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버린 공정 감수성의 불똥이

엉뚱하게 튄다는 것이다.

이미 경쟁에서 탈락해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게까지

노력하라는 잣대를 들이댄다.

경쟁과 평등은 뒤죽박죽되어 소수자를 위한 평등이 아니라

소수자에 대한 배려 없음으로 나타난다.

경쟁 의식은 소수의 승자에게 부를 축적시켰는지는 몰라도,

내가 언젠가는 승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유지시키는지는 몰라도,

경쟁에서 뒤떨어진 사람들을 배제해버리고 말았다.

- 정관영, 『헌법에 없는 언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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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골동품 서점
올리버 다크셔 지음, 박은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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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서적 판매점인 “소서런”(실제로 존재하는 서점이라고 한다. 1761년에 영업을 시작한)에서 새로 일하게 된 작가(이것도 실제 경험이라고 한다)가, 자신의 새 직장에서 경험한 온갖 모험(?)들을 재치 있는 문체로 묘사해 낸 반 에세이, 반 환상문학(?)이다.


여기에 계속 괄호 안 물음표를 붙이는 이유는, 이런 종류의 책들 특유의 과장과 풍자가 아주 진하게 묻어있기 때문이다. 거의 도시전설급 던전으로 묘사되는 소서런은, 아무도 열 수 없는(열쇠를 분실해서) 의심스러운 금고가 도처에 있고, 지하 창고에는 직원들이 들어가기를 꺼려하는 뭔가 무시무시한 게 있는 것 같고, 영국 어딘가 있다는 “창고”들 중 하나의 위치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책에 묘사되는 소서런의 전반적인 이미지는, 아날로그적인 일처리 방식에 기초해 온갖 수기로 작성된 문서들이 탑처럼 곳곳에 쌓여있고, 책장에 꽂혀 있는 오래된 책들은 그걸 담당하는 직원들만 알 수 있는 논리에 따라 배열되어 있는데, 가끔씩 이상한 방문자들로 이해 평화가 깨지거나, 책을 팔러, 또 사러 오는 사람들과 미묘한 신경전이 쉬지 않고 일어나는 그런 곳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주 조용한 이미지. 이런 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지 짐작도 되지 않는.





이 모든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아마도 “약간”의 각색을 더해) 쓰였다는 게 재미있다. 이 정도면 고서점이라는 장소 자체를 일종의 관광지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체험형 서점이라.. 뭔가 필이..


어쩌면 고서점에서 파는 건 오래된 책 자체만이 아니라, 그 책에 얽힌 이야기도 함께 파는 게 아닌가 싶다. 갈수록 책 읽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출판 마케팅이 나아가야 할 지점도 이 부분이 아닐까. 책의 내용뿐 아니라, 책 자체가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고, 나아가 책을 파는 사람들도 각자의 스토리를 갖는 그런.


사실 책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 책이라는 게 다 같은 건 아니다. 내 경우 여기에 나오는 “고서적” 같은 데는 별 취미가 없는지라,(수집욕은 C. S. 루이스를 제외하고는 없는 데다가, 그나마 초판이니 하는 것들에 대한 애착도 없다. 내게 중요한 건 내용이니까) 집에도 고서적 같은 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책이라는 공통점으로 묶인 이상 여기 나오는 이야기들이 영 멀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꽤 재미있기 읽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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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3-18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말은 ‘헌책’입니다. ‘고서’는 일본말입니다. 일본에서 쓰는 ‘고서’는 바탕이 ‘헌책’이고 ‘옛책’도 ‘고서’로 아우릅니다. ‘헌책집(고서점)’은 책만 팔거나 다루지 않아요. “책을 이미 읽은 사람 손길”이 만나고 이어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헌책집을 드나드는 모든 헌책과 옛책은 “책을 쓴 사람, 책을 펴낸 사람, 책을 사고파는 사람, 책을 읽은 사람”이라는 네 가지 사람이 저마다 다르게 살림을 꾸린 손빛이 흐르는 곳입니다.

이런 얼거리를 느껴서, 저는 꽤 예전부터 ‘헌책(고서)’을 가리키는 다른 우리말로 ‘손길책·손빛책’이라는 낱말을 지어 보기도 했습니다.

헌책집에서 만나는 모든 책은 ‘헌책’이라는 ‘상품’이면서, ‘손길·손빛’이 닿은 ‘이야기’와 ‘삶’이 어우러지는, 그야말로 돈으로는 살 수 없지만, 돈으로도 고맙게 사서 누리는 우리 이웃 삶이야기까지 배우는 빛나는 이음꽃이라고도 느낍니다.

노란가방 2025-03-18 13:2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책 안에도 소서런에서 판매하는 책 이외의 물건들이 나오더군요. 커다락 독수리가 조각된 독서대라던지, 엘리자베스 여왕의 얼굴이 새겨진 박이라던지.. 그렇게보면 책과 관련된 박물관 같기도 하고요.

카스피 2025-03-19 07: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에서도 소서란 같은 오래된 헌책방이 있으면 좋겠지만 책을 자꾸만 안 읽는 국내 사정상 과연 그럴 곳이 있을까 싶어요.아 물론 기업형인 알라딘 중고서점을 제외하고요.

노란가방 2025-03-19 08:10   좋아요 0 | URL
알라딘 중고서점과는 길이 다를... ^^
 



구름책방과 북서번트의 공식적인 첫 콜라보 영상입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독서모임을 운영해 오던 두 운영자가 함께 만나서 

이런저런 경험을 이야기 해 보았습니다.

후편은 일주일 후에 공개되고요.. 거기엔 좀 더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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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광이가 되기는 쉽다. 이단이 되기도 쉽다.

자신의 것을 지키는 게 어렵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는 건 어려울 게 하나도 없다.

현대의 사조에 순응하기는 쉽다. 속물이 되는 건 어려울 게 전혀 없다.

기독교가 걸어온 역사의 길목에 늘어선,

온갖 풍조와 종파가 놓아둔 오류와 과장의 덫에 빠지는 건

정말 간단한 일이다.

넘어지는 건 간단하다. 넘어지는 각도는 무한하고,

서 있는 각도는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 G. K. 체스터턴, 『하나님의 수수께끼가 사람의 해답보다 더 만족스럽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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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3-17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G. K. 체스터턴을 브라운 신부를 저술한 추리 소설가로만 알고 있었느데 의외로 종교관력 책도 많이 저술한 분이시더군요.

노란가방 2025-03-17 14:51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체스터턴은 유명한 가톨릭신자이면서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는 ˝정통˝이나 ˝영원한 사람˝ 같은 기념비적인 책도 냈었죠.
 
여행, 관광인가 순례인가 - 그리스도인을 위한 길 위의 신학
요르그 리거 지음, 홍병룡 옮김 / 포이에마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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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종교에서, 특히 기독교에서 여행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강조하면서 시작한다. 그건 상징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랬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사건과 40년 동안의 광야 여행은 민족 형성에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호출된다. 복음서의 예수님과 제자들 역시 끊임없이 갈릴리와 유대 지역을 오고가는 과정에서 복음을 가르치셨고, 바울은 지중해 동부를 반복적으로 여행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편지를 통해 신학적 정리를 이루었다.


여행에 대한 이런 강조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전환되어 이어졌다. 중세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은 순례라는 위험한 여행을 자발적으로 나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회개와 신적 은혜를 추구했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광범위한 여행을 거듭하고 있는 오늘날, 여행의 성격은 다시 한 번 바뀌었는데, 이제 사람들은 개인적인 성장이나 자아실현과 같은 지극히 내적인 동기, 나아가 자기 과시를 위한 관광에 집중하고 있다.


당연히 이런 관광으로는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기 힘들다. 저자는 그 가장 큰 이유가 여행자와 현지인 사이의 권력의 격차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여행자는 돈을 지불하고 현지의 자원을 가져가거나 훼손시키고, 이 과정에서 쓰레기를 만들어 낸다. 무엇보다 현지인들에게 자신들의 문화와 역사, 전통을 상품화하도록 부추긴다.


이건 여러 형태의 종교 관광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소위 단기 선교나 성지 순례라고 불리는 많은 종류의 종교적 여행들에서, 여행객은 현지인들보다 권력의 우위에 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걸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말이다. 개인적으로 단기선교 과정에서 들었던 뭔지 모를 불편함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주는” 위치에 서 있다는 사실에 기인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이에 관해 “자신이 해결책 일부가 되기에 앞서 자신이 어떻게 문제 일부가 되었는지 깊이 자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여전히 기독교 신앙에서 여행의 모티브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영원한 집을 짓고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돌아갈 곳이 있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시간과 자리는 여행지에서 보내는 일정일 것이다. 이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언제 뽑아버릴지 모르는 텐트의 고정못을 마치 보물처럼 여기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야곱이 파라오 앞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는 평생 나그네로 사는 사람들이다.


책의 저자는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에서 약자들의 위치에 서보지 않는 종류의 여행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변화나 도전을 줄 수 없다고 보는 듯하다. 모든 사람들이 나그네로 살지만 그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진정한 나그네의 입장(연약하고, 다른 사람들의 호의를 구해야 하고, 무엇인가를 비는 입장)에 서 볼 때에야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는 말로 보인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지순례라는 이름으로 떠나는 종교 관광을 떠올려 보자. 여행 내내 무슨 성경 이야기가 나오고, 가끔 기도를 한다고 해도 아마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결국 돈을 내고 현지의 자원을 소진시키는 일에 동참하는 소비자(Consumer, 소진시키는 사람)로 다녀오는 것뿐이라면, 그저 휴대폰 사진첩 속 자랑용 여행이었을 뿐일 게다. 예수님이 함께 하셨던 사람들과의 어떠한 교류도 없다면, 굳이 그 비싼 돈을 들여서 온갖 환경오염과(비행기의 대기오염물질 배출량은 어마어마하다) 자연파괴, 쓰레기 생산을 일으킬 이유가 뭐란 말인가.


진정한 순례란 무슨 유명한 건축물이나 자연물을 보고 오는 것이 아니고, 온 세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은혜와, 특별히 그 은혜를 여전히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는 약하고 가난한 이들과 (우리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하나가 되어 보는 것, 과거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런 경험을 했던 자리를 밞으면서 동시에 나 또한 그렇게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것, 그런 것이 아닐까.





여행이라는 주제에 관한 본격적인 인문학적, 신학적 해석을 담은 책. 물론 정치, 경제적인 부분에 좀 치우친 면이 있지는 않나 싶지만, 그래서 오히려 신학적인 면이 좀 밀려나지 않았나 싶긴 하지만, 그 부분은 읽는 사람이 어느 정도 감안해서 읽으면 되는 부분이다. 분명 좋은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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