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를 보았다 - I Saw The D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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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관심이 예전같지 않은 터라 신작에 대한 정보흡수가 거의 백지상태입니다. 누가 연출했고, 누가 출연했는지 정도만 확인하고 영화를 봅니다. 영화평은 고사하고 종종 어떤 내용인지도 모른 채 상영관에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관심을 줄었지만 영화를 보는 행위자체는 여전히 즐거운가 봅니다.
<악마를 보았다>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 김지운이 연출했고, 이병헌과 최민식이 출연한다는 기본정보에, 사이코패스를 소재로 한 복수극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아, 그리고, 작품에 대한 평가가 서로 갈린다고 이야기를 언뜻 들은 정도였습니다. 아무튼 오랜만에 나타난 최민식이 반가웠고, 이병헌이라는 댄디한 배우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궁금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왜 이 영화의 평가가 갈리는지 알겠더군요. 영화평이나 관련 기사 하나 제대로 읽지 않았지만 어떤 말들이 나왔는지 알겠더군요. 정말 분명한 영화였습니다. 모든 면에서요.

김지운 감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연출한 영화들은 한결같이 가짜 같았어요. 늘 겉으로는 그럴 싸 해보이지만 알맹이가 없었습니다. 데뷔작 <조용한 가족>부터 <장화홍련>도 그렇고, <달콤한 인생>이나 <놈.놈.놈.>까지 모두 그랬습니다. 그나마 <놈.놈.놈.>이 가장 괜찮았습니다. 역시 알맹이는 없지만 솔직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악마를 보았다>는 이전과 달랐습니다. 정말 분명히 속이 찬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를 만약 싫어하거나, 악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럴 만도 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이 영화는 몹시 불쾌한 영화거든요. 하지만 이 영화를 욕하는 사람일지라도 이것만은 인정해야할 겁니다. <악마를 보았다>는 지금까지 김지운이 만든 작품 중 최고라는 것. 그러니까 좋은 영화는 아닐 지언정 꽤 괜찮은 작품일 수는 있다는 말입니다.
 

<악마를 보았다>가 불쾌한 이유는 최민식이 주인공이기 때문일 겁니다. 이 영화는 사이코패스인 연쇄살인마의 동선을 따라 이야기 진행됩니다. 그러니까 복수하는 남자 이병헌의 이야기가 아니라 복수를 당하는 살인마 최민식의 이야기입니다. 그 결과 관객들은 살인마의 만행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봐야만 합니다. 피가 튀고, 살점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고, 사지가 절단되는 순간들을 살인마와 함께 동참해야합니다. 정의(?)를 위한 복수는 나중 이야기입니다. 피해자에게 공권력은 언제나 저 너머에 있듯, 이 영화에서 복수의 카타르시스는 멀기만 합니다. 이는 복수하는 남자 이병헌에게도 마찬가지죠.
불쾌하면서도, 흥미로운 것. 이 영화에서 살인마 최민식이 피해여성들을 사냥하는 동안 관객들은 긴장감을 느끼기보다 감당하기 힘든 무력감에 시달린다는 점입니다. 김지운 감독은 관객들이 살인마 최민식의 숨소리 하나, 땀방울 하나 놓치지 말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카메라를 향해 쏘아보는 그 섬뜩한 눈빛은 관객들을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의 무기력한 방관자 혹은 잠정적 피해자로 만드는 듯합니다.
지금까지 본 한국영화에서 이토록 살인마의 모습을 한계까지 밀어붙인 영화는 보지 못했습니다. 감독의 용기가 가상할 지경입니다. 살인마 최민식의 마지막 질주를 때로는 거칠고 투박하게, 때로는 산뜻한 기교로 동행하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해야만 하는 2시간 20분은 너무나 힘겹고 불쾌합니다. 그래서 전 이 영화를 좋아할 수 없습니다.

영화는 그야말로 냉혹하고 잔인무도하며 끔찍합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김지운 영화와는 달리 지극히 사실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장화홍련>이나 <달콤한 인생>, <놈.놈.놈.>같은 환타지의 세계가 아니예요. 그런 의미에서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전원주택 에피소드는 눈에 거슬립니다. 이전 김지운 영화 같은 무대장치와 상황들이 작품의 일관성을 저해합니다. 이 시퀀스는 <호스텔>류의 슬래셔 무비에나 어울리는 이미지와 개그들이더군요.
전혀 다른 개성의 두 남자 이병헌과 최민식의 조화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그들의 상승효과는 초반보다 중반, 중반보다 후반부에 더욱 힘을 발휘합니다. 어쨌거나 두 남자는 좋은 배우임에 분명합니다. 그럼 두 사람의 대결은? 승리자는 최민식이 될 수밖에 없어요. 영화 속에서나 영화 밖에서나 둘 다 말입니다. 복수극이 아닌 살인마의 이야기이니 그럴 수밖에요.
<악마를 보았다>는 분명히 김지운 감독의 또 다른 모습일 겁니다. <달콤한 인생>의 이병헌처럼 댄디한 스타일리스트이면서 잔혹극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컬트 마니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이 영화를 보기전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틀리지 않았습니다. 김지운 감독이 <악마를 보았다>같은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은 아주 뜻밖의 일은 아닙니다. 아주 오래전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회고전에서 김지운 감독을 본적 기억이 있어요. 영화를 보기 위해 며칠을 출몰하더군요. 구로사와 기요시의 초창기 영화와 <악마를 보았다>가 비슷한 동네에 있다는 것은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벌써 칠팔 년전 이야기니까 김지운 감독은 예전부터 하드보일드한 컬트 잔혹극을 꿈꾸고 있었을 겁니다.



김지운 감독의 새로운 시도를 환영합니다. 개인적으로 그간 보여준 댄디한 스타일이 별로였거든요. <악마를 보았다>를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지만, 이전 작품들 보다 분명히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못마땅한 것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제작비는 무려 70억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영화의 이야기 규모는 70억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마더>가 그랬고, <박쥐>가 그랬던 것처럼요. 이 불쾌한 영화를 욕하는 사람의 일부는 어처구니없는 규모의 제작비 때문에 그랬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제경우 <악마를 보았다>를 17억, 아니 27억에 찍었다면, 김지운 감독을 좋아했을 지도, 아니 존경했을 지도 모릅니다. 영화의 때깔이 덜 세련되었을 지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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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 - Inceptio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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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꿈속에 들어갈 수 있다면? <인셉션>은 이런 발상에서 시작합니다. 재미있는 아이디어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비밀을 훔쳐보거나 조작하려는 시도로 확장됩니다. 주인공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다른 사람의 꿈에 침입하는 전문가입니다. 저 밑바닥에 있는 무의식의 영역까지요.
비밀을 캐려하는데 꿈의 주인이 가만히 있을 리 없습니다. 침입자의 존재를 인지하는 순간 방어체계가 작동하는데, 침입자를 제거하려는 사람들(킬러 혹은 군인)이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무의식이 비밀스러운 생각을 들춰내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거죠. 마치 백혈구(이건 함께 영화를 본 사람의 표현입니다. 적절한 거 같아요)처럼요. 재미있는 것은 침입자인 코브의 무의식도 동시에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코브를 방해하고 위협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꿈속에 자기 무의식이 나타나 다른 사람의 무의식이 공조 아닌 공조를 펴는 거죠. 어때요 재미있지 않나요? 




이런 흥미로운 아이디어로 출발한 <인셉션>은 뜻밖에 지루하고 따분했습니다. 괜찮은 아이디어를 황홀한 스펙타클로 형상화했는데도 말입니다. 왜일까요? 아마도 극적 갈등이 희미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주인공들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미션을 수행합니다. 다른 사람의 꿈에 들어가 거짓 기억을 주입시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세 번에 걸친 꿈속 침투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꿈속에서 또 꿈속으로, 다시 꿈속으로 들어가 꿈을 꾸는 인물의 내면에 자리한 비밀을 찾아내어 새로운 기억을 이식해야합니다. 점입가경(漸入佳境). 그러니까 점점 들어갈 수록 놀라운 일들이 펼쳐지는 거죠. 마치 거듭되는 컴퓨터 게임의 미션처럼 말입니다.(혹시 <인셉션>의 원작이 게임인가요? 게임에 대해 무지하고, 검색하는 것도 귀찮네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꿈속의 꿈이 겹치는 설정, 이중삼중으로 미션을 수행하는 것은 정말 컴퓨터 게임의 스테이지 진행과 흡사합니다. 각 스테이지 마다 뛰어넘어야할 미션이 있을 뿐 플레이어에게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똑같습니다.

물론 주인공 코브에게 갈등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무의식에는 아내를 죽도록 했다는 것에 대한 죄의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코브의 아내(그러니까 코브의 무의식)는 꿈속에 나타나 번번이 코브의 임무를 방해합니다. 이런 아내를 볼 때마다 코브는 괴로워하죠. 그런데 이것이 코브가 맡은 임무와 전혀 관계가 없어요. 코브의 임무는 피셔라는 인물의 꿈에 침투하여 새로운 정보를 입력하는 것. 그래서 피셔의 갈등을 해결하는 겁니다. 결국 영화에서 내내 펼쳐지는 엄청난 스펙타클은 주인공과 감정적 교감이 전혀 없는 피셔를 위한 이벤트입니다. 피셔를 구원하기 위한 깜짝쇼인 거죠.
그럼 주인공 코브의 갈등은? 깜짝쇼를 방해하는 요소의 하나 일 뿐입니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에요. 이런 이유로 주인공 코브가 번민하고 눈물을 흘려도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컴퓨터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가 휴대폰 통화를 하느라 제대로 미션을 클리어하는데 방해받는 느낌이랄까요? 둘은 전혀 엮기지 않습니다. 




인간의 꿈을 소재로 하고 있고, 무의식과 림보, 토템을 들먹이고 있지만 <인셉션>은 전혀 지적인 작품이 아닙니다. 꿈이라는 것의 특성을 잘 소화하지도 못했고, 무의식과 림보, 토템도 멋지게 활용하지 못하고 이름만 따온 수준입니다.
사실 <인셉션>의 꿈은 우리가 알고 있는 꿈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의 무의식이 은유와 환유로 재구성된 것과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말입니다. 프로이트에 일자무식인 사림이 봐도 전혀 프로이트적인 세계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꿈과 인간의 뇌에 관한 과학적인 근거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럼 <인셉션>의 꿈은 무엇일까요? <매트릭스>의 시뮬라크 세계와 같습니다. 현실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답을 시뮬라크 세계(꿈)에서 찾는다는 설정이 똑같습니다. 시뮬라크의 세계를 겹겹이 쌓아놓아 그 구조를 조금 복잡하게 만들었을 뿐 다를 바가 없습니다. 꿈속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면 림보라는 동일한 세계에 빠진다는 설정이 그 증거입니다. 저마다 다른 꿈을 꾸어도 그들이 떨어지는 림보는 하나로 설정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영화 속에서는 이를 정당히 얼버무리고 있는 것 같았어요. 아니면 제가 얼버무리고 있거나요. 사실 좀 지루하게 본 터라 대사에 집중하지 않은 장면 종종 있거든요.)
결론만 말하면 가상현실에나 어울리는 설정을 꿈이라는 소재에 우격다짐으로 끼워 넣은 듯한 인상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연출도 영화를 지루하게 만드는데 한몫 합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드라마에는 약해요. 감정을 쌓아가기보다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정보전달에만 관심을 두거든요. 사건이 긴박하게 전개되기는 하지만 늘 서사구조가 느슨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어요. 특히 씬과 씬의 연결이 거칠기 그지없는데, 뛰어난 편집으로 이를 극복하죠. 영화를 보다보면 마치 무성영화처럼 배경음악이 끊이질 않고 흐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도 또한 거칠게 이어붙인 씬들을 눈가림하기 위한 수단인데 때로는 몹시 귀에 거슬립니다.
반면 절정의 순간을 상정해놓고 스트레이트하게 몰아붙이는 힘은 대단합니다. 거의 뻔뻔스러울 정도로 막판 승부만을 위해 가속을 붙입니다. 관객들이 인물과 동화하는지 어쩐지는 관심 없어요. 리듬감 부재! 언제나 클라이맥스의 폭발만을 위해 감정을 폭주기관차처럼 달려가니까요.
<다크 나이트>의 경우 크리스토퍼 놀란의 스타일이 놀라운 위력을 발휘한 작품입니다. 하이라이트인 ‘배트맨과 조우커의 대결/투페이스의 탄생/선상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교차하면서 긴장감과 함께 묵직한 주제가 떠오릅니다. 그런데 <인셉션>의 경우 그렇지 못합니다. 실패죠. 긴장감은 힘을 발휘하나 주제가 부각되지 않기에 공허합니다. 사건의 설정만 있을 뿐 인물의 갈등이 없었으니 주제가 떠오를 리 없지요.
똑같은 스타일의 영화인데 왜 <다크 나이트>는 성공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캐릭터의 힘입니다. 배트맨/조우커/하비 덴트(투 페이스)의 캐릭터는 이미 분명한 갈등요인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서로 뒤엉키며 이야기가 완성되고 마무리되었거든요. 다시 생각해봐도 <다크 나이트>는 무모하리만치 저돌적인 걸작 블록버스터입니다.


영화에 대한 해석을 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가 있나봅니다. 그런 이야기를 얼핏 듣고 호기심을 느낀 것도 사실이죠. 그래서 영화를 보았으니까요. 뚜껑을 열어보았더니 <인셉션>은 그냥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입니다. 모호함은 의도된 것이 아니라 요령부득 때문입니다. <다크 나이트>의 무게감에 턱없이 모자를 뿐만 아니라, <매트릭스>가 구현한 시뮬라크 세계도 제대로 흉내 내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뜯어볼수록 흥미로운 두 영화와는 격이 다릅니다.
감기는 눈을 부릅뜨느라 ‘백푸로’ 집중하지 못했지만 이런 소리를 한다고 감독이 억울해하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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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레슬러 - The Wrest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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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레슬러>는 <록키 발보아>(록키6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작품 모두 늙는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권투와 레슬링은 육체적 노화를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좋은 소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때 섹스 심벌이었던 미키 루크가 주인공 ‘랜디 더 램’을 맡은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완전히 망가진 미키 루크의 사생활과 주인공 랜디 더 램의 현재가 절묘하게 중첩되어 놀라운 흡입력을 발휘하고 있으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더 레슬러>는 늙는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 아닙니다. 한심하고 대책 없는 늙은 수컷에 대한 신랄한 까발림입니다. 그래서 순진한 남성 환타지에 충실한 <록키 발보아>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더 레슬러>의 주인공 랜디 더 램은 한때 잘나가던 프로레슬러였습니다. 하지만 세월은 그를 속절없이 퇴물로 만들어 버리죠. 영화는 전성기를 훌쩍 지난 노쇠한 레슬러 랜디의 초라한 뒷모습에서 시작합니다.
늙은 랜디의 삶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입니다. 초라한 링에 올라 몸을 던져 시합을 하지만 그의 손에 쥐어진 게임머니는 푼돈에 불과합니다. 현재 그의 거처는 낡은 트레일러인데, 그마저 밀린 방세 때문에 쫓겨날 판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심장마저 좋지 않아 더 이상 링에 서지 못하게 되자 램은 사랑하는 딸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딸은 아버지를 매몰차게 외면하죠. 이 모든 것은 그가 자초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누굴 탓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슬픕니다.

랜디의 막장 인생은 그가 최고였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처절합니다. 퇴물 레슬러의 삶을 영화는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죠. 프로레슬러로서 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도 그에게는 혹독하기만 합니다. 결국 늙고 병든 수컷은 자신을 외면하는 세상을 뒤로 하고 다시 링에 오르기로 결심합니다. 링은 그를 기다려주고 알아주는 유일한 곳이죠.

극한 삶에 내몰린 주인공 랜디 더 램을 동정할지언정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는 자기가 선택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은 전혀 배려하지 않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일관합니다. 다행히 링의 세계는 일종의 ‘쇼’이기에, 그가 한때 잘나가던 랜디 더 램이기에 그런 태도가 먹힙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더구나 퇴물이 된 지금은 두 말할 것도 없겠죠.

(동정할 가치 없는) 랜디의 삶은 마리사 토메이가 열연한 스트리퍼 캐시디로 인해 더욱 분명해집니다. 캐시디와 랜디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죠. 두 사람은 ‘몸’으로 먹고 삽니다. 캐시디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무대 위에서 ‘쇼’를 한다는 점도 같죠. 게다가 이들의 상품적 가치는 이제 종착역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랜디의 처진 근육과 캐시디의 탄력 잃은 관능은 똑같이 서글퍼 보입니다. 
이들을 이어주는 또 다른 공통점은 부모라는 것입니다. 랜디는 딸을, 캐시디는 아들이 있죠. 그런데 여기서 랜디와 캐시디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랜디는 찰나적 쾌락을 거부하지 못해 딸과의 중요한 약속도 저버린 대책 없는 아버지입니다. 그는 늘 이런 식입니다. 감정적이고 찰나적이죠. 반면 캐시디는 아들을 위해 자신의 감정과 생활을 절제할 줄 아는 헌신적인 어머니죠.

두 사람의 차이는 이름에 관한 태도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랜디는 실생활에서도 ‘랜디 더 램’이라는 링네임을 고집합니다. 이미 레슬러로서 은퇴한 마당에도 로빈 라몬스키라는 실제 이름을 거부하죠. 반면 캐시디는 ‘팸’으로 불리기를 원합니다. 아들을 돌보기 위해 스트리퍼 캐시디가 될 뿐이지, 그녀는 팸이라는 이름의 어머니임을 한시도 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전혀 다른 동네에서 살고 있네요. 랜디는 링에서 ‘근육’을 과시하기 위해 마트에서 알바를 하지만, 캐시디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관능’을 팝니다. 그러니까 랜디는 링에 오르기 위해 마지못해 현실을 받아드리지만, 캐시디는 현실을 위해 무대에서 춤을 춥니다. 이건 비단 랜디와 캐시디의 차이가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의 차이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어머니로서 이타적 삶을 사는 캐시디의 모습은 수컷 랜디의 어리석음을 더욱 뼈저리게 보여줍니다.

작품 곳곳에는 감독 대런 아르노프스키의 악취미가 심심치 않게 드러납니다. 여과 없이 보여주는 잔혹한 레슬링 경기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이후 가장 끔찍한 고어 장면이었습니다. 여기에 몸을 사리지 않는 미키 루크의 연기는 차라리 고문에 가까울 만큼 리얼했습니다. 정말이지 두 번 다시 보고 싶은 않은 장면이자 연기였습니다.

하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기는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랜디처럼 사는 불쌍한 수컷들에 대한 까발림은 이 영화 한 편으로 족합니다. 보는 내내 복잡한 감정이 뒤엉켜 불편했습니다. ‘한심한 놈, 넌 죽어도 싸!’, ‘가여운 인생’이라는 감정이 교차했으니까요. 거기에 끔찍함까지!! 이게 바로 영악한 감독의 노림수였겠지요.
한 가지 덧붙이면,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건스 앤 로지스의 ‘Sweet Child O'Mine’이 이렇게 가슴 아프게 들릴 줄은 몰랐습니다. 이 역시 ‘변태’ 감독의 노림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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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3-12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키 루크가 오스카를 못 받은 것이 좀 의외더군요.돌아온 탕아한테 미국 아카데미가 충분히 줄만 했었는데요.

lazydevil 2009-03-13 11:59   좋아요 0 | URL
ㅎㅎ그러게요. 카스피님 말처럼 미키 루크가 돌아온 탕아이긴 한데... 그간 필모가 위원님들의 입맛에 맞는 작품들은 아니었죠. 아카데미는 늘 이전 업적까지 둘러보는 경향이 있는거 같아요~~^^

쥬베이 2009-03-14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제 영화서평까지!! 역시 데블님ㅋㅋ
제가 볼때는 듀나님보다 더 잘쓰세요!!

lazydevil 2009-03-15 19:45   좋아요 0 | URL
푸하~~ 쥬베이님 오랜만에 오셔서 비행기까지용??ㅋㅋ 암튼 다시 뵈서 반갑습니다.
 
H2 1 - 소장판
아다치 미츠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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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럴 줄은 몰랐다. 곧 다가올 월요일을 준비하며 저마다 휴식을 취하는 일요일밤 11시, 개인적 아픔(?)을 달래기 위한 마취제로 퇴근길에 충동적으로 빌린 만화책 몇 권. 내게 만화귀신이 씌워놓고 말았다.

출근길 어김없이 고개를 상하를 끄덕이며 졸던 내가 아침시간 내내 말똥말똥 눈을 뜬 채 출근을 한다. 왜냐고? 만화 볼려구!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어도 간혹 내릴 곳을 놓칠 뻔하여 허겁지겁 지하철 문을 나선다. 왜냐고? 만화 보다가! 밤이면 다음날 출근시간이 기다려지고, 사무실에서는 빨리 퇴근 시간을 기다린다. 왜냐고? 차안에서 만화 볼려구!

하긴 며칠 미친 듯이 만화에 열광했다고 당장 만화광이 될 리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오늘 이야기하는 이 만화는 확실히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이런 세계도 있구나. 이런 즐거움도 있구나.

'H2'의 스토리는 통속적이다. 그런데 이 통속적인 이야기를 꾸려가는 작가 아다치 미츠루의 솜씨는 정말 대단하다. 그 솜씨가 얼마나 대단한지 결말을 뻔히 예상하면서도 손을 놀 수 없게 만든다.
아다치의 탁월함은 캐릭터를 만드는 힘에 있다. 만화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가 저마다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주인공 히로는 이름처럼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야구영웅. 헌데 그는 경기의 승패나 기록에는 별 관심이 없다. 단지 야구를 좋아하며 게임을 즐기는 평범한 야구소년일 뿐이다. 실제로 히로는 갑자원에서 히데오와 대결하는 것이 목적이지 우승기나 우승컵 따위에는 별 집착을 보이지 않는다.

단지 고등학생일 뿐인데 벌써 세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히로. 이상하게도 이렇게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전혀 어색하거나 거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유인 즉 아다치는 비현실적인 캐릭터와 이야기를 일상적인 상황과 너무나 잘 조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히로와 히카리를 둘러싼 가족과 친구들은 만화 속에 등장하지만, 그래서 다소 과장되어 있지만, 당장이라도 주위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리고 찾고 싶은 평범하지만 이상적인 인물들이다. 평범하지만 이상적이라! 그래서 그들은 매력적이다.

'H2'의 또 하나의 놀라운 점. 이야기의 갈등과 긴장감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전형적인 악당이 나올 법한데 이 만화에는 악당이라고는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무슨 천사표 만화도 아니고 이게 뭐람! 초반 구제불능 악당 비스무레하게 등장하는 키네(내가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는 곧 히로의 없어서는 안될 친구가 되고, 승리를 위해 갖은 야비한 수단을 마다하지 않는 또 다른 야구천재 히료타조차 결국 미워할 수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니까 'H2'에는 버릴 만한 캐릭터가 하나도 없다는 것.

이렇게 캐릭터의 절묘하게 소묘한 덕에 'H2'는 탁월한 대중을 획득하는데... 이 정도에서 그쳤다면 'H2'는 그냥 평범한 베스트셀러 만화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열성적인 지지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아다치 미츠루의 감수성과 그것을 극대화시키는 연출력이다.

'H2'전편에는 아디치 미츠루만의 독특한 감수성이 흐르고 있다. 그것은 평범한 일상에 숨어있는 미묘한 감정의 떨림을 잡아내는 섬세함이다. 그 감수성이 비록 사소하고, 가벼운 것일지라도 'H2'를 다른 만화와 차별화시키는 가장 큰 힘이자 탄탄한 열혈지지자를 만들어낸 저력이다.

사실 나도 그 점 때문에 이 만화에 반했는데, 그 섬세함이 단아하고 참신한 연출과 맞물려 발휘하는 재미와 감동은 웬만한 영화를 찜쪄 먹을 수준이다. 아니 이 만화를 보면서 만약 아다치가 영화감독이 되었다면 이와이 슌지가 울고 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나는 요즘 이 만화의 소장을 꿈꾼다.... (200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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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zydevil 2008-08-24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을 뒤적이다가 발견한 글입니다. 8년전, 그러니까 알라딘 서재 블로그가 없던 시절 썼던 리뷰죠. 출처불명으로 떠돌고 있길래 긁어다 놨습니다. 오래된 일기를 다시 펼쳐본 기분인데... 다시 읽어보니... 쩝~ ^^;

쥬베이 2008-08-25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처음에 'lazydevil님 어제 밤에 만화보셨구나^^' 했는데
마지막 부분에 연도보고 약간 의아ㅋㅋㅋ 예전 글이었군요^^
저도 만화 좋아해요, 딸기 100% 재밌었음ㅋㅋㅋㅋ

lazydevil 2008-08-25 12:40   좋아요 0 | URL
오래전 끄적인 글이 행불자처럼 떠돌고 있더라구요. 수정없이 올려놨는데 부끄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