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나루세 미키오와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대표작(들)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영화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절반만 솔직한 것이다. 진짜 솔직한 나머지 절반은 여배우들 때문이다. 나루세 미키오와 미조구치 겐지는 유난히 여자의 이야기를 많이 다뤘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에는 여배우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것도 예쁜 여배우들이. 그들은 하나같이 연기도 잘할뿐더러, 나루세 감독과 미조구치 감독은 그들을 화면에 아름답게 담아낼 줄 안다. 더구나 두 감독의 대표작은 대부분 흑백 영화이기에 흑백 명암으로 묘사된 여배우의 얼굴은 그 자체만으로도 예술이다.

 

그렇다고 나를 덕후로 생각하지 말지어다. 안타깝게도 난 덕후가 될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다. 일단 끈기가 부족하고, 집중력이 떨어진다. 게다가 사람 이름을 지독히 못 외운다. 일본사람 이름은 더욱 그렇다. 일본 여배우의 이름을 줄줄 외우는 것은 구구단을 거꾸로 외우는 것 만큼이나 힘들다.

 

이름 못 외우는 것은 핑계일 뿐이고, 실은 일본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호기심과 명성에 현혹되어 본 영화들이 전부다. 뭐 그 유명한 기타노 다케시 영화나 이와이 순지, 미이케 다카시, 구로사와 기요시 등... 아니면 싸구려 호러물이나 폭력물, SF물, 괴수영화, <카우보이 비밥>같은 애니메이션 시리즈 혹은 ‘살색영화’에 잠시 빠져든 것이 전부다. 내가 본 일본영화는 너무 작가적이거나, 너무 싸구려였다. 양쪽 모두 흥미로웠지만 그건 우리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색다른 맛에 대한 탐닉이었을 뿐 일본영화에 대해 존경은 들끓지 않았다.

 

어쩌다 만나는 일본 고전영화도 솔직히 별 재미가 없었다. 그들이 자랑하는 위대한 일본감독 4인방의 영화를 몇 편 보았지만 ‘참 좋은 영화다’하는 생각만 들었을 뿐 묵직한 파토스가 나를 사로잡지는 못했다. 아마도 시간의 간극과 문화적 차이를 뛰어넘어 발가벗고 끌어안기가 쉽지 않았나 보다.

 

묘하게도 일본영화, 그것도 일본의 옛날영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한국영화 때문이다. 우연한 계기로 50,60년대 한국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결과 세상의 모든 옛날영화가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나 40,50,60년대 일본영화는 한국영화와 매우 밀접한 ‘역사적 크로스오버’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후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사귀고 있는 여자에게서 옛 여자의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묘한 흥미로움(?)이 격하게 도사리고 있더란 말이다. 그래서 그 관심에도 없던 일본의 옛날영화가 요즘 보고 있다.

 

암튼 나루세 미키오나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 한편을 골라 이야기해보려고 했는데 사설이 길어졌다. 그건 다음으로 미루고 엉뚱한 이야기로 잡담을 마무리한다.

 

어디선가 읽었더라? 개화기 무렵 서양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크게 놀란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한국사람들이 밥 먹는 모습이었다. 작은 체구의 조선사람이 자기 머리통만한 밥그릇에 밥을 가득 담아 깨끗이 비우는 모습이 가히 충격적이었다는 거다. 생각해보니 이건 할머니나 큰아버지 세대도 종종했던 이야기다. ‘우리 때는 밥을 고봉으로 먹었어!’

 

 

 


증거 사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신상옥)에서 김진규가 먹는 밥(위 사진)을 보라. 나루세 미키오의 <밥>(1951)에서 하라 세츠코의 밥그릇(아래 사진)과 비교해 보면 고봉(그러니까 산봉우리처럼 수북이 쌓아)이란 말이 실감난다. 남녀차이를 감안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보다 많이 먹었다. 고로 우리는 한때 ‘위대’했다.ㅎㅎ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2-04-19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19 1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책을 읽고 글을 올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요즘 책을 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인지 책에 집중을 할 수 없다. 그러니 책읽기가 힘겹고 재미없을 수밖에. 책읽기의 즐거움을 잊어먹었다.(잃어버렸다,가 맞는 표현일까? 암튼~~)

 

지난해 말, 책과의 관계가 돌연 소원해질 무렵, 잠시 TV에 빠졌다. 밤시간 TV 앞에서 멍하니 시간을 죽이고, 또 죽였다. 한동안 지속된 이 습관은 시간에 대한 인지능력을 묘한 방식으로 변화시키거나 퇴화시켰다. 가령 TV를 보는 밤시간 동안 시간의 흐름은 프로그램의 시작과 끝으로 환산된다. 요일의 변화 역시 시간대별 프로그램의 변화로 인지하고, 한주의 시작과 마무리도 고정 프로그램의 다음주 예고로 깨닫는다.


가령 일요일 저녁에 가 끝나면, ‘한주가 끝났구나!’ 혹은 ‘일요일이 끝났구나’ 뭐 이런 식. 채널을 돌리다가 MBC <100분 토론>이 방영되면, ‘어라, 오늘이 목요일이었네?’하는 반사적 반응! 그나마 다행인 것은 원체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 터라 나의 TV 중독은 심야 시간에만 편중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간대가 바로 하루 중 주로 책을 읽던 때라는 것. TV 때문에 침대 옆에 쌓여있는 읽다만 책은 먼지를 위한 아늑한 안전지대가 되어버렸다.

 

이런 멍청한 습관에서 나를 구해준 것은 방송사 파업이다. MBC가 파업을 했고, 얼마 후 KBS도 파업을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방송 프로그램들이 더욱 한심해지거나 재방, 삼방이 반복되었다. 이미 본 프로그램을 또 보고 있을 때 드는 자괴감은, 멍청하고 한심한 프로그램에서 눈을 떼지 못할 때만큼이나 심각하다. 나의 병신스러움을 어찌 변명할 수 있을까? 병맛.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병맛을 떨쳐버리려고 TV를 껐다, 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어쩌다보니 TV 대신 뭐 딴 거 없을까?하는 심산으로 오랜만에 DVD플레이어를 켰다. 집에 굴러다니던 DVD, 일 년전 빌려와서 돌려주지 않은, 보지도 않을 거면서 꿀꺽하기로 작정한, 해적판 불법 리핑 싸구려 DVD, <역마차>(1939, 존 포드, 2,900원에 알라딘에서 구입할 수 있다.)를 틀었다.


그런데 그만 빠져버리고 말았다. 옛날 영화에 말이다. 이날 이후 나는 주인에게 즉각 DVD를 반납했다. 왜냐고? 다른 걸 빌려야 하니까. 그는 보지도 않은, 앞으로도 보지도 않을 옛날 영화를 꽤 가지고 있다. <역마차>를 돌려주고 <이키루>(1952, 구로사와 아키라), <우리 생애 최고의 해>(1947, 윌리엄 와일러)를 생포해왔다. 그런데 이 두 작품이 소위말하는 대박이었다. 특히 <이키루>는!

 

요즘은 거의 매일 밤, 맥주와 함께 옛날 영화를 보고 잔다. 고색창연한 옛날영화를 보며 희희낙락하는 것이 어찌나 깨알같은지... 이 재미가 맥주와 오징어 다리 때문인지, 위대한 감독들의 위대한 작품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즐겁다. 심히 즐겁다.
 
내가 생각하는 옛날 영화의 기준은 ‘1975년 4월 30일’ 이전에 개봉한 영화다. 앞으로 1975년 4월 30일 이전 작품만 편애하기로 했다. 왜 1975년 4월 30일이냐고? 뭐 특별한 이유는 없다. 내 생일도 아니다. 그냥 베트남전이 공식적으로 끝난 그 날이 어쩐지 현대사의 전환점인 것 같아서이고, 뭔가 역사적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시간의 흐름이 쌓인 시점인 것 같아서이다. 그러니까 1975년 4월 30일 이전 영화라면 무조건 사랑하기로 한다.


물론 옛날 영화 중에 특히 내 가슴을 뛰게 만드는 건 40년대, 50년대, 60년대 영화들이다. 이 시기의 영화들은 약간의 시차와 제작 환경의 차이에 따라 흑백과 컬러 영화들이 뒤섞여 있고, 스탠다드 화면과 시네마스코프 화면이 공존한다. 특히 50년대 영화는 정말 그렇다.

 

TV 앞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과 흘러간 옛날영화를 보며 소일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TV는 병맛이고, 옛날 영화는 고상한가? 절대 아니다. 중요한 건 옛날영화는 나를 야릇하게 흥분시킨다는 점이다. TV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자극’이 옛날영화에는 있다.

 

이 흥분에 관한 변태적인 반응에서 소외되는 것은 TV 뿐만 아니다. 요즘 영화도 마찬가지다. 최근 아는 사람(들)이 내게 물었다. “<건축학개론> 봤어?” 당연히 안 봤다. 꽤 괜찮은 영화라며 추천하는 그(들)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마도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심미안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한가인과 수지보다 지난밤에 본 나루세 미키오의 <밥>(1951)에 출연한 하라 세츠코와 하나이 란코가 더 예쁘게 보인다.(물론 난 이들보다 최은희나 조미령, 윤인자 같은 우리나라 여배우를 더 좋아한다!) 그러니까 딴 여자가 더 예뻐 보인단 말이다. 뭐 사랑이 변한 거지.

 

책읽기의 재미를 잊어먹어(혹은 잃어버려) 속상하다. 책읽기에 대한 사랑은 변한 것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 뭔가 서로 엇갈리고 있을 뿐 곧 서로 뜨거운 밤을 불태울 것으로 믿는다! 뭐, 언젠가 그 분이 다시 오시겠지. 당분간은 옛날영화와 맥주와 오징어다리로 만족하자. 책을 못 읽어서 알라딘 리뷰 좀 못쓰면 어때! 언젠 열심히 썼나?, 싶다!

 

 

유치하지만 올려본다, 두 분의 여신님이 함께 한 흐뭇한 사진을 

 


댓글(8)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12-04-03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1951년 영화라니...제가 본 제일 오래된 영화가 뭘까 생각해보았는데, 아마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최은희, 조미령까지는 알겠는데 윤인자는 모르겠는데 그래서 호기심 급증이고요.
제가 생각하는 옛날 영화의 기준은 내가 그 영화 제목을 얘기하는데 주위 사람들이 아무도 본 사람이 없을 때 라고 할까요? 오늘은 글쎄, 영화 Trainspotting 제목을 댔는데 앞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더라고요 ㅠㅠ 이건 너무 심했지요? 아무리 제가 나이 좀 어린 친구들 앞에서 얘기했기로서니.

lazydevil 2012-04-04 01:06   좋아요 0 | URL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더 옛날영화. 근데 컬러필름이죠. 어린 시절 재개봉을 할 때 봤는데, 상영시간이 길어서 한밤중에 집에 들어간 기억이 나네요.ㅎ
<트랜스포팅> 옛날영화 맞아요. '나이 좀 어린 친구들'이 모를 수 밖에요. 이완 맥그리거도 한때 청춘스타였는데, 이젠 아저씨~ㅎㅎ
윤인자는요... 언제 우리나라 여배우 이야기로 잡담 한번 늘어놓을까요?^^

카스피 2012-04-03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마를린 먼로는 알겠는데 옆에 계신 한복 입으신 분은 누규??

lazydevil 2012-04-04 01:08   좋아요 0 | URL
최은희 누님입니다.ㅎㅎ
1954년 몬로가 주한미군을 위문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왔는데 그때 대구 비행장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라네요.

2012-04-03 2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04 0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04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낫 합성사진이 아니었군여.. 저도 이제껏 안 봤고 앞으로도 안 볼 것만 같은 디비디 끼고 사는 사람인데 대여나 해줘야겠군요.;;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lazydevil 2012-04-04 12:40   좋아요 0 | URL
합성같은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는 게 현실인가봐요^^
어허~ 섬님에게 딸린 디비디 리스트가 궁금하네요.
목록 공개하시고, 저 좀 빌려주세...욯ㅎㅎ
 

지난 달 마지막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저녁에 서둘러 영화관을 찾았다. 그날 상영작을 너무나 보고 싶어서 개뻥을 치고 업무용 약속도 조기 땡땡이쳤다. 그날 정말 추웠다. 초봄에 접어든 지금 그렇게 추웠던 날이 언제 있었냐 싶지만, 정말 추웠다.

 

초저녁 허기를 달랠 겸 오렌지맛 환타와 살구파이 하나를 덜렁덜렁 들고 극장로비를 배회하던 중 한분과 마주쳤다. 10년전 같은 사무실에서 일했던 분이다. 부서도 다르고, 일도 다르고, 나이 차이도 꽤 있던 터라 가까이 지낸 사이는 아니었다. 다만 항상 훌륭한 성품을 얼굴로 웅변하시던 분이라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다가가 인사를 했고, 다행히 알아보셨다. 상영시간이 임박했기에 짧게 안부만 묻고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곧 영화가 시작했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그분과 단출한 식사를 했다. 우동과 맥주 한잔씩. 영화 이야기를 조금 나누고 서로 근황을 물었다.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편하게 응대해주셨다. 그래서인지 이런 말이 툭 튀어나오고 말았다.
“요즘도 글을 쓰세요?”
시인에게 이런 무례한 질문을 하다니! 부끄럽다.

 

겨울의 첫걸음
                         채충석

 

남들은 4년이면 마치는 것을
나는 5학년까지 하게 되었다.
그것도 지방 사립 대학을
증서 없는 졸업식 날 학교 떠나는
친구들이 모아 주는 30만원으로
나머지 1학점의 등록을 마치니
노천 강당의 개나리 넝쿨은
올들어 두 번째 피어났다.
낯선 이름과 언어가 붐비는
수요일의 한 시간을 위해
두시간 거리의 직행 버스로 등교하면
지독하게 피곤하였다. 그 다음 날도
이렇게 한 주간이 쉬 지났다.
대학원에 다니냐는 후배들은
모란이 피자 모두 아스팔트 위로
파도처럼 밀려나고, 나만이
텅 빈 풀밭에 오그리고 앉아
흩어진 과우들에게 엽서를 쓰거나
도시의 변두리가 돼버린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였다.
동네 어른들이 입을 모아 흉년이 들었다고 하는 동안
코스모스 피는 가을은 슬쩍 찾아들고
5학년 1학기도 한달을 더 끌다
끝났다, 자, 가야지 내일은
경제학사 학위를 받으려
성이 최씨로 바뀐 무거운 앨범도 찾고
홀로 교문을 나서는 나를 만나러
서랍만 달린 겨울을 만나러

 

몇 번을 거듭해 읽은 ‘겨울의 첫걸음’은 내 가슴을 아련하게 만든다. 젊은 날의 시인이 있고, 일상이 있고, 세상이 있고, 세월이 담겨있다. 서른 해의 시간을 뚫고 공감할 수 있는 이 시는 시인의 처녀작이다.(시인은 ‘겨울의 첫걸음’으로 81년에 등단하였다.) 그가 이 시를 내놓지 한참이 지난 후 나는 그를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시인은 시를 쓰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아련한 시로 등단했다는 것도 모른 채 멀어졌다. 다시 세월이 흘렀고, 우연히 만나 그에게 나는 싸가지 없는 질문을 냅다 싸질렀다. “요즘 글을 쓰세요?” 더 한심한 건 내가 무례한 짓을 저질렀다는 걸 며칠이 지나서 깨달았다.(이눔아, 백일간 묵언수행이다!)

 

그런데 시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요즘 들어 다시 쓰려고 해요.”
그러더니 이런 이야기를 했다. 지난해 일본에서 68살의 할머니가 발표한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할머니가 발표한 첫 시집이었다. 우연히 그 시집을 읽었고 느낀 바가 있었다. 68살의 나이에도 시작을 하는데. 시작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뭐 이런...
그날 시인과 함께 본 영화는 신도 가네토라는 감독의 <오후의 유언장>이라는 영화였다. 감독이 83세에 찍은 이 영화는 늙음과 죽음에 대해 성찰한 작품이다. 시인은 신도 감독의 작품이 무척이나 좋았다고 말했다.(신도 감독은 지금도 살아있고(무려 100살!), 지난해 <한 장의 엽서>라는 작품으로 공식 은퇴선언을 했다. 99세에 찍은 <한 장의 엽서> 역시 삶에 대한 노련한 성찰이 담긴 무시무시한 작품이다.)

 

집에 돌아와 시인의 첫시를 읽고 있자니 쫌 묘했다. 시인의 첫시와 엊그제 모습이 오버랩 됐고, 나의 어제와 오늘이 뒤를 따랐다. 침대 위에서 두터운 이불을 돌돌 감고 나는 어렴풋이 내일도 떠올려 보려고 노력했다.(나에게 내일은 너무나 두려운 것이기에 노력하지 않으면 결코 떠올릴 수 없다.) 그리고 그 끔찍한 몰골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살아있는 시체의 날들이여! 꺄아아악~.

 

한해가 지나간 것처럼 새 계절이 왔다. 곳곳에 낯선 기운이 진동하기 시작한다. 꽁꽁 얼어버린 한강을 보고 혼자 낄낄거리며 흐뭇해하던 겨울은 이제 끝장났다! 떠밀리듯 ‘서랍만 달린 겨울’을 뒤로 하고 첫걸음을 내딛어야할 때가 어김없이 찾아온 것이다. 그래 또 삼월이다. 지금이라도 입 다물고 시작해야 한다, 최소한 자발적으로.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2-03-10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11 1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촌방향> 홍상수, 2011
<달빛 길어올리기> 임권택, 2011

 

어쩌다보니 한국영화만 네 편을 내리 보게 되었다. 두 편은 최근 개봉한 영화고, 두 편은 지난해 작품이다. 불과 한 해 차이로 개봉된 작품인데 그 모양새가 워낙 달라서 신기하기까지 하다. 최근작 두 편(<댄싱퀸>, <파파>)은 특별히 말할 거리가 없다. 그냥 한숨과 하품만. 그런데 2011년산 두 작품은 그렇지 않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재미있다는 거다. 언제부터인가 영화를 보며 시간을 확인한다. DVD나 PC 환경에서 영화를 볼 때 타임코드를 보는 것이 습관이 되서 그런지, 아니면 영화들이 워낙 따분해서인지 두어 차례 시간을 본다. 극장에서도 그런다. 모래폭풍처럼 질주하는 <미션 임파서블4>를 볼 때도 시계를 열었다. 그런데 <북촌방향>과 <달빛 길어올리기>는 그러지 않았다. 스크린 속에 끊임없이 시선을 묶어두는 무언가가 있었다.

 

 

홍상수 감독을 겉으로만 인정할 뿐 내심 싫어한다. 임권택 감독은 존경한다는 생각뿐었다는 걸 고백한다. 그렇다고 <북촌방향>과 <달빛 길어올리기>를 본 후 홍상수를 좋아하게 되었고, 임권택 감독을 마음까지 다해 존경하게 되었다는 건 아니다. 여전히 홍상수 영화는 싫고, 여전히 임권택 영화(특히 <춘향뎐> 이후 작품들)는 선뜻 품기가 꺼려진다. 하지만 <북촌방향>과 <달빛 길어올리기>는 최근 본 한국영화 중 가장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어떤 평론가의 블로그를 보니 <북촌방향>에 대해 열변을 토했더라. 얼핏 보니 홍상수의 작품세계, 신화적 공간, 북촌의 의미, 순환구조 등을 언급하며 영화에 대해 침을 튀며 열광하는 것 같았다. 모두 맞는 말일테지. 하지만 난 그냥 이 영화가 재미있었으며, 그 뿐이다. 그 이유도 너무 단순하다. 요즘 한국영화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어려운 이야기 집어치우고, 나는 <북촌방향>의 익숙함과 엉뚱함이 재미있었다. ‘홍상수는 영화로 일기를 쓰냐?’며 빈정거린 적 있다. 홍상수의 영화가 본격적으로 흥미로워진 것은 <극장전>부터인 것 같다. 근데 그때부터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일정치의 비용과 시간을 들여가며 한 영화감독의 ‘사생활’을 보기 싫었다. <북촌방향>에서 홍상수는 또 그 짓거리를 한다. 근데 비죽비죽 끼어든 엉뚱함과 뻔뻔스러움이 반갑고 재미있었다.

 

원색 바탕에 커다란 타이포그라피로 제작된 타이틀 화면이 인상적이었고, 대낮에 촬영한 장면을 한밤중이라고 ‘쌩까는’ 능청스러움에 신났고, 1인2역 설정이 풍기는 야시시한 분위기도 신선했고, 등장인물이 시종일관 똑같은 옷만 입고 나오는 것도 웃겼다. 나중에는 조악한 흑백화면도 정이 들더라. 요즘 한국영화의 관습과 틀을 희롱하고 야유하는 듯한 태도가 유쾌해 보였다. 게다가 상영시간도 짧다!(이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지점이다!!) 홍상수는 감동이고 작품성이고 관심 없는 듯하다. 그냥 꼴리는 데로 찍는다. 오십이 넘은 이 아저씨,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제멋대로잖아. 이런 영화 왜 찍으세요? 하하하.

 

 

반면 일흔살이 넘은 임권택 감독은 그 어느 때보다 관객을 배려하고 있다.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까봐, 알기 쉽게 표현하려 노력한다. 임권택의 영화를 꽤나 많이 보았지만 이렇게 관객을 생각하는 영화는 처음이다. 자기 이야기가 외면 받으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마저 느껴진다. 그런데 그 조바심이 싫거나 불편하지 않다. 마음을 전하려는 마음이 느껴져 고맙다. 그 진짜 선의가 영화 속에 앉아있다. 이런 작품을 두고 작품성과 대중성을 논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관객의 비위를 맞추거나 관객을 낚으려는 영화가 넘쳐나고, 그렇지 않으면 관객을 개무시하는 감독 뿐인 요즘, 팔십을 바라보는 노인이 만든 <달빛 길어올리기>는 참으로 순수하고 순진한 영화다. 그런 영화가 주는 감동이 있다.

 

아쉬운 점 한 가지. <달빛 길어올리기>는 우리의 전통한지를 소재로 삼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전통한지의 은은하고 강인한 매력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어쩐지 그 정서는 아날로그 어법에 어울리는 듯하다. 그런데 HD로 촬영한 <달빛 길어올리기>의 화면은 전통한지의 아름다움과 임권택 감독의 마음을 담기에는 너무 깨끗하고, 선명하며, 차갑다. 하지만 어쩌랴? 필름의 시대는 이미 끝났는걸. 지난주 이스트만 코닥사가 공식적으로 파산을 선언했다.

 

생각할수록 <북촌방향>과 <달빛 길어올리기>는 이상한 나라에서 온 영화같다. 임권택과 홍상수가 특별하게 보이는 2012년 이 겨울의 ‘설정’은 뭐지? 도무지...
혹 길을 가다 임권택 감독님을 보게 되면, “고맙습니다. 존경합니다.”라고 인사하고 싶다. 그리고 “다음 작품은 개봉관에서 보겠습니다, 꼭”이라는 말도 덧붙일 거다. 그러니 제발...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2-02-03 2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술이 덜 깬 아침, 아른 거리는 여자. 그녀의 눈을 보며 세상과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는데, 한달전에 헤어졌다. 덕분에 성숙한 거 같다. 근데 딱히 실감은 나지 않는다. 젠장, 술은 깨질 않고 그날 아침만 떠오른다.

 

행복한 나날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가 남긴 지랄같은 기분만 남았구나. 지금 숙취처럼 말이야. 하지만 난 변할 거다. 그날 아침 기억 때문에, 숙취 따위로 이렇게 망가질 순 없어. 일어나자! 엿 같은 상황은 조만간 바뀌겠지.

 

내가 또 사랑이란 걸 할까? 뭐 그렇다면 또 실연을 당하고, 또 병신이 되겠지. 아님 운이 좋으면 실연의 법칙에서 예외가 될 수도... 젠장, 그날 아침 그녀가 또 아른거린다. 골 아파.
속이 울렁거려서 도무지 쉴 수 없군. 난 제대로 망가졌는데, 그녀는 멀쩡하게 지내고 있겠지. 그녀가 무엇을 하든 나는 끝까지 모를 거다. 사람들이 나한테 이야기해주기 전까지는, 내 눈으로 그녀가 뭘하는 지 직접 보지 않는 이상 말이야. 사람들이 뭐라든 그냥 그렇다고.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상과 사랑에 빠진 느낌이 들게 하던 그녀. 자꾸 아른 거린다. 젠장, 아침인데 술이 깨질 않아.

내 이야기가 아니다. 엘리엇 스미스의 ‘say yes'라는 노래의 가사다.
어제 아침 저녁 오가며 이 노래를 대략 50번은 들은 거 같다. 아이팟 랜덤 모드로 듣다가 갑자기 가사가 궁금해졌고, 반복재생 모드로 줄기차게 들었다. 좋은 곡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오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중딩영어 단어로 된 가사인데, 도무지 의미를 모르겠더란 말이다. 아무리 내 영어가 병신이라지만 어이가 없었고, 오기가 발동했다.


웹서핑을 하니 성기완이 번역한 가사가 있었다. 세 번 읽어봤지만 더 병신된 느낌. 이건 아니잖아. 원문 가사를 소개한 외국 웹사이트에서도 가사의 의미를 두고 지들끼리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 같더라. 엘리엇이 술(혹은 약?)에 ‘쩔어’ 쓴 가사라서 그런가? 그럼 나도 술(혹은 약?)에 ‘쩔어’ 노래를 듣고 가사를 보면 통하려나?


암튼 버스에서 가사원문과 함께 반복청취를 하며 ‘진짜 멋대로 해석’한 것이 윗글이다. 노래에서 줄기차게 반복되는 'the morning after'가 ‘숙취’와 ‘그날 아침’을 함께 의미하는 것 같아서 맘대로 이해했다. 꿈보다 해몽!

 

전에 알던 친구는 ‘엘리엇 스미스는 들을수록 지겹다’고 했다. 나는 엘리엇 스미스의 열혈팬은 아니다. 하지만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그 며칠 전에는 유투브에서 엘리엇의 라이브 동영상을 보고 울컥한 바 있어 솔직히 더욱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난 침묵했다. 죽은 사람을 두고 갑론을박하는 게 싫었고, 그 친구는 엘리엇 스미스의 앨범을 한번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니까. 그런데 오늘 만원버스 구석 좌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say yes'의 가사를 해석하고 있자니 그때 엘리엇을 위해 반박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리고 죽은 엘리엇에게 미안했다. 엘리엇 형, 미안해!

 

집에 돌아와 엘리엇의 앨범들을 뒤졌다. 오랜만이다. 근데 앨리엇의 마지막 앨범의 CD가 실종되었다. 케이스와 북클릿만 보일 뿐 정작 CD는 보이질 않는다. 엘리엇은 이렇게 또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엘리엇 형, 미안해! 

 

뭐 이제 다 지난 이야기다. 엘리엇도, 그 친구도, 엘리엇 때문에 혼자 맘 상한 것도, 사라진 CD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도망가지 않은 CD를 듣는 거... 자살하기 전 마지막 무대의 영상을 보며 마음 아파하는 거... 그것 뿐이다. 죽은 사람한테 다시 살아나라고 할 순 없지 않는가?

 

2003년 9월 19일 마지막 무대 중에서.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f8oLojgTMVA

 

나는 바보. 유투브 동영상 띄우는 거 몰라서, URL만 뿌린다.ㅎㅎ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Forgettable. 2012-01-31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ㅎㅎ 저도 엘리엇 스미스 한 때 엄청 빠져서 들었었어요. 특히 작년에 혼자 -_-;;;
between the bars는 수백번 들어도 질리지도 않더라구요. 으..
say yes가 저런 내용이었군요. 흠. 들을 떈 몰랐는데ㅠㅠ

아이팟 노래 다 날리는 바람에 엘리엇오빠 노래도 다 날아갔는데 다시 파이럿베이 뒤져봐야겠다는;; ㅋㅋㅋ

lazydevil 2012-01-31 14:24   좋아요 0 | URL
제발 쫌! 실시간 댓글에 놀랐잖아요!!
가사 해석 믿지 마시고...
CD는 도망가고, 파일은 날아가고... 그들은 살아있음이 분명하네요.ㅠㅠ

Forgettable. 2012-01-31 14:49   좋아요 0 | URL
놀라긴ㅋㅋㅋ
지겨운 회사생활이 다 이런게 낙 아니겠어요? ㅋㅋ

왠일로 시간 나셨나봐요?
근데 왜 제 서재에 반말했다가 존대말로 수정했어요? ㅋㅋㅋㅋ 반말해도 돼요 ㅋ

lazydevil 2012-02-01 00:17   좋아요 0 | URL
젠장, 댓글 수정하다가 삭제됐네요ㅜ
암튼 반말 안했다고요...!ㅎㅎ

Forgettable. 2012-02-05 20:36   좋아요 0 | URL
우연히 버려진 유에스비에서 노래 찾아서 다시 들었습니다.
좋습니다. ^^

lazydevil 2012-02-06 18:34   좋아요 0 | URL
지랄맞게 좋지요?
버림받은 것들도 잘 살펴보면 쓸만하다니까요.ㅎㅎ

2012-02-02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2 15: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4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2017에도 엘리엇을 듣고 있는 1인입니다. 좋은 가사네요 가사 번역 감사드립니다

lazydevil 2017-04-26 15:34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저도 들어요, 요즘도. 게을러서 요즘 서재는 방치... 트윗으로 가끔 음악 이야기하네요^^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