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란 무엇인가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정명환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 예상은 하루에 120페이지 정도를 3일에 걸쳐 읽으려고 했다. 조금 무리해서 140페이지까지 읽어야만 했지만 사람에게 예정은 예정일 뿐이였다. 첫날 겨우 10페이지 읽고 둘째날 100페이지 읽고 셋째날 30페이지 정도를 읽게 되었다. 제한된 시간은 목요일이였고 일요일에 읽기 시작해서 화요일까지의 사정이 이러하여 수요일에 어쩔수없이 250페이지 이상을 읽어야만 하는 엄청난 상황이 나에게 닥쳤다. 꼭 다 읽어야 한다는 사명감은 없지만 내 원칙이 집어든 책은 끝까지 읽자는 주의라 부랴 부랴 수요일에 200페이지 정도를 읽고 당일인 목요일에 50페이지 정도를 읽었다. 덕분에 읽느라 힘들었다. 읽었다는 성취감만 남은 듯하다.

 

샤르트르를 철학자로 알고 있었다. 하여, 이 책의 저자인 장 폴 샤르트르가 내가 알고 있는 샤르트르일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책이 다소 생소했다. 철학 내용이 아니라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책이라니 말이다. 내 미션중에 하나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전부 읽는 것이라 차례가 되어 읽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샤르트르가 맞았다. 실존주의 철학자라는 부분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동일했는데 그 외에도 이 책과 같은 비평집도 펴 냈고 소설도 썼고 희곡까지 썼고 내가 알고 있는 그 철학자로써 철학책도 썼다. 다방면에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야 할 듯 하다. 내가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이니 당연히 유명한 사람이라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듯 하고 말이다. 내가 안다는 것이 유명인사와 동일시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장 폴 샤르트르는 장 폴 샤를 에이미르 샤르트르라는 풀 네임을 갖고 있다. 아마도 내가 샤르트르라는 인물을 알게 된 것은 프라스 영화에서 장 뤽 고다르와 프랑소와 트뤼포와 같은 영화감독들의 누벨 바그를 통해 알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과 달리 당시의 프랑스 영화는 문화를 리드하는 입장이였고 화면의 구성이나 철학들이 감미되어 사람들에게 영화를 새롭게 바라보는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했는데 이런 것들이 철학과 맛물려 이야기가 되었고 우리나라에도 뒤 늦게 90년대 전후로 유명세를 치르면서 함께 프랑스 철학들도 더 유명해진 것으로 기억한다. 

 

샤르트르는 느벨바그의 사람들과는 30년의 차이 정도가 나는 인물이지만 그들의 사상적인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라 생각된다. 단순히 그들이 아니라 프랑스 사람들에게 실존의 문제에 대해 생각을 하게 만든 여러 사람중에 한 명이 아닐까 싶은데 당시의 시대 상황과 연결되어 생각하면 실존에 대해 고민을 하고 궁금해 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던 듯 하다. 2차 세계대전과 그 후에 살아 남은 자들에게 당면한 문제 였을테니 말이다. 또한, 마르크스를 비롯한 공산당의 유럽 공습과 함께 더더욱 지식인으로써 고민을 하던 시기라 생각이 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제목과는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로 들리지만 이 책의 내용을 읽게 되면 결코 뜬금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책 한권이 세상에 나올 때는 그 책과 관련되어 당시의 시대상과 사람들의 생각, 행동들이 다 결부 된 것이고, 그 책을 저술한 저자와도 밀접한 연관이 된다. 저자가 어떤 생활태도와 자세와 철학과 세계관을 갖고 있느냐도 중요하고 어떠한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거쳐 성장했는지 여부를 비롯해 현재 작가의 상태와 상황도 중요하고 작가가 책을 쓸 당시의 시대상을 비롯한 다수의 알 수 있고 없는 힘들이 뭉쳐 작가의 머리에서 글이라는 매체를 통해 책으로 펴 냈는지를 아는 것은 책의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1947년 작가의 상황'이라는 네 꼭지에 대해 저술된 작품이다. 제목만 볼 때 꽤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고리타분할 수도 있고 읽기 어려울 것이라는 냄새가 팍팍 난다. 한편으로는 단지 저 4개의 제목을 갖고 이리 긴 글을 써서 책을 출판했다는 사실이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역시 철학자이자 작가답다는 다소 경탄어린 생각을 갖게 만든다.

 

사람은 무엇에 대해 보고 듣고 알고 느끼고 생각한다고 해서 꼭 글로 쓰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그 자체로 끝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누군가는 음악을 하고, 누군가는 온 몸으로 표현을 하고, 누군가는 글로 표현을 한다. 이 중에서 글로 표현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바로 '문학이란 무엇인가'이다. 일단, 이 많은 사람들중에서 가장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직접적으로 사람의 뇌리에 들어가는 말로된 표현을 글로 써서 시각을 통해 머리에 들어와 기억에 남고 어떤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모든 독자는 작가라고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단순히 혼자만 알고자 쓰는 법은 없다.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면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위중에 하나로 글을 쓰는 것이다. 불 특정 다수에게 보여주기 위해 글을 쓰는 경우도 있지만 특정한 대상을 염두에 두고 쓰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에 대해 알아야 하지 않을까? 글을 써도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 망망 대해에 오로지 나 혼자 있다는 게 확실하다면 굳이 글이라는 걸 쓰려고 하지 않을 수 있다. 단, 내가 언젠가는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글을 쓰게 될 것이다.

 

고대로 부터 내려와서 글을 쓰면 누군가는 본다는 걸 의미하는데 중세시대까지는 글을 읽는 사람들이 명확했다. 글을 쓰는 작가가 일반인이라도 해도 글을 읽는 사람은 고위층이였다. 그들의 입맛에 맞는 글을 써야만 했다. 중세시대라면 성직자들이 좋아할 글을 써야만 글이 읽혀진다. 글을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누군가 글을 읽어야 만 존재의 가치가 생긴다. 중세 이후라 하더라도 큰 변화는 없었다. 이제는 성직자에서 돈 많은 사람들 - 귀족, 왕족, 신흥 세력들 - 을 대상으로 글을 쓴다는 차이가 다를 뿐이다.

 

작가로써는 글을 쓰는 것만으로는 먹고 살 수가 없다. 지금도 대다수의 작가들에게 여전히 해당하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는 자신을 글을 읽고 만족할 사람이 나와야 하니 부자들에게 글을 쓰고 그들에게 돈을 받으며 먹고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불행한 존재일 수 있다. 시대가 흘러 부자를 위해 특정 계층을 위해 글을 써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지만 여전히 글이라는 것은 누군가를 대상으로 쓰게 되어 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리뷰도 누군가 이 글을 읽을 사람들이 읽지 않는다면 존재 이유가 없다. 단순하게 내가 이 글을 쓰고 내적으로 풍부해지고 내공이라 표현하는 것이 생긴다는 이유만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솔직히 말이 안된다. 누군가 이 글을 읽고 반응을 보이거나 최소한 이 글을 읽는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글을 쓴 보람이 생긴다.

 

아울러 내가 아무리 이 책을 읽고 글을 쓴다고 하여도 이미 내가 자라온 성장 배경이나 만났던 사람들, 지금까지 읽었던 책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 현재 내가 처해 있는 상황 - 직업, 사는 곳, 쓰는 언어, 가족 구성원을 비롯한 잡다한 것까지 - 을 비롯해 이 글을 쓰기 직전에 봤던 인터넷 기사까지 다 포함된 총합으로써 정념이 글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같은 주제를 갖고도 오늘 쓰는 글과 내일 쓰는 글이 다르고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아 글로써 표현이 되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이 생각을 정리하고 읽은 것을 내 자신에게 맞게 다시 조합하는 일련의 과정이고 이를 사람들이 보는 곳에 올려 검증이 되기도 하고 공격을 받기도 하고 함께 공감을 받기도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스스로 알 수 없는 누군가를 인식하며 올리게 된다. 이런 문구에 기분이 나뻐할 지 좋아할 지에 대해서도 잠시 고려하기도 말이다. 글을 쓰고 누군가에게 보여줌으로 인해 최소한 몇 명이라도 내 글에 공감을 표시하는 것에 기뻐하는걸 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기 위해 글을 쓰다보면 어느 순간 나라는 자아가 흔들리고 보여주기 위한 글을 쓰게 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이고 도대체 무엇을 위해 글을 쓰고 누구를 위해 쓰는 것인지에 대해 이 책을 읽는다고 답을 알 수는 없다. 책에서 1947년 작가의 상황처럼 어느 작가가 쓴 글을 완벽하게 이해하려면 그 글을 쓴 목적과 글을 쓸 당시의 상황과 작가의 처지까지 알아야만 작가의 머리속에 들어가 작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내가 읽고 내가 깨닫는 것이 바로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내 주관을 갖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나로써는 글을 쓴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였지만 지속적으로 글을 쓰면서 점점 내 글을 누군가가 읽는다는 명확한 인식을 하고 글을 쓰고 있다. 그럼으로 인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공존을 할텐데 대체적으로 부정보다는 긍정적인 면이 훨씬 많다. 스스로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쓰지는 않아도 최소한 더 잘 쓰려고 노력을 하는 측면이 있으니 말이다. 나에게 문학이란 세상을 알아가는 하나의 과정이고 선택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빅 픽처를 그려라 - 인생의 큰 그림을 보는 힘
전옥표 지음 / 비즈니스북스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더글라스 케네디의 '빅픽처'의 내용은 이러하다.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 한 인물이 우연한 기회에 완전히 다른 곳으로 가서 지금과는 달리 본인이 원했던 삶을 살게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몇가지 행운이 결부되어 이전의 삶과는 다른 뛰어난 실려과 행복한 삶을 살게된다는 내용이다. 이전의 삶과 이 후의 삶에 있어 다른 점은 이전의 삶이 어쩔 수 없이 살았던 삶이라면 이후의 삶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노력한 삶이라는 것이다.

 

'빅픽처'라는 제목이 이미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 책은 바로 '빅픽처'에 영감을 받아 관련된 내용을 이야기하는 책이려니 지레짐작을 했다. 그러나, 우연의 일치였다. 전옥표씨가 자신이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의 네이밍을 '빅픽처'로 삼고 준비를 하는 과정에 이미 '빅픽처'라는 소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회사도 그렇지만 개인도 마찬가지로 무엇인가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자신만의 독특한 네이밍이 필요하다. 마케팅이라고도 하고 광고라고도 하지만 어쩔 때는 내용보다 네이밍을 얼마나 잘 했느냐에 따라 최소한 반은 먹고 들어간다. 목표와 방향이 제대로 설정되어 있다면 어떤 시련과 고난이 닥쳐도 헤쳐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다른 의미로는 비전을 갖고 있느냐의 여부를 따진다고 볼 수 있는데 '빅픽처를 그려라'에서 빅픽처가 바로 비전이라 할 수 있다.

 

빅픽처가 딱히 새로운 이야기나 기존에 듣지 못했던 개념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아니라 이미 있는 내용을 갖고 저자만의 새로운 네이밍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관심을 유발하고 호기심에 책을 들어 읽게 만드는 눈부신 효과를 발휘한다. 단어 그대로 큰 그림을 본인이 그리고 있느냐 내지 갖고 있느냐에 따라 사람은 비록 잘못된 길로 갈지라도 다시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이 어떤 그림이든 스케치북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만약 아주 아주 큰 종이에 - 서울시청만큼이라 생각해 보자 - 그림을 그리고 있다면 전체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지 않는 사람이나 특정 부분만 보고 있는 사람에게는 현재의 모습만을 갖고 무엇이라 할 수 있다. 

 

전체의 모습을 볼 때와 달리 일부만 볼 때 지금 그리고 있는 곳이 오로지 검은 색만을 칠하고 있는 부분이라면 '이 따위 그림을 그리고 있나~!'라는 생각으로 보거나 '검은 색 이외에는 칠 할 수 없구나~!'라고 한탄을 할 수 밖에 없지만 큰 그림으로 본다면 그 부분은 꼭 필요한 부분이다. 오로지 모든 그림이 완성되어야만 전체적인 조감을 통해 확인하고 알 수 있는 것이다. 고로, 머리속에 큰 그림이 없다면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릴 수 도 없을 뿐더러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게 된다.

 

전작 '이기는 습관'은 알고 있었지만 읽어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다른 것들처럼 때를 놓치면 이상하게 안 읽거나 보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나에게는 '이기는 습관'이 그랬다. 꽤 많이 사람들이 보는 것 같고 주변 몇 몇 사람들도 보는 것을 알았지만  꼭 봐야 할 이유가 없어 하다보니 읽지 않게 되었고 이번 책 '빅픽처를 그려라'를 보게 되었는데 이미 몇 권의 책을 펴 낸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자신만의 빅픽처를 그리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작은 단위의 세부적인 행동을 하고 나서 주변 사람들과 함께 그림을 그려나가라는 단계적인 이야기를 해 준다. 뭐, 사실 그다지 새롭고 특이할 것은 없는 개념이고 자기계발 내용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존의 것들은 단순히 이렇게 하라는 이야기만 한다면 이 책의 명확히 그림을 그려준다는 것이다.

 

막연히 비전을 갖고 생각을 하고 실천을 하면 언젠가는 당신이 꿈꾸는 세상을 얻게 될 겁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하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도 좀 뻔하디 뻔한 생각도 들고 조금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 어딘지 손에 잡히지 않는 느낌이 들지만 명확하게 빅픽처를 그려라는 명확하고도 눈에 그려지는 단어로 설명을 하기 때문에 책을 읽는 사람이 좀 더 머리에 잘 들어올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어떤 큰 그림을 그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을 책을 통해 배웠지만 각자 자신이 그릴 큰 그림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냐의 여부는 각자 다시 고민을 해야 한다. 누구는 책에 나온 것처럼 고래를 그리고 누구는 상어를 그리고 누구는 사자를 그리고 누구는 강아지를 그릴 수 있다.

 

멋있는 큰 그림을 그린다고 대단하고 보잘 것 없는 사물의 큰 그림을 그린다고 잘 못 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삐딱하게 볼 수는 있다만 책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남들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시선으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 자신에게 맞는 것인지 여부는 직접 해 봐야 알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먼저 작은 도화지나 A4용지에라도 그려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작은 성공이라도 성취해보라는 이야기가 책에도 나오는데 그처럼 작은 그림이라도 한 번 그려본 다음에 그 중에 가장 좋아했고 재미있었던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려 본다면 큰 그림을 그리다가 중간에 멈추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처음부터 너무 큰 그림을 그리려 하는 것보다는 이 편이 보다 좋을 것이라는 개인적인 판단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플랫폼을 생각하고 있다. 나를 통해 책을 읽게 되고 나를 통해 부동산 경매에 대해 알게 되고 나를 통해 주식에 대해 알게 되고 나를 통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등의 어딘지 거창하지만 어딘지 소박한 입문 안내자의 길을 생각하고 있다. 거창하기 보다는 부담없이 나를 통해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는 그런 플랫폼이라는 빅픽처 아닌 빅픽처를 그리려고 한다. 

 

사람들은 빅픽처를 그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 자신이 지금 있는 곳이 어디있지는 빅픽처를 갖고 있다고 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빅픽처를 갖고 있으면 최소한 정확하지는 못해도 대략적으로라도 유추하여 버티고 참을 수 있는 영혼을 갖게 된다. 빅픽처를 그리라고 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현재가 아닌 미래를 위해서 일 것이다.

 

 

 

 

 

 

 

빅픽처를 그리는데 도움되는 책(클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나를 찾아줘
길리언 플린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확하지는 않지만 미국에서 책과 관련되어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오프라 윈프라로 알고 있다. 그가 하는 프로에서 한 달에 한 번 책을 선정해서 추천하는데 여기에 선택되는 책들은 그 즉시 베스트셀러가 된다고 한다. '나를 찾아줘' 경우에도 그렇게 오프라 윈프라쇼에 소개가 되었고 베스트셀러가 되어 우리나라까지 소개가 되고 있다. 그것도 오프라 윈프라가 추천했다는 문구와 함께.

 

이 책과 완전히 관계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 추리, 스릴러 소설들의 분량이 너무 길다는 것이다. 소설은 단순히 내용을 전달하는 장르가 아니라 얼마나 치밀하게 상황에 대해 묘사를 잘 하느냐의 장르라고 볼 수도 있어 내용이 다소 길어질 수 있지만 최근의 추리, 스릴러 장르들은 너무 내용이 길다. 

 

예전, 아가사크리스트의 추리소설이나 코난 도일의 추리 소설을 비롯한 작품들이 300페이지 넘지 않는 분량으로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고 읽게 만들었고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는데 반해 지금은 기본 500페이지는 되는 듯 하다. 그렇다고 예전 작품들에 비해 훨씬 더 재미있고 흥미진지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분명히 아니다. 묘사가 좀 더 많아졌다는 것 이외에는 말이다.

 

'나를 찾아줘'도 600페이지를 넘는 분량인데 해석의 과정에 그렇게 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해도 내 입장에서는 길다는 느낌을 갖는다. 내용만으로는 300페이지 밑으로 할 수 있겠지만 상황묘사와 심리묘사등의 설명에서 제법 길어졌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런 것들이 쌓여 한 권의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고 소설은 그러한 묘사를 읽기 위해 보는 측면도 분명히 있다. 

 

대부분 추리, 스릴러 장르와 이 책은 다르다. 추리라는 장르에는 어울리지만 스릴러 장르에는 그닥 어울리지 않고 추리라는 장르에 넣기도 애매한 측면이 있다. 오히려 애정 활극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은 꽤 재미있다.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계속 전개되는 것이 궁금증과 호기심을 유발한다. 

 

소설의 시작은 어느 평범한 부부가 결혼기념일 5주년에 갑자기 부인이 실종되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 남편은 살인자로 점점 범위가 좁혀진다. 이 부부가 특이한 점은 결혼기념일마다 보물찾기를 통해 서로 기념을 한다는 것이다. 한 100페이지를 읽었을 때 부부관계가 예전과 같지 않아 더 특별한 이벤트를 위해 부인이 일부러 실종되어 생각하지도 못한 보물찾기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된다. 책은 두 사람의 시선과 시점으로 진행이 된다. 남편인 닉의 관점으로 진행되는 것과 부인이 쓴 에이미의 일기로 시작되어 나중에는 에이미의 관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로 끝까지 진행이 된다. 일방적인 한 명의 시점이 아니라 두 사람이 동일한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시선과 시점으로 묘사하고 있어 그걸 보는 재미도 있다.

 

이 책은 3분의 2까지는 순수하게 실종의 사건으로 다뤄지면서 과연,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배우자에 대해서는 나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라는 추리소설답지 않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다. 오히려, 화성 여자, 금성 남자와 같은 부류의 책을 읽는다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점점, 책은 추리 소설류로 전환을 하면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빠져 들게 만든다.

 

어찌보면 엉성한 측면도 있어 보이지만 이 책에는 완벽하고도 증거가 남지 않는 살인이 이뤄진다. 책에도 묘사되는 것처럼 능력과 치밀한 실행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내이다. 그래야 모든 것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할 수 있게 된다. '나를 찾아줘'의 악당 - 읽은 사람은 악당에 대해 알게 된다 - 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게 된다.

 

소설은 분명히 추리 소설류로 보이지만 정작 '나를 찾아줘'는 추리 소설이라기 보다는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고 살아가면서 상대방에 대해 생각하고 다름을 인식하고 결국 아이를 낳고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같이 살고 있어도 서로 모르는 남녀가 부부가 되어 살아가는 이야기에 대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추리 소설(클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 - 경제 원리에 숨겨진 부자들의 투자 비밀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은 2007년 2월에 읽었던 책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은 책은 다시 보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한 번 본 책은 다시 보는 스타일이 아니라 - 그래도 몇 몇 책은 몇 번을 보기는 했다 - 이 책은 고이 고이 책장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시 봐야지라는 생각은 했지만 지속적으로 우선순위에서 밀려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개인적으로 주최하는 '이상한 날의 독서모임'에서 이번 달 독서로 선정이 되었다. 사실, 책 선정을 내가 했는데 독서모임에서 투자 책을 처음으로 선정하는 것이라 이왕이면 유명하고 기본적인 서적으로 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선택을 했다.

 

벌써,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책을 다시 본 다는 것은 - 그것도 몇 년이 흘러 - 그동안 나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를 확인하는 시간이 된다. 내가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을 저절로 깨닫게 되는 시간이 된다. 몇 년 전에 읽었던 당시와는 달리 세월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고 머리에 들어간 지식이 많아지면서 절대로 몇 년전의 나와는 다를 수 밖에 없다.

 

책을 선정하고 읽기 시작할 때 간만에 다시 읽는다는 생각이 더 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자신이 그동안 변화했는지에 대한 걸 전혀 인식하거나 검증하겠다는 판단을 하진 않았다. 더구나, 내가 시골의사가 말하고 생각하고 전하는 세계관을 감히 평가하고 해부하고 부정할 능력이 되지 않지만 한 편으로는 무비판적인 칭송과 절대적인 흡수를 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

 

실제로 몇 년전에 이 책을 읽을 당시에도 '어~!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데'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렇다면, 시간이 흐른 후에 그 당시 내가 생각했던 부분에서는 내가 그동안 변했는지 여부와 여전히 그 당시에 내렸던 판단을 유전히 갖고 있는지 책을 읽으면서 저절로 알게 되리라 봤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그 당시나 지금이나 내가 생각하는 투자의 본질과 제반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책의 내용을 전부 언급하기는 그렇고 책의 서문에 나온 이야기 중에 투자는 정답이 없다라는 표현을 하는데 난 투자에는 정답이 있지만 방법에는 정답이 없다라고 생각한다. 물론, 좀 더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면 비슷한 논점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일단 투자에서는 이익이 나거나 손해가 나는 정답이 있는 게임이라 본다. 소크라테스의 생각에 대해서는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정답이 없는 것처럼 투자에 대해서도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건 하나의 의견이지 정답이나 오답이 아닌 것과 같이 말이다.

 

다만, 투자를 하는데 있어 바라보는 자세나 접근하는 방법이나 단기 이익을 노릴 것인가, 장기 이익을 노릴 것인가, 진입 시점을 언제로 잡을 것인가와 같은 방법에서는 정답이 없다고 본다. 부동산 경매에서 수 많은 입찰자중에서 오로지 단 한 명의 낙찰자가 나오는 것과 같이 말이다. 정답이 없다면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전부 맞다고 할 수 있는데 그건 아니지 않나 한다. 극단적으로 볼때 이익이 나면 정답이고 손해가 나면 오답이라 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좀 지루했다. 분명히 예전에 이 책을 읽을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죽하면, 내가 소장을 하고 있을 정도다. 예전에 읽을 당시에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고개를 갸웃하기도 하면서 봤지만 이번에도 거의 동일하게 느낌이 표출되었기에 지루했다. 책이 별로라는 말은 아니다. 책은 아주 훌륭하다. 투자에 대해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 번 정도는 읽어볼 만한 책이다. 그러기에 독서모임에서 이 달의 책으로 선정을 한 것이다.

 

주제넘게 이야기하자면 책에서 나온 이야기가 이미 지겹게 듣고 읽고 봤던 내용이라 지루했다는 것이다. 몇 년 전에도,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보는 내용이라면 솔직히 그런 감정이 들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책에 서두에 분명히 밝히는 것은 이 책은 친절하지 않다는 것이고 이 책의 제목은 부자 경제학이라는 것이다. 이 두 관점은 이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로써 욕을 해도 칭찬을 해도 두 관점에서 해야만 한다.

 

먼저, 책은 쉽게 읽기 편하게 써 있지는 않다. 좀 많이 딱딱하다. 대부분의 투자 서적들이 문제는 그렇다. 그나마 사람들이 투자라고 생각하고 읽고 있는 재무설계 분야의 책들은 좀 더 읽기 편하게 써 져 있다. 이 책은 또한 책 제목에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부자들의 경제학이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대다수의 서민층이나 중산층을 위한 경제학이 아니라 부자 경제학이다.

 

부자들이 어떤 식으로 경제를 바라보고 투자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책이다. 부자란 더이상 부를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지칭한다고 하는데 그런 관점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부를 많이 갖고 있는 재벌들은 여전히 부자가 아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들은 부자다. 갖고 있는 부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부자라고 하는데 재벌들이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물론, 유지하기 위해 공격적인 노력을 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부자들은 이렇게 투자한다고 알려주고 있지만 말 그대로 부자들은 이렇게 투자를 해서 돈을 벌고 있다고 알려주고 있어 '그래서 부자가 돈을 버는 구나!'라고 알게 되지만 정작 이 책을 읽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역설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부자가 아니라 책에서 소개된 방법을 쓸 수 없다. 유지하려고 투자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투자에 대해 주식에 대해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하고 지식을 알려주고 있는 시골의사는 반대로 투자를 하지 말라고 한다. 늘 투자는 하지 말라고 한다. 부자들에게 이용당하거나 지는 게임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이유로. 아메리카 드림의 성공 방정식에 근거해서 가난하거나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부자가 되는 것은 어쩌면 돌연변이라고 보는 것이다. 

 

투자의 벤치마크는 금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시골의사는 복리예금을 하라고 한다. 가장 성공한 투자였다고 한다. 투자라는 것이 위험을 감수한다는 측면에서 복리예금은 투자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책에서 나온 것처럼 매월 200~300만원 버는 사람이 복리예금으로 부자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던질 수 밖에 없고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느낌표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시골의사와 같은 전문직 직업군에 속한 사람들은 수입으로 가능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예전에 읽을 때는 내가 아는 것과 다른데 한 부분들이 이번에 읽을 때 든 생각은 자신이 주장한 바에 대한 정확한 팩트에 대한 증거를 보여준 후에 이렇기에 그렇다는 이야기를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 본다. 그냥, 전후사정도 없이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게 가장 좋다라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한다. 얼마든지 통계를 보여주면서 할 수 있는 분야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대부분 경제분야에서 어떤 주장을 하기위해서는 관련된 증거 자료를 제시해야만 한다. 그 증거를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펼쳐야 사람들이 인정하거나 의문을 갖는 사람이 스스로 그 증거를 찾아 조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딴지를 걸기 했지만 투자에 대해 경제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고 순환하는지에 대해 공부하고 싶고 부자들이 어떤 관점을 갖고 자신들의 자산을 유지하고 관리하는지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책중에서는 꼭 읽어야 할 책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는 투자 책이 드물다고 볼 때 말이다. 

 

아마도, 이런 투자서적들은 박경철씨가 이제는 펴 내지 않을 것이라 본다. 그런 이유로 새롭게 개정된 책이 나왔을 것이라 본다. 그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개정 서문에 개정전의 책 내용을 그대로 펴 냈다고 했으니 예전 책을 읽어도 무방할 듯 하다. 투자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 시골의사는 이제 정답이 없는 세계로 들어가 그곳에서 정답없는 삶을 보내려고 하니 말이다.

 

 

부자들의 생각(클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살아야 하는 이유 - 불안과 좌절을 넘어서는 생각의 힘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 사계절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웃는 모습은 당연히 아니지만 무표정도 아닌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김상중이라는 사람의 눈길에 내가 벗어날 수 없어 이 책을 읽었다고 하면 좀 낯간지럽지만 '살아야 하는 이유'라는 제목과 재일교포 2세으로써 겪는 정체성에 도쿄대학 교수라는 특이성(??)까지 결부되고 책의 두께까지 합쳐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유혹이 든 책이다.

 

책 제목인 '살아야 하는 이유'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우리들은 살아간다. 그런데, 살아간다는 것을 포기하거나 두려워 하거나 물음표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에서 3월 11일 - 동일본 대지진 후 일어난 일련의 대사고 - 이후에 벌어진 사고로 일본 사람들이 혼란해 하고 인생이라는 무엇이고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해 주는 책이다.

 

흔히 이런 책들은 이렇게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라거나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책들과 달리 이 책을 시작하며 확실한 실마리를 바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적혀 있는 글을 보면서 속으로 깜짝놀랐다. 보통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데 반해 이토록 자신있게 이야기를 하다니 하면서 말이다.

 

3월 11일 이후의 일본에서 벌어지는 심리 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듯 하지만 그 보다는 자신보다 먼저 삶을 끝내버린 아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다. 공교롭게도 그 직후에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 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전하는 것으로 보였다. '아들아~! 이래서 살아야 한단다'라고 말이다.

 

책은 200페이지 밖에 안 되지만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고 생각해야 할 것들로 가득차 있어 휘리릭~ 읽지도 못했지만 계속 되씹어 읽어야만 할 책이다. 굳이 분야를 나누자면 철학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어렵고 현학적인 용어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질리게 만들지 않고 진지하지만 조근 조근하게 양해를 구하면서 이야기하는 듯 한 느낌이 든다.

 

책의 전체적인 면을 갖고 독후감식의 글을 쓰는 것보다는 한 단락 한 단락이나 한 장 한 장씩을 아니, 한 문단씩 글을 해체하며 곱씹으면서 저자가 이야기한 내용에 덧붙여 내 생각을 하나씩 주석달아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책이다. 그러나, 딱히 주석을 달거나 내 생각을 따로 적어야 할 이유는 그다지 크지 않는 것은 저자의 생각에 많은 부분에서 동의하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은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다시끔 돌아보게 되었다.

 

 

일본 소설가 소세키와 미국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글을 전제로 저자가 생각하는 걸 주로 엮은 후에 막스 베버와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인 빅터 플랭크의 사상까지 합쳐 책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전달해 준다. 

 

책의 구성이 '행복론의 종언'으로 시작되어 '사람은 왜 살아가는가' '왜 이토록 고독한가' '다섯 가지 고민거리(돈,사랑,가족,자아,세계)' '고민으로 둘러싸인 시대' '진짜 자기를 찾는다는 것'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살아갈 근거를 찾아낼 수 있을까' '인생이 던진 물음에 답한다'으로 맺는다.

 

워낙 하나씩 이야기를 하고 떠들기 좋은 주제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중에 하나인 '진짜 자기를 찾는다는 것'만 아주 잠시 언급을 하자면 현대인들은 진짜 자기를 찾으려고 하지만 진짜 자기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불행하고 힘들다고 한다. 나라는 한 개인은 이미 세상에 태어나 삶을 살고 있는데 거기서 진짜 나를 찾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가짜이고 무가치한 존재라는 의미가 되어 버린다. 현재 존재하고 있는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행복할 수 있다. 진짜 자기를 찾는다는 것은 나라는 본질을 찾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거꾸로 헛된 욕망을 쫓는 과정이 될 수 있다.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든지 그것은 전부 나이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변하지는 않는다. 상황에 맞게 적응을 하고 보이는 모습은 달라보일 수 있지만 말이다.

 

하나 써 봤는데 관련되어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들이 많아진다. 책을 읽을 때도 그런 일이 많았는데 솔직히 책을 읽는다는 것이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꼭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그냥 읽고 넘어가도 하등 문제가 없다. 아니, 읽으면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 책을 읽으면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울림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것으로 족하다고 본다. 꼭 표현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책의 모든 내용을 개인적으로는 마지막에 나온 문장이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해서 적어 놓는다.

 

"하지만 행복은 추구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노력해도 안 된다는 허무주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좋은 미래를 추구하기보다 좋은 과거를 축적해 가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기가 죽을 필요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도 괜찮다는 것. 지금이 괴로워 견딜 수 없어도, 시시한 인생이라고 생각되어도, 마침내 인생이 끝나는 1초 전까지 좋은 인생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는 것. 특별히 적극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 특별히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지금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당신은 충분히 당신답다는 것. 그러니 녹초가 될 때까지 자신을 찾을 필요 같은 건 없다는 것. 그리고 마음이 명령하는 것을 담당하게 쌓아 나가면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는 저절로 충분히 행복한 인생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 등등. 이러한 '태도'가 아닐까요.


이것들은 우리가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경우의 '태도'입니다만,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는 어떤 사회나 세계를 바람직하다고 생각할까요. 그것은 '존엄'이라는 것이 의식되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유일성'이나 '일회성'이 의식되는 사회입니다. 이런 것들이 사회를 재검토할 때 기본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저절로 사람을 상품화하여 물건처럼 취급하는 시장경제의 존재 방식이나 사람을 이름없는 군중으로 바꾸고 공공영역을 생략해 버리는 직접 접근형 사회의 문제에도 새로운 빛이 비칠 것입니다. 또 공공 영역뿐 아니라 해체되고 있는 가족이나 지역이라는 작은 공동체에서도 새로운 숨결이 살아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행복의 변신론에 의한 행복 방정식을 바꾸는 것이 불가결합니다. 그렇게 해나가는 과정에서 행복 방정식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자신은 틀렸다고 생각한다거나 자신은 비참하다고 생각하는 '자기 추방'형 사고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새로 생겨난 사회 안에서 '거듭나기'의 인생을 오래오래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철학관련 책(클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