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이미지는 백두산 화산 폭발과 그 피해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중심에 둔 일종의 재난 영화가 아닌가 싶었다. 사실 영화의 첫장면은 화산 분화의 파괴력에 대한 묘사로 시작하는데, 마치 게임 트레일러 영상을 보는 듯한 긴박감을 주긴 한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 완성도에 실망하기도 하더라

 

     하지만 정작 영화는 비핵화 국면에서의 남북미의 다른 정치적 입장과 그 안에서 자신의 가족을 지키려는 인물들 사이의 대립과 협력이 주가 된다. 여기에 주인공들(과 영화 속 주변인들)이 다 군인인지라 총격전도 적지 않게 등장하고, 화산 폭발을 막기 위한 핵심적인 북측 키맨인 리준평(이병헌)의 속내가 시종일관 의심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진다는 점에서 스릴러적 요소도 살짝 보인다. 시도 때도 없는 로맨스가 빠진 것은 다행이지만, 전반적으로 정작 화산 폭발이라는 블록버스터적 요소가 점점 주변부로 밀려나는 느낌이랄까.

 

 

 

     네이버에는 왜 북한은 선이고 미국은 악이냐고 빽빽거리는 한줄평이 도배되어 있지만(이 정도 별점 테러면 또 어디서 나사 빠진 인간들이 집단으로 달려든 느낌이다), 그 정도로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며 살면 주변 사람을 좀 힘들게 할 듯싶을 수준의 주장이다. 한반도에서 미국이 결국 자국에 유리한 방식의 외교적, 군사적 결정을 하게 될 것임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애초에 영화 속 화산 폭발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작전 자체가 갖는 민감한 성격을 묘사하기 위한 장면이었을 뿐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사실상 정치영화적 속성을 보여준다. 백두산 화산 폭발이라는 전대미문의 재앙을 앞에 두고, 관련된 네 개 나라(대한민국, 북한, 미국과 중국)의 입장이 엇갈리면서 충돌하는 과정이 흥미롭게 그려진다. 아마 현실에서는 여기에 일본과 러시아 정도가 더 숟가락을 얹으려고 하지 않을까. 다만 이 과정이 충분히 친절하게 설명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한 소리 들을 만하겠지만.

 

     또 한 가지 문제는, 그렇게 정치 이야기, 또 가족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동안, 정작 기대했던 화산 폭발과 관련된 영상은 생각만큼 제대로 그려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굴러다니는 돌덩이 몇 개나 컴퓨터 모니터 속 수치 정도로 설명될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이 정도의 폭발이 전조도 전혀 없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발생할 수 있는 건지 싶기도 하고

 

.

 

     밸런스를 좀 더 잡았더라면 괜찮은 오락 영화가 되었을 텐데 싶은 영화. 특히 영화 제목이기도 한 백두산의 모습에 좀 더 공을 들였더라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트루먼 쇼 - [할인행사]
피터 위어 감독, 에드 해리스 외 출연 / 파라마운트 / 200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너무나도 많이 알려져서, 영화를 직접 보지 않았더라도 대략적인 내용을 알고 있을 만한 영화인 트루먼 쇼. 한 섬을 무대로 삼아, 주인공 트루먼의 출생부터 성장, 결혼과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과정을 실시간 방송 프로그램으로 만든다는 스토리다. 주인공의 삶은 철저하게 세트 안에서 살도록 유도되고, 혹 미리 세팅된 상황을 벗어나려고 하면 제작진의 개입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이 개입이라는 게 꽤나 살벌해서, 종반부에는 폭풍을 일으켜 배를 뒤엎기까지 한다

 

 

 

 

     모든 종류의 작품들이 그러하듯, 이 작품 역시 20년 전 처음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기발한 아이디어쪽에 좀 더 비중을 두고 즐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안에 담긴 메시지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처음에는 저런 일이 어디 있어싶었던 상황이지만, 어느 샌가 우리는 몇 초마다 한 번씩 온갖 카메라에 찍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

 

     물론 또 한 편으로는 각종 SNS의 발달로 영화 속 트루먼과 같은 고립된 상황에는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장 중국이나 일본만 하더라도 진실에 눈을 뜨지 못하도록 하는 대규모의 정보통제와 조작들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니 안심하기엔 이르다. 이미 우리는 크고 작은 여론 조작에 휩쓸리는 대규모의 무리들을 보는 게 익숙해졌다. 말하자면 시대를 앞서간 영화랄까.

 

 

 

 

     비단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이들에 의한 조작이 아니라도, 우리는 얼마든 다른 사람의 삶을 우리의 뜻대로 조종하고 싶은 욕구를 가질 수 있다. 사실 영화에서 가장 끔찍했던 부분은, 트루먼의 삶을 브라운관으로 보며 울고 웃으면서도 대다수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늙은 노인 자매들도, 일본의 가족들도, 평범한 경비원들도... 

 

     ​무서운 건 매우 자주 그런 식의 조작 충동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너를 내가 사랑하는(즐기는) 대가로 뭔가를 얻고 있으니, 너에게 내가 무슨 욕을 해도 그건 감당해야 한다는 식의 헛소리도 비슷한 사고구조다. 내가 어떤 이를 사랑하는 건 그를 위해 나를 내어준다는 것이지, 나를 위해 그를 이용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우리의 삶이 누군가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준다는 건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걸 위해 진실에 눈을 감거나, 망상에 빠져 머무는 건 악한 일이다. 문제는 오늘날 대중문화를 통해 값싸게 뿌려지는 많은 즐거움들이 (영화에서처럼) 이런 식의 망상과 조작된 관계를 유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문화에 오래 빠져 있을수록, 우리는 좀 더 자극적이고, 좀 더 즉각적이고, 좀 더 강렬한 관계를 찾아 헐떡이게 될 것이다. 사람을 도구로 전락시키는 악한 문화에 우리는 저항해야 한다. 반대로, 진실하고 정직한 삶을 통해 전해지는 기쁨은 느리고, 은은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건 좋은 차()의 향기가 오래 남는 것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는 기쁨을 줄 것이고.(우리 사회는 이런 종류의 기쁨을 거의 잊어버린 듯하다)

 

     제대로 된 관계는 조작과 통제가 아니라, 진실과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들은 거짓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린 시절부터 바둑에 재능이 있었던 주인공 귀수(권상우), 자신을 무료로 가르쳐주겠다는 제안을 하며 누나를 성폭행한 당대 최고수 황도경(정인겸)에게 복수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 그 중심에는 바둑, 그 중에서도 내기 바둑이 놓여 있었다.

 

    ​ 우연히 만난 허일도(김성균)와의 수련으로 엄청난 고수가 된 후, 전국의 내기 바둑 고수들을 도장깨기하는 장면이 극의 중반을 이룬다. 1100의 대결을 펼쳐 자신이 한 번이라도 이기지 못하면 패하는 것으로 하겠다고 황도경에게 도전하는 내용이 결말부.

 

 

 

 

 

      우선 참 보고 있는 게 힘들었던 영화다. 바둑을 중심 소재로 삼긴 했는데, 바둑 자체보다는 웬 잡기들이 난무하면서 영화를 산으로 끌고 올라간다. 차라리 여러 캐릭터들이 특성을 가지고 협력한다는 1편의 설정이 훨씬 나아 보였는데, 그 모든 것을 한 사람에게 집약시키자 이건 그냥 만화 같은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또 이 사이에 여기저기에서 본 듯한 클리셰들이 잔뜩 끼어들어 영화를 산만하게 만드는 건 덤.

 

     1편의 주인공인 정우성이 권상우로 교체된 부분도(물론 이야기 자체가 다르긴 하지만) 살짝 우려스러웠는데, 앉아서 바둑을 두는 것보다 피지컬 트레이닝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 듯한 모습을 보며 (물론 영화를 보면 그 정도 트레이닝을 안 하면 감당이 안 될 정도의 사건들이 일어나긴 한다) 실소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나름 이름깨나 있는 배우들이 B급 정서의 영화에 출연하는 일 자체는 뭐 이상하지 않지만, 그냥 B급 영화가 되어버렸다면 누군가는 책임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렌델 왕국의 여왕으로 다스리고 있던 엘사에게 어느 날부터 이상한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자신도 모르는 새 그 목소리를 따라가기 시작한 엘사. 엘사가 목소리에 반응하자 곧 왕국에는 재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숨겨진 과거를 찾아 깊은 숲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는 이야기.

 

     어느덧 디즈니의 대표 애니메이션이 되어 후속작까지 제작된 영화. 페미니즘이 화두가 된 시점에 발맞추기 위해선지, 주인공도, 주요 도움이 되는 조연도 모두 여성이고, 나머지 주요 조연인 남성(크리스토프)는 시종일관 살짝 나사가 빠져 있는 모양새다. 심지어 순록에게도 밀릴 정도의 판단력이니... 여성도 할 수 있고, 여성으로도 충분하다는 메시지일까.(참고로 이 메시지 자체는 옳고, 백번 동의한다)

 

 

 

 

 

     애초에 아동을 대상으로 한 작품인지라, 귀여운 모습의 캐릭터들이 눈을 끈다. 너무 어른스럽지 않은 애니메이션도 나쁘지 않다. 엘사가 사용하는 얼음 마법은 기발하기도 했고(특히 막판에 등장하는 물 말을 얼음 말로 변신시키는 모습 같은), 시각적으로도 아름답다.

 

     ​다만 1편을 보지 않은 나도 알 정도로 유명했던 “Let it go” 같은 인상적인 노래는 잘 들리지 않았다. 주요 장면들이 뮤지컬처럼 연출되어 있는 영화여선지 가사들이 스토리와 관련되어 있는데, 그게 또 썩 잘 연결되는 느낌도 아니었고. 특히 크리스토프의 단독 노래 장면은 그 애절한 가사에도 불구하고 전혀 상황 파악이 안 된 상태인 캐릭터 때문인지 생뚱맞게 들릴 정도였다.

 

 

 

 

     영화 속 문제의 핵심에는 거대한 댐 건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댐은 더 많은 사람들과 땅을 지배하려는 탐욕과 그대로 연결된다.(문득 강바닥을 파고 보를 쌓는데 수 조원을 썼던 어떤 사람이 떠올랐다) 누군가는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더 큰 사건을 벌이지만, 아무리 튼튼하게 만들어진 댐도 결국 물의 힘을 이기지 못하듯(끊임없는 보강, 보수 공사를 하지 않으면 결국 무너진다) 감춰진 비밀도 결국 드러나게 된다.

 

     현실 속 댐과 같은 것들도 언젠가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 당장은 가진 힘으로 약자를 억누르고, 진실을 묻어버리는 이들의 지배가 영원할 것 같아도,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의 힘은 결국 그 둑을, 보를, 댐을 무너뜨리고 말 것이다. 여기에 필요한 건 엘사의 마법이 아니라, 욕심이 아닌 진실을 향한 의지와 어두운 현실 너머를 볼 수 있는 굳은 소망이다. 부디 우리가 그 날을 볼 수 있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수년 째 고시공부를 해왔지만 좀처럼 합격하지 못하고 있는 자영(최희서)의 삶은, 좁은 원룸이 어지러워지는 것처럼 서서히 망가지고 있었다. 마침내 시험을 포기하고 남자친구와도 이별한 자영은 한강 둔치에서 캔맥주를 마시려다가 열심히 달리고 있는 현주(안지혜)를 만난다

 

     자영의 시선을 대신하는 카메라는 현주의 탄탄한 몸매를 따라 훑어간다. 비단 이 부분만이 아니라, 감독은 영화 내내 여성 캐릭터들의 몸매를 카메라로 훑는데(참고로 감독도 여자다), 이 시선의 의미가 뭔지 정확히 와 닿지 않는다. 그게 건강함에 대한 동경인지, 성적 판타지인지...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 애매함이 단지 몇몇 장면에 그치는 게 아니라 영화 전반에 걸쳐 묻어나오고 있음이 점점 분명해진다.

 

 

 

 

 

     단순히 시놉시스만 보면, 좌절할 만한 상황에 처한 주인공이 운동을 통해 서서히 몸을 세워나가면서 점차 삶을 보는 관점도 건강하게 변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을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렇게 이해될 만한 부분도 있다. 달리기를 통해서, 영화 초반의 둔한 모습을 탈피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무엇보다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장면에서도 조금씩 자신감이 생긴다.

 

     하지만 주인공이 처한 현실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보러간 면접도 쉽지 않았고, 친구의 도움으로 늦은 나이에 시작한 인턴생활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여기에 극중 현주의 죽음 이후 자영이 보인 돌발행동은 그녀가 처한 상황을 더욱 꼬이게 만들기만 한다.

 

     그런데 그 돌발행동은 하나로 그치지 않았고, 영화의 종반부에서 자영은 현주와 우울감에 빠진 현주와 했던 대화 속 바람을 이루기 위해 또 다른 충동적 행동을 취한다. 그 소원이라는 게 최고급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마음껏 성관계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는데, 이 허탈한 소원은 또 남자가 아닌 자영의 자위로 묘사되기만 한다. 이쯤 되면 뭔가 밝고 명랑한 희망을 발견하기 위해 영화를 보려고 한 사람은 혼란에 빠질 뿐.

 

 

 

 

     영화의 제목인 아워 바디(Our Body)'가 새삼 의미심장해 보인다. 일반적으로 영어에서 our라는 표현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우리 몸이 되겠지만, 일반적인 대상을 두루 이르는 표현으로서의 우리와 좀 더 구체적인 대상을 특정하는 느낌이 강한 ’our'는 정확히 동일한 단어가 아니다.

 

     ​영화 속 아워 바디가 가리키는 대상은 뭘까? 우선 주인공인 자영의 몸을 가리킨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분명 그녀의 몸은 변화를 경험하니까. 여기에 그녀의 몸과 묶여 'our'라는 단어를 형성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몸은 현주의 몸이다. 영화 시작부터 계속 카메라로 훑던 그 몸 말이다. 두 사람이 친해진 후, 현주는 자영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데, 집이 덥다며 겉옷을 모두 벗어버리며 속옷 차림이 된다. 자영은 놀라면서도 그런 현주의 몸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한다

 

     ​어쩌면 그 순간 두 사람의 몸은 하나가 되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후에 자영이 회사에서 충동적인 사건을 저지를 때, 그녀는 죽은 현주가 바랐던 소원을 자신의 것인 양 실행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자영의 마지막 자위장면은, 이제 두 사람(여자)의 몫()으로 살아가고 있음을(그래서 다른 사람이 필요 없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약간 억지 해석처럼 보이기도 한데, 맞다, 영화가 이런 식의 말을 하려고 했다면 억지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순간 멍해지는 영화. 내가 뭘 본 걸까 싶은 생각에. 그 와중에 한강변의 조망은 쓸 데 없이 예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