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의 길
서광원 지음 / 흐름출판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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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사장이 아니더라도, 한해 두해 나이를 먹어가는 걸 실감하는 사람이라면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삶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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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라이터
리처드 포드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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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도서관에서 닉 혼비의 <피버피치>가 스포츠서가, 그것도 축구분야에 꼽혀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런 어이없는 분류가 오히려 닉 혼비에게 어울리는 거 같아 키득거렸다. 닉 혼비라면, ‘우스꽝스럽지만 불만 없음!’, 뭐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스포츠라이터>는 장편소설이라는 문구가 책표지에 버젓이 인쇄되어 있기에 <피버피치>같은 황당한 대접을 받지는 않을 테지만, 그 제목이 풍기는 명백한 뉘앙스로 인해 누구처럼 생각없는 독자는 분명히 스포츠에 관한 신나는 소설로 오해할거다. 그러나 몇 페이지만 읽어보면 깨닫게 된다. <스포츠라이터>는 ‘스포츠’ 소설이 아니다. <스포츠라이터>는 ‘라이터’인 한 남자에 관한 쓸쓸하고 서늘한 소설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소설을 쓴 리처드 포드라는 정말 글을 ‘개잘쓰는’ 작자라는 것도 알게 된다.

 

<스포츠라이터>를 퍽이나 오랫동안 읽었다. 몇 주가 걸렸는지 모른다. 초반 80페이지 가량은 아마 세 번쯤 읽었을 거다. 지루하거나 어려워서가 아니다.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도록 하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출몰한다. 인물들의 사연을 듣고 넘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느끼며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데 인물들이 하나같이 멘탈붕괴 직전이다. 겉으로는 부족한 거 없이 멀쩡하게 보이는 아저씨, 아줌마 들. 하지만 속은 균열 그 자체다. 이런 지경이니 술술 책장을 넘기며 폭주하는 즐거운 독서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이 작품이 진정 무서운 것은 ‘희망없음’과 ‘멘붕’을 이야기하는 태도다. 앞서 말했지만 주인공은 모두 먹고 살만하다. 그러니까 그냥 사는 건 문제 없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자신만의 분명한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남은 인생도 지금까지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살아갈 것이다.


문제는 여태껏 고수해온 삶의 태도가 그들을 붕괴직전으로 몰고 갔다는 거다. 꼰대가 된 그들은 이것을 깨닫고 있다. 그런데 삶의 방식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거다. 아니 바꿀 수 없다고 믿는다. 기껏해야 애써 멀쩡한 척 연기하며 버티거나, 머리통에 총알을 박고 자살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인간들이 좀비처럼 시시때때로 출몰하니 애초에 훈훈함과는 삼만 광년 떨어져있을 수밖에.

 

이런 생각을 해봤다. 레이먼드 카버가 장편소설을 쓴다면 이런 작품을 쓰지 않을까? 그만큼 <스포츠라이터>는 미국적이다. 부활절, 대도시, 중산층 거주지역의 풍경은 너무 미국적이라 낯설고 또 낯설다. 특히나 뉴저지, 뉴욕, 디트로이트 등 동북부 도시의 봄풍경을 내가 어찌 생생히 떠올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주인공의 상처와 어리석음에 크게 공감하는 순간 ‘미국소설’ <스포츠라이터>는 누구나 공감할 만한 보편적인 이야기가 된다.
(스타인벡과 피츠제럴드, 셀린저, 필립 로스 등을 언급하며 미국소설 어쩌구저쩌구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내가 잘 모른다는 사실이 번쩍-!!!했기에 집어치운다. 이건 내가 오늘 내린 결정 중 가장 현명한 결정인 거 같다.)

 

어리석음에 관해서는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다. <스포츠라이터>를 읽으며 느낀 건데, 인물의 어리석음은 독자를 사로잡는 가장 큰 무기인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이나 영화를 떠올려보면, 주인공들은 대개 일생일대의 중요한 순간에 꼭 어리석은 짓거리를 하고 만다. 그 결과 주인공은 회복불능의 상태가 된다. 파국, 파멸, 파탄, 파경, 파산... 이 모든 것은 어리석은 결정을 한 주인공의 몫이다. 퍼뜩 떠오른 작품들을 살펴보면, <위대한 개츠비>가 그렇고..., 영화 <레슬러>가 그랬고..., 드라마 <로스트>가 그러하며..., 챈들러 소설의 주인공들이 그러하다. 어리석은 자에 대한 연민은 분명히 독자와 관객을 사로잡는 비급이었던 것 같다.(적어도 작품의 완성도와는 별개일지라도 말이다.) 더욱 슬픈 것은, 본인들이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다는 점이고, 그들이 대부분 남자라는 거다.(아, 문득 어리석은 결정을 내린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이나 영화의 리스트를 작성하고 싶다. 어리석음의 종결자로 불릴 만한 인물로 누가 있던가?)

 

리처드 포드는 퓰리처상 수상작가다. 수상작은 <스포츠라이터>의 후속작 <독립기념일>이란다.(<스포츠라이터>는 제목을 ‘부활절’로 달아도 무방한 소설이다.) 제목부터 오지게 미국적이라 정이 가질 않는다. 그런데 읽고 싶다. 편집자님 역자님 들이시여,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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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내 사랑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3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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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모자를 벗어서 머리를 만져보았다. 멋지고 오래된 내 머리, 너무 오랫동안 달고 다녔지. 지금은 약간 무른 과육 같고 꽤 아팠다. 그렇지만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가볍게 얻어맞은 정도였다. 모자가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대로 여전히 쓸만한 머리였다. 어쨌거나 내년에도 쓸 수 있을 것이다.(p96)

지난 주 내내 며칠간 뒷골이 당길 정도로 짜증이 범람했다. 폭주하는 ‘골땡김’을 극복하는 처방이랍시고 한 짓거리. 책장에서 챈들러를 꺼내 읽으며 매실주 음용하기! 쫌 찌질하다. 이런 때 챈들러라니? 무슨 허세냐. 게다가 위스키 사워나 김릿도 아니고 발암물질 함유가 다분히 의심되는 매실주가 뭐냐?

2.
굴착기 삽만 빼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얻어맞은 것처럼 얼굴이 여기저기 찌그러져 있었다.(p.14)

암튼 오랜만에 말로를 다시 만나는 동안 잠시 골땡김을 잊었던 것은 사실이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책장을 넘기다가 키득거리고 웃었으니까. ‘말로가 날 웃겼어. 말로가 나를 웃겼다고.’라고 혼잣말을 해본다.

3.
어찌나 예의 바르던지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그를 침실까지 업어다 주고 싶을 지경이다.(p.182)

원래 책 읽는 속도가 느린 편이지만, 확실히 챈들러를 읽는 속도는 더욱 느리다. <안녕 내 사랑>을 거의 나흘 이상 붙들고 있었으니까. 오래전 처음 읽었을 때는 더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을 거다. 하지만 분명히 그럴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느리게 읽기와 다시 읽기의 댓가를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챈들러를 추앙하고, 말로를 흠모하기에 억지로라도 엇나가고 싶다. 하지만 말로를 만나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즐겁기에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챈들러를 추앙하고, 말로를 흠모하노라고. 어찌나 흠모하는지 그를 침실까지 업어다 주고 싶을 지경이다. 아고 허리야...

4.
한기가 느껴지고 나 자신이 역겨워졌다. 가난뱅이의 주머니를 턴 기분이었다.(p.198)

말로는 죄 많고 더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위악적인 태도를 보호색으로 삼는다. 그것이 때로는 지독한 냉소나 환멸로 표출되기도 하고, 때로는 신념을 지키는 다크 나이트의 정의로움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하지만 역시 그의 매력은 냉소와 환멸이다. 그것은 썩어빠진 세상에 대한 야유이기에 전혀 밉살스럽지 않다.

5.
“나는 매끈하고 화려한 여자가 좋아요. 비정하고 죄를 잔뜩 짊어진 여자들 말이에요.”(p.287)

북하우스판 번역은 매우 충실한 편이다. <빅슬립>부터 <기나긴 이별>까지 차례로 읽을 때도 느낀 점이지만 뒤로 갈 수록의 말로에 어울리는 번역본으로 진화한다. 다만 다시 거슬러 <안녕 내 사랑>을 펼쳐보니 말로의 어투가 조금 공손하고 예의바르게 들린다. 깍듯한 말투로 이죽거리는 말로도 재미있긴 하다. 하지만 터프한 척 허세작렬하는 남자, 그게 말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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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 2011-10-08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리뷰를 읽고도 책을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lazydevil 2011-10-09 12:15   좋아요 0 | URL
허걱, 오디션 프로에서 심사위원들에게 칭찬을 받는 기분임다.^^;;

Forgettable. 2011-10-08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번에 읽으셨군요?? 재밌죠 ㅋㅋ 동시대(?)에 님과 같은 책을 읽은 경우는 이번이 첨이 아닐까 싶네요 ㅎ 전 챈들러가 좋은지 말로가 좋은지 점점 헷갈립니다ㅡ ㅋㅋ

lazydevil 2011-10-09 12:24   좋아요 0 | URL
일년에 한번 정도는 꼭 말로를 읽어줘야 말로식 허세를 흉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ㅋㅋㅋ

전 헛갈리리지 않아요. 챈들러는 질투, 말로는 흠모임다.

느린산책 2011-10-08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씨 어찌 이리 재기발랄 솔직본능 멘트들이 날라다닐 수 있는 거인지..
정말 부러워요. 데빌님. (아 질투나)

lazydevil 2011-10-09 12:21   좋아요 0 | URL
부러우면 지는거...ㅎㅎㅎ
근데 저따위를 질투하는거.. 아무짝에 쓸모 없다는...^^;;

쥬베이 2011-10-14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azydevil님~ 리뷰에서 말로의 향기가 풍기는데요^^
레이먼드 챈들러 작품은 아직 읽은게 하나도 없어요.
입문자가 읽을만한거 하나 추천해 주세요^^
요즘 주말에 공부는 안하고 소설만 읽고 있어서 ㅋㅋㅋ

lazydevil 2011-10-17 15:20   좋아요 0 | URL
음.. 말로 시리즈는 순서대로 읽어야 할 거 같아요.
아마도 첫작품 <빅슬립>이 고비가 아닐까...시리즈 전체를 놓고 보면, <빅슬립> 후반부터 힘이 폭발하기 시작해요^^
전 개인적으로 <리틀 시스터>를 제일 좋아합니다. 좀 말로답지 않은 구석이 풍기지만 <호수의 여인>도 무척 재미있게 읽어요. 물론 가장 역작은 <기나긴 이별>같아요^^
 
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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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거미여인의 키스>를 읽고 난 후 독후감을 쓸 생각은 없었는데, 샤워를 하던 중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몇 마디 적는다.

읽는 내내 독자를 발렌틴의 역할로 소환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눈에 띄었다. 두 인물의 대화가 이 작품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옥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갇혀있고, 대화는 이들이 그곳에서 무엇을 했고, 무엇을 생각했으며, 무엇을 욕망했는지를 전달하는 거의 유일한 단서다.
흥미로운 것은 두 주인공의 대화 중 대부분이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들려주는 영화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거미여인의 키스>는 대부분 대화로만 구성되어있고, 그 대화 중 대부분은 몰리나가 보았던 영화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몰리나가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발렌틴은 대부분 입을 다물고 있다. 즉 발렌틴은 몰리나의 이야기를 듣는 청자의 역할에만 만족하고 있는데, 이는 <거미여인의 키스>를 읽는 동안 독자가 하는 짓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작품 속에서 발렌틴은 몰리나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동안에는 책을 읽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무슨 책을 읽는 지는 제대로 밝히지 않는다. 작품 내내 발렌틴이 하는 짓거리란, ‘책읽기’, ‘디비자기’, ‘처먹기’, ‘물똥싸기’, ‘몰리나 이야기 듣기’가 전부다.(이건 내가 이 책을 읽는 동안 했던 짓거리와 무척 닮았다!ㅎㅎ) ‘책읽기’, ‘디비자기’, ‘처먹기’, ‘물똥싸기’ 등을 하는 동안에 무슨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겠는가?
고로 대화가 중심인 이 작품은 몰리나가 들려주는 영화이야기가 전부고, 발렌틴은 철저히 듣는 사람 역할만 할 뿐이라고 우겨도 된다. 결론은 작품 전체로 놓고 보면, 발렌틴은 ‘삐꾸’고, 몰리나야 말로 이야기의 ‘갑’이라는 것. 동시에 발렌틴과 독자는 하는 짓거리가 똑같다. 발렌틴은 독자나 다름없다는 것. 그럼 뭐야? 몰리나는 작가 마누엘 푸익이란 말인가? 맞다. 어찌보면 이 작품에는 “나도 여자랍니다.”라는 몰리나의 육성을 발렌틴과 독자에게 학습시키려는 푸익의 음모가 숨어있다. 그 증거, 몰리나와 푸익은 둘 다 게이이며, 지독한 영화광이었다는 것. 너무 억진가? 
근데 이건 샤워하면서 떠오른 생각이 아니라 삼천원짜리 커피 마시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머리에서 삼푸 거품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동안 떠오른 생각은 좀 다르다.
이 작품에서 독자의 시선을 발렌틴에 고정시키는 것은 멍청하고 단순한 이해라는 것. 작가 마누엘 푸익은 이 작품에서 서술자라기보다 기록자 역할을 하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작품은 대화로만 이뤄진 작품이다. 아니 대화 말고 몇 가지 요소가 더 있다. 사건 기록이라든가, 신문기사, 각주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조차 해석과 설명보다는 기록 및 자료 역할을 하고 있다.
<거미여인의 키스>는 감옥에 갇힌 몰리나와 발렌틴에 관한 하나의 ‘감시 기록’이라할 수 있다. 지극히 객관적인 소스만 나열하고 있다. 마치 감옥에 설치한 도청장치를 통해 몰리나와 발렌틴의 대화를 엿듣는 형국이다. 간간이 삽입된 몰리나와 소장의 대화 역시 마찬가지다. 사건 취조 녹취록에서 발췌한 내용같다. 결국 독자는 발렌틴의 시선으로 몰리나의 이야기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훔쳐듣는 도청자의 시선으로 소환된 것이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독자는 상상하고, 추측하고, 이입한다. 그러고 보니 <타인의 삶>이라는 독일영화가 떠오른다. 한 연극연출가의 생활을 감시하는 도청전문가의 이야기를 다룬 그 영화는 ‘무대와 객석’, ‘예술과 독자’와의 관계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푸익은 전통적인 소설기법에서 벗어난 독특한 양식을 통해 독자의 위치를 한 곳에 묶어두지 않고 이리저리 옮아가게 만든다.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동안 독자는 발렌틴/몰리나/감시자/독자의 역할을 무의식적으로 오가며 이야기 속에 빠져든다.
솔직히 명성에 비해 무시무시할 정도로 재미있거나 놀라운 작품은 아니었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흥미로운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이건 순대국 먹다가 떠오른 생각인데, 사람 사는 동네는 모두 비슷하다.
어쩌다가 1950,60년대 우리나라 정치상황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후 읽는 책마다 정치적 은유와 풍자가 선명하게 읽히더라. 아르헨티나든, 인도든, 대한민국이든, 도미니카 공화국이든 독재국가의 모습은 비슷하고, 독재자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비델라를 인디라 간디로 바꾸고, 인디라 간디를 이승만으로 바꾸고, 이승만을 다시 트르히요로 바꿔서 이해해도 무방하다. 이건 무바라크→후세인→김정일→카다피 등으로 개명놀이를 계속할 수 있다는 말이다. <거미여인의 키스>가 출간될 당시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상황을 모름에도 작품을 이해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었다.
 
독후감을 마무리하며 느닷없이 떠오른 생각. 이 따위 리뷰를 끝까지 읽는 사람이 있을까? 이 글을 서재에 올릴 필요가 있을까?

참 자꾸 ‘거미여인의 키스’를 ‘거미여인의 최후’라고 실수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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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09-22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이지데빌님은 뭘 많이 하시면 생각이 많이 떠오르시나 봐요. 책은 못 읽었는데 저는 못 읽은 책 리뷰에만 관심이 많아서, 너무 재밌어서 페이퍼 읽었어요. 얼마전부터 가끔 오는데,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lazydevil 2011-09-22 16:31   좋아요 0 | URL
저도 예전에 작품보다 리뷰에 읽는 걸 더 좋아한 적 있습니다. 소설이든, 시든 리뷰만 읽었던 기억이...ㅎㅎ
요즘은 그 반대죠. 작품만 읽고 해설은 대충 넘겨봐요^^ 근데 알라딘에 리뷰랍시고 올리니 좀 웃기죠. ㅋㅋ
반갑습니다.^.^

June* 2011-09-22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페이퍼. 막ㅡ 저녁을 먹고 책을 읽으려고 앉아있던 참에 폰으로 여기저기 서재탐방 중이거든요. 소장은 하고 있는 책인데 몇년째 먼지 속에 묻혀있어요. 리뷰를 보니까 갑작스레 읽고싶어지는걸요 ^^

lazydevil 2011-09-23 09:30   좋아요 0 | URL
저도 벼르고 벼르다가 이제서야 읽었습니다. 전 푸익의 다른 소설 <천사의 음부>까지 쟁여놨어요..ㅡ.ㅡ 암튼 읽고 나니 빚청산한 기분이랄까요?ㅎㅎ 준님도 얼릉 청산해보세요.
반갑습니다.^.^

Forgettable. 2011-09-22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끝까지 읽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
리뷰써달라고 부탁한 것도 있고 해서 ^^

전 이거 재밌었단 기억밖에 남아있지 않아요. 그런데 마누엘푸익이 정말 영화광에 게이였나요?? 흥미로운 정보군요.. 이 책과 [타인의 삶]이 함께 놓이다니, 그럴법해요.
[타인의 삶]에서 감시자에게 주는 말인 'HGW XX/7 gewidmet, in Dankbarkeit' 이 헌사와..
[거미여인의 키스]에서 제가 밑줄 그어두었던
'하지만 커튼을 젖히고 몇 분 동안에 걸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음.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북서쪽을 바라보고 있었음.
즉 후라멘토가와 바우네스가의 교차로,
좀더 정확하게 방향을 표시하자면,
교도소가 있는 비야데보토 지역을 향해 쳐다보고 있었음.'

이 부분이 묘하게 겹치는 느낌이네요..
재밌는 리뷰 잘 읽었습니다. ^^

lazydevil 2011-09-23 09:33   좋아요 0 | URL
뭡니까, 코드번호까지 증거자료로 삼는 포겟님의 댓글....ㅋㅋ
근데, 인용하신 대목...
다시보니 참 쓸쓸하네요. 감시일지에서 몰리나의 내면이 백푸로 묻어나는군요.
푸익, 정말 대단합니다.

울창 2011-09-29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따위 리뷰"에 관심이 많습니다.^^

lazydevil 2011-09-29 17:45   좋아요 0 | URL
뜨거운 격려가 다른 '이 따위'를 부르네요^^ 감사합니..ㅎ
 
한밤의 아이들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9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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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랑 세 작품만 놓고 보자.(<광대 살리마르>, <피렌체의 여마법사>, <한밤의 아이들> 세 작품만 읽었으니까.)
<광대 살리마르>가 최고다. 인도의 역사를 환타지, 박식함, 수다로 능청스럽게 엮어내는 솜씨에 그야말로 입을 닥치고 감탄만 했다. 거기다가 심장을 뜨겁게 하는 감동의 순간까지 있었으니, 돌이켜보면 <광대 살리마르>는 루슈디 최고의 작품이다.

그러지만 말이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아니 조금만 더 읽어보면, 이게 좀 그렇지 않다. <광대 살리마르>의 작품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최고의 작품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루슈디라면 죽고 못 사는 독자라면, 함께 나이를 먹으며 그의 행보를 쭉 지켜본 동시대 독자라면 <광대 살리마르>를 윗길로 치지는 않을 것이다. ‘최고의 작품 <광대 살리마르>’는 순전히 늦된 독자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니까 ‘삼십대의 소지섭’을 첫만남으로 기억하는 나같은 사람말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천재성이 소란스럽게 요동치는 데뷔작 <한밤의 아이들>로 루슈디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응당 <한밤의 아이들>을 최고의 작품으로 꼽을 것이다.

루슈디를 알고 싶으면, 인도를 알고 싶으면, 인도에 가보고 싶다면, 인도 영화를 보다 잘 이해하고 싶다면, <한밤의 아이들>을 읽어야 한다. <한밤의 아이들>을 읽은 후 인도와의 만남을 어떻게 시작해야할 지 알 것 같았다. 루슈디는 시종일관 인도의 삶에 대해 들려준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인도의 새역사가 시작된 순간부터,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로 찢겨진 굴곡의 역사를 호들갑스럽고 능청스러운 입담으로 기록하며 풍자한다. 아픔의 역사를 한편의 유쾌한 소동극인 마냥 떠들어댄다. 이제 나는 인도에 대해 비로소 조금 알 것 같다.

달랑 세 작품만 놓고 보자.
루슈디는 늘 인도만 이야기한다. 그런데 매 작품에서 보여주는 인도는 이형동체의 모습이다. 그래서 인도를 만나는 맛과 재미가 다르다.
<한밤의 아이들>이 인도의 근현대사를 42.195 킬로미터로 요약한 마라톤 같은 작품이다. 반면 <광대 살리마르>는 카슈미르의 아픔과 미국의 위선에 초점을 맞춘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이고, <피렌체의 여마법사>는 무굴제국의 영광과 쇠락을 그린 매혹의 시대극이다. 이들 작품에 비춰지는 인도의 모습은 그야말로 만화경 속 이미지 같다. 이슬람 문화와 힌두 문화,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뒤섞인 인도는 힌두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이름만큼이나 변화무쌍하다.

진심으로 인도에 가보고 싶어 한 적이 없다. 기회가 되면 한번 가봐야 할 곳 정도랄까? 아마 공짜 항공마일리지를 당장 써야하는 상황에 놓인다면, 인도는 절대 삼등 안에 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루슈디가 바꿔 놓았다. 겁 많은 여행자에게 인도는 여전히 두려운 곳이지만 <피렌체의 여마법사>에 묘사된 무굴제국의 옛 수도, 비운의 도시 시크리의 실제 모습을 보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루슈디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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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1-09-14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국인이 보지 못하는 인도를 책을 읽으면 볼 수 있는건가요?
다 스러져가는 폐허가 된 왕국의 무너진 궁궐터에 앉아 바람을 쐬며 눈을 감고 화려한 인도 여자들이 인도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그것을 감상하는 왕의 모습을 상상한적이 있는데요. ㅋㅋㅋㅋㅋㅋ 유치하지만 그래도 손에 꼽는 행복한 기억입니다.

궁금한 책이네요.

lazydevil 2011-09-15 10:53   좋아요 0 | URL
유치하다니요???
'다 스러져가는 폐허가 된 왕국의 무너진 궁궐터에 앉아 바람을 쐬며 눈을 감고 화려한 인도 여자들이 인도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그것을 감상하는 왕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 <--- 이거 해보려고, 저도 인도에 가고 싶은 겁니다.

수다스러운 루슈디는 늘 재미있더라고요.
이상하게 읽을 수록 작가의 호감도는 옅어지고, 작품의 호감도가 커져만 가는, 루슈디와 작품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