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과 만나다 - 신약성서 신학의 정점, 그리스도교 신학의 원천 비아 만나다 시리즈
외르크 프라이 지음, 김경민 옮김 / 비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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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분히 성경비평적 관점에서 쓰인 요한복음 입문서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 부분은 요한복음의 특징과 저자, 저작 연대와 배경 등 개론을 다루고, 2부에서는 본문 자체를 살피면서 주요 주제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마지막 3부는 요한복음에 관한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간략히 살피면서, 요한복음을 읽어나갈 때 집중해야 할 부분에 관해 짚어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요한복음은 이른바 비슷한 관점을 지닌 나머지 세 복음서들(공관복음)과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전체적인 얼개와 사건들은 유사해 보이지만, 자세히 읽다 보면 이질감이 많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요한복음의 그 인상적인 시작구부터가 우리의 기억에 오래 남는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창세기의 첫 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이 구절은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언행을 정리하는 것뿐 아니라 그 이상의 목적을 지니고 있었음을 짐작케 만든다.


덕분에 많은 학자들도 요한복음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했고, 다양한 주장들을 해왔다. 특별히 계몽주의 시대 이후 이성만이 진리추구의 유일한 길이요 빛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견해들을 무시하고 깨뜨리는 것이 본인의 학문적 수준의 높음을 드러내는 증표인양 여기기 시작했다. 오늘날 신학은 사실상 이런 부류의 결과물들을 모아 놓은 것에 가깝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비평적 관점 또한 비슷하다. 물론 책의 2부나 3부 말미를 읽다 보면 저자의 관심사가 이른바 신앙적인 것에 닿아있다는 게 드러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요한복음을 하나의 문학적 창작물로 보고, 여기에 나오는 예수의 말 중 상당 부분을 실제로 한 말이 아닌 “자신의 신학 견해와 관심에 따라 제시한 글”(33)이라고 단언한다. 당연히 요한복음에 담겨 있는 예수의 행적을 “실제 사건과 거리가 먼”(161) 것으로 생각하거나, 요한복음의 서문조차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예수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표현”(168)한 것일 뿐이라고 본다.


애초에 요한복음의 저자부터가 누구인지에 관해서도 이 책의 저자는 다양한 의심만 뿌려둔다. 전통적으로 인정되어 오던 사도 요한이 아닐 가능성을 강하게 제기하면서, 그와 다른 “장로 요한” 설을 살짝 띄우다가, 결국 소위 특정한 신학적 견해를 가진 공동체가 자신들의 신학을 반영해 쓴 문서라는 식의 결론으로 기운다.


사실 이런 식의 접근은 딱히 새로울 것도 없고, 더 나아진 것도 없어 보인다. 특히 요한복음의 배경을 재구성하는 과정은 이런 접근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데, 저자는 본문 속 다양한 “힌트”들을 모아 그 상황을 재구성하는데, 그렇게 재구성한 결과물로 다시 본문을 해석하는 순환논리로 아주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들어간다. 문제는 그 “힌트”들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구성될 수도 있다는 점일 텐데 이에 대한 검토는 별로 없다.


저자는 “로고스 성육신 개념이 예수의 잉태나 탄생과 무관하며, 동정녀 탄생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108)다고, 공관복음서의 예수의 출생 기사가 실제 일어난 일과는 상관없는 꾸며낸 이야기인 것처럼 설명하면서도, 그러면 정작 성육신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별 설명이 없다.


또, 조금은 의아한 건, 지금까지 언급한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수를 따르던 이들 중 일부”를 포함한 “더 큰 집단까지 광범위하게 부활 체험을” 했고(159), 그것이 초기 기독교가 발생하고 성장하는 데 중요했을 것이라고 말한다는 부분이다. 동정년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것은 믿을 수 없지만, 부활은 믿을 수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부활 체험”은 실제로 일어난 부활에 대한 목격이 아닌 다른 신학적 해석이 필요한 일을 가리키는 것일까?





근 1년 간 매일 성경을 읽는 모임을 운영 중이다. 참가자 중 한 명이 자주 아주 근본적이면서 강한 질문을 던지곤 하는데, 자신을 신앙을 발견하고 싶은 초심자라고 소개하는 그의 질문은 꽤나 묵직할 때가 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그리고 신학이라는 “놀음”에 지나치게 깊이 빠져있다 보면 시야가 좁아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만약 이 책의 논의를 따른다면,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누가 쓴 책인지 확실치 않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은 실제 있었던 일과도 상관이 없다면, 이 책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성령이라는 저자의 주장(78)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이 성령을 따라 기록되었다는 건 누가, 어떻게 확인해 줄 수 있다는 말일까. 그저 책 속에 담긴 사상이 훌륭하기 때문에(그 훌륭하다는 것은 무슨 기준에 따라 그렇다는 것인지)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닌가? 결국 책의 신뢰성, 심지어 영감성까지도 그것을 읽는 “나”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극히 주체성에 대한 현대주의적 신봉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책의 구성은 나름 알차다. 현대의 비평적 관점을 잘 정리해 냈고, 그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의 자리를 만들려는 노력도 보인다. 다만 그 논리 과정이 어떻게 일관성을 지닐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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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6-26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적에 성경을 읽을 적에도 요한복음이 나머지 3개의 성경과 성격이 좀 달라서 의아한 생각이 들긴 하더군요.그런데 성경은 노란 가방님 말마따라 저자가 불분명해서 (실제 4복음만해도 에수님의 12제자가 직접 저술했는지도 아라송함),그 당시에도 계파마다 읽던 성경이 제 각각이었다고 하지요.그건 아무래도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로마에 박해를 박고 30세 전후로 일찍 돌아가시고 12 제자들도 뿔뿔히 흩어져서 그런것이 아닌가 싶어요.
이에 비해 꾸란이나 불경의 경우 마호메트(62세)와 부처님(80세)이 오래 사신데다가 살아생전 어느 정도 교세도 있어서 (많은)제자들이 두 분의 말씀을 모두 암기했다고 책으로 만들었기에 성경보다는 논란의 여지가 적은것 같아요.
 


그러니 사랑을 진정으로 ‘쓰고’,

마음을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은

혼자만 더 많이 사랑한다고 해서 마음이 가난해지지 않는다.

쓰고 또 써도 줄지 않는 사랑을 상대방을 통해 확인하고,

새로운 경험과 교훈을 얻고 있으니까.

그래서 혼자 하는 사랑은 때로 슬프지만,

진정으로 사랑을 나누고 있다면 삶은 더 풍성해진다.


- 허유선, 『나는 너와의 연애를 후회한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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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게네스 성경해석학 서사기 - 해석·상징·드라마
곽계일 지음 / 다함(도서출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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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게네스는 초기 기독교 시기 중요한 신학자 중 한 명이다.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던 교리문답학교를 운영하기도 했고, “헥사플라”라고 불리는 전설적인 6개 성경 본문을 비교/대조한 대작을 펴내기도 했던 성경연구가이자, 수천 편의 저작을 남긴 정력적인 저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후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비운의 신학자인데, 최근에는 그 이단 정죄의 근거에 대해 의심하는 시각도 있다.


오리게네스가 특별히 주목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가 성경해석학에 기여한 독특한 공헌 때문인데, 그는 이른바 성경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이 책은 오리게네스의 성경해석법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해 왔는지 그 과정을 서사적으로 되짚어 보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오리게네스 이전에도 알레고리적 방식으로 문헌을 해석하는 시도는 존재했다. 고대 그리스에 상징(그리스어로 “심볼론”)은 BC 6세기에서 4세기 사이 인간과 신 사이를 이어주는 신성한 증표로 여겨졌고, 이 시기를 거치며 호메로스 같은 이들을 시인에서 선지자로, 그들의 작품은 서사시에서 신탁을 감추고 있는 상징으로 격상되었다.


플라톤 사상 전통에 바탕을 두고 이런 상징을 전면에 들고 나온 인물이 암모니아스였다. 그는 텍스트 상징을 독특한 방식으로 해석함으로써, 플라톤이 물질계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켰던 천상계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런 암모니아스의 1세대 제자가 바로 플로티노스, 신플라톤주의 주창자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오리게네스가 등장한다. 오리게세네스 역시 플로티노스와 마찬가지로 암모니아스의 제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동기인 플로티노스와는 다른 문헌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바로 구약성경이다. 그는 구약성경을 신적 비밀이 가득한 일종의 텍스트 상징으로 보았고, 이른바 비유 해석법, 즉 알레고리를 통해서 그 상징 속 본래 의미를 드러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저자는 우선 이렇게 오리게네스의 학문적 계보가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책은 흥미롭게도 오리게네스의 개인적 삶의 연대기와 그의 신학적 작업을 매치시키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이런 구성을 통해서(그러니까 오리게네스의 저작이 나온 순서와 배경을 아울러 살핌으로써) 자연스럽게 그의 사고와 사상이 어떤 식으로 발전되어 왔는지를 함께 살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역시 주된 주제는 그의 알레고리적 해석 방식이 어떻게 나왔고, 어떤 식으로 사용되었는지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에서의 정치적인 이유로 쫓겨난 후 정착한 팔레스타인의 카이사레아(가이사랴)에서 그의 작업은 유대 랍비들과의 토론을 통해 새로운 장으로 접어든다. 흥미로운 건 성전이 파괴된 시대를 살고 있던 랍비들 역시 일종의 알레고리로 구약을 해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유월절의 핵심적인 상징인 “피”를, 유대인들은 모리아산에서 흘린 이삭의 피나, 그에 앞서 할례를 행할 때 흘린 아브라함의 피로 해석하곤 했다. 이에 반해 오리게네스의 해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큰 차이점이 있고.



국내 저자 가운데 교부 신학을 전공하고 이렇게 책(원래는 논문이었지만)까지 내는 경우를 많이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고 보지만, 책의 내용 역시 흥미로운 설명들이 잔뜩 발견되어서 즐거운 독서를 할 수 있었다.


특히 1장 “상징의 시대”와 4장 “텍스트 상징으로 지은 성전” 부분이 새로운 내용들이 많아 집중해서 읽었다. 알레고리적 해석이라는 것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 그냥 무시해 버릴 수 있는 가벼운 이론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려준다. 작고 얇은 볼륨이기도 하니, 이 분야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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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2 - 7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7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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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정면대결을 하지 않고 있다. 제2차 삼두정치의 결과물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어서, 제국의 서방은 옥타비아누스가, 동방은 안토니우스가 지배하고 있었다. 나머지 삼두의 한 머리인 레피두스는 북아프리카에서 나름 힘을 키우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주목하지는 않았으니...


하지만 변화는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으니,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죽기 직전 추진했었던 파르티아 원정에 나섰다가 대패를 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지만, 반대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해적집단 때문에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에서 들어오는 곡물길이 막히며 극심한 민심의 동요를 마주하고 있던 옥타비아누스는 마침내 안토니우스로부터 해군력을 지원받아 섹스투스를 궤멸시키는 데 성공한다. 덤으로 마침내 북아프리카에서 나와 존재감을 과시하려 했던 레피두스까지 무너뜨리며 확실히 우위에 섰다.






사실 이번 권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들 가운데 하나는 카이사리온이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그는 어머니 클레오파트라의 막대한 기대 속에서 성장하고 있었는데, 이번 편에서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자의식이 확고하게 자라면서, 이집트를 로마와 비슷한 나라로 만들기 위한 자신의 계획을 시작한다.


만약 그 계획이 실현되었다면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 사뭇 궁금해지긴 한다. 과연 성공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전혀 다른 역사와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었던 이집트에서 로마식 공화정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까. 작가가 의도적으로 카이사르의 어린 시절과 비슷하게 묘사하는 카이사리온은, (아마도 다음 권에서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바로 그 유사성 때문에 결국 채 꽃을 피우지 못한 채 숙청되고 만다.





여기에는 결국 그의 어머니였던 클레오파트라의 권력욕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반면 그녀의 욕망을 이루는 데 필요한 현실감각이나 특별히 군사적, 전략적 능력은 너무나 부족했다. 대신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방식으로 전형적인 동방의 여성이 선택할 법한 행동을 했는데, 바로 자신 대신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꼭두각시 남성을 쥐고 흔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비장의 무기 역시, 그녀의 안목의 부족 때문이었는지 하필 안토니우스 같은 인물을 선택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물론 그렇다고 옥타비아누스의 성향과 자질을 보면, 그를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이룰 수는 없었을 게 분명하지만. 그리고 애초에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는 남성은 선택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렇게 이야기는 대단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시리즈의 마지막 한 권만 남았다. 이제 대파국이 나타날 텐데, 저자 특유의 섬세한 심리 묘사로 이걸 어떻게 그려낼 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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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6-24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연합은 안토니우스측에서는 이집트의 국물과 군사지원,클레오파트라측에서는 당시 최강 로마제국의 지배자의 부인이 될 기회였기에 서로 윈윈하는 관계였지요.다만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빠져서 자신의 병력을 클레오파트라에게 지원(동생과 왕귄다툼중)하는 바람에 옥타비아누스와의 경쟁에서 패배한 것이지요.
 


루이스가 생각하기에,

마음 맞는 친구 혹은 자기와 비슷한

사회적·경제적 지위에 있는 귀족 커뮤니티를

발견할 수 있는 교회를 찾아다닌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천국은 온갖 부류의 사람들로 가득 찰 것이므로

우리 또한 그날을 준비하면서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러므로 신자는 각자 자기의 교구 교회에 출석을 해야지,

그것을 대신할 예배 공동체를 찾아다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라일 도싯, 『C. S. 루이스의 영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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