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외에도 저자들이 신학교나 교회에서 겪었던, 여성에 대한 저열한 공격이나 낮춰보는 시선들은 분명 시정되어야 마땅하다. 그건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그분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인간 본질에 관한 성경의 대전제에도 어긋나는 행태다.
저자들은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강호숙 쪽이 상대적으로 좀 더 세게 느껴진다), 공히 이 문제를 ‘가부장적 문화’의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성경 안에서도 발견된다고도 한 발 더 나아간다. 자, 성경 속 진술에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보수적 신학교에서 공부한 저자들은 아예 성경 텍스트 자체를 편집하거나 부정하는 데까지 언급하지는 않지만, 대신 ‘여성적 관점’에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우리는 성경 속에서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명령들을 만날 때, 예를 들면 앞서 언급한 노예제를 용인하는 것 같은 구절들을 만날 때, 그 기록이 쓰였을 당시의 사회적 맥락을 고려해 이해하고자 한다. 이런 접근은 기독교를 단순히 수천 전의 율법을 그대로 준수하는 율법종교로 전락하지 않게 만들어 준다.
우리는 여성의 권익을 심각하게 차별하는 것으로 보이는 관행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도 있다.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구절(고전 14:34)은 바울과 고린도교회 사이에서 주고받은 편지에 나오는 기록이다. 편지는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공유하는 현실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바울의 권고는 당시 고린도교회의 상황에 대한 조언으로 읽으면 되지, 여성의 목회자 자격을 거부하는 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바로 앞에 나오는 방언과 예언에 관한 바울의 권고(“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 방언하지 말라” 고전 14:28)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들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쉽게 허용하는 상황을 고려하면 더더욱 이중적인 잣대다.
어떻게 보면 여성적 관점으로 성경을 읽는 것도 이와 비슷한 접근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그게 여성이든 흑인이든, 민중이든 특정한 통 속 구멍으로만 세상을 읽으려 하면 굉장히 시야가 좁아진다는 점이다. 이른바 ‘정체성 정치’에 입각해서, 특정한 정체성이 전체를 읽어내는 키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방식은 갈등과 상호혐오만을 유발시키는 결과로 끝난다는 것이 거의 전 세계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굳이 그렇게 큰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하나의 주제로 성경 전체를 읽어나갈 때 우리는 수많은 구절들이 무시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게 성경을 바르게 읽는 태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