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셉션 - Inceptio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다른 사람의 꿈속에 들어갈 수 있다면? <인셉션>은 이런 발상에서 시작합니다. 재미있는 아이디어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비밀을 훔쳐보거나 조작하려는 시도로 확장됩니다. 주인공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다른 사람의 꿈에 침입하는 전문가입니다. 저 밑바닥에 있는 무의식의 영역까지요.
비밀을 캐려하는데 꿈의 주인이 가만히 있을 리 없습니다. 침입자의 존재를 인지하는 순간 방어체계가 작동하는데, 침입자를 제거하려는 사람들(킬러 혹은 군인)이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무의식이 비밀스러운 생각을 들춰내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거죠. 마치 백혈구(이건 함께 영화를 본 사람의 표현입니다. 적절한 거 같아요)처럼요. 재미있는 것은 침입자인 코브의 무의식도 동시에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코브를 방해하고 위협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꿈속에 자기 무의식이 나타나 다른 사람의 무의식이 공조 아닌 공조를 펴는 거죠. 어때요 재미있지 않나요? 




이런 흥미로운 아이디어로 출발한 <인셉션>은 뜻밖에 지루하고 따분했습니다. 괜찮은 아이디어를 황홀한 스펙타클로 형상화했는데도 말입니다. 왜일까요? 아마도 극적 갈등이 희미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주인공들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미션을 수행합니다. 다른 사람의 꿈에 들어가 거짓 기억을 주입시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세 번에 걸친 꿈속 침투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꿈속에서 또 꿈속으로, 다시 꿈속으로 들어가 꿈을 꾸는 인물의 내면에 자리한 비밀을 찾아내어 새로운 기억을 이식해야합니다. 점입가경(漸入佳境). 그러니까 점점 들어갈 수록 놀라운 일들이 펼쳐지는 거죠. 마치 거듭되는 컴퓨터 게임의 미션처럼 말입니다.(혹시 <인셉션>의 원작이 게임인가요? 게임에 대해 무지하고, 검색하는 것도 귀찮네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꿈속의 꿈이 겹치는 설정, 이중삼중으로 미션을 수행하는 것은 정말 컴퓨터 게임의 스테이지 진행과 흡사합니다. 각 스테이지 마다 뛰어넘어야할 미션이 있을 뿐 플레이어에게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똑같습니다.

물론 주인공 코브에게 갈등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무의식에는 아내를 죽도록 했다는 것에 대한 죄의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코브의 아내(그러니까 코브의 무의식)는 꿈속에 나타나 번번이 코브의 임무를 방해합니다. 이런 아내를 볼 때마다 코브는 괴로워하죠. 그런데 이것이 코브가 맡은 임무와 전혀 관계가 없어요. 코브의 임무는 피셔라는 인물의 꿈에 침투하여 새로운 정보를 입력하는 것. 그래서 피셔의 갈등을 해결하는 겁니다. 결국 영화에서 내내 펼쳐지는 엄청난 스펙타클은 주인공과 감정적 교감이 전혀 없는 피셔를 위한 이벤트입니다. 피셔를 구원하기 위한 깜짝쇼인 거죠.
그럼 주인공 코브의 갈등은? 깜짝쇼를 방해하는 요소의 하나 일 뿐입니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에요. 이런 이유로 주인공 코브가 번민하고 눈물을 흘려도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컴퓨터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가 휴대폰 통화를 하느라 제대로 미션을 클리어하는데 방해받는 느낌이랄까요? 둘은 전혀 엮기지 않습니다. 




인간의 꿈을 소재로 하고 있고, 무의식과 림보, 토템을 들먹이고 있지만 <인셉션>은 전혀 지적인 작품이 아닙니다. 꿈이라는 것의 특성을 잘 소화하지도 못했고, 무의식과 림보, 토템도 멋지게 활용하지 못하고 이름만 따온 수준입니다.
사실 <인셉션>의 꿈은 우리가 알고 있는 꿈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의 무의식이 은유와 환유로 재구성된 것과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말입니다. 프로이트에 일자무식인 사림이 봐도 전혀 프로이트적인 세계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꿈과 인간의 뇌에 관한 과학적인 근거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럼 <인셉션>의 꿈은 무엇일까요? <매트릭스>의 시뮬라크 세계와 같습니다. 현실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답을 시뮬라크 세계(꿈)에서 찾는다는 설정이 똑같습니다. 시뮬라크의 세계를 겹겹이 쌓아놓아 그 구조를 조금 복잡하게 만들었을 뿐 다를 바가 없습니다. 꿈속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면 림보라는 동일한 세계에 빠진다는 설정이 그 증거입니다. 저마다 다른 꿈을 꾸어도 그들이 떨어지는 림보는 하나로 설정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영화 속에서는 이를 정당히 얼버무리고 있는 것 같았어요. 아니면 제가 얼버무리고 있거나요. 사실 좀 지루하게 본 터라 대사에 집중하지 않은 장면 종종 있거든요.)
결론만 말하면 가상현실에나 어울리는 설정을 꿈이라는 소재에 우격다짐으로 끼워 넣은 듯한 인상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연출도 영화를 지루하게 만드는데 한몫 합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드라마에는 약해요. 감정을 쌓아가기보다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정보전달에만 관심을 두거든요. 사건이 긴박하게 전개되기는 하지만 늘 서사구조가 느슨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어요. 특히 씬과 씬의 연결이 거칠기 그지없는데, 뛰어난 편집으로 이를 극복하죠. 영화를 보다보면 마치 무성영화처럼 배경음악이 끊이질 않고 흐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도 또한 거칠게 이어붙인 씬들을 눈가림하기 위한 수단인데 때로는 몹시 귀에 거슬립니다.
반면 절정의 순간을 상정해놓고 스트레이트하게 몰아붙이는 힘은 대단합니다. 거의 뻔뻔스러울 정도로 막판 승부만을 위해 가속을 붙입니다. 관객들이 인물과 동화하는지 어쩐지는 관심 없어요. 리듬감 부재! 언제나 클라이맥스의 폭발만을 위해 감정을 폭주기관차처럼 달려가니까요.
<다크 나이트>의 경우 크리스토퍼 놀란의 스타일이 놀라운 위력을 발휘한 작품입니다. 하이라이트인 ‘배트맨과 조우커의 대결/투페이스의 탄생/선상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교차하면서 긴장감과 함께 묵직한 주제가 떠오릅니다. 그런데 <인셉션>의 경우 그렇지 못합니다. 실패죠. 긴장감은 힘을 발휘하나 주제가 부각되지 않기에 공허합니다. 사건의 설정만 있을 뿐 인물의 갈등이 없었으니 주제가 떠오를 리 없지요.
똑같은 스타일의 영화인데 왜 <다크 나이트>는 성공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캐릭터의 힘입니다. 배트맨/조우커/하비 덴트(투 페이스)의 캐릭터는 이미 분명한 갈등요인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서로 뒤엉키며 이야기가 완성되고 마무리되었거든요. 다시 생각해봐도 <다크 나이트>는 무모하리만치 저돌적인 걸작 블록버스터입니다.


영화에 대한 해석을 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가 있나봅니다. 그런 이야기를 얼핏 듣고 호기심을 느낀 것도 사실이죠. 그래서 영화를 보았으니까요. 뚜껑을 열어보았더니 <인셉션>은 그냥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입니다. 모호함은 의도된 것이 아니라 요령부득 때문입니다. <다크 나이트>의 무게감에 턱없이 모자를 뿐만 아니라, <매트릭스>가 구현한 시뮬라크 세계도 제대로 흉내 내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뜯어볼수록 흥미로운 두 영화와는 격이 다릅니다.
감기는 눈을 부릅뜨느라 ‘백푸로’ 집중하지 못했지만 이런 소리를 한다고 감독이 억울해하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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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 자살 노트를 쓰는 살인자,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2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참 재미있다. 구성은 탄탄하고, 문장을 발 빠르고, 상황 묘사는 치밀하고, 인물들은 잘 정리되어있다. 한 작품밖에 읽지 않았지만 작가의 명성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두툼하지만 끊임없이 책장을 넘기게 하는 재미있는 장르소설임이 분명하다.

책머리에 스티븐 킹의 서문이 실렸다. 스티븐 킹의 동료 작가들의 작품에 늘 후한 점수를 준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걸작이라고 치켜세우며 작가와 작품에 대해 최고의 찬사를 늘어놓는다. 그것도 기가 막힌 입담으로. <시인>은 재미있는 작품이고, 마이클 코넬리는 분명히 대단한 작가인 것 같지만 스티븐 킹의 칭찬에 동감하기 힘들다. 그의 말처럼 <시인>은 집안의 불을 전부 켜 놓고 읽어야할 정도로 무섭지도 않다. 스티븐 킹처럼 마지막 장면 때문에 충격을 먹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두 세 번 읽을 정도의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이 책에서 유일하게 두 번 이상 읽은 것은 대목은 스티븐 킹의 추천사다! 스티븐 킹은 내가 아는 작가 중 서문을 제일 재미있게 쓰는 사람이다.) 동료 작가에 대한 스티븐 킹의 애정 어린 호들갑이다. 속지 말지어다.

꽤 재미있었지만 아쉽다. 우선 <시인>에는 유머가 부족하다. 600 페이지가 넘는 꽤 두툼한 분량을 코넬리는 스트레이트하게 몰아붙인다. 간혹 등장하는 농담은 인물들이 서로 주고받는 것들일 뿐 독자가 동참하고 즐기기에는 심심하다. 그러니까 독자를 위한 농담이나 유머가 부족하다.

누구는 코넬리의 문장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이도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아름다운 문장이란 자고로 행간이 느껴지는 문장이다. 문장이 길든 짧든 문장과 문장 사이에 작가만의 독특한 정서가 스며있어야 한다. <시인>의 문장은 좋은 스토리텔러의 문장, 잘 읽히는 문장이지 정서가 스민 문장은 아니다.(마이클 코넬리는 분명 훌륭한 기자였을 것이다!) 

탄탄한 구성과 예상을 뒤엎는 반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결말이 전혀 충격적이지 않은 것은 독자가 ‘괴물’에 공감할 만한 시간을 전혀 주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독자의 시선이 비켜갈 수밖에 없는 인물을 ‘진짜 괴물’로 설정하고 이야기를 급히 마무리하는 것이 오히려 허탈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괴물에 대한 설명도 빈약하기 그지없다. <시인>이 삼부작의 첫 작품이라는 것도 변명거리가 되지 않는다. <시인>은 1996년작이고, 다음 작품 <시인의 계곡>은 2004년작이 아닌가?

‘시인’이라는 설정도 아쉽다. 포우의 시를 현장에 남기는 살인마라니 얼마나 흥미로운가? 그런데 시에 대한 충분한 설명도, 그럴듯한 의미가 없다. 포우가 이 작품을 읽는다면, 왜 자기 시를 작품 속에 구겨넣을까?하고 궁금해 할 것이다.
주인공 존 매커보이의 쌍둥이 형, 숀 매커보이와 살인마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불분명하다. 아니 두 사람이 꼭 쌍둥이로 설정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도 생긴다. 이 두 가지가 독자들을 초반에 강력하게 잡아끄는 요인이라는 걸 생각하면 더욱 더 개운치 않다.

기대를 너무 많이 했던 탓일까? 재미있으면 그만이지 너무 불평이 많은가? 그래도 눈에 거슬리는 건 거슬리는 거다. 최고라는 말이나 역작이라는 말이 홍보 문구가 아닌 자명한 사실로 다가오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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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0-07-22 0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여기서 마이클코넬리, 해리보슈 시리즈만 몇개 들쳐 봤는데 영 마음에 들지 않아요.
아니 탐정, 형사인가 아무튼 주인공이라면 좀 매력적이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주인공에 대한 호불호에 대해 너무 깊게 영향을 받으면 작품에서 많은 것을 놓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여튼 마이클 코넬리.. 어떤 작가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어요.

lazydevil 2010-07-22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캐릭터에 심히 영향을 받는 타입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좀 싱거웠나봐요. 해리 보슈~ 시리즈는 좀 다르려나 생각했는데... 보지 마슈~하는 귀뜸인 걸요ㅡㅡ;
 
순교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김은국의 <순교자>를 읽으며 무척 당황스러웠다. 한국인 작가가 쓰고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뜻밖에도 한국소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은국은 이 작품을 영어로 썼다. 하지만 그는 우리 땅에서 태어나 성장한 한국인이다. 젊은 시절 6·25전쟁을 겪었고, 휴전 직후 미국으로 건너가 9년만에 쓴 작품이 <순교자>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한국인이며, 6·25 전쟁 중 평양을 주요무대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순교자>는 한국소설이 아니었다.

<순교자>에는 한국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한국말을 하고, 한국인 성과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지만, 그들에게서 한국 사람다운 무언가를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름이 엘리엇, 웬트워스, 혹은 찰스, 스미스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참 이 작품에는 비중 있는 여성 캐릭터는 나오지 않는다. 동시에 성역활도 중요하지 않다. 주제가 성을 초월한 것이기에 말이다!)

6·25전쟁 역시 마찬가지다. 이 작품의 전쟁은 ‘6·25전쟁’이라는 명칭보다 ‘한국전쟁’이라는 명칭이 더 어울린다.(물론 영어로 쓴 이 소설은 ‘Korea War’라고 표기했을 것이다.) 이 작품이 묘사하고 있는 6·25전쟁은 우리 민족에 깊은 상처를 안긴 그 전쟁이 아니다. 그냥 관념적인 전쟁일 뿐이다. 이야기를 위한 하나의 배경일 뿐이다. 베트남 전쟁이든, 포클랜드 전쟁이든, 걸프전이든 상관없다. 그 무대가 바뀐다해도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크게 변하지 않을 듯싶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시선도 간혹 놀랍도록 국외자(局外者)처럼 보인다. 가령 주인공 ‘나’에게 친구 박 대위가 보내온 편지에는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문제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인 데다 양쪽이 모두 한국말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어. 우리가 어느 쪽을 죽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네. 모두 똑같은 언어로 “누구야, 너 누구야?”만 외쳐대고 있었으니 말일세.(p.45)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국군과 인민군이 육박전을 벌이는 상황을 묘사하는 이 대목은 철저하게 제삼자의 시선이다. 전쟁의 참상을 드러내는데 더 없이 좋은 설정이지만, 이는 마치 우리말을 모르는 외국인의 시선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어색함과 이질감은 <순교자>를 읽는 내내 목안의 생선가시처럼 불편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작가는 미국으로 간지 9년만에 어쩌면 이렇게 완벽하게 타자의 시선으로 작품을 쓸 수 있었을까? 타인의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한 의도였을까? 아무튼 김은국은 이 작품으로 한국인 최초의 노벨문학상 후보로 선정되었다.

다행히 책을 읽는 내내 나를 괴롭히던 의문은 책 말미에 실린 역자의 해설 덕분에 상당부분 해소되었다. 역자 도정일 역시 작품의 시선에 의문을 제시한다. 동시에 이 작품이 역사적 문화적 한계에서 벗어나 인간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보편적이며, 동시에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순교자>의 성공요인을 분석한다. 동의한다.
정말이지 지극히 개인적이며 좀스러운 이야깃거리가 대장 먹는 국내문학의 현실을 생각하면, 무국적이지만 범세계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 <순교자>는 분명히 큰 그릇에 담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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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7-13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낙 한국적인 냄새가 짙어서 보편성이 결여된 것이 한국소설의 단점이라는데 그런 점에서는 김은국의 소설도 필요할 거에요.소설가이며 번역가인 이윤기에 의하면 최근 소설가 중에서는 정찬의 소설(빌라도의 예수)이 외국인도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네요.

lazydevil 2010-07-14 22:52   좋아요 0 | URL
<순교자>의 주제의식은 정말 부족함이 없습니다.
<빌라도의 예수>라... 제목부터 범세계적인 걸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07-19 14:14   좋아요 0 | URL
정찬은 줄곧 '영혼의 문제'를 다루어 왔죠.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엔 이미 이승우와 함께 정찬은 알려지고 있구요. 두 사람의 소설이 비슷하기도 하구요.
<빌라도의 예수>에서 정찬은 예수와 빌라도를 정치적으로 읽어냅니다. 저는 때마침 김규항의 <예수전>을 읽고 있었는데 두 사람의 시각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lazydevil 2010-07-20 17:16   좋아요 0 | URL
나무님 반갑습니다.^^
정찬도 그렇고, 이승우도 그렇고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며 자기 세계를 넓혀가고 있나보군요. 한동안 우리 문학에 눈을 두지 않았더니.. 제겐 새로운 소식이네요.^^;; 암튼 두 작가 참 믿음직스럽네요.

2010-07-15 0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5 17: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그네스
페터 슈탐 지음, 박민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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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네스>는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만 같은 소설이다. 한때 감정의 파고가 격하게 몰아쳤을 것이 분명한 사랑의 기억을 작가는 매몰찰 만큼 짧고 건조한 문장으로 들려준다. 어찌나 건조한 지 당장이라도 바스라질 것처럼 위태위태하다. 각 문장들 사이의 여백도 확연하다. 주인공 ‘나’가 겪은 짧고 실제 이야기와 ‘소설 속 소설’ 틈새도 매력적이다. 건조한 문장으로 쓴 짧은 이야기, <아그네스>는 그런 소설이다.

<아그네스>는 다듬고 다듬어 완성된 작품임이 분명하다. 모래성에 꼽힌 나뭇가지가 쓰러지지 않도록 모래를 덜어내는 게임의 승자가 일궈낸 위태로운 순간을 보며 새어나오는 탄식 같은 작품. 작가는 이 짧은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문장을 덜어냈을까? 읽기는 쉽지만 쓰기는 쉽지 않았을 것.

놀랍고 대범한 문장만큼이나 이야기의 결말도 강렬하다. 불길함이 현실화되는 순간, 그들이 관계의 종말을 극복하지 못하고 끝맺는 순간 헛헛한 감동이 스며든다. 이렇게 끝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럼에도 <아그네스>가 생각만큼 강렬하게 다가오지 않았던 것은 아그네스를 사랑하는 주인공 ‘나’의 캐릭터 때문이다. 

주인공 '나'는 참으로 못났다. 아그네스를 사랑하지만, 사랑이 낳은 결과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가정을 이루는 것,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것, 정착해야만 하는 상황을 두려워한다. 그는 치열한 삶의 언저리를 서성일 뿐 선뜻 발을 내디딜 배짱이 없는 남자이다. 그것은 도중에 포기해버린 소설 원고들로 가득한 서랍과 같은 인생이다.

반면 아그네스는 이런 남자를 종용하여 소설을 완성하도록 만드는 뮤즈와 같은 존재이다. 게다가 남자의 아이를 잉태하고, 남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상에 내보내려고 한다. 엄마가 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주인공 ‘나’가 한심해 보이는 것은 그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도, 현실 속에서도 ‘나’같은 남자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아그네스>는 좋은 소설이다. 하지만 기대만큼 큰 감동을 주지 못했던 것은 이런 탓이다. 나이를 들먹이자면, 십년 전 이 작품을 읽었다면 꽤나 공감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지금은 아니다.
그렇다고 지난 십년 동안 내 안에 잠재한 그런 한심함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것이 한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 아닌가?

짧디 짧은 소설에 긴 이야기를 붙이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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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여 페이지의 얄팍한 두께, 시집크기만한 판형, 거기에 아이스커피 한 잔 정도의 가격. 살림지식총서다. 대략 목록을 훑어보다가 몇 권을 주문했고, 군것질하듯 읽었다. 

초,중,고등학교, 대학까지 꾸역꾸역 정규 교육과정을 이수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좋은 문장과 나쁜 문장에 대해 한 번도 공부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물론 이과생이기 그랬을 지도ㅡ.ㅡ) 암튼 영어수업 시간에 문법공부를 하고, 시험 때마다 틀린 문장 찾기 문제를 풀곤 했지만, 우리 말 문장에 대한 공부를 했던 기억은 없다. 지금 세대의 국어교육을 그 때와 다르리라 믿고 싶다.
살림지식총서 376번은 <좋은 문장 나쁜 문장>이다. 이오덕의 저작만큼 투철하거나 다양하지는 않지만 우리 말 문장을 바로 쓰기 위해 기억해야할 기초적인 사항을 정리하고 있다. 우리말의 꼴과 변화에 깊이 있는 설명이 아쉽고, 우리말이 잘못 쓰이고 있는 현장을 꼬집는 실례가 부족하다. 하지만 이를 원한다면, 고종석의 글이나 이오덕의 글을 읽어야할 것. 군것질 거리로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홍콩영화를 무척 좋아한다. 내가 홍콩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의 팔할은 홍콩영화에서 배웠다. 그러던 홍콩이 슬그머니 내게 낯선 곳으로 변했다. 홍콩영화가 몰락하면서 홍콩을 만날 기회가 점차 줄어들었기 때문일까? 어느새 홍콩보다 중국이 부쩍 가까워진 것은 사실이다. 중국에 수개월 머물었던 것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 반면 홍콩여행을 극히 짧았다. 그래도 오래전 여행에서 들었던 광동어 억양의 유쾌함을 잊을 수 없다. 여전히 북경어보다 광동어를 듣는 것이 좋다. DVD로 예전 홍콩영화를 다시 볼 때 주인공들의 실제 목소리(광동어)가 얼마나 반갑던지. 요즘 홍콩배우들이 본토영화에 출연하며 북경어를 하는 것이 낯설다. 아무튼 홍콩은 예전 같지 않고 낯선 곳이 되었다.
살림지식총서 330번째, <홍콩>은 홍콩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훑을 수 있는 알뜰한 요약판이다. 홍콩이 우리가 알고 있는 홍콩섬과 구룡반도를 말고도 2305개의 섬으로 구성되어있다는 것, 먹거리 천국이며, 동서양의 혼재된 문화가 어떤 방식으로 홍콩인의 삶 속에 드러나는지, 진정한 의미의 홍콩인은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지, 중국반환 전후로 홍콩에는 어떤 사회적 변화가 있었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흥미롭다. 언급하는 것마다 자연스레 그간 보아온 홍콩영화의 장면이 오버랩되곤 했다. 1960년대 쇼브라더스 영화부터 80년대 성룡과 주윤발의 영화를 거쳐, 최근작품까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의미가 새겨지기도 한다. 홍콩의 과거와 현재를 짤막하게 짚어보며, 홍콩의 미래까지 조심스럽게 예측하는 이 책은 홍콩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중국을 이해하는데 제법 도움이 된다. 

 

솔직히 놀랐다. 이 얄팍한 책 속에 어쩌면 이렇게 알찬 내용이 들었는지. 살림지식총서 62번 <무협>은 시종일관 ‘협(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이 고룡, 김용, 와룡생 등의 무협소설에 대한 예찬이나, 싸구려 무협지에 대한 오타쿠식 지식들을 뽐내거나, 무협영화에 대한 숭배로 ‘무협’을 이야기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사마천의 <자객열전>과 <유협열전>에 등장하는 당대 유협(遊俠)과 호협(豪俠)을 이야기하며, 협의 개념을 정의하고 중국인의 역사와 문화 속에 협의 개념이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살펴본다.
협은 늘 ‘지기知己’를 최우선으로 한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는 그 어떤 명분이도, 대의도, 목숨도 중요하지 않다.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러니까 지극히 개인적인 신념 앞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협은 합리성과 명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어리석기 그지없다. 이런 유별난 캐릭터를 중국의 역사(사마천의 사기)는 기록하고 숭상한다. 책을 읽고 나니 중국 말고 다른 나라에 협과 같은 캐릭터를 이렇게까지 높이 산 예가 있었나 싶다. 일면 이해할 수 없는 협의 개념을 맹자는 이렇게 말한다. 

   
  삶 또한 내가 바라는 것이다. 바라는 것 가운데 삶보다 더한 것이 있기 때문에 구태여 얻으려 하지 않을 따름이다. 죽음 또한 내가 싫어하는 것이다. 싫어하는 것 가운데 그보다 더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 어려움을 피하지 않으려는 따름이다. 사람이 바라는 것 가운데 삶보다 더한 것이 없다면 삶을 구해야지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사람이 싫어하는 것 가운데 죽음보다 더한 것이 없다면 그 어려움을 피해야지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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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산책 2010-06-29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살림지식총서..급땡기네요..함 훑어봐야겠어염~ㅎㅎ
군것질하듯 알음알음 읽으신 그 맛이 얼마나 달콤하셨을까나~^^

lazydevil 2010-06-30 11:34   좋아요 0 | URL
작고 가벼워서 지하철에서 읽기 편했어요.
오랜만에 가벼운 책, 전자책 보는 옆자리 처자가 부럽지 않았답니다.ㅎㅎ

이매지 2010-06-29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저는 레이지데블님이 이과생이셨을 꺼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살림지식총서는 정말 군것질하듯 읽기 좋은 듯^^
저도 좋은 문장~에는 관심이 가네요 :)

lazydevil 2010-06-30 11:37   좋아요 0 | URL
그래서 인문학쪽에 구멍이 뻥뻥~~ 뚫려있답니다. 체계가 없걸랑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