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덜 깬 아침, 아른 거리는 여자. 그녀의 눈을 보며 세상과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는데, 한달전에 헤어졌다. 덕분에 성숙한 거 같다. 근데 딱히 실감은 나지 않는다. 젠장, 술은 깨질 않고 그날 아침만 떠오른다.
행복한 나날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가 남긴 지랄같은 기분만 남았구나. 지금 숙취처럼 말이야. 하지만 난 변할 거다. 그날 아침 기억 때문에, 숙취 따위로 이렇게 망가질 순 없어. 일어나자! 엿 같은 상황은 조만간 바뀌겠지.
내가 또 사랑이란 걸 할까? 뭐 그렇다면 또 실연을 당하고, 또 병신이 되겠지. 아님 운이 좋으면 실연의 법칙에서 예외가 될 수도... 젠장, 그날 아침 그녀가 또 아른거린다. 골 아파.
속이 울렁거려서 도무지 쉴 수 없군. 난 제대로 망가졌는데, 그녀는 멀쩡하게 지내고 있겠지. 그녀가 무엇을 하든 나는 끝까지 모를 거다. 사람들이 나한테 이야기해주기 전까지는, 내 눈으로 그녀가 뭘하는 지 직접 보지 않는 이상 말이야. 사람들이 뭐라든 그냥 그렇다고.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상과 사랑에 빠진 느낌이 들게 하던 그녀. 자꾸 아른 거린다. 젠장, 아침인데 술이 깨질 않아.
내 이야기가 아니다. 엘리엇 스미스의 ‘say yes'라는 노래의 가사다.
어제 아침 저녁 오가며 이 노래를 대략 50번은 들은 거 같다. 아이팟 랜덤 모드로 듣다가 갑자기 가사가 궁금해졌고, 반복재생 모드로 줄기차게 들었다. 좋은 곡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오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중딩영어 단어로 된 가사인데, 도무지 의미를 모르겠더란 말이다. 아무리 내 영어가 병신이라지만 어이가 없었고, 오기가 발동했다.
웹서핑을 하니 성기완이 번역한 가사가 있었다. 세 번 읽어봤지만 더 병신된 느낌. 이건 아니잖아. 원문 가사를 소개한 외국 웹사이트에서도 가사의 의미를 두고 지들끼리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 같더라. 엘리엇이 술(혹은 약?)에 ‘쩔어’ 쓴 가사라서 그런가? 그럼 나도 술(혹은 약?)에 ‘쩔어’ 노래를 듣고 가사를 보면 통하려나?
암튼 버스에서 가사원문과 함께 반복청취를 하며 ‘진짜 멋대로 해석’한 것이 윗글이다. 노래에서 줄기차게 반복되는 'the morning after'가 ‘숙취’와 ‘그날 아침’을 함께 의미하는 것 같아서 맘대로 이해했다. 꿈보다 해몽!
전에 알던 친구는 ‘엘리엇 스미스는 들을수록 지겹다’고 했다. 나는 엘리엇 스미스의 열혈팬은 아니다. 하지만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그 며칠 전에는 유투브에서 엘리엇의 라이브 동영상을 보고 울컥한 바 있어 솔직히 더욱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난 침묵했다. 죽은 사람을 두고 갑론을박하는 게 싫었고, 그 친구는 엘리엇 스미스의 앨범을 한번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니까. 그런데 오늘 만원버스 구석 좌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say yes'의 가사를 해석하고 있자니 그때 엘리엇을 위해 반박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리고 죽은 엘리엇에게 미안했다. 엘리엇 형, 미안해!
집에 돌아와 엘리엇의 앨범들을 뒤졌다. 오랜만이다. 근데 앨리엇의 마지막 앨범의 CD가 실종되었다. 케이스와 북클릿만 보일 뿐 정작 CD는 보이질 않는다. 엘리엇은 이렇게 또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엘리엇 형, 미안해!
뭐 이제 다 지난 이야기다. 엘리엇도, 그 친구도, 엘리엇 때문에 혼자 맘 상한 것도, 사라진 CD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도망가지 않은 CD를 듣는 거... 자살하기 전 마지막 무대의 영상을 보며 마음 아파하는 거... 그것 뿐이다. 죽은 사람한테 다시 살아나라고 할 순 없지 않는가?
2003년 9월 19일 마지막 무대 중에서.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f8oLojgTMVA
나는 바보. 유투브 동영상 띄우는 거 몰라서, URL만 뿌린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