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마릴린> 이지민, 그책

‘그냥 그렇게 묻히기는 아까운 작품’이라는 아는 사람의 멘션과 ‘1954년에 우리나라에 방문한 마릴린 몬로의 통역을 맡았던 한국여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라는 발상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최근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급 매혹되어 있는 터라 <나와 마릴린>은 게으른 자의 필독 리스트에 올랐고...
아는 사람의 멘션과 달리 이 작품이 그냥 묻힐 수밖에 없는 이유만 확인했다. 여성 캐릭터를 그려내는 특유의 섬세함은 돋보이지만, 그뿐이다.(미안하게도 이건 내가 우리나라 여성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 제일 불편해하는 대목이다. 묘한 날카로움과 신경질이 묻어나는 여성 캐릭터!)
주인공 앨리스 킴의 상처와 고뇌는 너무나 보편적이다. 그의 갈등과 상처를 이야기하는데, 굳이 ‘1950년대’가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마릴린 몬로의 방한 역시 마찬가지다. 아,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은 전쟁 직후 폐허가 되어버린 대한민국과 할리우드 스타 마릴린 몬로가 이뤄내는 우스꽝스럽고 슬픈 역사적 부조화의 풍경이 아니었는가? 안타깝다.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창비

베스트셀러가 맞긴 맞는가 보다. 요즘 지하철이나 동네 문화체육센터에서 이 작품을 읽고 있는 사람들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독자의 대부분은 여성.
김애란은 분명 재능 있는 작가다. 우울한 이야기를 웃으며 이야기할 줄 안다. 등장인물만 웃는 게 아니라, 독자들도 웃게 만들 줄 안다. 아니 울릴 줄도 안다. 작가의 재능이 가장 반짝이는 대목은 대화다. 전반적으로 대화가 좀 많은 편인데, ‘뭐 불필요한 대화 없나?’하는 못된 마음으로 읽었다. 없다. 모든 대화가 가볍고 리듬감 넘친다. 그야말로 촌철살인. 혼자 심각한 척하거나 징징거리지 않아서 좋다.
한 대목 아주 짠했다. 펄럭펄럭 책장을 넘기다 말고 밑줄을 그었다. 이 작가 참 감정을 쌓아올릴 줄 아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조금 뒤로 가니 그것이 뒤통수였다. 물론 작가는 주인공의 비극적 상황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한 장치로 설정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반전’ 때문에 상처를 입은 것은 주인공만이 아니다. 진심으로 상황에 몰입하며 눈물을 흘렸던 독자에게 모든 것이 ‘뻥’이었다고 고백하는 소설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한 심정으로 작품 후반부를 읽었는데, 참으로 헛헛했다.
더불어 작품 말미에 실려있는 주인공 한아름이 남기고 간 글 ‘두근두근 그 여름’은 사족이 아닌가 싶다.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 황현진, 문학동네

계간지를 구독하는 덕분에 올해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을 공짜로 받았다. 읽었다. 재미있는 성장소설이다. 어쩌다보니 요사이 성장소설 몇 권을 내리 읽게 되었는데,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의 순서가 제일 끝머리다. 먼저 읽은 작품을 열거하면, <한밤의 아이들>, <두근두근 내 인생>. 신인작가로서는 불리한 대진운이라 할 수 있지만, 이와 상관없이 작품에 대해 딱히 할 말 없다. 굳이 말하자면, 지난해 수상작 <사라다 햄버튼의 겨울>보다 훨씬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는 것 정도.
한 가지 실수라면, 수상작에 내놓은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을 읽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덕담을 위한 자리라지만 공감할 수 없는 칭찬을 쏟아내는 심사위원들의 태도가 거슬린다. 독자들이 애정 없는, 혹은 형식적인 칭찬을 못 알아챌 것이라 생각했는가? 솔직히 소설가 윤성희의 심사평을 제외하면 작가와 작품에 대한 공정한 관심이 느껴지질 않는다. 수상작으로 뽑기가 마뜩치 않았을까? 내키지 않으면 뽑지 말고, 뽑았으면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라. 그것이 신예작가와 독자에 대한 예의다.
생각해보니, 지난해 수상작의 심사평을 읽었을 때도 속이 틀어졌던 것 같다. 어쩌면, 앞으로 심사평 따위는 읽지 않는 것이 방법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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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산책 2011-09-19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쏙 들어오는 단순명쾌 소개글.
트위터에선 여기와는 또다른 모습의 데빌님 ㅋ
앞으로 자주 뵈어용.

lazydevil 2011-09-20 12:26   좋아요 0 | URL
트친님^^;;;
 

 

 

 

 

 

 

 

 

 

우익청년의 탄생기를 그린 <구월의 이틀>를 읽는 내내 갈팡질팡했습니다. 작가의 태도 때문이기도 하고, 독자의 성향 때문이기도 합니다. 작가는 이 작품이 건강한 우익 보수청년의 탄생기를 그려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주인공 은이 우익 보수청년이 되는 과정은 그다지 건강해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찌된 것일까요?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이 작품에는 우익 보수세력에 대한 냉소와 조롱이 곳곳에 깔려있습니다. 냉소와 조롱 속에는 후련한 까발림도 있었지만 실패한 좌파 진보세력의 찌질함도 느껴집니다. 전자가 작가의 분명한 의도로 드러난 대목이라면, 후자는 현재 참혹한 패배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작가와 독자의 피해의식이 만들어낸 산물이 은연중에 드러난 것일 겁니다.

말할 것도 없이 <구월의 이틀>은 정치소설입니다만 그 형태가 조금 독특합니다. 장정일식 성장소설의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재미있습니다. 이런 성장소설의 장치는 실제로 이 작품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오십을 눈앞에 둔 작가가 요즘 세대의 청춘을 바라보며, 또 자신의 청춘을 되돌아보며 그려낸 소묘가 흥미롭거든요. 작가는 두 주인공 ‘금’과 ‘은’에게 때론 꼰대처럼 잔소리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비딱한 사촌형처럼 일탈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작가의 이런 양면적인 태도가 전체 이야기에 중심을 잡아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애써 자신을 감추고 중용을 견지하려는 어정쩡한 태도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야기 역시 두 주인공이 새로운 출발을 선언하는 것으로 흐지부지 끝을 맺습니다. 이전까지 금과 은(두 주인공의 이름), 이성애와 동성애, 좌익과 우익, 전라도와 경상도, 문학과 정치 등 내내 대립적인 구도를 철저하게 견지하거든요.(이들이 서로 흘레붙는 양상을 살펴보는 것이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지름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돌연 독자에게 선택권을 떠넘긴 후 마무리한 인상이 역력해 당혹스럽습니다.

<구월의 이틀>은 장정일 소설답습니다. 장정일은 탁월한 이야기꾼은 아닙니다. 하지만 틀에 얽매이지 않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시적 상징이 돋보이는 에피소드를 작품 속에 적절히 삽입하여 독자들의 즐거움을 줍니다. 문장은 전반적으로 투박하고 건조합니다. 섬세하거나 유려한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죠. 그런데 그런 투박함과 건조함이 오히려 시적 이미지와 충돌하며 독특한 효과를 내는 것 같아요.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이야기의 토대가 충분히 정치적이니 좀더 성장소설에 치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요즘 젊은이들을 위한 성장소설이라고 하기에 주인공 금와 은은 너무 요즘 젊은이들 같지 않습니다. 정치의식이 진공상태나 다름없는 대다수의 요즘 젊은이들을 일깨우기에는 두 주인공은 80년대를 살아가던 386세대와 닮아있습니다. 오히려 <아담이 눈뜰 때>의 주인공 ‘아담’보다 늙수그레한 느낌입니다. 물론 이 작품의 목표가 우익 청년의 탄생을 탐구하는 것이기에 의도적으로 전형화된 면이 없지 않아 있기는 하지만요.

<구월의 이틀>에는 젊은이들이, 아니 꼭 젊은이가 아니라도 생각해봄직한 좋은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합니다만, 쉽게 공감하기 힘든 인물들 때문에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내는 것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젊은이들이 읽어야할 소설이 젊은이들에게 외면 받을 지도 모른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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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산책 2010-03-02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빌님, 이런 글 자주 써주셔요. 뒤에 영화 이야기도 재밌더라구요^^
데빌님의 서평도 굿이지만 영화평이 머리에 쏙쏙 들어오네요ㅎㅎ

lazydevil 2010-03-03 11:5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영화는... 요즘 극장엘 자주 못가요ㅜㅡ 맘먹고 가면 딱히 땅기는 영화는 사라져 버리고요.
암튼 뭉클님 즐봄하세요^^
 

  

 

 

 

 

 

  

언제부터인가 국내 소설에 대한 관심이 점점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외국 소설만 읽고 있는 걸 깨달았습니다. 흥미를 잃은 것이고 다른 이야기를 찾아 나선 결과입니다.

원체 책 읽는 속도가 느린 편입니다. 집중력 부족과 독해력 빈곤 때문이죠.
번역서를 읽을 때 조금 더 고생하는 편입니다. 특히 쌀겨처럼 까칠한 번역을 만나면 두 세 배로 힘겨워합니다. 그래도 외국 소설만 계속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나무토막 같은 둔탁한 번역투 문장으로 중무장한 외국 소설도 조금씩 소화하는 능력이 생기더군요.

최근 어쩌다보니 보니 국내 소설을 네 편이나 읽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 모두 최근에 출간된 여자 작가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네 작품 모두 글 읽기가 즐거웠습니다. 오랜만에 진짜 우리글을 읽은 거죠. 내용이야 어찌되었든 정말 편안하게 술술 읽었습니다.

공선옥의 <내가 제일 예뻤을 때>도 그 가운데 한 작품입니다. 앞서 읽은 네 편의 작품 중에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포함되어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모두 90년 초에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작가들이군요.
그래서 일까요? 두 작품은 비슷한 점이 많아요. 일상 속에 숨어있는 섬세한 감정을 간결하고 단단한 문장으로 포착하는 작가의 노련한 솜씨가 드러납니다. 두 작품 모두 사투리의 아름다움을 멋들어지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공선옥은 여전히 80년 광주와 투쟁의 기억과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더군요. 신경숙의 작품에서 여전히 ‘깊은 슬픔’이 감지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건 두 작가의 상처이자 창작의 근간이겠죠.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두 작품 모두 ‘테레비 연속극 같다’는 겁니다. 이건 칭찬입니다.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수많은 드라마에서 익히 보아온 이야기와 크게 다를 바 없고, <내가 제일 예뻤을 때>는 추억을 되새김질하게 만드는 7,80년대 배경의 드라마에 어울리는 에피소드가 빈번히 등장합니다. 그래서 두 작품은 ‘테레비 연속극’처럼 익숙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동시에 두 작가의 작품은 통속극의 수준에서 한참을 뛰어넘는 울림을 줍니다. 단순한 감정의 자극이 아닌 공감할 수 있는 속 깊은 무엇이 느껴집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 설명하긴 힘들지만, 작가의 역량과 문학성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예전처럼 국내 소설을 열독하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국내 소설을 읽고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기도 뭣하고, 별점을 주기에는 더욱 부담스럽습니다. 역시 생각나는 대로 막말하기에는 외국 소설이 편합니다. 특히 최근 즐겨 읽는 장르 소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도 종종 국내 소설을 읽을 작정입니다. 문장읽기의 즐거움과 편안함을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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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릴레이] 나의 독서론
    from My own private affairs 2009-06-14 10:57 
    [릴레이] 나의 독서론 규칙입니다. 1. 독서란 [ ]다. 의 네모를 채우고 간단한 의견을 써주세요. 2. 앞선 릴레이 주자의 이름들을 순서대로 써주시고 3. 릴레이 받을 두 명을 지정해 주세요. 4. 이 릴레이는 6월 20일까지만 지속됩니다. 기타 세칙은 릴레이의 오상 참조    독서란 [문(門)]이다.  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던, 모르던 간에 저는 처음 문을
 
 
Forgettable. 2009-06-12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여성작가들 글을 참 좋아했었는데, (그러니깐 대표적으로 신경숙이나 전경린 등..)
근데 자꾸 읽으니까 왠지 뻔한.. 뭐랄까 모녀간 혹은 고부간의 갈등, 자매간의 질투, 의미혹은 사랑없는 섹스, 밑도 끝도 없이 우울하거나 차가운 남자캐릭터;; 운동의 로망(?) 이런 것이 지겨워져요 ㅎㅎ
너무 일반화했나^^;
그래도 분명 한국적인 감성이나 다듬어진 문장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란 건 인정해요. 국내 소설이나 드라마는 왜 이야기가 외국 작품에 비해서 빈약할까요..


lazydevil 2009-06-13 00:4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포겟님의 일반화에 상당부분 동의합니다.
그래서 우리 소설 읽기에 흥미를 잃었을 겁니다.
조만간 이야기의 힘을 보여주는 우리 소설도 등장하겠죠.
아니 포겟님과 저만 모르게 벌써 등장했을 지도 몰라요...!!

카스피 2009-06-13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쟝르 소설을 좋아하다보니 국내 작가의 책들을 읽어본지 꽤 오래됬네요.뭐 근자에 있은 책은 늦었지만 최인호씨의 상도 정도....
여성 작가분의 책들은 너무 개인적인 관점으로 흘러선지 잘 안 읽혀지는것 같네요^^

lazydevil 2009-06-13 00:53   좋아요 0 | URL
'상도'라면, 읽어보지 못햇지만,
그래두 이야기의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어요.
저두 비슷한 생각입니다.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 자의식이 강하게 드러나는 거...요^^;

쥬베이 2009-06-14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lazydevil님하곤 통하는게 있어요!ㅋㅋ
[언제부터인가 국내 소설에 대한 관심이 점점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외국 소설만 읽고 있는 걸 깨달았습니다.] <--- 초공감!!^^
저도 국내소설은 잘 안 읽게 되더라고요...

lazydevil 2009-06-15 12:35   좋아요 0 | URL
무슨 말씀을... 그래도 근간에는 국내소설도 종종 읽으시잖아요~
암튼 쥬베이님, 굿 투 씨유 어게인입니다~~^*^

Forgettable. 2009-06-14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빌님-0-

괜찮으시면 트랙백 달아놓은 것 부탁드려요 ㅋㅋ
숙제에요! ㅎ
 

단편집 <나를 위해 웃다>의 젊은 작가는 분명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밝고 경쾌하며 가볍고 씩씩합니다. 일감이 그래요. 그래서 무엇을 이야기하든 밝고 경쾌하고 가볍고 씩씩하게 들립니다.  

실제로 <나를 위해 웃다>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은 모두 그렇습니다. 일감이 그래요. 독자들 또한 그녀가 무엇에 관해 이야기하든 밝고 경쾌하고 가볍고 씩씩하게 느낍니다. 덕분에 책읽기는 한층 수월해집니다.

때론 밝고 경쾌하고 가볍고 씩씩한 작가의 목소리가 그녀가 이야기하는 것의 무게와 충돌하기도 합니다. 그 결과는 ‘이야기하는 것의 무게’에 따라 종종 다르게 나타납니다. 때로는 ‘무게’가 필요이상으로 희석되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방식의 ‘무게’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전자의 경우 아쉬웠고, 후자의 경우 흥미로웠습니다. 그런데 한 작품 한 작품 읽을수록 작가의 목소리에 익숙해진 나머지 종국에는 아쉬움이 익숙해짐으로 슬며시 변하기도 했습니다.

한 가지가 빠졌네요.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이 작가의 목소리는 밝고 경쾌하고 가볍고 씩씩하지만 절대로 선을 넘지 않습니다. 매우 단하하고 정제되어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절제된 목소리입니다. 생각해보면 절제된 목소리는 ‘밝고 경쾌하고 가볍고 씩씩한’ 것과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또 한번 충돌이 일어납니다.
아무튼 작가의 목소리는 맞보기를 하듯 양쪽을 모두 엿봅니다. 작가의 목소리가 가볍지만 전혀 경박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래저래 작가의 목소리는 가벼운 충돌을 만들어냅니다. 그 결과 생겨나는 것 중 하나가 이미지의 여백이고요. 술술 읽히는 가운데도 작가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놓치지 않고 그려보게 하는 힘이라고나 할까요.

그래도 ‘이야기’에 대한 아쉬움은 큽니다. 젊은 작가다운 감수성이 돋보이기는 하지만 그간 우리 소설들이 주로 다뤄왔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아쉽고도 아쉬웠습니다. 목소리는 여전히 귓전을 맴도는데 말이죠.

덧붙임.
피츠제럴드의 단편 ‘벤자민 버튼의 기묘한 경우’를 떠올리게 하는 표제작 ‘나를 위해 웃다’가 무척 좋았습니다.

궁금증.
<나를 위해 웃다>는 작가의 첫 소설집입니다. 그런데 해설에서 그 어떤 작품보다 많이 언급되는 단편 ‘스톤피시는 어디로 갔을까?’는 왜 수록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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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작가의 첫 소설집을 읽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불필요한 선입견이나 기대심리에 간섭받지 않고 편안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죠. 선입견이나 기대심리를 대신하는 것은 호기심. 순수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독서는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편안한 관계맺음의 시작일 겁니다.

<늑대의 문장>은 생경한 작품들로 채워진 소설집입니다. 작가는 용감하게도 전통적인 방식의 이야기를 포기하고, 파편적인 이미지로 이야기가 사라진 빈 공간을 채웁니다. 그러니까 이 책에 실린 작품은 줄거리 요약이 불가능한 소설이고, 읽고 난 후 독자의 머리 속에 남는 것은 낯선 이미지들과 만났던 기억뿐입니다. 마치 <안달루시아의 개>같은 전위영화를 보는 기분이랄까요?

솔직히 두 세 차례 끝까지 읽기를 포기할까 생각했을 만큼 부담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서두르지 않고 읽었습니다. 낯선 이미지를 섬세하게 더듬어내는 탄탄하고 군더더기 없는 작가의 문장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문장도 허투로 풀어놓지 않으려는 젊은 작가의 끈기가 엿보였고, 이는 독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미덕일 겁니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종종 과욕으로 비춰질 때가 있었습니다. 종잡을 수 없는 이미지의 불쑥 튀어나와 쫓아가기가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의심도 해보았습니다. 사실은 할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기교'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 이 작가는 단편 하나 써내는 것도 버겁고 버겁지 않았을까? 이런 방식의 글쓰기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의심을 불식시킬 만큼 작가가 만들어낸 이미지와 섬세한 문장을 아름다웠습니다.

재미있는 책읽기였지만 작가에 대한 판단과 작품에 대한 평가는 뒤로 미루고 싶습니다. 작가를 파악하기에 이 책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은 턱없이 부족하고, 작가가 만든 세계를 조망하기에도 불충분합니다. 그리고 작가가 만든 세계는 아직 미완이기에 더욱 쉽지 않습니다. 아홉 편의 단편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작가가 일궈낸 일정부분의 성취, 그리고 기대와 우려가 섞인 조심스러운 전망이 고작일 것입니다.

여하튼 젊은 작가 김유진의 첫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을 즐겁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분을 책 말미에 실린 한 평론가의 ‘해설’이 잡쳐놓았습니다. 책장을 덮은 뒷맛이 영 안 좋아요.  무슨 소린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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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5-08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 작가의 해설은 좀 그렇지만 외국 작품에 대한 해설이 없으면 좀 2%빠진 듯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그 작가의 작품이 또 번역된다는 보장이 없으니 전후 좌후에 대한 해설이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데 일부 번역가나 출판사에서는 이게 귀찮다고 안하는 경우가 있더라구요.
저는 외국 작품에 한해서는 해설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인입니다.

lazydevil 2009-05-09 00:09   좋아요 0 | URL
동감입니다. 좋은 해설을 읽는 즐거움은 두 말하면 잔소리죠. 마치 즐거운 후식을 맛보는 기쁨이잖아요. 그리고 독자들이 그런 해설에서 많은 정보를 얻는 것도 사실이고요.^^
제가 말한 건 그런 좋은 해설이 아니라 공감할 수 없는 해석과 현학적인 지식만 난무하는 꿈보다 해몽식 평론을 말한 거랍니다.^*^ 그런 평론보다 카스피님 서재에 있는 좋은 정보들이 저같은 독자에겐 훨씬 도움이 된답니다.~^^;;


쥬베이 2009-05-09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저도 이 작품 읽었어요!!
저는 나름 좋았는데, lazydevil님께는 약간 아쉬웠나 봐요^^
해설부분 비판하신거..멋지십니다!! 해설은 어깨에 힘만 잔뜩들어가 있는 글이죠ㅋㅋㅋ

lazydevil 2009-05-13 08:55   좋아요 0 | URL
국내 작가의 작품은 서평하기가 좀 그래요. 별점 주는 것도 머쓰하고요.
그래서 서평도 잘 안쓰는데... 이 작품은 평론가의 '해설'때문에 쫌 흥분해서리 과격해졌네요~~^*^
아무튼 이 책의 주인, 어린 작가가 좋은 문장을 가지고 있어서 기대도 되고, 한편으로 부러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