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의 서술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아버지는 무엇보다 자신도 그 시절 나치의 열렬한 숭배자였다고 고백한다. 비록 나치가 패망할 때까지도 여전히 나이가 어려서 직접적으로 뭔가를 하지는 못했지만, 아마 몇 살만 더 먹었어도 기꺼이 기여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는 이들 나치의 자식들에 대해 조금은 연민이 담긴 태도로 묘사한다.
아들 역시 그런 아버지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이상, 이 문제를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쓰지는 않는다. 대신 그는 독일이라는 나라가 일종의 국가적 망각을 선택했다고 분석한다. 나치에 관한 기억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도, 말하지도 말자는. 대신 그들은 경제발전을 선택했고, 오늘날 유럽의 손꼽히는 경제선진국이 되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일까? 이런 선택은 독일인들을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 아들의 지적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독일 사람들은 그래도 나치의 만행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배상을 위한 노력을 해왔다는 평과는 사뭇 달라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대표적으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게토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비석 앞에 무릎을 꿇은 일에 관해서도 저자는 당시 서독은 국제거인 감시와 통제를 받고 있었기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그것이 진정한 사과는 아니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증거로 당시 서독 안에서조차 여전히 옛 나치의 동료들이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집단적인 수치심과 죄책감의 상실, 이건 오늘날 다시 떠오르는 네오나치들의 극우적 행태를 설명하는 중요한 포인트인 듯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 우리는 일제의 후예들과 당시 국내에서 호의호식하던 친일파의 후손들, 그 찬양자들이 여전히 이 나라 곳곳에서 떵떵거리며 성공가도를 달리는 모습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암살당한 일본 총리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는 잘 알려진 제2차세계대전의 일제 측 A급 전범이었다. 전범의 후손이 집권여당의 수장이 될 수 있는 게 일본이라는 나라의 본질이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김구와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떠드는 친일 어용학자들이 설치고, 그 중 일부는 정부 내각에도 들어가는 망조를 보이고 있다.
자신들의 만행을 끝없이 부정하는 일제의 자식들은 나치의 자식들이 보이는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과거를 미화하고, 온갖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보이지 않게 만들려고 애쓴다. 여기에 돈 몇 푼 쥐어주면 과거 피해자의 자식으로 가해자를 옹호하는 비렁뱅이들은 넘치고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