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모든 예술은 종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추상예술조차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의 어떤 면을 포착해서 과장하거나 의도적인 왜곡, 축소를 통해 예술가가 경험한 감흥과 통찰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으로 교회는 예술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진리를 드러내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해 왔다. 중세는 교회 예술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오용도 있었다. 화려함의 극치를 달렸던 중세 교회 예술은 지나치게 많은 비용이 들었고, 그런 것들을 관리하는 교회 또한 함께 부유하고 화려해져만 갔다. 화려함에 익숙한 교회는 자연스럽게 부패해버렸고, 가장 본질적인 말씀의 선포는 약해지다 못해 희미해졌다.
종교개혁자들이 예술을 의심스럽게 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 시기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장식화 된 교회의 각종 부속들을 제거하고, 본질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시기였다. 마치 과식을 해서 체한 사람이 기름진 음식을 끊고 죽만 먹어야 하는 것처럼. 개혁자들은 미술과 음악, 건축 등 여러 부분에서 소박한 (때로는 금욕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양식을 선호했다.
아쉽게도 이 때문인지 개신교회 안에서 예술에 관한 관심은 여전히 부족하다. 물론 개혁파 화가라고 인정받는 얀 베르메르 같은 걸출한 작가도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그 양과 질에서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특히나 이전 시대 이른바 “성화”라고 불렸던, 기독교적 주제를 담은 좀 더 창의적이고 현대적인 작품들이 부족한 것은 퍽 아쉬운 일이다.
이 책은 가톨릭 사제이면서 화가이기도 했던 지거 쾨더라는 인물의 작품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책 전체에 걸쳐서 컬러 도판이 잔뜩 실려 있고(무려 103개), 그 그림을 해설하는 다양한 필자들(무려 28명이다)의 글이 덧붙여져 있는 형태다.
물론 눈으로 읽는 것은 그 필자들의 글이고, 개중에는 꽤 인상적인 통찰들도 보이지만, 역시 이 책의 백미는 그림이다. 독특한 화풍인데, 계속 보다보니 특징 같은 것들도 눈에 좀 들어오고(문외한인 나에겐 꽤 큰 발견이다), 성경 속 이야기와 오늘날 우리의 현실 사이의 시간과 공간적 간격을 그림 속에서 극복하는 모습도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게 예술의 능력이지 않을까.
상당수의 그림에서 손이 자주 보인다. 하나님의 손을 상징하는 장치로 보이는데, 성경 속 수많은 인물들과 하나님이 함께 계셨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 하나님의 손이 전쟁과 증오로 시끄러운 오늘 우리의 세계에도 임하시기를.
아일랜드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웃나라인 잉글랜드의 식민지로 오랜 시간을 살아오면서 많은 착취를 당했지만, 마침내 독립을 쟁취했다. 물론 이 과정은 평화롭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20세기 중후반까지도 치열한 무장투쟁이 벌어졌다. 이 소설은 그런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한다.
소설이 시작됐을 때부터 이미 나라는 권위주의적 정부가 집권을 한 채, 국민들을 통제하는 여러 법률을 만들어 놓은 상황이다. 네 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주인공 아일리시의 남편은 교원노조 부위원장으로서 이런 사태에 대한 항의를 위한 시위에 나섰다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정부의 억압은 점차 수위를 높여간다.
너무나 평범하게 살아가던 주인공에게 닥친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어떻게든 남편이 돌아오기 전까지 가족을 처음 그대로 붙들고자 하던 그녀의 노력은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게 된다. 이제 겨우 중학교를 졸업할 나이였던 맏아들은 징집영장을 피해서 반군에 들어갔고, 둘째 아들은 공습 파편에 맞아 병원에 입원했다가 정부군에게 끌려가 죽은 채로 돌아온다. 딸아이는 엄마와 제대로 대화를 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고, 막내는 아직 우유를 먹여야 하는 어린 아이다.
작가는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아이일리시가 조금씩 자신이 지켜야 할 것들을 잃어버리는 과정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서술이 철저하게 아일리시 개인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에 독자도 아일리시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아일리시의 생각을 따라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정보의 결핍은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기 어렵게 만들고, 닥쳐오는 사건들에 대처하는 데 급급하게 만든다.
여기에 책 전체에 마침표와 쉼표를 제외한 다른 문장부호들이 사용되지 않고, 심지어 줄 바꿈마저 매우 적게 사용된다. 대화라고 해서 따로 줄 바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치 영화로 치면 롱 테이크로 장면을 연속해서 촬영하는 것처럼, 긴박감과 함께 시각적 압박감을 준다. 페이지 전체를 여백 없이 꽉 채우고 있는 문장들을 보고 있으면 사방이 꽉 막힌 주인공의 상황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권위주의 정부의 독재적 지도자, 그로 인한 격렬한 폭력이 동반된 충돌과 그 피해를 정면으로 뒤집어쓰는 (곧 난민이 될 운명의) 평범한 시민들이라는 작품 속 이미지는 저자가 시리아 난민들을 보고 떠올린 것이라고 한다. 그로부터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우리는 더 많은 곳에서 비슷한 모습을 보고 있다.
사실 이런 소재라면 좀 더 정치적인 메시지나 분석이 담길 만도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 저자는 철저하게 아일리시라는 개인의 눈으로 사태를 서술한다. 만약 좀 더 직설적으로 정치적 비평을 가했다면 이런저런 말들이 나올 수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피해자 중심으로 서술함으로써 사태의 잔혹성, 정치적인 문제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가를 더 생생하게 묘사해 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자신에게 아부하는 간들에 둘러싸여서 입맛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입을 틀어막고, 정치적 반대파와의 대화를 거부한 채, 종래에는 상대를 반국가세력으로 몰아가며 군대를 동원해 쿠데타까지 획책했던 윤석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소설 속 참혹한 모습은 어쩌면 윤석열이 바랐을 미래였을 지도 모르겠다(직접 그 끝까지 그리지는 못했을 지라도―생각이 참 부족한 인사였으니까―그가 그렸던, 그리려고 시도했던 미래와는 비슷할 것이다). 최근에는 트럼프가 그와 비슷한 짓을 하는 것 같아 우려스럽기도 하다.
작품 속 사건 이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이후에는 어떻게 그 문제가 결말에 이르렀는지 퍽 궁금하다. 권위주의적 독재정부를 출현시킨 것도 시민들의 의사(투표)를 통해서였을까. 정부군과 반군의 전투는 어떻게 끝났을까. 그리고 누군가는 제대로 책임을 졌을까.
■ 간만에 다시 돌아온 체스터턴의 "정통" 읽기! 북서번트의 이정우 목사님과 함께 촬영했습니다.
■ 이번 영상에서는 유물론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이 세상의 초자연적인 면에 관한 집요한 탐구를 시도하는 체스터턴의 모습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결핍은 정신을 침범하므로 무해하고 사소한 감정이 아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결핍되었다고 느낄 때 다르게 행동한다.
- 뤼트허르 브레흐만,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 중에서
사도신경은 오늘날 가장 많은 교회에서 고백하고 있는 신앙고백문이다. 개신교회와 가톨릭교회 모두에서 고백하고 있는데(약간 형태는 다르다), 정교회에서는 사용을 하지 않는다. 사실 개신교회가 가톨릭교회와 일정 부분 역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서방교회 전통을 함께 이어오는 측면이 있는 듯하다.
재미있는 부분은, 정교회가 사용하는 니케아 신경과 달리 사도신경 자체는 보편 공의회에서 합의를 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사실 이 신경을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물론 그 기원으로 추정되는 몇 가지 신앙고백들이 있었고, 대략 4세기 경 로마 인근에서 정리된 것으로 보이긴 하고, 역시 중요한 건 그 내용이 초기 기독교회의 신앙을 잘 정리, 요약했다는 점에서 쉽게 무시할 수는 없다.
다만 그렇게 자주 고백되고(많은 교회에서 예배 순서 중 하나로 넣고 있다), 익숙하지만 그 내용에 관해 차근차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흔하지는 않은 것 같다. 어린 시절에는 분명 한글로 된 내용인데, 몇몇 구절들은 한자어와 신학용어로 되어 있어서 ‘그게 무슨 뜻인지?’하고 혼자 궁금해 했던 적이 있다.
이 책은 잘 알려진 복음주의 저자 제임스 패커가 사도신경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내용이다. 책 자체가 굉장히 작고 얇은데, 일종의 핸드북 성격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책은 사도신경의 각 구절을 하나씩 떼어내서 차례대로 설명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각 장의 말미에는 함께 읽어 볼만한 성경 구절과 생각해 볼 질문들이 덧붙여져 있다.
간략하지만 담아야 할 내용은 충분히 담겨 있다. 저자는 기독교의 공통적인 신앙(C. S. 루이스의 표현으로 말하면 “순전한 기독교”)에 기초해 설명을 하고 있기에 (다만 “교회”에 관한 내용에서는 가톨릭교회와의 차이를 언급하긴 한다) 널리 쓰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