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백 페이지 넘도록 음담으로만 채워진 이 책을 읽는 동안 꼴리지 않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그 꼴림이 욕망을 자극하지는 않는다. 짜릿하고 도발적이며, 때로는 파격적인 음행이 어두운 욕망의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 것은 웃음이라는 건강한 밑바탕 위에서 까발려졌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성소화선집>은 제목 그대로 야하지만 웃기는 이야기들의 모음집이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에서 야한 거 못지않게 주목해야할 것이 웃음이다. <조선후기 성소화선집>을 읽는 동안 어린 조카나 여동생이 무단침입해도 놀라지 않았던 것은 ‘조선후기’ 때문이 아니라 ‘소화(笑話)’ 때문이다. 웃음은 건강함와 쾌활함을 담보하기 때문에 누구와도 공유할 수 있다. 반면 ‘심각함’은 얼마나 부자연스러운가? 야동, 그러니까 포르노는 늘 심각하다. 정확히 말하면 심각한 척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심각할 것을 강요한다. 야동(설) 속의 인물들도 심각하고, 야동(설)을 보고(읽고) 있는 사람도 심각하다. 야동이나 야설에 몰입하는 사람의 표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어찌나 뻣뻣하고 부자연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지... 민망하고 웃기다.(뭐 이런 표정을 살펴보는 게 더 변태같이 들리는군!ㅎㅎㅎ) 아무튼 필요이상으로 심각한 것은 위험 신호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을 진작 펼쳐들었다. 그런데 마지막 백여 페이지와 옮긴이의 해설을 남겨놓고 꽤 오랫동안 미뤄두고 있었다. 비슷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터라 뒤로 갈수록 책읽기가 느슨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어쩌다 옮긴이의 해설을 읽고 난 후 못다 읽은 나머지 분량을 읽어치웠다. 순전히 좋은 해설 덕분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책은 해설부터 읽어야 한다’는 거다. 아니 반절쯤 읽다가 해설을 읽은 후 마저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알기 쉽고 유용한 이야기로 가득한 해설은 조선시대 음담을 어떻게 이해하고 즐겨야하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해설에 실린 다음 글귀는 의미심장하다. 윤리는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공동체를 위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현재의 상황이 미래까지 지속되기를 꿈꾸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절망의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상황이 오랫동안 유지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때문에 금지된 영역을 보여줌으로써, 금지된 것을 위반함으로써, 자신의 울분을 드러낸다.(p.649) 이것이 해설을 쓴 옮긴이의 생각인지, 푸코의 주장인지, 바타유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이 즐긴 ‘꼴리는 이야기’들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열쇠임에는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