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영화는 대개 심각하고 침울한 분위기인 경우가 많지만, 이 영화는 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다. 사실 주연인 조정석, 윤아 자체가 눈물을 쏙 빼거나 긴장감이 들게 만드는 배우들은 아니니까. 감독은 상황에서 탈출하는 과정을 마치 캐주얼한 게임을 진행하듯 가볍게 그리고 있다. 여기에 두 배우를 중심으로 틈이 날 때마다 주고받는 유머가 더해지면, 적당히 즐길 수 있는 장르의 영화가 나온다.

 

     ​몇 년 전부터 지진이나 태풍 같은 자연재해는 물론, 각종 대형 사고들이 일어나면서 주로 심야시간에 재난시 대처요령을 담은 프로그램들이 여러 채널을 통해 송출되고 있다. 물론 대개는 내레이션과 함께 연기자들이 대처방법을 연기하는 재미없는 방식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걸 갖고 재난대비 교육을 하면 되겠다 싶은 것.

 

     ​화재 시 탈출구가 될 수 있는 옥상의 문을 잠가두는 것은 일단 소방법 위반인 상황이고, 위기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할 책임자가 나 몰라라 자기 혼자 도망가는 상황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 외에 재난 시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의 안내방송을 잘 듣고 다음 행동을 결정한다든지, 유독가스에 노출된 사람을 어떻게 구호조치를 해야 하는지, 방독면의 한계 사용 시간 등등 예비군 훈련 때 틀어주면 딱 좋겠다 싶은 영화.

 

 

 

 

 

     ​변변한 직장도 없이 집안의 애물단지 처지인 주인공 용남이 가진 유일한 특기는 대학교 동아리에서 배웠던 암벽등반 기술뿐이었다. 영화 속 대사 가운데는 왜 하필 그런 쓸 데 없는 동아리에 들어갔느냐는 핀잔까지 있을 정도. 이 말에는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동아리 활동은 쓸 데가 없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하긴 요새 몰리는 동아리는 공무원시험이나 입사시험이나 영어자격을 위한 스터디 모임 같은 것들이니.

 

     모든 것을 돈을 벌기 위한 과정으로 만들어버리는 자본주의의 속성은 이런 농담 속에서도 묻어나온다. 그냥 일찌감치 모든 사람을 부유하게 만들어준다는 비전은 거짓으로 드러났고, 도리어 이제 모두를 돈에 매인 노예로 전락시킨 체제는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특히나 오늘날의 돈 버는 기술이란 더 이상 무엇인가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금융기술을 이용한 타이밍 싸움, 혹은 토지와 같이 대체재가 없는 것들을 대상으로 한 투기처럼 진정한 생존에는 아무 짝에도 필요 없는 것들이다.

 

     영화는 그렇게 무시 받던 재주가 모두를 구하는 존재가 된다는 미운 오리새끼의 서사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물론 실제 삶 가운데서 그런 미운오리들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가끔 보이더라도 금세 눈앞에서 사라져버리기도 하고. 수많은 미운 오리들이 큰돈은 벌지 못하더라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세상이 진짜 좋은 세상이 아닐까. 암벽 등반이면 어떻고, 독서나 수영이면 어떤가.

 

 

 

 

 

     ​딱 편하게 볼 수 있는 명절용 오락영화. 꼭 암벽등반 같은 기술이 아니라도, 구급법과 같이 자신과 옆에 있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최소한의 응급조치법은 알아두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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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 기지에 DHLSUBWAY 매장이 생긴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오래 전 태양계 외곽의 지적생명체를 찾기 위해 탐사에 나섰다가 사라졌던 아버지를 찾아가는 아들의 이야기. 아빠 찾아 삼만 리에는 예기치 못했던 사건들과 위기들, 역경 극복이 있다. 사실 영화의 성격이 정확히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이 역경이 어떤 종류의 것일지 궁금함이 컸고, 주인공의 아버지에게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최종적인 의문지점이었다.

 

     결국 영화의 종반부에서 이런 의문에 대해서는 나름 성실하게 답을 해주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질문들도 있다. 도대체 그 강력한 전자폭풍인 써지는 어떻게 만든 건지, 그리고 정말 주인공의 아버지가 발생시킨 건가 같은

 

     ​물론 영화는 그런 기술적인 문제보다는 아버지를 잃은 아들의 심리, 그리고 가족을 포기한 채 먼 우주로 나가 돌아오려 하지 않는 아버지의 심리를 다루는 데 좀 더 치중한다. 다만 태양계 끝자락 그 먼 곳까지 가서 나누는 부자(父子) 사이의 대화는 특별히 새로울 것도, 신기한 것도 없었다. 좀처럼 말이 통하지 않는 고집불통의 노인과 아버지의 큰 그늘에 가려 살짝 눌린 아들의 모습.

 

 

 

 

 

     영화를 보면서 몇 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우선 주인공이 우주여행을 하는 내내 계속해서 확인받는 심리테스트. 주인공은 그 때마다 아마도 맥박을 체크하는 패치를 목에 붙이고는 몇 가지 질문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진술한다. 테스트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늘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해야하는 것 같다. 흥미로운 부분은 주인공의 대답들을 쭉 읽어봐도 내용상의 어떤 일관성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점이다. 단순히 심리적 중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평정심 자체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는 것.

 

     ​내용보다 태도가 중요시 되는 현실은, 내용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만이 의미가 있다는, 극단적인 주관주의를 보여주는 듯하다. 사실이나 진리보다는 그에 대한 느낌, 감각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상황. 이런 상황이 강화되면 내가 기분이 나쁘면 그것은 문제이고, 내가 감각할 수 있는 것만이 실재하는 것이라는 식의 주장에까지 이른다.

 

     아마도 역시 그와 같은 심리 테스트를 통과한 후 리마 프로젝트의 수장에 임명되었을 주인공의 아버지가 보인 파괴적인 모습은, 이런 식의 태도가 결국 어떻게 끝날 지를 미리 보여주는 듯하다. 우리의 감각과 느낌은 확실한 근거가 될 수 없다

 

 

 

 

 

     ​또 한 가지 부분은 영화 속 대사에서도 나오듯, ‘존재하지 않는 것만을 찾다가 눈앞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된주인공 아버지의 모습이다. 비단 이 영화가 아니라도 우리는 주변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가장 소홀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듣던지.(물론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그러고 있는 줄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주를 배경으로 하지만, SF보다는 휴먼드라마 성격이 좀 더 강하게 느껴지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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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은 격투기 선수 용후(박서준)에게 어느 날 갑자기 손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출혈이 발생한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해서 만나게 된 안 신부(안성기)는 바티판에서 파견되어 온 구마사제. 아버지를 살려 달라는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은 신에 대한 깊은 배신감과 불신을 갖고 있던 용후는 안 신부를 쉽게 믿지 못하지만, 점점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되면서 함께 악의 사제를 처단하기 위한 일에 나서게 된다는 이야기.

 

     ​격투기 선수와 구마사제라는, 쉽게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보여주는 뭔가가 있을 줄 알았으나,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전형적인 오버스러움을 벗지 못해 딱 뻔한 영화가 되어버렸다. 구마사제라는 소재마저 최근에 OCN에서 방송되었던 프리스트나 앞서 제작되었던 영화 검은 사제들보다 못했으니... 초반의 말끔한 클럽 사장의 모습에서 뭔가 엄청난 능력이나 목적이 있을 것 같았던 빌런도 그냥 흐지부지되고 말았고. 사실 영화에서 뭘 말하려고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내용도, 재미도, 그림마저도 잃은 영화.

 

 

 

 

 

      영화의 초반부터 중후반 상당 지점까지 주인공 용후를 괴롭게 만드는 건, 어린 시절 기도에 관해 겪었던 강한 실망이다. (아마도) 출산 과정에서 세상을 떠난 어머니부터, 사고로 순직한 아버지까지, 신에게 기도를 했음에도 왜 구해주지 않았느냐는 것. 단순해 보이긴 하지만, 기도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을 묻는 본질적인 질문이다. 히친스나 도킨스 같은 신무신론자들이 대표적으로 비꼬는 부분이기도 하고.

 

     ​사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도 어려운 질문이다. C. S. 루이스는 개인기도에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11:24)는 구절을 어린아이나 불신자에게 기독교를 가르치는 출발점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조금은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되었을 때 적용될 수 있는 구절이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물론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청원 기도를 할 수 있다. 그분은 훨씬 열등한 기도도 받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한편 루이스는 세상의 마지막 밤에 실린 기도의 효력이라는 글에서 기도의 정의를 좀 다르게 내린다. 그는 기도를 요청이라고 말한다. 요청은 강제와 달리 거절당할 수 있음을 전제한다. “무한히 지혜로운 존재가 유한하고 어리석은 피조물들의 요청에 귀를 기울인다면, 당연히 그는 요청을 들어주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할 것이다. 다만 우리는 기도를 들으시는 분의 선한 속성과 의지를 믿고 구할 뿐이다. 그렇게 요청(기도)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분에 대해 더욱 깊이 알아가며 성숙해지게 된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영화 속 어린 용후에게는 너무 어려운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의 보호자였던 어른들(아버지와 신부)은 제대로 된 설명 없이, 그리고 자신들도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 내용을 문자적으로만 가르친 실책이 없지 않고.(물론 이 부분을 쉽게 가르치는 곳은 많지 않다)

 

 

 

 

     ​엑소시즘이라는 소재가 끊임없이 대중문화 가운데 다뤄지고 있는 건, 영적인 영역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 부분이 지나치게 흥미 본위로만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 아쉬운 부분. 신비주의나 영적 탐험은 제대로 된 지도가 없다면 길을 잃기 쉽다는 C. S. 루이스의 경계를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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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조선 세조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조카인 단종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왕위를 차지한 세조는 정통성에서 큰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 유명한 살생부에 적힌 수많은 사람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많은 피를 흘렸고, 이는 세조 자신에게도 큰 트라우마를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민심이었으니,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왕에 대한 악평과 저주 섞인 이야기들은 권력자의 칼로 막을 수가 없는 종류의 위협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이해 발탁된 것이 영화 속 덕호(조진웅)를 비롯한 다섯 명의 광대들이었다. 이들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각종 기계장치를 통해 그럼직하게 만들어 냄으로써 소문이 퍼지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는데, 세조대의 최고의 권신인 한명회가 이들의 재주를 눈여겨보고 왕위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한 작전을 시작한다는 내용.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 이 광대패들이 꾸며내는 각종 기이한 사건들이다. 영화는 세조실록에 실려 있는 수십 가지의 기적들이 실은 이들 광대들이 꾸며낸 작전의 결과였다고 설명한다. 그 유명한 정이품송은 줄을 매달아 끌어당긴 것이고, 금강산에 나타났다는 수많은 부처의 형상도, 온천에서 세조를 만나 그의 병을 고쳐주었다는 보살들도 모두

 

     ​포인트는 어떻게 그런 형태를 만들어내었는가 하는 과정 부분인데, 영화적 상상력을 잔뜩 동원해서는 당시에 있었을 법하지 않은 다양한 기계장치와 대규모 인력을 동원해 꾸며내는 세트 분위기가 꽤나 흥미롭다. 여기에 번번이 큰 귀를 달고 나와 적당히 연기를 하며 보살인 척 해내는 김슬기의 능청스러움도 눈에 들어오고.

 

 

 

 

 

​     처음에는 그렇게 유쾌하게만 진행될 것 같은 영화는, 물론 반전의 기미가 살살 드러난다. 사실 한명회 같은 인물과 함께 일하면서 끝까지 버텨내려면 어지간한 처세술이 필요한 게 아닌데, 이들 광대들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우니까. 다만 감독은 이들 사이의 간격을 벌리기 위해 광대패 중 한 명의, 조금은 뜬금없고 무모해 보이는 반발을 억지로 욱여넣는다.

 

     그리고 영화는 곧 회맹을 중심으로 한 궁중에서의 정치투쟁으로 성격을 바꾼다. 그 과정에서 광대패는 급격히 영화의 중심부에서 밀려나는데, 사실 이건 애초에 영화를 보러 간 사람들이 기대했던 부분이 아니니까... 살짝 당혹스러운 감도 없지 않다.(굳이 이들이 회맹을 망가뜨리려고 목숨을 걸고 나설 이유가 뭐란 말인가) 차라리 처음부터 끝까지 신나게 광대들이 벌이는 놀이로 채웠더라면 어땠을까

 

 

 

 

 

​     영화는 소문의 중요성에 관해 말한다. 분명히 존재하는 사실들을 가리고, 허구의 소식을 사실로 만들어 내는 게 바로 소문이다. 실제로 그 사람이 어떤지 보다는 사람들 입에 어떤 식으로 오르내리느냐가 더 중요한 게 이 즈음의 상황인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여기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황을 그렇게 몰아가는 거짓된 이들의 악한 계획과 정파적 이익을 위해 옳고 그름의 기준을 일부러 무디게 만드는 태도도 한 몫을 할 게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마저 이런 거짓 소문의 물결을 일으키는 데 한 몫을 하고 있다는 현실은 꽤나 아프게 느껴진다. 옳은 것을 옳다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해야 할 책임(5:37)을 받은 이들이지 않던가. 물론 어떤 이들은 단지 몰라서 그랬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사실관계를 정확히 확인하지 않은 채 적극적으로 소문을 퍼뜨리는 일도 딱히 선처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한동안 교회에서 한 주간의 뉴스를 보며 기도제목을 만드는 역할을 했었다. 그 때 새삼 절실하게 느꼈던 건, 세상에는 좋은 뉴스보다 악한 뉴스, 선에 관한 소식보다 악에 관한 소문이 훨씬 더 많이 떠돈다는 점이었다. 소위 미담 뉴스는 정말로 찾아내기 어렵고, 온통 싸움과 분노, 학대와 거짓으로 쌓은 탑에 관한 소식만 널려있었다. 물론 저쪽은 뉴스꺼리가 되지 않으니까 다루지 않는 것이겠지만, 씁쓸한 마음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언제쯤 우리는 좋은 소식들, 다른 사람들의 선행을 알리는 소문들로 즐거워하게 될지...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한 발 먼저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게 조작된 소문이어서는 안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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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 봉오동 일대에서 일제의 월강추격대를 패퇴시킨 독립군의 활약을 그린 영화다. 고등학생 시절 당시 대표적인 독립군의 승전으로 청산리 대첩과 함께 기억해 두었던 내용인데, 영화로 만들어졌다니 안 볼 수가 없었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 친구로부터 구성이 별로였다는 감상평을 들은 지라, 기대치를 조금 낮추고 들어갔는데 그 때문이었을까, 생각했던 것만큼 그리 나쁜 구성은 아니었다는 느낌이 든다. 주연을 맡은 유해진이 확실하게 중심을 잡으면서 극을 이끌어 가고 있으니 확실히 몰입도는 있고, 여기에 일단 칼을 뽑아들으면 평소의 허당끼가 사라지고 또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반전매력도 보인다. 여기에 틱틱 거리며 함께 움직이는 파트너로 류준열이 출연하는데, (이젠 너무 자주 보여서 살짝 지겨워지는) 평소처럼 혼자 고민하고 행동하는 까칠한 캐릭터를 맡는다. 이젠 좀 연기 변신을 꾀할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영화는 포위공격을 할 수 있는 지형 안으로 어떻게 일본군을 끌어들일지를 놓고 벌이는 유인작전이 주를 이룬다. 약간은 길게 늘어지는 느낌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마지막 전투에서 느껴지는 쾌감이 증대될 수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흥미롭게 봤다. 예상보다 하드코어 한 면이 좀 있다는 건 기억.

 

 

 

 

 

​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전투에서의 열세가 확인된 후 월강추격대의 대장이 내뱉은 문장이었다. ‘오늘의 일이 저들(독립군과 그 후예들)의 입으로 기록되지 않게 하라는 정도의 내용이었던 듯하다. 사실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일제의 후예들의 역사왜곡의 베이스가 되는 문장이라고도 할 만하다. 과거의 사건을 오직 자신들의 입장만 반영해 멋대로 다시 쓰는 작업을 통해 현재를 정당화하려는, 일종의 역사수정주의적 입장(중에서도 굉장히 악질적인 쪽의).

 

     ​최근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서울대 교수 출신인 이 모씨가 쓴 책도 이런 입장에서 멋대로 재구성해 낸 소설 중 하나다.(정작 이 사람은 역사 전공자도 아니다) 흥미로운 건 그게 정확히 현재 일본의 군국주의 잔재세력의 시도와 동일하다는 것. 물론 역사라는 게 있는 그대로의 사건을 그대로 글로 옮길 수 있는 게 아니긴 하지만, 최소한의 객관적 사실 검증도 도외시한 채 그저 자신에게 돈(혹은 이에 상응하는 무엇)을 대주는 이들의 입장에 맞춰 기술하는 건, 그냥 홍보전단 그 이상이 아니지 아닐 것이다.

 

     ​포스트모던이라는 철학과 함께 역사에 관한 이런 임의적 재구성이 일종의 놀이처럼 여겨지면서 이런 경향이 더욱 쉽게 발견되는 듯하다.(모든 권위를 부정해 버리면 남는 건 순간적인 즐거움을 주는 놀이들밖에 없다) 물론 이게 단지놀이의 차원에 머문다면, 그리고 그게 여러 사람들을 유쾌하게 만들어주는 정도라면 무리가 없겠지만, 그게 다가 아니니 말이다

 

 

 

 

 

     오늘도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하는 이들을 향해 내밀 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는, 역시 성실하게 역사적 사실을 조사하고 사실관계를 정확히 가려내기 위한 노력이다. 역사가 저들에 의해서만 기록되지 않도록. 그리고 무엇보다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허튼 이들의 허튼 소리가 들어올 틈을 주지 않는 일도 필요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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