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다. 나는 철지난 바닷가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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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은 시절, 춘천에 도심 다실이 있었다.

 

당시에는 도심의 뜻을 잘 몰랐다. 나이가 들어서 깨달았다. 도심은 한자로 都心이며 그 뜻은 도시의 중심부였다. 그렇다면 얼마나 잘 지은 이름인가. 시내 한복판인 중앙로 로터리에 접한 다실이었으니.

이런 생각도 든다. 도심의 심()이 본래 마음을 뜻하는 한자이니까 다실 이름 도심은 도시의 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는.

 

어쨌든, 1970년경 중앙로 로터리에 접한 도심 다실은 묘한 데가 있었다. 흔치 않은 지하인데다가 삼각형 공간이었던 것이다. 대개의 다실(다방)이 반듯한 사각 공간인 걸 생각하면 도심 다실은 아무래도 입지(立地)에 사연이 있어 보였다. (훗날, 새로 지은 옆 건물의 일부분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으니 애당초 반듯한 구조를 갖기 어려운 자투리땅이 아니었을까.)

 

 

그 즈음 여름날이다. 내가 무슨 일인지 오전 10시 경에 도심 다실에 들어가 앉았다. 지하라 서늘한데다가 물청소까지 마친 직후라 냉기마저 맴 돌았다. 티셔츠 차림인 나는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 때 감색넥타이에 연두색 여름양복을 입은 정장 차림의 사내를 보게 되었다. 사내는 다실의 종업원 아가씨(당시 레이지라 불렀다.) 둘과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정확히는, 아가씨들이 얘기하고 사내는 눈을 반쯤 감은 채 간간이 고개나 끄덕이는 모습이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내가 그 날 도심 다실에서 본 연두색 차림의 사내를 생생히 기억하는 까닭은, 사내만큼 양복 정장이 잘 어울리는 사람을 여태 못 봤기 때문이다. 얼굴도 잘생긴 사내였다. 탤런트 이정길 씨를 닮아서 종업원 아가씨들이 체면 무릅쓰고 손님도 아닌데 합석해서 말을 붙였던 것 같았다.

다실 벽의 형광등 불빛이, 사내가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함께 움직이는 연두색 상의(上衣) 자락을 선하게 드러내주었다. 다림질이 잘 돼 상의의 날선 줄이 드리우는 그늘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평일 날 양복 차림으로 오전부터 다실에 앉아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사내는, 카바레 제비족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남들 출근해서 사무실에 있을 시간에 그런 차림으로 반쯤 졸면서 지하 다실에 있을까. 아마도 노란 달걀 푼 쌍화차 한 잔을 마시고서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반추하는지도 몰랐다.

그 후 나는 사내를 다시 본 적이 없다. 세월이 반세기 흘렀다.

오늘 문득 사내가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해졌다. 분명한 것은 사내도 나처럼 노인네가 됐을 거라는 사실이다. 지하공간에서도 빛나던 20대 청춘들은 어느 덧 사라져버렸다.

 

내 젊은 시절 춘천에, 지하에 도심 다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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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에 왔다가 의림지에 들렀다. 의림지는 마한진한변한의 삼한시대부터 있었다니 어언 2000년이 넘었다.

해 질 녘 의림지 일대는 가을 한기가 맴돌았다. 풍경 사진을 찍었는데 ---- 2000여 년 시간은 찍히지 않았다. 문득 이런 생각들이 내 머리를 스쳤다.

우리는 시간의 자취를 공간에서나 발견하는 걸까? 시간은 오직 공간의 자취로만 확인되는 게 아닐까? 시간은 어쩌면 실재한다기보다 관념 속에서나 존재하는 게 아닐까?’

 

 

 

2000여 년 되는 시간이 의림지 호수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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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송이는 가시들로 무장한 탓에 매우 조심스럽다. 밤송이 따다가 잘못되어 실명(失明)했다는 얘기가 괜한 게 아니다.

 

오늘 농장에 갔다가 밤나무에서 밤송이들을 땄다. 고슴도치처럼 가시들로 무장한 놈들이라, 곡괭이로 나뭇가지를 걸어 당겨 내려놓고 땄다. 문제는 딴 밤송이들에서 알밤을 빼내는 일이다. 손에 장갑을 끼고 해봤지만 밤송이 가시가 얼마나 날카로운지 사정없이 찔린다. 하는 수 없이 등산화를 신은 발로 밤송이를 밟아가며 알밤을 빼냈다.

 

그런데발로 밤송이를 밟아가며 알밤을 빼내는 내 동작이 왠지 낯익게 느껴졌다.

TV에서 본 한 장면이 떠올랐다. 높은 나무에 오른 오랑우탄이발에 해당되는 손으로 나뭇가지를 잡던 장면이었다. 우리 인류도 아득한 옛날에 오랑우탄과 별 다를 게 없었다. ‘발에 해당되는 손으로 나뭇가지를 잡기도 했다. 그러다가 직립보행하게 되면서 발에 해당되는 손이 서서히 지금의 발로 퇴화한 것이다.

 

나는 오늘, 오랜만에발에 해당되는 손을 한 번 써 보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해수욕을 하다가 발에 밟힌 바지락조개들을 발가락들을 조몰락거려 잡아내던 일까지 그 감각까지 선하게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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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있어 영월에 다녀왔다. 여기 춘천에서 영월까지는 300 리 길. 이제는 도로가 좋아져서 한 번 가는 데 1시간 50분밖에 안 걸렸다. 왕복 네 시간이 채 걸리지 않은 셈이다. 물론 자가용차를 몰았다.

춘천에서 오전 10시에 출발해서 영월에 정오 직전에 도착해서 충분히 일을 보고는 오후 3시경에 다시 영월을 출발오후 5시가 되기도 전에 춘천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훤한 낮에 600리 길을 별 일 없이 오가다니 참 놀랍다.

도로가 좋아진 때문이다. 춘천제천 간은 고속도로였고 제천영월 간은 국도였지만 사실상 준 고속도로라 불러도 좋을 만큼 시원하게 닦인 국도였다.

 

31년 전인 1989년에도 나는 영월춘천 간을 자가용차를 몰고 하루 만에 오간 적이 있었다. 그 때는 고속도로가 없어 국도로만 다녔는데구불구불한데다가, 좁은 2차선인 데다가, 번잡한 도심(원주시와 제천시)까지 경유하느라고 정말 운전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가는 데 3시간밖에 안 걸렸던 것이다.

고백컨대 위험한 과속을 일삼았던 거다. 과속뿐인가 수시로 앞차를 추월하고 급정거하고 그러면서 이뤄낸, 부끄러운 기록이었다. 지금보다 차가 많지 않은 시절인데다가 결정적으로는 운이 좋았다. 하늘이 나를 도왔다.

차 사고로 인생이 잘못되는 경우가 허다한데 그 때 그런 일이 벌어졌더라면 젊은 내 목숨도 그렇지만 아무 죄 없는 처자한테까지 한()과 고생을 남길 뻔했다.

 

다시 한 번 젊은 시절 과속운전을 일삼던 짓을 가슴 깊이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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