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이북스와의 첫 협업 영상입니다.
앞으로 이런 저런 영상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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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A. 카슨의 하나님의 사랑 - 우리가 오해한 그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기 위하여
D. A. 카슨 지음, 황영광 옮김 / 죠이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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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모 대형교회가 벽에 써 붙이면서 더욱 유명해진 이 문구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오해된다. 당연히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분은 우리가 저지르는 모든 오류와 잘못을 언제나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다. 그러니 우리는 조금은 더 느슨해져도 된다.


이 책의 저자인 D. A. 카슨은 바로 그런 세간의 오해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몇 개의 강연을 모은 이 책의 원제목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난해한 교리(The Difficult Doctrine of the Love of God)”다. 흥미롭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교리가 어렵다니? 그건 너무나 단순하고 분명한 말 아닌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끝.


그러나 저자는 이 문제가 생각만큼 쉽지 않다고 지적한다. 우선은 우리 시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사랑의 개념이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고,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성경 속 하나님의 사랑이 한 가지 모습이 아니라는 데 있다. 저자는 성경에서 진술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표현에는 다섯 가지 유형(삼위의 내적 사랑, 창조세계 전반을 향한 섭리적 사랑,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사랑, 그분이 선택하신 이들, 즉 교회를 향한 사랑, 그리고 자기 백성들에 대한 조건적 사랑)이 있으며, 이들 유형이 서로 혼동될 때 우리는 신학적 오류에 빠져들고 만다고 지적한다.





그냥 쉬운 에세이 정도로 생각했지만, D. A. 카슨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 잠시 깜빡했다. 책의 후반부는 하나님의 공의, 주권, 심판, 징계 같은 주제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교리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에 관한 탐구다. 주된 논지는 앞서 언급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표현되는 대한 성경의 다섯 가지 유형에 따른 적절한 구분과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초반에 언급한 “결국 나를 사랑하시는 것 외에 다른 걸 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생뚱맞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는 저자가 학창시절 함께 했던 아프리카계 프랑스인 동료의 이중적 사고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고향에 아내가 있지만, 공부를 하러 온 독일에 와서 주말마다 매음굴을 찾아나섰다. 그게 과연 그의 기독교 신앙에 합당하느냐는 카슨의 질문에, 그가 한 대답은 “용서하시는 게 하나님의 일인 걸”이었다.


탁월한 복음주의 신학자인 저자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 결국 하나님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 수 없게 된다는 점을 제대로 짚어낸다. 특히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사이의 속죄의 범위에 대한 차이 역시 나름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까지 제안된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모든 사람에게 충분했고, 선택된 사람들에게 효과적”이었다는 것인데, 양측의 강경파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지만, 썩 나쁘지 않은 조화일 듯싶다.





사실 이런 신학적 이견보다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크게 와 닿는 부분은 역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성적이기만 한 접근이 아닐까 싶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사람의 행동에 매어 쩔쩔 매는 존재로 그려내는 이런 감성적인(종종 ‘영적’이거나 ‘초월적’이라는 미사여구가 붙기도 하는) 그림이야 말로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이단일 테니까.


아쉬운 부분은 이 주제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좀 더 많은 내용들을 다 포함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강연이라는 시간적 제한 때문으로 보이는데, 덕분에 후반부의 논의들은 좀 서둘러 지나간 듯한 느낌도 들고. 그래도 이 주제에 관해 꽤 흥미로운 책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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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자식들
노르베르트 레버르트 외 지음, 이영희 옮김 / 사람과사람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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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20세기 초중반 유럽 전체에 엄청난 피해를 안겨준 장본인이었다. 물론 이런 식의 민폐를 끼친 것이 독일 하나만은 아니었지만, 특히 제2차세계대전의 전범국으로서, 6백 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데 거의 전 국민이 직간접적으로 공모했던 인종학살 가해국으로서의 책임은 그 어떤 나라에 뒤지지 않는다.


전쟁이 끝난 후 수괴였던 히틀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그 수하에서 히틀러의 망상을 실행하는 데 기여했던 나치의 고위급 전범들은 재판에 넘겨져 심판을 받았다. 이 책은 그 1급 전범들의 자식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40년의 터울을 두고 아버지가 취재했던 내용을 아들이 다시 취재해 교차적으로 함께 엮은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들 전범의 자식들의 처지가 퍽 딱하다. 적어도 그들이 부모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더구나 전쟁 당시 그들의 나이는 어려서 직접적인 관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 그들을 낳아준 아버지에 대한 인간적인 정리 또한 쉽게 지울 수는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정은 딱 여기까지일 뿐이다. 그들은 나치가 유럽을 유린할 당시, 그들의 아비들이 수많은 국가로부터 강탈해 온 부를 누리며 즐거운 날들을 보냈다. 최소한 이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감은 느끼는 것이 인간다운 행동이 아닐까. 하지만 막상 취재를 해 보니 그들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치 초기의 친위대장이었던 루돌프 헤스의 아들은, 전범재판으로 종신형을 받고 수감생활 중인 아버지가 석방되지 않는 것에 대해 연합군측의 음모가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나아가 자신의 아버지가 ‘평화의 수호자’였다고 주장하면서 열렬한 히틀러 숭배자로 살았다. 심지어 유대인들이 가는 곳마다 핍박을 받은 걸 보면 애초에 그들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식의 피해자를 공격하는 언사까지.


나치의 도살자 힘러의 딸은 아버지의 이름을 딴 책을 써서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키겠다는 계획을 밝혔고, 결국 이 책은 쓰이지 않았지만, 대신 그녀는 “조용한 손길”이라는 나치를 돕는 단체에 소속되어 이제는 늙고 병든 전직 나치들의 삶을 보살피는데 참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네오나치주의자들의 정치집회에도 종종 참여하면서 자신의 몸에 흐르는 아버지의 피를 드러낸다.


나치의 2인자였던 괴링의 딸은 여전히 아버지를 경애하는 이들의 호의를 넘치게 받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나치의 만행에 대해 어떤 의견도 내지 않으면서, 자신에게 친절했던 아버지와 대부 히틀러에 관한 기억만을 낭만적으로 묘사한다. 심지어 나치의 찬양자였던 음악가 바그너의 후손들은 오늘날까지도 나치의 자식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준다고 하니 이 동네도 아주 개판이다.


물론 좀 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다. 히틀러의 문고리 권력자였던 마르틴 보어만의 큰아들은 가톨릭에 귀의해 신부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을 묵묵히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예는 소수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서술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아버지는 무엇보다 자신도 그 시절 나치의 열렬한 숭배자였다고 고백한다. 비록 나치가 패망할 때까지도 여전히 나이가 어려서 직접적으로 뭔가를 하지는 못했지만, 아마 몇 살만 더 먹었어도 기꺼이 기여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는 이들 나치의 자식들에 대해 조금은 연민이 담긴 태도로 묘사한다.


아들 역시 그런 아버지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이상, 이 문제를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쓰지는 않는다. 대신 그는 독일이라는 나라가 일종의 국가적 망각을 선택했다고 분석한다. 나치에 관한 기억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도, 말하지도 말자는. 대신 그들은 경제발전을 선택했고, 오늘날 유럽의 손꼽히는 경제선진국이 되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일까? 이런 선택은 독일인들을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 아들의 지적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독일 사람들은 그래도 나치의 만행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배상을 위한 노력을 해왔다는 평과는 사뭇 달라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대표적으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게토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비석 앞에 무릎을 꿇은 일에 관해서도 저자는 당시 서독은 국제거인 감시와 통제를 받고 있었기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그것이 진정한 사과는 아니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증거로 당시 서독 안에서조차 여전히 옛 나치의 동료들이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집단적인 수치심과 죄책감의 상실, 이건 오늘날 다시 떠오르는 네오나치들의 극우적 행태를 설명하는 중요한 포인트인 듯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 우리는 일제의 후예들과 당시 국내에서 호의호식하던 친일파의 후손들, 그 찬양자들이 여전히 이 나라 곳곳에서 떵떵거리며 성공가도를 달리는 모습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암살당한 일본 총리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는 잘 알려진 제2차세계대전의 일제 측 A급 전범이었다. 전범의 후손이 집권여당의 수장이 될 수 있는 게 일본이라는 나라의 본질이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김구와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떠드는 친일 어용학자들이 설치고, 그 중 일부는 정부 내각에도 들어가는 망조를 보이고 있다.


자신들의 만행을 끝없이 부정하는 일제의 자식들은 나치의 자식들이 보이는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과거를 미화하고, 온갖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보이지 않게 만들려고 애쓴다. 여기에 돈 몇 푼 쥐어주면 과거 피해자의 자식으로 가해자를 옹호하는 비렁뱅이들은 넘치고 넘친다.





문제 해결의 시작은 가해자들에 대한 냉혹하게 느껴질 정도의 단죄부터다. 이 작업이 선행되지 않으면, 이후 어떤 조치들도 이런 나치의 자식들, 일제의 찬양자들이 탄생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역시 나치의 전범이었던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까지 가서 납치해 와 결국 자국의 재판정에 세웠던(그리고 사형에 처했던) 이스라엘의 조치는 가혹해 보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해답이었다.


일제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대한민국의 초기 역사로 인해, 여전히 친일파들이 정재계에 발에 챌 정도로 깔려 있고, 반면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이들은 온갖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연히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도 쥐꼬리만 한 포상으로 가난한 삶을 전전하거나, 변절해 친일을 옹호하는 정치세력에 들어가 일신의 영달을 꾀하며 비루한 삶을 살아갈 뿐이다.


가혹할 정도의 패가망신이라는 단죄가 없다면, 우리는 이런 모습을 계속해서 반복해 보아야 할 뿐이다. 그들 당사자뿐 아니라 그들의 자식들도, 무슨 형사적 처벌이나 경제적 제한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 공무나 정치 같은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까지는 맡지 못하도록 하는 게 옳다. 연좌제라는 비판은 당시 고문과 죽음으로 내몰린 사람들 앞에 가서나 하라고 하자. 독립유공자의 후손에게 (쥐꼬리만 한) 혜택을 주는 게 문제가 없다면, 전범과 민족의 배반자들의 후손들에게 (고작) 작은 불이익을 주는 게 또 무슨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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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4-09-10 2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타고난 괴물이거나 의도된 인지부조화 상태가 아닌가 싶네요.
 


자유주의는 실패해왔다.

어딘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충실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성공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자유주의가 ‘더 완전’해질수록 자유주의의 내적 논리가 더 분명해지고,

자기모순이 더 드러날수록 자유주의 주장의 변질인 동시에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실현인 병폐들이 생겨났다.

공정성을 증진하고, 문화와 신념의 다원성을 옹호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자유를 확대하겠다던 정치철학이

실제로는 엄청난 불평등을 낳고, 균일성과 균질성을 강요하고,

물질적·정신적 퇴폐를 조장하고,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

패트릭 J. 드닌, 『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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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주의 완전한 딸이라 - 성경적 여성상의 허구를 버리고 복음적 자존감 갖기
강호숙.박유미 지음 / 홍성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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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사에서 꽤 이례적인 내용의 책이 나왔다. 페미니즘 신학을 전면에 내세운 두 명의 여성신학자들의 대화를 책으로 엮었다. 여기서 “여성신학자”란 “여성인 신학자”이기도 하지만, “여성신학을 주장하는 학자”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여성신학”은 기본적으로 세속적 페미니즘의 전제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애초에 남성에 비해 각종 법적 권리(대표적으로 투표권)가 제한되던 여성들의 권리를 신장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운동이었던 페미니즘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전장을 크게 넓혔다. 이제 법적으로는 어느 정도 남녀의 차별이 철폐되어가는 상황에서, 사회 전반의 문화와 의식까지 영향력을 끼치려 시도하는, 나름 그쪽 섹터에서 강한 강령을 제시하는 이념이 되었다.


사실 최근의 페미니즘은 일체의 권위에 대한 부정을 특징으로 하는 신좌파 운동의 한 흐름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물론 이즈음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다양한 분파들로 나뉘어져 있어서, 사실상 그 이름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이지 않는 면도 있다. 가장 단순하게 남녀평등, 성차별의 시정을 요구하는 운동을 페미니즘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막상 그 안으로 들어가서 다양한 주장들을 검토하다보면 이 목표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또 그 근본 전제에서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페미니즘에 기초한 신학은 시작부터 분파성이 강한 신학이다. 흑인신학이나 해방신학처럼, 그건 처음부터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 신학이다. 물론 그것이 나오게 된 계기를 살펴보면 공감이 되는 바가 없진 않지만, 이런 식의 접근은 시간이 갈수록 그 주장이 과격해지면서 자체고립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유의해야 할 듯하다.





책 전반에 걸쳐 교회 내 여전히 남아있는 차별적인 시선들, 특히나 여성의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과 제한에 관한 비판이 자주 등장한다. 단적으로 몇몇 보수적 주요 교단들에서는 여성들이 목사로 임직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으며, 교회 내 의사결정의 대표자인 장로가 될 수 있는 자격도 주어지지 않는다. 성경의 몇몇 간접적인 구절이 그 근거로 제시되지만, 성경이 가지고 온 여성해방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또 다른 (간접적인) 구절들은 무시된다는 게 문제다.


너무나 당연하게 이 책의 저자들은 성경 속 여성 리더십을 강조하는 구절들을 반론의 증거로 제기하려고 시도한다. 물론 이들 역시 사라가 남편인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부르며 순종함으로 칭찬을 받았다는 구절(벧전 3:6)은 인용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교회의 직분이란 성별이 아니라 그 일을 맡을 수 있는 은사가 있느냐에 따라 맡겨지는 게 성경적이라고 본다. 성경에 노예의 존재가 인정된다고 해서 우리가 노예를 소유하거나 부리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듯이, 제한적인 구절에서 장로의 조건으로 ‘남편’(딛 1:6)을 꼽고 있다고 해서 장로를(그리고 장로 중 하나인 목사를) 남성만이 맡아야 한다고 볼 필요는 없다. 그리고 애초에 성경 시대의 ‘장로’와 오늘날 교회에서 통용되는 ‘장로’는 그 역할과 지위 자체가 다르기도 하다.





이 외에도 저자들이 신학교나 교회에서 겪었던, 여성에 대한 저열한 공격이나 낮춰보는 시선들은 분명 시정되어야 마땅하다. 그건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그분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인간 본질에 관한 성경의 대전제에도 어긋나는 행태다.


저자들은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강호숙 쪽이 상대적으로 좀 더 세게 느껴진다), 공히 이 문제를 ‘가부장적 문화’의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성경 안에서도 발견된다고도 한 발 더 나아간다. 자, 성경 속 진술에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보수적 신학교에서 공부한 저자들은 아예 성경 텍스트 자체를 편집하거나 부정하는 데까지 언급하지는 않지만, 대신 ‘여성적 관점’에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우리는 성경 속에서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명령들을 만날 때, 예를 들면 앞서 언급한 노예제를 용인하는 것 같은 구절들을 만날 때, 그 기록이 쓰였을 당시의 사회적 맥락을 고려해 이해하고자 한다. 이런 접근은 기독교를 단순히 수천 전의 율법을 그대로 준수하는 율법종교로 전락하지 않게 만들어 준다.


우리는 여성의 권익을 심각하게 차별하는 것으로 보이는 관행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도 있다.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구절(고전 14:34)은 바울과 고린도교회 사이에서 주고받은 편지에 나오는 기록이다. 편지는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공유하는 현실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바울의 권고는 당시 고린도교회의 상황에 대한 조언으로 읽으면 되지, 여성의 목회자 자격을 거부하는 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바로 앞에 나오는 방언과 예언에 관한 바울의 권고(“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 방언하지 말라” 고전 14:28)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들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쉽게 허용하는 상황을 고려하면 더더욱 이중적인 잣대다.


어떻게 보면 여성적 관점으로 성경을 읽는 것도 이와 비슷한 접근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그게 여성이든 흑인이든, 민중이든 특정한 통 속 구멍으로만 세상을 읽으려 하면 굉장히 시야가 좁아진다는 점이다. 이른바 ‘정체성 정치’에 입각해서, 특정한 정체성이 전체를 읽어내는 키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방식은 갈등과 상호혐오만을 유발시키는 결과로 끝난다는 것이 거의 전 세계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굳이 그렇게 큰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하나의 주제로 성경 전체를 읽어나갈 때 우리는 수많은 구절들이 무시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게 성경을 바르게 읽는 태도일까?





옥스퍼드의 최초 여성 학위자이기도 했던 도로시 세이어즈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우리는, 범주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존재할 뿐 그 목적이 다하면 바로 버려야 한다는 사실은 잊은 채, 사람을 고정된 범주로 분류하려는 경향이 너무 강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근본적 차이가 있지만, 세상에서 근본적 차이란 그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나이는 성차만큼 근본적입니다. 국적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범주는 그것이 필요한 직접적 목적을 넘어서까지 강조되면 그룹들 사이의 반목을 형성하고 국가의 분열을 가져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한 것입니다.”


그녀의 시대로부터 거의 한 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이런 범주오류에서 벗어나는 건 쉽지 않은 듯하다. 여성의 권리주장을 조금이라도 부정하는 구절을 성경에서 지우려는 태도가, 여성은 곧 옳다는 식의 주장으로 넘어가는 데는 그리 오래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이미 페미니즘 일각에서는 여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런 세계에서는 순종과 양보, 인내라는 용기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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