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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여인의 키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평점 :
뒤늦게 <거미여인의 키스>를 읽고 난 후 독후감을 쓸 생각은 없었는데, 샤워를 하던 중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몇 마디 적는다.
읽는 내내 독자를 발렌틴의 역할로 소환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눈에 띄었다. 두 인물의 대화가 이 작품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옥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갇혀있고, 대화는 이들이 그곳에서 무엇을 했고, 무엇을 생각했으며, 무엇을 욕망했는지를 전달하는 거의 유일한 단서다.
흥미로운 것은 두 주인공의 대화 중 대부분이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들려주는 영화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거미여인의 키스>는 대부분 대화로만 구성되어있고, 그 대화 중 대부분은 몰리나가 보았던 영화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몰리나가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발렌틴은 대부분 입을 다물고 있다. 즉 발렌틴은 몰리나의 이야기를 듣는 청자의 역할에만 만족하고 있는데, 이는 <거미여인의 키스>를 읽는 동안 독자가 하는 짓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작품 속에서 발렌틴은 몰리나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동안에는 책을 읽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무슨 책을 읽는 지는 제대로 밝히지 않는다. 작품 내내 발렌틴이 하는 짓거리란, ‘책읽기’, ‘디비자기’, ‘처먹기’, ‘물똥싸기’, ‘몰리나 이야기 듣기’가 전부다.(이건 내가 이 책을 읽는 동안 했던 짓거리와 무척 닮았다!ㅎㅎ) ‘책읽기’, ‘디비자기’, ‘처먹기’, ‘물똥싸기’ 등을 하는 동안에 무슨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겠는가?
고로 대화가 중심인 이 작품은 몰리나가 들려주는 영화이야기가 전부고, 발렌틴은 철저히 듣는 사람 역할만 할 뿐이라고 우겨도 된다. 결론은 작품 전체로 놓고 보면, 발렌틴은 ‘삐꾸’고, 몰리나야 말로 이야기의 ‘갑’이라는 것. 동시에 발렌틴과 독자는 하는 짓거리가 똑같다. 발렌틴은 독자나 다름없다는 것. 그럼 뭐야? 몰리나는 작가 마누엘 푸익이란 말인가? 맞다. 어찌보면 이 작품에는 “나도 여자랍니다.”라는 몰리나의 육성을 발렌틴과 독자에게 학습시키려는 푸익의 음모가 숨어있다. 그 증거, 몰리나와 푸익은 둘 다 게이이며, 지독한 영화광이었다는 것. 너무 억진가?
근데 이건 샤워하면서 떠오른 생각이 아니라 삼천원짜리 커피 마시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머리에서 삼푸 거품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동안 떠오른 생각은 좀 다르다.
이 작품에서 독자의 시선을 발렌틴에 고정시키는 것은 멍청하고 단순한 이해라는 것. 작가 마누엘 푸익은 이 작품에서 서술자라기보다 기록자 역할을 하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작품은 대화로만 이뤄진 작품이다. 아니 대화 말고 몇 가지 요소가 더 있다. 사건 기록이라든가, 신문기사, 각주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조차 해석과 설명보다는 기록 및 자료 역할을 하고 있다.
<거미여인의 키스>는 감옥에 갇힌 몰리나와 발렌틴에 관한 하나의 ‘감시 기록’이라할 수 있다. 지극히 객관적인 소스만 나열하고 있다. 마치 감옥에 설치한 도청장치를 통해 몰리나와 발렌틴의 대화를 엿듣는 형국이다. 간간이 삽입된 몰리나와 소장의 대화 역시 마찬가지다. 사건 취조 녹취록에서 발췌한 내용같다. 결국 독자는 발렌틴의 시선으로 몰리나의 이야기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훔쳐듣는 도청자의 시선으로 소환된 것이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독자는 상상하고, 추측하고, 이입한다. 그러고 보니 <타인의 삶>이라는 독일영화가 떠오른다. 한 연극연출가의 생활을 감시하는 도청전문가의 이야기를 다룬 그 영화는 ‘무대와 객석’, ‘예술과 독자’와의 관계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푸익은 전통적인 소설기법에서 벗어난 독특한 양식을 통해 독자의 위치를 한 곳에 묶어두지 않고 이리저리 옮아가게 만든다.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동안 독자는 발렌틴/몰리나/감시자/독자의 역할을 무의식적으로 오가며 이야기 속에 빠져든다.
솔직히 명성에 비해 무시무시할 정도로 재미있거나 놀라운 작품은 아니었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흥미로운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이건 순대국 먹다가 떠오른 생각인데, 사람 사는 동네는 모두 비슷하다.
어쩌다가 1950,60년대 우리나라 정치상황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후 읽는 책마다 정치적 은유와 풍자가 선명하게 읽히더라. 아르헨티나든, 인도든, 대한민국이든, 도미니카 공화국이든 독재국가의 모습은 비슷하고, 독재자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비델라를 인디라 간디로 바꾸고, 인디라 간디를 이승만으로 바꾸고, 이승만을 다시 트르히요로 바꿔서 이해해도 무방하다. 이건 무바라크→후세인→김정일→카다피 등으로 개명놀이를 계속할 수 있다는 말이다. <거미여인의 키스>가 출간될 당시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상황을 모름에도 작품을 이해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었다.
독후감을 마무리하며 느닷없이 떠오른 생각. 이 따위 리뷰를 끝까지 읽는 사람이 있을까? 이 글을 서재에 올릴 필요가 있을까?
참 자꾸 ‘거미여인의 키스’를 ‘거미여인의 최후’라고 실수하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