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의 노래 - 2023 부커상 수상작
폴 린치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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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웃나라인 잉글랜드의 식민지로 오랜 시간을 살아오면서 많은 착취를 당했지만, 마침내 독립을 쟁취했다. 물론 이 과정은 평화롭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20세기 중후반까지도 치열한 무장투쟁이 벌어졌다. 이 소설은 그런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한다.


소설이 시작됐을 때부터 이미 나라는 권위주의적 정부가 집권을 한 채, 국민들을 통제하는 여러 법률을 만들어 놓은 상황이다. 네 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주인공 아일리시의 남편은 교원노조 부위원장으로서 이런 사태에 대한 항의를 위한 시위에 나섰다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정부의 억압은 점차 수위를 높여간다.


너무나 평범하게 살아가던 주인공에게 닥친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어떻게든 남편이 돌아오기 전까지 가족을 처음 그대로 붙들고자 하던 그녀의 노력은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게 된다. 이제 겨우 중학교를 졸업할 나이였던 맏아들은 징집영장을 피해서 반군에 들어갔고, 둘째 아들은 공습 파편에 맞아 병원에 입원했다가 정부군에게 끌려가 죽은 채로 돌아온다. 딸아이는 엄마와 제대로 대화를 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고, 막내는 아직 우유를 먹여야 하는 어린 아이다.





작가는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아이일리시가 조금씩 자신이 지켜야 할 것들을 잃어버리는 과정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서술이 철저하게 아일리시 개인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에 독자도 아일리시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아일리시의 생각을 따라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정보의 결핍은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기 어렵게 만들고, 닥쳐오는 사건들에 대처하는 데 급급하게 만든다.


여기에 책 전체에 마침표와 쉼표를 제외한 다른 문장부호들이 사용되지 않고, 심지어 줄 바꿈마저 매우 적게 사용된다. 대화라고 해서 따로 줄 바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치 영화로 치면 롱 테이크로 장면을 연속해서 촬영하는 것처럼, 긴박감과 함께 시각적 압박감을 준다. 페이지 전체를 여백 없이 꽉 채우고 있는 문장들을 보고 있으면 사방이 꽉 막힌 주인공의 상황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권위주의 정부의 독재적 지도자, 그로 인한 격렬한 폭력이 동반된 충돌과 그 피해를 정면으로 뒤집어쓰는 (곧 난민이 될 운명의) 평범한 시민들이라는 작품 속 이미지는 저자가 시리아 난민들을 보고 떠올린 것이라고 한다. 그로부터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우리는 더 많은 곳에서 비슷한 모습을 보고 있다.


사실 이런 소재라면 좀 더 정치적인 메시지나 분석이 담길 만도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 저자는 철저하게 아일리시라는 개인의 눈으로 사태를 서술한다. 만약 좀 더 직설적으로 정치적 비평을 가했다면 이런저런 말들이 나올 수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피해자 중심으로 서술함으로써 사태의 잔혹성, 정치적인 문제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가를 더 생생하게 묘사해 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자신에게 아부하는 간들에 둘러싸여서 입맛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입을 틀어막고, 정치적 반대파와의 대화를 거부한 채, 종래에는 상대를 반국가세력으로 몰아가며 군대를 동원해 쿠데타까지 획책했던 윤석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소설 속 참혹한 모습은 어쩌면 윤석열이 바랐을 미래였을 지도 모르겠다(직접 그 끝까지 그리지는 못했을 지라도―생각이 참 부족한 인사였으니까―그가 그렸던, 그리려고 시도했던 미래와는 비슷할 것이다). 최근에는 트럼프가 그와 비슷한 짓을 하는 것 같아 우려스럽기도 하다.


작품 속 사건 이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이후에는 어떻게 그 문제가 결말에 이르렀는지 퍽 궁금하다. 권위주의적 독재정부를 출현시킨 것도 시민들의 의사(투표)를 통해서였을까. 정부군과 반군의 전투는 어떻게 끝났을까. 그리고 누군가는 제대로 책임을 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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