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 막이 오른다 - 초원에서 찾아낸 12개의 이야기
김주연 지음 / 파롤앤(PAROLE&)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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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거의 다 읽었을 무렵, 제목을 확인하고는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언젠가 이와 비슷한 제목의 책을 읽지 않았던가? 물론 같은 책은 아니다. 이 책은 올해 새로 나온 책이고 내 머리 속의 그 책은 재작년에 읽었던 책이니까. 확인해 보니 제목이 이 책과 아주 비슷하다. “슬라브, 막이 오른다”. 이 책과는 딱 그 앞 단어만 다르다. 그리고 심지어 저자까지 동일인이었다. 이걸 너무 늦게 알았다.


책은 제목처럼 중앙아시아 5개국(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을 이리저리 누비며 경험한 저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만 제2의 김일성이라고 불리는 독재자와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 대통령을 해 먹고 있는 투르크메니스탄의 경우 입국 자체가 쉽지 않아 패스한 모양이다.





우리와 생각보다 지리적으로는 가까운 곳에 있지만, 오히려 유럽이나 미국, 심지어 더 먼 서아시아보다 심리적인 거리감은 더 큰 것 같은 지역이 중앙아시아다. 그 때문인지 오히려 이 지역에 관한 이야기가 더 이색적으로 들린다. 이 지역의 역사적인 인물이라든지 건축물 같은 것들, 또 저자의 직업적 특성상 관심이 있고 그래서 자주 언급되는 예술 같은 부분은 좀처럼 다른 데서 쉽게 들어보지 못한 내용들로 가득하다.


이 지역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역시나 소련의 영향력을 빼 놓을 수 없다(이 점에서는 앞서 읽었던 “슬라브, 막이 오른다”와 비슷하다). 19세기와 20세기 이데올로기 충돌은 목적을 위해 사람들을 수단으로 전락시켰고,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 살던 고려인들의 강제 이주를 비롯한 여러 민족들의 이산을 불러왔다.


그리고 이번에 지도를 자세히 보면서 알게 된 일 중 하나는,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 그리고 타지키스탄의 국경선의 기묘한 모습의 유래다. 마치 각각의 나라에서 촉수를 하나씩 뻗어서 서로를 옭아매는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소련 측에서 이들 국가가 독립한 이후 이 지역의 튀르크인들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막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결과물이라고 한다. 고려인 강제 이주 때도 그랬지만, 학살자 스탈린의 악행은 끊임없이 튀어 나온다.





컬러 도판이 여러 장이다. 중앙아시아 하면 왠지 건조하고 붉은 흙만 잔뜩 있을 것 같은 느낌인데, 건물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화려하다(물론 그런 것만 찍어 실었겠지만). 과거 실크로드가 지나던 길목들인지라 꽤나 번성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이야 과거의 영광이 되었지만, 켜켜이 쌓여 있는 역사의 케이크가 언제 또 빛을 발하게 될 지는 모르는 일이다.


편안하게 읽히는 여행 에세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개인적으로 직접 몸을 움직여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이렇게 대신 여행을 다녀주며 필요한 정보까지 또 수집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니 감사할 따름. 요새는 영상물이 좀 더 대중적이긴 하지만, 원하는 페이지마다 사진 한 장을 앞에 두고 잠시 멈출 수 있는 책의 매력은 또 다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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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커스 보그의 고백 - 기억에서 회심으로, 그리고 확신으로 비아의 말들
마커스 J. 보그 지음, 민경찬 외 옮김 / 비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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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신앙 여정을 돌아보는 일은 의미가 있다. 신앙이라는 것은 어느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통해서 조금씩 축적되고 쌓여가는 면이 있다. 물론 이런 부분을 명확하게 포착하는 일이 쉽지 않긴 하지만, 잘 정리된 신앙의 여정은 읽는 사람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비록 그가 가진 신앙의 결이 나와 다르다고 할지라도) 유익을 끼칠 수 있다.


이 책은 저명한 신학자인 마커스 보그의 자서전, 정확히 말하면 신학적 자서전에 가깝다. 거의 평생을 학교 기관에서 일해 왔던 저자는, 스스로도 딱히 눈에 띄게 특별한 사건이 없었다고 말한다. 때문에 이야기는 그의 생애 가운데 조금씩 갖게 된 신학적 인식들을 하나씩 풀어 놓는 식으로 진행된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저자는, 대학생 시절 지적인 회심을 경험한다. 그 내용이란 기독교 안에 지적인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깨달음으로 인한 일종의 해방감 때문이었다는 게 흥미롭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독교가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만 서 있지 않다는, 앞서의 깨달음과 결이 비슷한 정치적 회심이 이어진다. 이미 이 시점에서 저자는 당시 미국 사회의 주류였던 보수주의적 기독교에서 벗어나는 길을 택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회심은 저자도 말하는 “명백하게 종교적인 회심”이었다. 그는 일종의 신비적 경험을 했는데, 어느 날 운전을 하며 가다가 발견한 노을에 덮인 풍경 속에서 이른바 “경이감”을 느꼈던 것 같다. 이 부분에서는 C. S. 루이스가 평생 추구했던 “Joy”와도 비슷한 느낌이다. 루이스는 그것을 천국에서 이 자연세계로 흘러나온 것에 대한 갈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 경험은 짧았지만(때로 1분 이내), 이후에도 몇 차례 반복적으로 일어났고, 이를 통해 저자는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다만 여기에서 저자는 존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신학”에 대한 추구를 완전히 내던지고, 개인화된 신학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듯하다.


이후의 장들에서는 구원이란 현세에 관한 이야기이며, 성경에 대한 문자적 이해는 불충분하며 예수를 중심으로 새롭게(아마도 비문자적으로, 그리고 다분히 내가 갖고 있는 감성에 따라) 해석하는 것이 옳으며, 예수의 십자가는 대속 보다는 일종의 삶의 모범으로서의 기능을 하며, 성경에서 진보적 정치 의제를 뽑아내는 데 집중한다.





사실 저자가 자신의 삶과 생각을 소개하는 무드인지라, 굳이 일부러 다른 견해를 강조하며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책 자체가 신학을 담고 있는 지라 몇 가지 떠오르는 질문들이 있긴 하다. 그 중 하나는 성경의 문자적 이해를 버린 채 “예수를 중심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어떤 식으로 실제 기능하느냐인데, 결국 무엇이 예수를 중심으로 읽는 것인지는 독자의 주관성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지는 않을까.


신비주의와 자유주의의 만남이 조금은 독특하게 느껴졌다. 애초에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것이 이성에 기초한 신학의 재해석에서 시작된 것이기에, 신비주의적 요소가 자리 잡을 만한 데가 잘 안 보이지 않던가. 하지만 신앙이라는 것엔 그렇게 합리주의적 면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그걸 넘어서는 무엇이 있다는 걸) 저자의 삶이 잘 보여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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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고차원적인 사랑과

스톡홀름 증후군을 정말로 구분할 수 있는가?

고차원적인 사랑은 자기를 괴롭히는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더라도

그의 악행을 봐주거나 자신이 입은 피해를 축소하지 않는다.

스톡홀름 증후군은 가해자의 동기를 이해한다는 이유로

핑계를 찾아 주고 그 사람의 일탈 행동들까지 옹호한다.


크리스텔 프티콜랭, 『당신은 사람 보는 눈이 필요하군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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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9월이네요. 첫 날부터 비가 주룩주룩.
8월엔 얼마 못 읽나 했지만, 후반부에 몰아치기 성공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책들을 만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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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고통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조화시키는 문제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에 하찮은 의미를 부여하며

인간이 만물의 중심인 양 만물을 바라보는 한

결코 해결될 수 없습니다.


- C. S. 루이스, 『고통의 문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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