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모멘트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1년 10월
평점 :
좋은 소설을 읽은 후에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그 여운이 책을 덮는 손가락 끝을 타고 내 심장으로 들어온다. 그 심장에서 펌프질을 통해 온 몸으로 전달되어 한 동안 그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굳이 여운을 벗어나려 하지 말고 여운을 깊히 만끽할 수도 있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여운에서 깨워날 수 도 있다. 어떠한 방법을 통하든 책을 덮은 다음에 단 몇 분이라도 약간 멍한 상태가 지속된다는 것은 동일하다. 내 의지로 벗어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순간은 아니다. 오로지, 알 수 없는 감정이라는 이름이 나를 지배할 뿐이다.
'빅 피처'를 읽은 후에 책 내용이 너무 인상적이고 누구나 한 번은 꿈꿀 수 있는 인생이라 더글라스 케네디가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책을 찾아 읽은 '위험한 관계'는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용에 좀 짜증이 났다. 그런 이유로 '모멘트'는 과연 어떨지 모른다는 위험(??)이 있었지만 책을 보자마자 아무런 망설임없이 선택했다. '모멘트'에도 나오는 내용중에 두 주인공이 서로 자신들은 책을 읽을 때 '줄거리를 중요하게 여긴다'라고 하는데 나도 가장 중요하게 본다. 세세한 부분보다는 줄거리에 집중하는 스타일이다.
'모멘트'는 잘 만들어진 줄거리를 갖고 있다. 자고로, 역사이래로, 연애 소설은 그 자체로 어느정도의 흥미를 일으키는 요소를 갖고 있다. 이성이 만나 서로 호감을 갖게 되고 전기에 감염되어 상대방에 대해 오로지 밝게 빛나는 면만을 집중해서 보게 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이야기꺼리를 제공해 준다. 아무리 평범하고 지루할 정도의 연애를 했어도 누군가와 누군가가 만나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는 호기심을 자극하고 흥미를 이끌어 낸다.
불행히도 불행한 연애를 우리는 더 흥미롭게 본다. 우리가 소설이나 드라마와 영화를 보는 이유는 우리가 평범하게 연애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환타지를 제공해야 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에게 듣는 이야기는 단지 몇 분 정도로 흥미롭게 읽고 끝낼 수 있지만 소설이나 영화는 1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줄거리를 쫓아 갈 수 있게 만들어 줘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타지를 현실과 잘 조화를 이뤄 보고 싶은 것만을 보여 줄 때 그 소설은 나에게 좋은 소설이 된다.
우리가 읽거나 볼 때 주도적으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이미 만들어 놓은 세계를 작가가 원하는 장면이나 내용만 읽거나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소재가 무척 중요하다고 본다. 흥미로운 소재에는 자연스럽게 관련된 에피소드가 꽃이 피고 작가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서 캐릭터들이 즐겁게 활동을 하게 만들어 준다. 이러한 이유로 대부분의 창작들이 비슷한 소재가 등장 할 수 밖에 없다. 이를테면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말이다.
'모멘트'역시도 흥미로운 소재가 이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들고 감정이입해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두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바라보게 만든다. 우리나라에서 분단이라는 사실만큼 흥미롭고 기가 막힌 소재가 없는 것처럼 독일을 배경으로 할 때 동독과 서독으로 나눠져 있는 사실은 더 할 수 없는 소재가 된다. 거기에 동독의 여자와 서독의 남자가 만난다는 설정이라면 더더욱 새드엔딩을 예상하게 만들어주고 그 설정 자체가 긴박한 상황도 연출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이 책은 미국의 남자와 동독 출신의 여자가 동서진영으로 나눠져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모든것이 정당활 되었던 시대를 배경으로 만나 서로 사랑해지만 시대의 아픔이 이 둘에게도 영향을 미쳐 자연스럽게 슬픈 사랑을 맺게 되는 줄거리이다. 될 수 있는 한 줄거리를 소개하지 않으려 하지만 이 책은 그 줄거리를 안다고 해서 책읽을 때 특별히 감정선을 따라가는데 지장은 없다고 생각되어 소개한다. 어딘지 모르게 작가의 분신일 것 같이 교묘하게 배치한 남 주인공을 통해 더더욱 소설에 감정이입을 하게 만들어준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가슴에 품고 지내는 것은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장 절정의 순간만 기억하고 추억을 꼽씹고 환상이 덧칠되어 못 이룬 사랑에 대해 더 깊은 동경을 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다시는 그 순간이 되돌아 오지 않는다는 좌절감이 그 순간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지도 모른다.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서 다른 선택을 할 때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역시 과거를 추억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내가 선택할 수 있지도 않고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도 없고 내 의지를 갖고 추진할 수도 없는 미지의 세계다. 사랑을 선택하고 조절하고 의지대로 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고 사랑이라는 이름의 껍데기를 착각하는 것이라 본다. 보고 싶다고 새벽에 상대방 집을 찾아 가는 행동을 내가 예상하거나 예측할 수 도 없고 미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감정이다.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고 주체할 수 없는 기운이 폭발하는 10대에서 20대까지의 청춘남녀들에게는 더더욱 사랑이라는 감정은 몸 안에 갖고 있는 에너지에 불을 켜는 도화선이다. 아주 작은 불씨에도 자신이 갖고 있는 에너지는 스스로 다스릴 수 없는 예측불가능한 거대한 블랙홀과도 같이 자신을 집어 삼키게 된다. 이러한 사랑이기 때문에 평생 가슴 어느 구석에 집어 넣고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싶다. 잊고 살고 있다고 생각하다 어느 순간 터져 나오기도 하고 말이다.
이 책을 10년 전에 읽거나 20년 전에 읽었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다. 이 책을 10년 후에 읽거나 20년도 더 지난 후에 읽는다면 그때는 또 어떤 생각을 갖게 될지는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 읽었을 때 느끼는 이 감정이 지금 이 순간에만 유효한지도 모르겠다.
책의 주인공이 우연히 배달된 신문기사를 통해 과거를 회상하고 자신이 직접 저술한 옛 과거의 특정 시점에 대해 다시 읽은 이야기들과 그 후에 똑같은 시간을 보낸 여인의 시점에서 저술된 노트를 읽으며 비로소 진실이 밝혀지며 책은 끝을 맺는다. 가슴이 멍먹하다는 표현을 하는데 그런 느낌이 아마도 책을 접으며 여전히 나에게 떠나지 않고 내 감정을 지배했다. 젊은 날의 사랑은 무조건 아름답다는 말도 안되는 말로 리뷰를 맺는다.
p.s: 여운이 계속 남아 다른 책을 차마 읽지 못했는데 '해품달'은 자연스럽게 그 감정이 연결되어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