사람의 시체를 보는 순간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는데, 이 마지막 장면에서 독자인 나도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래, 토미 씨 속에 있는 거 다 쏟아내요...한 방울도 남김 없이 다...'
[그는 곧 말을 잃고 사고력도 판단력도 잃어버렸다. 도저히 걷잡을 수 없었다. 몸속 깊고 어둡고 뜨거운 곳에서 별안간 눈물샘이 터지며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고, 그러자 온몸이 와들와들 떨리고, 고집스럽던 머리가 수그러지고, 어깨가 구부러지고, 얼굴이 일그러지고, 손수건을 쥔 양손마저 말을 듣지 않았다.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써봤지만 소용없었다. 목구멍에 크게 맺힌 불행과 슬픔의 응어리가 자꾸 치밀어 올랐고, 그는 결국 다 포기해버리고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울어버렸다.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엉엉 울었다. (p.171)]
솔 벨로의 책은 처음 읽어 봤는데, 왜 이 분이 그렇게나 많은 상을 탔는지 알 수 있었다. 또한 상만큼 결혼도 다섯 번이나 했는데, 정말 놀라운 것은 1999년 그의 나이 84세에 다섯 번째 부인에게서 외동딸을 낳았다는 사실이다. 여러모로 참 대단한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