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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내 사랑 ㅣ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3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1.
(...) 모자를 벗어서 머리를 만져보았다. 멋지고 오래된 내 머리, 너무 오랫동안 달고 다녔지. 지금은 약간 무른 과육 같고 꽤 아팠다. 그렇지만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가볍게 얻어맞은 정도였다. 모자가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대로 여전히 쓸만한 머리였다. 어쨌거나 내년에도 쓸 수 있을 것이다.(p96)
지난 주 내내 며칠간 뒷골이 당길 정도로 짜증이 범람했다. 폭주하는 ‘골땡김’을 극복하는 처방이랍시고 한 짓거리. 책장에서 챈들러를 꺼내 읽으며 매실주 음용하기! 쫌 찌질하다. 이런 때 챈들러라니? 무슨 허세냐. 게다가 위스키 사워나 김릿도 아니고 발암물질 함유가 다분히 의심되는 매실주가 뭐냐?
2.
굴착기 삽만 빼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얻어맞은 것처럼 얼굴이 여기저기 찌그러져 있었다.(p.14)
암튼 오랜만에 말로를 다시 만나는 동안 잠시 골땡김을 잊었던 것은 사실이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책장을 넘기다가 키득거리고 웃었으니까. ‘말로가 날 웃겼어. 말로가 나를 웃겼다고.’라고 혼잣말을 해본다.
3.
어찌나 예의 바르던지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그를 침실까지 업어다 주고 싶을 지경이다.(p.182)
원래 책 읽는 속도가 느린 편이지만, 확실히 챈들러를 읽는 속도는 더욱 느리다. <안녕 내 사랑>을 거의 나흘 이상 붙들고 있었으니까. 오래전 처음 읽었을 때는 더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을 거다. 하지만 분명히 그럴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느리게 읽기와 다시 읽기의 댓가를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챈들러를 추앙하고, 말로를 흠모하기에 억지로라도 엇나가고 싶다. 하지만 말로를 만나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즐겁기에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챈들러를 추앙하고, 말로를 흠모하노라고. 어찌나 흠모하는지 그를 침실까지 업어다 주고 싶을 지경이다. 아고 허리야...
4.
한기가 느껴지고 나 자신이 역겨워졌다. 가난뱅이의 주머니를 턴 기분이었다.(p.198)
말로는 죄 많고 더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위악적인 태도를 보호색으로 삼는다. 그것이 때로는 지독한 냉소나 환멸로 표출되기도 하고, 때로는 신념을 지키는 다크 나이트의 정의로움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하지만 역시 그의 매력은 냉소와 환멸이다. 그것은 썩어빠진 세상에 대한 야유이기에 전혀 밉살스럽지 않다.
5.
“나는 매끈하고 화려한 여자가 좋아요. 비정하고 죄를 잔뜩 짊어진 여자들 말이에요.”(p.287)
북하우스판 번역은 매우 충실한 편이다. <빅슬립>부터 <기나긴 이별>까지 차례로 읽을 때도 느낀 점이지만 뒤로 갈 수록의 말로에 어울리는 번역본으로 진화한다. 다만 다시 거슬러 <안녕 내 사랑>을 펼쳐보니 말로의 어투가 조금 공손하고 예의바르게 들린다. 깍듯한 말투로 이죽거리는 말로도 재미있긴 하다. 하지만 터프한 척 허세작렬하는 남자, 그게 말로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