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주의 완전한 딸이라 - 성경적 여성상의 허구를 버리고 복음적 자존감 갖기
강호숙.박유미 지음 / 홍성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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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사에서 꽤 이례적인 내용의 책이 나왔다. 페미니즘 신학을 전면에 내세운 두 명의 여성신학자들의 대화를 책으로 엮었다. 여기서 “여성신학자”란 “여성인 신학자”이기도 하지만, “여성신학을 주장하는 학자”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여성신학”은 기본적으로 세속적 페미니즘의 전제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애초에 남성에 비해 각종 법적 권리(대표적으로 투표권)가 제한되던 여성들의 권리를 신장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운동이었던 페미니즘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전장을 크게 넓혔다. 이제 법적으로는 어느 정도 남녀의 차별이 철폐되어가는 상황에서, 사회 전반의 문화와 의식까지 영향력을 끼치려 시도하는, 나름 그쪽 섹터에서 강한 강령을 제시하는 이념이 되었다.


사실 최근의 페미니즘은 일체의 권위에 대한 부정을 특징으로 하는 신좌파 운동의 한 흐름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물론 이즈음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다양한 분파들로 나뉘어져 있어서, 사실상 그 이름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이지 않는 면도 있다. 가장 단순하게 남녀평등, 성차별의 시정을 요구하는 운동을 페미니즘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막상 그 안으로 들어가서 다양한 주장들을 검토하다보면 이 목표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또 그 근본 전제에서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페미니즘에 기초한 신학은 시작부터 분파성이 강한 신학이다. 흑인신학이나 해방신학처럼, 그건 처음부터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 신학이다. 물론 그것이 나오게 된 계기를 살펴보면 공감이 되는 바가 없진 않지만, 이런 식의 접근은 시간이 갈수록 그 주장이 과격해지면서 자체고립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유의해야 할 듯하다.





책 전반에 걸쳐 교회 내 여전히 남아있는 차별적인 시선들, 특히나 여성의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과 제한에 관한 비판이 자주 등장한다. 단적으로 몇몇 보수적 주요 교단들에서는 여성들이 목사로 임직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으며, 교회 내 의사결정의 대표자인 장로가 될 수 있는 자격도 주어지지 않는다. 성경의 몇몇 간접적인 구절이 그 근거로 제시되지만, 성경이 가지고 온 여성해방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또 다른 (간접적인) 구절들은 무시된다는 게 문제다.


너무나 당연하게 이 책의 저자들은 성경 속 여성 리더십을 강조하는 구절들을 반론의 증거로 제기하려고 시도한다. 물론 이들 역시 사라가 남편인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부르며 순종함으로 칭찬을 받았다는 구절(벧전 3:6)은 인용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교회의 직분이란 성별이 아니라 그 일을 맡을 수 있는 은사가 있느냐에 따라 맡겨지는 게 성경적이라고 본다. 성경에 노예의 존재가 인정된다고 해서 우리가 노예를 소유하거나 부리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듯이, 제한적인 구절에서 장로의 조건으로 ‘남편’(딛 1:6)을 꼽고 있다고 해서 장로를(그리고 장로 중 하나인 목사를) 남성만이 맡아야 한다고 볼 필요는 없다. 그리고 애초에 성경 시대의 ‘장로’와 오늘날 교회에서 통용되는 ‘장로’는 그 역할과 지위 자체가 다르기도 하다.





이 외에도 저자들이 신학교나 교회에서 겪었던, 여성에 대한 저열한 공격이나 낮춰보는 시선들은 분명 시정되어야 마땅하다. 그건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그분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인간 본질에 관한 성경의 대전제에도 어긋나는 행태다.


저자들은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강호숙 쪽이 상대적으로 좀 더 세게 느껴진다), 공히 이 문제를 ‘가부장적 문화’의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성경 안에서도 발견된다고도 한 발 더 나아간다. 자, 성경 속 진술에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보수적 신학교에서 공부한 저자들은 아예 성경 텍스트 자체를 편집하거나 부정하는 데까지 언급하지는 않지만, 대신 ‘여성적 관점’에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우리는 성경 속에서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명령들을 만날 때, 예를 들면 앞서 언급한 노예제를 용인하는 것 같은 구절들을 만날 때, 그 기록이 쓰였을 당시의 사회적 맥락을 고려해 이해하고자 한다. 이런 접근은 기독교를 단순히 수천 전의 율법을 그대로 준수하는 율법종교로 전락하지 않게 만들어 준다.


우리는 여성의 권익을 심각하게 차별하는 것으로 보이는 관행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도 있다.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구절(고전 14:34)은 바울과 고린도교회 사이에서 주고받은 편지에 나오는 기록이다. 편지는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공유하는 현실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바울의 권고는 당시 고린도교회의 상황에 대한 조언으로 읽으면 되지, 여성의 목회자 자격을 거부하는 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바로 앞에 나오는 방언과 예언에 관한 바울의 권고(“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 방언하지 말라” 고전 14:28)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들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쉽게 허용하는 상황을 고려하면 더더욱 이중적인 잣대다.


어떻게 보면 여성적 관점으로 성경을 읽는 것도 이와 비슷한 접근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그게 여성이든 흑인이든, 민중이든 특정한 통 속 구멍으로만 세상을 읽으려 하면 굉장히 시야가 좁아진다는 점이다. 이른바 ‘정체성 정치’에 입각해서, 특정한 정체성이 전체를 읽어내는 키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방식은 갈등과 상호혐오만을 유발시키는 결과로 끝난다는 것이 거의 전 세계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굳이 그렇게 큰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하나의 주제로 성경 전체를 읽어나갈 때 우리는 수많은 구절들이 무시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게 성경을 바르게 읽는 태도일까?





옥스퍼드의 최초 여성 학위자이기도 했던 도로시 세이어즈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우리는, 범주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존재할 뿐 그 목적이 다하면 바로 버려야 한다는 사실은 잊은 채, 사람을 고정된 범주로 분류하려는 경향이 너무 강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근본적 차이가 있지만, 세상에서 근본적 차이란 그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나이는 성차만큼 근본적입니다. 국적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범주는 그것이 필요한 직접적 목적을 넘어서까지 강조되면 그룹들 사이의 반목을 형성하고 국가의 분열을 가져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한 것입니다.”


그녀의 시대로부터 거의 한 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이런 범주오류에서 벗어나는 건 쉽지 않은 듯하다. 여성의 권리주장을 조금이라도 부정하는 구절을 성경에서 지우려는 태도가, 여성은 곧 옳다는 식의 주장으로 넘어가는 데는 그리 오래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이미 페미니즘 일각에서는 여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런 세계에서는 순종과 양보, 인내라는 용기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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