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파도가 기회다 - 우체부 프레드의 절대 배신하지 않는 성공원칙
마크 샌번 지음, 권기대 옮김 / 베가북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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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에서 자기계발과 관련된 산업은 상당히 번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무엇인가 돈을 지불하고 지식을 얻는다는 것에 일정 부분 선입견을 갖고 있지만 미국같은 경우에는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게다가 그러한 좋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기꺼이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그렇기에 강연자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다.

 

하나의 산업으로써 좋은 영향력을 끼치고 사람들이 열광과 환호를 하기도 하고 이야기를 듣고 삶에 적용을 하기도 한다. 단순히 책을 읽고 강연을 듣는 것을 넘어 아예 강의녹음을 구매해서 지속적으로 듣기도 한다. 너무 산업화하는 측면에 대해 일정부분 우려의 시선이나 사기꾼 냄새도 없지 않아 있지만 이를 통해 성공학을 비롯한 다양한 미국의 성취동기가 탄생한 배경이기도 하다.

 

'모든 파도가 기회다'의 저자인 마크 샌번도 그러한 자기 계발 강연자 중에 한 명이다. 이 책을 펴 내면서 다른 점은 강연이 줄었고 투자가 잘 못 되었고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전립선 암에 걸렸다는 점이다. 이로 인하여 어찌보면 흔히 그렇듯이 다시 한 번 인생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통찰을 할 시간을 갖게 되었고 이를 훌륭히 소화하고 극복해서 이처럼 책을 펴 내게 되었다.

 

성공이란 무엇인가? 이 점에 대해 사람마다 다른 관점으로 설명을 하게 될 듯 하다. 대체적으로 자본주의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성공이라는 단어를 듣게 되면 부자라는 것과 결부를 짓게 된다. 부자면 성공한 것이고 아니면 아직 성공하지 않은 것이라는 정의 아닌 정의 말이다. 부자에 대한 정의를 내리자면 또 이야기가 한참 전개 되겠지만 말이다.

 

책에서는 결과중심, 인정받기 중심, 레크리에이션 중심, 인간관계 중심으로 성공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로지 결과만으로 이야기할 것인가,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는 것을 핵심으로 볼 것 인가, 자신의 삶을 즐기는 것에 중심을 둘 것인가를 이야기하지만 결국에는 인간 관계 중심으로 성공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

 

존 맥스웰이 "당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당신을 가장 존경해주는 것, 그것이 성공이다"라는 말로 인간관계 중심의 성공을 이야기한는데 여러 곳에서 강조하는 말이지만 역시나 스스로 생각을 해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 - 그것도 나를 잘 아는 친구나 식구나 완전히 친한 지인으로 부터 -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분명히 성공한 인생으로 봐도 무방할 듯 하다. 내 스스로 돌아보고 생각해도.

 

이러한 성공을 얻는 것은 끊임없이 올라오는 파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바다에 파도가 없다면 바다가 아니다. 또한, 잠시 파도가 잠잠할 수도 있고 심하게 요동치며 칠 수도 있지만 그러한 파도를 다 이겨내야만 된다. 그러니, 파도를 정복하려 하지 말고 파도를 인정하고 파도와 함께 살아가려 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늘 긍정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어떤 일이든 임해야 하고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는 완전히 다른 내일을 위해 끊임없이 배워야만 하고, 내가 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 내 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나 혼자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되어 돈을 벌기는 커녕 사회에서 버림을 받을 것이다. 얼마나, 더 도움이 되느냐에 따라 내 성공과 연결이 된다.

 

스스로 우선순위를 정하고 중요한 것을 먼저 하면서 노력할 때야 어제와는 다른 내가 되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사람들이 찾아오게 될 것이다. 단순하게 도움이 되는 것을 넘어 그들에게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것을 주게된다면 성공이라는 것은 멀리있지 않다. 이렇게 쓸때는 쉽지만 내가 막상 직접 하려면 너무 어렵고 망막한 점은 인정한다만.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려가면 잠시 반짝하고 말게 된다. 늘, 미래를 위해 나를 위해 가족을 위해 내 주변 사람들을 위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위해 오히려 비축하면 자신을 채워나가야 한다. 그래야, 축적된 에너지로 달려갈 수 있다. 단,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대접해야 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전부 나에게는 감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see' 'think' 'do'라는 슬로건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보고 생각하고 실천하라' 

 

지금, 현재 나에게는 잔 파도가 오느냐, 큰 파도가 오느갸, 태풍이 몰아치느냐, 한낮의 따뜻한 햇살에 바람 한 점 없느냐에 따라 다른 상황에 처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지금 내 상황이 어떠하냐는 지금의 상황이지 평생 내가 겪을 상황이 아니다. 큰 파도를 오히려 즐기면서 서핑을 타는 사람도 있다. 단지, 내 선택이고 마음가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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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 지음, 한기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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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은 무척이나 유명한 책이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인지 우리나라에서 유독 유명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월든의 저자가 1862년에 사망했으니 무려 200년이 지나 아직도 이 책이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는 것은 굳이 확인을 하지 않아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유명하다는 뜻이 되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전부 이 책의 제목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라는 저자에 대해 알고 있다는 의미는 분명히 아니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월든'은 유명해 진 것일까? 어떤 점이 이 책이 나온 이후에 이 책을 읽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였기에 사람들은 이 책을 200년이 된 지금도 꾸준히 읽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사람들의 번역으로 된 다양한 출판사에서 출판하고 있는 것일까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목적이라고 하면 본 말이 전도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만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에 대한 해답은 책 초반부터 나오기도 하고 '월든'을 소개하는 사람들의 소개글을 읽기만 해도 알 수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갈수록 어딘지 모르게 쫓기는 삶을 살고 있다. 내가 살아가는 이 삶이 올바른 삶인지 다른 삶은 없는 것인지에 대해 궁금해 하기도 하고, 왜 이렇게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어렵고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인지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된다. 아침에 일어나 정신없이 출근하고 회사에서 내 뜻과는 상관없이 일을 하고 피곤한 상태로 퇴근을 해서 겨우 겨우 하루를 마감하는 반복되는 삶에서 무엇인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산업자본주의 사회로 접어 들며 더욱 대두된 문제다.

 

그에 비해 이 책의 저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그런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동 떨어진 삶을 선택해서 살았다. 단순하게 살았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월든'에서 생활하며 느끼고 겪고 생각했던 점을 책으로 펴 내기까지 하여 자신의 사상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어떻게 보면 하나의 종교를 사람들에게 전파한 것이나 다를 바 없을 정도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면 된다는 관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하여도 똑같은 조건에 똑같은 상황으로 먹고 살아도 누군가는 주체적으로 자신이 결정을 내려 그러한 삶을 선택해 살고 있고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은 상황으로 살고 있다면 삶을 바라보는 자세는 엄청나게 다를 수 밖에 없다. 책에서 나온 저자의 삶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삶이지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삶이 아니다. 저자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분명히 당시에도 많았을 것이다. 그 차이가 크다고 본다.

 

자신이 선택한 삶이였고 어느 정도의 학식까지 갖춘 인물이 도시 생활의 - 당시의 도시 생활이라고 하니 그다지 감이 오지 않는다만 - 번잡함을 벗어버리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월든'이라는 호수에서 농사를 지며 자급자족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였지만 한편으로는 분명히 언제든지 자신이 이 삶을 청산하고 다른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머리에 품고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런 삶을 운명이나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지만 저자에게는 여러 삶 중에 하나로 선택해서 살았던 것이다.

 

실제로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평생을 '월든'에서 정착해서 살지 않았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특정 기간에만 '월든'에서 살았고 그 살았던 기간도 전체 삶에서 보자면 아주 작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가 속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마도 내가 지탄을 받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실제로 저자는 '월든'에서 살다 책 말미에 사정으로 월든에서 나왔다고 표현을 한다. 여러가지 사정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이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고 생각되기에 괜히 한 번 언급한다.

 

솔직히, 이 책이 유명하다는 이유로 읽기는 했지만 어떤 내용일 것이라고 예측은 가능했는데 실제로도 그 예측을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책은 그런 이유로만 읽는 것은 아니기에 끝까지 읽었다만 마지막 50페이지는 상당히 고민을 했다. 끝까지 읽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책을 읽기는 했지만 엄청나게 지루했다. 저자가 '월든'에 살면서 경험하는 것을 비롯한 소소한 일상과 생각과 삶을 자세에 대해 정말로 자세하게 썼다. 어찌보면 별 것 아닌것 같은 사소한 일에도 상당히 사실적이고 세부적으로 묘사하면서 썼는데 읽어도 읽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끝까지 읽었다는 점이 대견하다는 심정일 정도다. 

 

이 책은 많은 유명한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있는 책인데 그 유명한 사람이나 이 책에 소개된 그 유명한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어느정도 무엇인가를 성취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과 같은 현실에서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이렇게 자급자족으로 살라고 하면 도저히 못한다.

 

여전히 물욕으로 가득차 있는 나에게 물욕을 버리고 자급자족으로 살라고 하면 옳은 말일 수 있어도 나 자신은 선택하고 싶지 않은 삶이다. 자급자족할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지도 않고 말이다. 귀촌이나 귀농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귀촌이나 귀농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좀 더 나이를 한 20년 넘게 먹으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도 충분히 적당히 안분지족까지는 아니고 무소유까지는 아니라도 될 수 있는 한 내 삶에서 과하지 않을 정도로 산다고 보는데 - 이건 보는 사람에게 따라 워낙 차이가 크다만 - 그것마저 버리고 '월든'이라는 곳에서 살라고 하면 난 절대로 반대한다.

 

유명한 사람들이 이 책처럼 버릴 것을 버리고 '월든'과 같은 곳에서 - 속세를 벗어나?? -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그들은 정작 그러한 삶을 선택하지 않고 여전히 좋은 옷과 좋은 대접을 받으면서 살고 있다. 이 책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진정으로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지으면 얼마가 소요되는지까지 하나씩 다 계산하고 자신이 '월든'에서 사는 삶에서 어느 정도의 비용이 드는지까지 전부 계산하고 더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기에 그런 점을 존경해야 하지만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그런 이야기 하는 사람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싶다. 그렇다면, 직접 하면서 동참을 호소하던가 말이다.

 

이 책의 글에 대해서도 칭친과 화려한 미사여구로 칭소하지만 읽는데 좀 지루했다. 어쩌면, 초록은 동색이라고 저자만큼은 아니라도 나도 느릿하게 살고 있는 편이라 그다지 크게 와 닿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는 조금은 건방진 생각도 든다. 열심히 치열하게 하루 하루를 사는 사람에게는 어느날 '월든'을 읽고 크게 깨닫는 것이 있고 '내가 그동안 잊고 있었다'라는 독백을 하면서 다시 자신의 삶에 대해 돌아볼 수 있을지 몰라도 나에게는 내 삶을 돌아보기는 해도 책에 나온 관점에서 돌아보지는 않아 그런지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내가 읽은 출판사의 번역으로 된 '월든'에서는 열여덟개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처음 이야기와 마지막 이야기만 읽으면 충분하다고 본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유명하다는 사람들이 외치는 이야기가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가슴으로 느끼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도 첫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고 점점 갈수록 지루하고 읽는 것이 고단했는데 마지막 이야기에서 다시 흥미롭고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다시 알게 되었는데 한 편으로는 마지막 이야기는 그 앞 전까지 한 이야기와는 다소 상관없는 이야기로 보이기도 했다. 자신이 '월든'에서 살아오고 겪고 느끼고 생활했던 것을 열심히 세밀하게 이야기했는데 뜬금없이 철학적인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한다는 투로 이야기해서 말이다.

 

감히, 내가 세계에서도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영감을 불러 일으킨 책에 대해 이렇게 미주알 고주알 떠드는 것을 넘어 삐딱한 시선으로 쓰게 되어 부담이 되지만 누군가는 이런 생각도 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도 일방적인 소통에 비해서는 진정으로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원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스스로의 정당성을 괜히 부여하면서 끝을 맺는다.

 

참,, 그렇다고 책이 결코 읽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책은 분명히 읽을 가치가 있다. 특히, 현재 정말로 열심히 방향과 목표를 잃고 앞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 정도는 쉬어가며 심호흡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줄 것이다. 내가 삐딱하게 바라봤어도 책은 내용은 좋고 200년이 되도록 사람들에게 선택된 이유가 분명히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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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자적 100년 - 백 년을 사는 다섯 가지 즐거운 마음가짐
자오무허 구술, 팡야후이 지음, 김영화 옮김 / 물병자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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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자적의 저자는 현재 나이가 100살이 넘었다. 장수하면 일본이라는 점때문에 얼핏 보고서는 저자가 일본 사람이라고 오독을 했다. 저자의 이름을 눈여겨 보지 않고 대략적인 내용만 보다보니 그랬다. 책을 읽어보니 책의 저자인 자오무허는 대만사람으로써 100세가 넘은 시점에 책을 펴 내고 98세에 석사학위를 따낸 인물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당연히 그 존재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 볼 정도의 유명인사는 아니여도 어느 정도 알만한 사람은 아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나이가 들어 대학을 간다는 이야기는 종종 우리나라에서도 듣기는 했는데 90세가 넘어 대학원에 진학을 했다는 것은 대단한다고 아니 할 수 없다.

 

그정도의 연세면 기력이 쇠하여서 움직이고 활동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석사학위를 딴 것도 모자라 100세가 넘은 지금 시점에도 활발하게 여러가지 활동을 하고 있고 이처럼 책까지 - 비록 구술이기는 해도 - 펴 냈다고 하니 젊은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이라 할 수있다.

 

책에서 아쉬운 점은 100세라는 나이가 포인트라 이왕이면 80세 이후의 본격적인 활동이 좀 더 많이 책에서 다뤄지고 언급이 되었다면 좀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어릴 때부터 시작해서 전체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하나씩 언급을 하고 있는 책이라 어떻게 보면 자서전에 가까운 책이라 할 수 있다.

 

입지전이 인물은 아닐지라도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처럼 꽤 대단한 과거를 지녀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릴 적 일본의 침략과 국민당과 공산당의 치열한 다툼의 과정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향을 떠나 떠 돌면서 결국에는 대만으로 정착하기까지의 여정은 비록 당시에는 누구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였다고 해도 상당히 대단하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대만에 정착해서 여러 일을 하면서 점차 안정이 되었어도 자신이 세운 원칙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 왔다. 특히, 잘못된 일이 있으면 본인의 위험이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당당히 맞서는 내용은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데 - 나 같으면 - 개선하려고 끝까지 온 몸을 다해 노력한 걸 읽으면서 헛투루 인생을 산 분은 아니라고 보였다.

 

남들은 이제 노인이라고 하면서 소일거리를 하고 새로운 일을 하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 나이에 오히려 본격적으로 남들과는 달리 해외 여행을 배낭여행으로 다니고 - 70세가 넘어 - 새롭게 무엇인가를 배우는 자세에서 평생 공부를 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물론, 책을 읽다보면 좀 잘난체 한다는 느낌이 드는 장면들이 꽤 있는데 그런 부분은 잠시 참고 읽으면 된다. 어떤 시선으로 바로보느냐에 따라 상대방의 이야기가 나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그 정도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더구나, 연세가 많은 분이 과거를 회상할 때는 당연히 미화되는 측면이 좀 더 많은 것이라 본다. 원래, 추억은 늘 아름다운 것이니 말이다.

 

실제, 사진으로 봐도 100세가 된 어르신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젊어보인다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니 그 연세가 되도록 정정하게 자신의 일을 끊임없이 지금도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일정 나이가 넘으면 스스로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이 있다. 그건,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아 왔느냐가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형태로 나온다는 의미다.

 

실제로도 젊은 시절에는 미모와 몸매등의 젊음으로 많은 부분이 제대로 들어나지 않을 지라도 나이가 들면 한 개인의 성격과 인생과 역사가 몸에서 풍겨나오고 얼굴을 통해 유추할 수 있게 된다. 밝게 살아 오셨고 밝게 살려고 노력하신 분들은 굳이 '나 지금까지 밝게 살아왔고 지금도 밝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라고 사람들에게 외치지 않아도 그 얼굴에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고 어르신이 되었을 때 주변사람들에게 존경과 환희를 받는 인물이 된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 커다란 성공을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내가 성공했다고 아무리 외치고 돈이 많다고 해도 주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환대를 받지 못한다면 굳이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그런 사람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책 제목인 '유유자적'하게만 살아온 분은 아니지만 - 꽤 꼬장 꼬장한 부분도 많다 - 전체적으로 자신의 인생에 있어 안분지족하면서 고민이나 걱정을 오래 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견지하였기에 지금까지도 건겅하게 늘 새로운 도전을 하면서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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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정명환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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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예상은 하루에 120페이지 정도를 3일에 걸쳐 읽으려고 했다. 조금 무리해서 140페이지까지 읽어야만 했지만 사람에게 예정은 예정일 뿐이였다. 첫날 겨우 10페이지 읽고 둘째날 100페이지 읽고 셋째날 30페이지 정도를 읽게 되었다. 제한된 시간은 목요일이였고 일요일에 읽기 시작해서 화요일까지의 사정이 이러하여 수요일에 어쩔수없이 250페이지 이상을 읽어야만 하는 엄청난 상황이 나에게 닥쳤다. 꼭 다 읽어야 한다는 사명감은 없지만 내 원칙이 집어든 책은 끝까지 읽자는 주의라 부랴 부랴 수요일에 200페이지 정도를 읽고 당일인 목요일에 50페이지 정도를 읽었다. 덕분에 읽느라 힘들었다. 읽었다는 성취감만 남은 듯하다.

 

샤르트르를 철학자로 알고 있었다. 하여, 이 책의 저자인 장 폴 샤르트르가 내가 알고 있는 샤르트르일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책이 다소 생소했다. 철학 내용이 아니라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책이라니 말이다. 내 미션중에 하나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전부 읽는 것이라 차례가 되어 읽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샤르트르가 맞았다. 실존주의 철학자라는 부분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동일했는데 그 외에도 이 책과 같은 비평집도 펴 냈고 소설도 썼고 희곡까지 썼고 내가 알고 있는 그 철학자로써 철학책도 썼다. 다방면에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야 할 듯 하다. 내가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이니 당연히 유명한 사람이라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듯 하고 말이다. 내가 안다는 것이 유명인사와 동일시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장 폴 샤르트르는 장 폴 샤를 에이미르 샤르트르라는 풀 네임을 갖고 있다. 아마도 내가 샤르트르라는 인물을 알게 된 것은 프라스 영화에서 장 뤽 고다르와 프랑소와 트뤼포와 같은 영화감독들의 누벨 바그를 통해 알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과 달리 당시의 프랑스 영화는 문화를 리드하는 입장이였고 화면의 구성이나 철학들이 감미되어 사람들에게 영화를 새롭게 바라보는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했는데 이런 것들이 철학과 맛물려 이야기가 되었고 우리나라에도 뒤 늦게 90년대 전후로 유명세를 치르면서 함께 프랑스 철학들도 더 유명해진 것으로 기억한다. 

 

샤르트르는 느벨바그의 사람들과는 30년의 차이 정도가 나는 인물이지만 그들의 사상적인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라 생각된다. 단순히 그들이 아니라 프랑스 사람들에게 실존의 문제에 대해 생각을 하게 만든 여러 사람중에 한 명이 아닐까 싶은데 당시의 시대 상황과 연결되어 생각하면 실존에 대해 고민을 하고 궁금해 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던 듯 하다. 2차 세계대전과 그 후에 살아 남은 자들에게 당면한 문제 였을테니 말이다. 또한, 마르크스를 비롯한 공산당의 유럽 공습과 함께 더더욱 지식인으로써 고민을 하던 시기라 생각이 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제목과는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로 들리지만 이 책의 내용을 읽게 되면 결코 뜬금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책 한권이 세상에 나올 때는 그 책과 관련되어 당시의 시대상과 사람들의 생각, 행동들이 다 결부 된 것이고, 그 책을 저술한 저자와도 밀접한 연관이 된다. 저자가 어떤 생활태도와 자세와 철학과 세계관을 갖고 있느냐도 중요하고 어떠한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거쳐 성장했는지 여부를 비롯해 현재 작가의 상태와 상황도 중요하고 작가가 책을 쓸 당시의 시대상을 비롯한 다수의 알 수 있고 없는 힘들이 뭉쳐 작가의 머리에서 글이라는 매체를 통해 책으로 펴 냈는지를 아는 것은 책의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1947년 작가의 상황'이라는 네 꼭지에 대해 저술된 작품이다. 제목만 볼 때 꽤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고리타분할 수도 있고 읽기 어려울 것이라는 냄새가 팍팍 난다. 한편으로는 단지 저 4개의 제목을 갖고 이리 긴 글을 써서 책을 출판했다는 사실이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역시 철학자이자 작가답다는 다소 경탄어린 생각을 갖게 만든다.

 

사람은 무엇에 대해 보고 듣고 알고 느끼고 생각한다고 해서 꼭 글로 쓰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그 자체로 끝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누군가는 음악을 하고, 누군가는 온 몸으로 표현을 하고, 누군가는 글로 표현을 한다. 이 중에서 글로 표현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바로 '문학이란 무엇인가'이다. 일단, 이 많은 사람들중에서 가장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직접적으로 사람의 뇌리에 들어가는 말로된 표현을 글로 써서 시각을 통해 머리에 들어와 기억에 남고 어떤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모든 독자는 작가라고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단순히 혼자만 알고자 쓰는 법은 없다.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면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위중에 하나로 글을 쓰는 것이다. 불 특정 다수에게 보여주기 위해 글을 쓰는 경우도 있지만 특정한 대상을 염두에 두고 쓰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에 대해 알아야 하지 않을까? 글을 써도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 망망 대해에 오로지 나 혼자 있다는 게 확실하다면 굳이 글이라는 걸 쓰려고 하지 않을 수 있다. 단, 내가 언젠가는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글을 쓰게 될 것이다.

 

고대로 부터 내려와서 글을 쓰면 누군가는 본다는 걸 의미하는데 중세시대까지는 글을 읽는 사람들이 명확했다. 글을 쓰는 작가가 일반인이라도 해도 글을 읽는 사람은 고위층이였다. 그들의 입맛에 맞는 글을 써야만 했다. 중세시대라면 성직자들이 좋아할 글을 써야만 글이 읽혀진다. 글을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누군가 글을 읽어야 만 존재의 가치가 생긴다. 중세 이후라 하더라도 큰 변화는 없었다. 이제는 성직자에서 돈 많은 사람들 - 귀족, 왕족, 신흥 세력들 - 을 대상으로 글을 쓴다는 차이가 다를 뿐이다.

 

작가로써는 글을 쓰는 것만으로는 먹고 살 수가 없다. 지금도 대다수의 작가들에게 여전히 해당하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는 자신을 글을 읽고 만족할 사람이 나와야 하니 부자들에게 글을 쓰고 그들에게 돈을 받으며 먹고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불행한 존재일 수 있다. 시대가 흘러 부자를 위해 특정 계층을 위해 글을 써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지만 여전히 글이라는 것은 누군가를 대상으로 쓰게 되어 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리뷰도 누군가 이 글을 읽을 사람들이 읽지 않는다면 존재 이유가 없다. 단순하게 내가 이 글을 쓰고 내적으로 풍부해지고 내공이라 표현하는 것이 생긴다는 이유만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솔직히 말이 안된다. 누군가 이 글을 읽고 반응을 보이거나 최소한 이 글을 읽는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글을 쓴 보람이 생긴다.

 

아울러 내가 아무리 이 책을 읽고 글을 쓴다고 하여도 이미 내가 자라온 성장 배경이나 만났던 사람들, 지금까지 읽었던 책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 현재 내가 처해 있는 상황 - 직업, 사는 곳, 쓰는 언어, 가족 구성원을 비롯한 잡다한 것까지 - 을 비롯해 이 글을 쓰기 직전에 봤던 인터넷 기사까지 다 포함된 총합으로써 정념이 글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같은 주제를 갖고도 오늘 쓰는 글과 내일 쓰는 글이 다르고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아 글로써 표현이 되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이 생각을 정리하고 읽은 것을 내 자신에게 맞게 다시 조합하는 일련의 과정이고 이를 사람들이 보는 곳에 올려 검증이 되기도 하고 공격을 받기도 하고 함께 공감을 받기도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스스로 알 수 없는 누군가를 인식하며 올리게 된다. 이런 문구에 기분이 나뻐할 지 좋아할 지에 대해서도 잠시 고려하기도 말이다. 글을 쓰고 누군가에게 보여줌으로 인해 최소한 몇 명이라도 내 글에 공감을 표시하는 것에 기뻐하는걸 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기 위해 글을 쓰다보면 어느 순간 나라는 자아가 흔들리고 보여주기 위한 글을 쓰게 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이고 도대체 무엇을 위해 글을 쓰고 누구를 위해 쓰는 것인지에 대해 이 책을 읽는다고 답을 알 수는 없다. 책에서 1947년 작가의 상황처럼 어느 작가가 쓴 글을 완벽하게 이해하려면 그 글을 쓴 목적과 글을 쓸 당시의 상황과 작가의 처지까지 알아야만 작가의 머리속에 들어가 작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내가 읽고 내가 깨닫는 것이 바로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내 주관을 갖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나로써는 글을 쓴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였지만 지속적으로 글을 쓰면서 점점 내 글을 누군가가 읽는다는 명확한 인식을 하고 글을 쓰고 있다. 그럼으로 인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공존을 할텐데 대체적으로 부정보다는 긍정적인 면이 훨씬 많다. 스스로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쓰지는 않아도 최소한 더 잘 쓰려고 노력을 하는 측면이 있으니 말이다. 나에게 문학이란 세상을 알아가는 하나의 과정이고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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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를 그려라 - 인생의 큰 그림을 보는 힘
전옥표 지음 / 비즈니스북스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더글라스 케네디의 '빅픽처'의 내용은 이러하다.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 한 인물이 우연한 기회에 완전히 다른 곳으로 가서 지금과는 달리 본인이 원했던 삶을 살게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몇가지 행운이 결부되어 이전의 삶과는 다른 뛰어난 실려과 행복한 삶을 살게된다는 내용이다. 이전의 삶과 이 후의 삶에 있어 다른 점은 이전의 삶이 어쩔 수 없이 살았던 삶이라면 이후의 삶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노력한 삶이라는 것이다.

 

'빅픽처'라는 제목이 이미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 책은 바로 '빅픽처'에 영감을 받아 관련된 내용을 이야기하는 책이려니 지레짐작을 했다. 그러나, 우연의 일치였다. 전옥표씨가 자신이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의 네이밍을 '빅픽처'로 삼고 준비를 하는 과정에 이미 '빅픽처'라는 소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회사도 그렇지만 개인도 마찬가지로 무엇인가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자신만의 독특한 네이밍이 필요하다. 마케팅이라고도 하고 광고라고도 하지만 어쩔 때는 내용보다 네이밍을 얼마나 잘 했느냐에 따라 최소한 반은 먹고 들어간다. 목표와 방향이 제대로 설정되어 있다면 어떤 시련과 고난이 닥쳐도 헤쳐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다른 의미로는 비전을 갖고 있느냐의 여부를 따진다고 볼 수 있는데 '빅픽처를 그려라'에서 빅픽처가 바로 비전이라 할 수 있다.

 

빅픽처가 딱히 새로운 이야기나 기존에 듣지 못했던 개념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아니라 이미 있는 내용을 갖고 저자만의 새로운 네이밍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관심을 유발하고 호기심에 책을 들어 읽게 만드는 눈부신 효과를 발휘한다. 단어 그대로 큰 그림을 본인이 그리고 있느냐 내지 갖고 있느냐에 따라 사람은 비록 잘못된 길로 갈지라도 다시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이 어떤 그림이든 스케치북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만약 아주 아주 큰 종이에 - 서울시청만큼이라 생각해 보자 - 그림을 그리고 있다면 전체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지 않는 사람이나 특정 부분만 보고 있는 사람에게는 현재의 모습만을 갖고 무엇이라 할 수 있다. 

 

전체의 모습을 볼 때와 달리 일부만 볼 때 지금 그리고 있는 곳이 오로지 검은 색만을 칠하고 있는 부분이라면 '이 따위 그림을 그리고 있나~!'라는 생각으로 보거나 '검은 색 이외에는 칠 할 수 없구나~!'라고 한탄을 할 수 밖에 없지만 큰 그림으로 본다면 그 부분은 꼭 필요한 부분이다. 오로지 모든 그림이 완성되어야만 전체적인 조감을 통해 확인하고 알 수 있는 것이다. 고로, 머리속에 큰 그림이 없다면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릴 수 도 없을 뿐더러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게 된다.

 

전작 '이기는 습관'은 알고 있었지만 읽어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다른 것들처럼 때를 놓치면 이상하게 안 읽거나 보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나에게는 '이기는 습관'이 그랬다. 꽤 많이 사람들이 보는 것 같고 주변 몇 몇 사람들도 보는 것을 알았지만  꼭 봐야 할 이유가 없어 하다보니 읽지 않게 되었고 이번 책 '빅픽처를 그려라'를 보게 되었는데 이미 몇 권의 책을 펴 낸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자신만의 빅픽처를 그리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작은 단위의 세부적인 행동을 하고 나서 주변 사람들과 함께 그림을 그려나가라는 단계적인 이야기를 해 준다. 뭐, 사실 그다지 새롭고 특이할 것은 없는 개념이고 자기계발 내용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존의 것들은 단순히 이렇게 하라는 이야기만 한다면 이 책의 명확히 그림을 그려준다는 것이다.

 

막연히 비전을 갖고 생각을 하고 실천을 하면 언젠가는 당신이 꿈꾸는 세상을 얻게 될 겁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하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도 좀 뻔하디 뻔한 생각도 들고 조금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 어딘지 손에 잡히지 않는 느낌이 들지만 명확하게 빅픽처를 그려라는 명확하고도 눈에 그려지는 단어로 설명을 하기 때문에 책을 읽는 사람이 좀 더 머리에 잘 들어올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어떤 큰 그림을 그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을 책을 통해 배웠지만 각자 자신이 그릴 큰 그림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냐의 여부는 각자 다시 고민을 해야 한다. 누구는 책에 나온 것처럼 고래를 그리고 누구는 상어를 그리고 누구는 사자를 그리고 누구는 강아지를 그릴 수 있다.

 

멋있는 큰 그림을 그린다고 대단하고 보잘 것 없는 사물의 큰 그림을 그린다고 잘 못 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삐딱하게 볼 수는 있다만 책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남들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시선으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 자신에게 맞는 것인지 여부는 직접 해 봐야 알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먼저 작은 도화지나 A4용지에라도 그려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작은 성공이라도 성취해보라는 이야기가 책에도 나오는데 그처럼 작은 그림이라도 한 번 그려본 다음에 그 중에 가장 좋아했고 재미있었던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려 본다면 큰 그림을 그리다가 중간에 멈추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처음부터 너무 큰 그림을 그리려 하는 것보다는 이 편이 보다 좋을 것이라는 개인적인 판단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플랫폼을 생각하고 있다. 나를 통해 책을 읽게 되고 나를 통해 부동산 경매에 대해 알게 되고 나를 통해 주식에 대해 알게 되고 나를 통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등의 어딘지 거창하지만 어딘지 소박한 입문 안내자의 길을 생각하고 있다. 거창하기 보다는 부담없이 나를 통해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는 그런 플랫폼이라는 빅픽처 아닌 빅픽처를 그리려고 한다. 

 

사람들은 빅픽처를 그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 자신이 지금 있는 곳이 어디있지는 빅픽처를 갖고 있다고 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빅픽처를 갖고 있으면 최소한 정확하지는 못해도 대략적으로라도 유추하여 버티고 참을 수 있는 영혼을 갖게 된다. 빅픽처를 그리라고 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현재가 아닌 미래를 위해서 일 것이다.

 

 

 

 

 

 

 

빅픽처를 그리는데 도움되는 책(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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