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파면’소식을 외신이 영어로 표현했다.

‘Park out'

이 이상 간단명료하고 확실한 표현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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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학교에 전학 간 첫 날, 담임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그래, 어느 특활반에 가고 싶냐?”

“미술반입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답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뜻밖의 말씀을 하였다.

“미술반은 이미 인원이 꽉 차서 안 되니까…… 독서 3반에 가는 게 어떠냐?”

내가 ○○시의 그 유명한, 교대부속초등학교 미술반에서 활동한 어린이라는 걸 모르시는 걸까? 돌이켜보면 그럴 만했다. 담임선생님이 받아든 내 생활기록부에는 ‘특활부서: 미술반’이란 정도로 극히 간략하게 쓰여 있었을 테니까. 어쨌든 어린 나는 뭐라 해명할 엄두도 못 내고 풀죽은 목소리로 ‘네에.’하고 답했다.

독서 3반은, 금요일 6교시 특활시간에 모여서 아무 책이나 한 시간 동안 묵독하는 반이었다. 원래 한 반이었는데 희망 인원이 넘쳐나 ‘독서 1,2,3반’으로 나뉘었다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하나뿐이라는 ‘미술반’ 역시 각자 알아서 아무 그림이나 그리다가 종치면 끝나는 반이라 했다. 그런 식으로 특별활동에 관심 없는 학교라면 나의 특출한 그림 솜씨는 드러날 수가 없었다.

학급에서 교과학습으로 하는 미술시간마저 담임선생님이 미술교과서를 읽고 풀이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이 시골학교에서 내 그림 솜씨는 영 빛을 못 볼 것 같았다.

 

한 달쯤 지났다.

담임선생님이 미술시간에, 처음으로 국화 몇 송이가 담긴 꽃병을 교탁 위에 올려놓더니‘한 장씩 그려 내거라.’ 하였다. 나는 ‘그림 솜씨를 보여줄 좋은 기회다!’라는 생각에 아주 열심히 그려 제출했다. 담임선생님은 놀랐다. 어린이의 그림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햇볕 드는 창가 자리에 앉아 무슨 사무를 보느라고, 내가 그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 주변의 애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구경하느라 바빴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내 그림이 교실 뒤의‘우리 솜씨’란에 게시됐다. 다른 애들 그림도 게시됐지만 내 그림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내 그림은 꽃병의 명암까지 살려 다채롭게 색을 쓴 데 비해 다른 애들의 그림은 단색으로 꽃병 모양이나 가까스로 그려낸 정도였다.

그 날부터 나는 ‘아주 그림 잘 그리는, 전학 온 아이’가 되었다. 미술시간이 교과서 수업 대신 실제로 그림 그리는 시간으로 바뀌면서, 내 그림들 중 두 점이 교실 옆 복도 벽에까지 붙여졌다. 담임선생님은 내 그림 솜씨에 늘 감탄했지만 정작 그리기를 잘하는 분은 아니었다. 칠판에 백묵으로 어떤 물건을 그리며 설명할 때 보면 원근법에도 맞지 않고 명암도 엉망이었다. 그리기에 관한 한 내가 담임선생님보다도 낫다고 속으로 자부하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가? 저 유명한 교대부속초등학교 미술반에서 활동한 어린이가 아닌가? 이런 사실을 한 번쯤은 드러내놓고 자랑하고 싶었다. 그런 기회는 담임선생님이 마련해주어야 하는데 그런 데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는 분이 못 되었다. 단지‘그림을 잘 그리는 어린이가, 내가 맡은 학급으로 전학 왔구나.’하는 정도로 아는 듯했다.

 

4학년이 끝났다. 5학년이 시작되는 삼월 초 어느 날 ‘그분’이 나타났다.

연세가 오십 돼 보이는 담임선생님과 달리 그분은 삼십도 안 되어 보이는 아주 젊은 분이었다. 그분이 나타난 때는 쉬는 시간이었다. 여자애들은 교실 뒤쪽 빈자리에서 노래 부르며 공기놀이를 하고, 남자애들은 책걸상 사이로 뛰어다니며 장난 싸움을 하는데 낭랑한 어른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순식간에 그런 소란을 제압한 것이다.

애들이, 자리에 앉아 만화책을 보는 나와 앞쪽 출입문 가에 서 있는 그분을 번갈아보고 있었다. 깨끗한 옷차림에, 포마드를 발라넘긴 머리라서 선생님인 듯했는데 처음 보는 분이었다. 그분이 내 이름을 다시 불렀다.

“네에…….”

뒤늦게 대답을 하며 나는 앞쪽으로 나아갔다. 그분은 허연 얼굴에 빛나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냐?…… 나 따라 와라.”

다시 소란해지는 교실을 뒤로 하고 나는 그분을 따라갔다. 복도에서 쿵쾅쾅 뛰어다니던 애들이 그분 몸에 부딪쳤다가 놀라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나가기도 했고, 어떤 애들은 낯선 선생님한테 끌려가는 듯한 나를 의아한 눈길로 보며 얼핏 내 손이나 옷을 잡았다가 놓기도 했다.

복도를 지나 본관 끝에 있는 미술실로 나는 따라 들어갔다. 그 때 수업 시작종이 울었다. 내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는지 그분은 예의 낭랑한 음성으로 안심시켰다.

“걱정 마라. 네 반 담임선생님께 말해 두었다.”

겨우내 방치한 미술실로 알고 있는데 (연료를 아끼느라 그랬는지 겨울로 들어서면 교실 아닌 특별실들은 그냥 문 잠가버리던 시절이었다.) 작은 석유곤로 하나가 따듯하게 피워져 선생님 책상 가까이 놓여있었다. 그 책상 위에는 내가 지난 학기 미술시간마다 담임선생님께 제출했던 그림들 중 세 장이 놓여 있었다. 그분은 의자에 앉더니 그 중 하나를 들면서 내게 물었다.

“네 그림, 맞지?”

“네.”

“전학 왔다며? 그래, 먼저 학교를 다닐 적에 그림 그리기를 많이 했나 보지?”

나도 모르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시에 있는 교대부속초등학교에서 미술반을 했거든요. 거기서 매일, 수업이 끝난 뒤 따로 남아 한 시간씩 그림 그렸습니다. 그런데 작년 구월에 아버지가 여기 군청으로 전근 오면서 모두 이사 오게 되어, 전학 온 겁니다.”

그분은 ‘그럼 그렇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너, 특활반을 정할 때 미술반에 들 거지?”

아직 새 학년도의 특활반을 정하지 않은 때였다. 다음 주에 정할 듯싶었다. 나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네에.”

“내가 미술반을 맡아 가르칠 거니까, 다음 주 금요일에 보자.”

그분은 내 어깨를 두드리면서 이제 그만 가 봐도 된다는 손짓을 했다. 나는 고개 숙여 인사를 드리고 미술실을 나왔다. 나올 때 미닫이문이 겨우내 안 쓰인 탓인지 잘 닫히지 않았다. 나는 한 손으로 문을 밀다가 잘 안 되어 두 손으로 잡고 힘껏 밀어야 했다. 그럴 때 그분이 내 쪽을 바라다보았다. 창가의 햇빛을 뒤로한 모습이라 웃는 표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그 날, 그분이‘미술반에 들 거지?’하고 물었을 때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겠다고 응답한 것은 얼떨결에 이루어진 느낌이 컸다. 소란한 교실을 일시에 제압하던 낭랑한 목소리, 깔끔한 포마드머리의 젊은 모습, 허연 얼굴빛과 간간이 빛나던 눈빛 등의 분위기가 나를 다른 대답할 겨를이 없도록 만든 게 아니었을까?

만약 후줄근한 옷차림의 노인 선생님이 우리 학급을 찾아와서, 소란스런 애들을 제압하느라 내 이름을 고래고래 불러서 데리고 갔더라면 나는 미술반에 들지 않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미술실이라니. 작은 석유곤로 하나가 교탁 부근에 불피워있긴 했지만 겨우내 방치된 탓에 아무래도 춥고 을씨년스러웠다. 노인 선생님이 그런 미술실에 있었더라면 더욱 춥고 더 을씨년스레 보였을 텐데……다행히도‘그분’이었기에 덜 춥고 덜 을씨년스레 보인 거라고 나는 회상한다.

전학 온 처음에는, 방과 후 미술반 활동 같은 것도 없는 시골학교라서 나는‘뭐, 이런 학교가 다 있나?’하며 허탈했었다. 한 학기가 지나자, 만화책도 마음껏 보고 애들과 늦도록 놀기도 하며 방과 후 시간을 편하고 즐겁게 보내는 평범한 생활에 젖어서…… 그분이‘미술반 활동을 제대로 해 보겠다’는 어조였을 때 ‘저는 독서반을 할 건데요’하며 응하지 않았을 법했다. 그러기는커녕 교대부속초등학교 미술반 출신이라는 사실까지 상세히 말씀드렸으니, 고생 많았던 방과 후 미술반 활동을 그 순간 나는 깜박 잊었던 걸까? 전형적인 미술선생님의 풍모를 갖춘 그분과 맞닥뜨린 순간에 별 망설임 없이‘네에’하고 미술반 활동에 참가하겠다고 답한 건 그 까닭일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날의 내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다.

 

금요일 6교시 특활시간이 다가왔다. 특활반을 정하는 시간이었다. 그분한테서 미리 당부 받은 듯, 담임선생님이‘올 해 미술반은 금요일뿐만 아니라 토요일에도 따로 남아 할 거라니까, 잘 생각해서들 희망해라’했으므로 우리 학급에서 미술반 희망자는 나 하나뿐이었다. 학급 애들이‘역시 그림 잘 그리는 애는 다르다.’며 쑤군거리거나 ‘이제 너는 고생길에 들어섰다!’며 걱정하는 표정들인 가운데 나는 담임선생님한테서‘미술반 희망자 명단’ 쪽지를 받아들고 교실을 나섰다.

희망한 특활반을 찾아가는 전교생들로 복도는 붐볐다. 나는 애들 틈을 비집고 가며 간신히 본관 끝 미술실에 다다랐는데 그 앞 복도에는 애들이 하나도 없었다.

‘미술실 명패가 달려 있는 것을 보면 내가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닐 텐데?’

조심스레 뒤의 미닫이문을 열었더니 애들 여남은 명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조용히 앉아 있었다. 지난 학기만 해도 희망자가 넘쳐 더 못 받는다던 미술반이 인원부터 확 줄어들어 있었다. 한 교실이라면 보통 육십 명이 정원인데 여남은 명의 애들만 앉아 있으니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그분이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다가, 교단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말했다.

“여기 앉아 있는 어린이들은 미술반을 희망해서 온 게 맞지요?”

“네에.”

“내가 이 자리에서 말할 게 있어요. 담임선생님한테 말씀 들었겠지만 올해 미술반은 금요일 특활시간만 하는 게 아니라 토요일 오후도 할 겁니다. 그리고 봐서, 일요일도 할 것이고 어쩌면 여름방학 때도 할지 모릅니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애들이 있었다. 그분은 애써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어요. 아무래도 미술반 활동을 따라가기 힘들겠구나 싶은 어린이는 지금 이곳에서 나가도 좋습니다. 다시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리고 다른 특활반을 찾아가도록 하세요. 자아, 그럼?”

안색이 하얗게 질린 애들 대여섯 명이 주섬주섬 일어나 뒤쪽 미닫이문을 열고 나갔다. 최종적으로 확정된 미술반 인원이 일곱 명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순전히 자발적으로 희망해서 온 애들이 세 명, 나처럼 사전에 그림 솜씨로 인정을 받고 참가약속이 되어 있던 애들이 네 명이었다. 대부분 3,4학년생이었고 6학년은 한 명도 없었다. 유일한 5학년인 내가 미술반 반장으로 정해졌다. 그분은 모두 교탁 앞으로 모여 앉도록 한 뒤 말했다.

“내일, 토요일 오후부터 그리기 활동에 들어갑니다. 알겠죠?”

이어서, 그에 따른 ‘지시사항들’도 말했다.

“첫째, 자기 학급에서 수업이 끝난 뒤 오후 두 시까지 성당 마당으로 와야 합니다. 지각하는 어린이에게는 그리기 활동이 끝난 뒤 주변 청소를 맡길 것입니다. 둘째, 화구를 빠짐없이 갖춰 와야 합니다. 갖출 화구는, 천천히 말할 테니까 연필로 적으세요. 화판, 스케치북, 스무 가지 색 이상의 크레파스, 4B연필 한 자루와 보통 연필 한 자루, 연필깎이 칼, 고무지우개입니다. 내가 화구를 검사해서 한 가지라도 빠졌으면 역시 청소를 맡길 것입니다. 셋째, 만일 비가 오면 말입니다, 그냥 이 미술실에서 활동하겠습니다. 자아, 내가 할 얘기는 다 한 것 같네요. 그럼, 혹시 무슨 질문이 있습니까?”

요즈음 어린이들이었다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 ‘선생님은 언제 저희 학교에 오셨나요? 어느 대학을 나오셨고 결혼은 하셨나요?’. 당시의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분을 올려다봤을 뿐이다.

“그럼 이만 귀가해도 좋습니다.”

나중에 들은 소문으로는, 그분은 임시로 와 있는 선생님이라 했다. 서울에 있는 어느 미대를 졸업하고 군대를 갈 참이었는데 여의치 않은 사정으로 쉬던 중에 우리 학교 미술반을 맡게 된 거라던가. ‘여의치 않은 사정’이란 건강이 안 좋은 사정인 듯싶었다. 그분의 마른 몸매에다가 허연 얼굴빛을 보고 나온 추측이 아니었을까?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었다.

이튿날 오후 두 시에 우리 미술반원은 성당 마당에 모였다. 지각하는 사람은 청소를 시킨다고 한 엄포 때문인지, 지각은커녕 이십 분 전에 모두 모였다. 성당은 남향한 석조 건물로써 그리 높지 않은 동산에 위치했음에도 읍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소였다. 오래된 큰 밤나무들이 울타리처럼 성당 마당을 에워싸고 있어서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울 것 같았다.

이른 봄이라, 그 그늘에 들어가면 추웠다. 우리는 그늘이 없는, 나무들 사이의 양지에 모여 있었다. 각자 커다란 화판의 끈을 어깨에 건 채 스케치 북, 크레파스 등을 손에 쥐고 있으니 화구들 틈에 우리가 끼어있는 모습 같았다. 두 시가 되기 오 분 전에 그분은 성당 마당 입구에 나타났다. 햇빛에 포마드 바른 머리를 빛내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자아, 여기서 그리기 좋은 풍경을 각자 선택해서 그리는 겁니다. 연필로 스케치를 한 뒤에 크레파스로 칠한다는 거는, 더 말 안 해도 잘 알겠지요?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 그 안에 다 그렸으면 내게 갖고 올 것. 그럼, 각자 그림 그리기 좋은 자리를 찾아서 이동 실시!”

미술반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토요일 오후 두 시는 물론 금요일 6교시 특활시간에도 우리는 으레 성당 마당에 모여 한 시간씩 그림을 그렸다. 성당은 학교와 멀지 않아, 금요일에는 5교시가 끝나는 대로 화구들을 챙겨들고 부지런히 가면 모임 시간에 늦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 그리기 편한 곳에 화판, 스케치북 순으로 내려놓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읍내 풍경을 열심히 그렸다. 다 그리고 나면 근처 벤치에서 쉬는 그분한테 갖다 보였고, 그러면 그분은 구도 원근법 명암 색칠 순으로 꼼꼼하게 살펴 미흡한 부분은 직접 고쳐 보이며 지도했다.

날씨가 무더워지자, 밤나무 그늘은 그림 그리고 지도 받기에 괜찮은 시원한 장소로 바뀌었다.

한낮의 읍내 풍경은 투명한 햇빛 속에 잠겨 있었다. 자동차 경적이 간간이 들릴 때에는, 햇빛 한두 가닥이 튕겨져 날아오는 것 같았다. 자동차도 별로 없던 육십 년대 초의 시골 읍은 그 자체가 소리 없는 풍경화였다. 그림의 구도를 깨뜨릴 만한 큰 건물도 없고 대부분 아기자기한 규모의 가옥들이 가느다란 도로들을 끼고 장난감 마을처럼 우리 눈앞에 펼쳐 있었다.

그분이 낭랑한 음성으로 우리 그림을 낱낱이 지적하며 지도할 때 그 가늘고 흰 손가락이란. 그림의 미흡한 부분을 직접 고쳐 보이느라 혼합 색 크레파스처럼 변하기 일쑤였다. 나는 미술반 반장이기도 했지만 그리기 솜씨로도 모범이었다. 수 년 간 교대부속초등학교 미술반에서 닦아온 기량에 그분의 섬세한 지도가 덧입혀지자 사실상 더 배울 게 없는 나의 그리기 솜씨였다.

 

어쩌면, 나는 그 때 그분한테 지도를 받지 않는 게 더 좋았을는지 모른다. 오랜 세월이 지난 이제 생각이다…….

 

여름방학에도 미술반 활동은 계속됐다. 방학 전의 활동 흐름을 이으려는지, ‘금요일과 토요일 오후 두 시’에는 성당 마당으로 모여야 했다. 한여름의 읍내 풍경은 따가운 햇볕 때문에 조금씩 흔들리는 듯 보였다. 나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훔쳐내며, 눈가에 힘을 줘 그 흔들리는 풍경을 붙잡아 그렸다.

어느 날 나는 눈앞에 있는 밤나무를 그리기 시작했다. 읍내 풍경만 그리기가 싫증이 났기 때문이다. 밤나무 잎들만 해도 여러 색이었다. 그 시기나 햇빛을 받는 정도에 따라 흰빛이 도는 연두색부터 온전한 연두색, 조금은 짙은 초록색, 초록색에 흙색을 더한 올리브그린 색…… 숱한 녹색 계통들의 어우러짐이 밤나무 잎사귀들이었다. 그런 잎들을, 암갈색 나무그루와 가지가 적절한 균형으로 떠받쳐주는 게 밤나무 전경이었다.

“모두 이리로 모여라!”

내가 그 그림을 제출했을 때 그분은 떨리는 목소리로 미술반원들을 불러 모았다. 그분이 그림 그리고 있는 우리를 도중에 불러 모으기는 처음이었다. 그분은 내 그림을 벤치에 펴 놓고 말했다.

“과연 미술반 반장이다. 자, 이 그림을 잘 보고 어떻게 나뭇잎들의 색깔을 칠했는지, 어떻게 줄기나 가지 모양을 그렸는지, 잘 보라고!”

그분이 내 앞에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니, 나는 쑥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고개를 숙이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날이 여름방학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분은 처음으로 눈앞에 놓인 그림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 정도의 그림이라면 더는 손댈 수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그분은, 고개 숙이고 선 내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이런 말을 하였다.

“이 정도 그림이면 전국 그리기 대회에 나가도 단연 특상이야. 아암 그렇고말고.”

 

   이후 그분은 내 그림을 지도할 때는 다른 애들 것보다 더 오래 했다. 단순한 색칠로 끝나지 않고 미묘한 변화를 주는 기교까지 가르쳤다. 예로써 기와집 지붕을 그릴 때 회색 칠로 그치지 않고 부분적으로 연두색이나 노랑을 보탬으로써 ‘이끼 낀 기왓장 느낌’까지 표현하는 기교였다. 밤나무그루도 단순한 암갈색 칠로 끝나지 않고 부분적으로 흰색을 보태어 검지 끝으로 문지르면 ‘햇살을 한 쪽으로 받는 밤나무그루’가 되었다.   

   다른 애들도 따라 그렸으나 아무래도 내 그림만큼 되지는 못했다. 성당 마당으로 놀러왔던 어른들도 내 그림을 보게 되면 입을 다물지 못하고 경탄했다. 나는 말없이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그리기에 관한 한 내가 우리 학교에서 일인자라는 자부심으로 벅찼다.   

   사실, 나는 전학 오기 전 다닌 교대부속초등학교의 미술반에 선발된 과정부터 남달랐다. 그 도시의 여럿 초등학교 중 그 학교만 별나게 입학시험을 치러서 어린이들을 골라 받았는데 나는‘미술반에서 활동하는 조건으로 입학이 허가된 어린이’였다. 간단한 읽기 쓰기 셈하기 그리기 달리기를 과목으로 한 입학시험에서 평균 이하 점수로 불합격되었던 내가 미술반 활동을 조건으로 간신히 입학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시골로 전학 가기 전까지, 매일 방과 후에 미술반에 남아 한 시간씩 그리기를 했었다. ○○시 교육청 주최 그리기 대회에서 내 그림이‘우수상’을 탄 적도 있었다. 그랬던 내가 전학 온 뒤, 그리기 활동도 없이 평범한 어린이처럼 지내다가…… 뜻하지 않게 미대 출신의 그분을 만나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어린이’로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드높일 참이었다.

    그 당시 교대부속초등학교 미술반에는 나처럼 미술반 활동을 조건으로 입학된 애가 더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모두 같은 경우였는데 창피해서 말들을 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조건부 입학이란 원죄로 어린 우리는 고생을 했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하지만 재능은 고생하는 노력 끝에 빛을 보는 게 아닐까? 고진감래라는 말이 그 뜻이 아닌가? 나는 바야흐로 숱한 크레파스와 스케치북들을 쌓은 더미 위에서 전국적으로 빛을 볼 참이었다.

       

    9월이 되면서 우리는 성당 마당을 떠났다. 그 때부터는 6․25때 비행기 폭격으로 망가졌다는 다리 위에 모였다. 읍내 전경이 보이는 명당자리 성당을 떠나 그런 망측한 장소로 옮기는 게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기껏 짐작한 게‘밤나무에 밤송이들이 달리기 시작하니, 그게 떨어져서 우리가 다칠까 봐 그러는가 보다’였다. 그분의 생각은 달랐다. 풍경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성당 마당의 시각을 벗어나는 데 목적이 있었다. 한 달 뒤, 덕수궁 그리기 대회에 갔을 때 깨달은 사실이다.

    망가진 다리 위는 나무그늘이 없어서 각자 모자를 쓰고 와야 했다. 다리 위에서는 읍내 풍경의 옆과 앞모습이 보였다. 성당 마당에서는 주로 지붕이나 옥상들이 보였지만 이제는 건물의 벽이나 담 등, 그 동안 제대로 보지 못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성당 마당에서 그리기를 하다가 목이 마르면 가까운 데 있는 펌프를 찾아 물을 마셨다. 다리 위는 그렇지를 못해 물병도 각자 갖고 와야 했다. 다리 위는 여러 모로 그리기 활동에 불편한 장소였다. 다행인 것은 그런 불편이 한 달 만에 마감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분은 마침내, 시월 초에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다는 모 ‘신문사 주최 전국 어린이 그림 그리기 대회’에 우리 미술반 명단을 보내면서 망가진 다리 위의 활동을 마감했다.

    대회 날까지는 한 주가 남았다.

    미술실에서 대회를 대비하는 총 정리에 들어갔다. 3월부터 9월 하순까지 매주 이틀씩 그리기를 한 결과물은 대단해서, 그 동안 쓰인 스케치북이 일인당 여덟 권씩 되었다. 스케치북의 낱장마다 그분의 가늘고 흰 손가락이 혼합 색이 되도록 애써 가르치고 고친 흔적들이 가득했다. 햇빛에 고요히 잠겨있거나 간혹 구름 밑에 깔려있던 갖가지 읍내 풍경들이 피땀 자국처럼 남아 있었다. 우리는 스케치북을 하나하나 넘겨보면서 그분한테 지적 받은 부분을 다시 연습해 보는 일로 9월의 마지막 주를 보냈다.

    출전의 날이 왔다.

    새벽 다섯 시 서울 행 버스를 타기 위해 우리는 새벽 네 시 반까지 시외버스 대합실로 모였다. 전국에서 쟁쟁한 애들이 참가하는 그리기 대회라 생각하니 밤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일곱 명 모두 푸석푸석한 얼굴이었다. 교장, 교감 선생님은 물론이고 기성회장님까지 나와 있었다. 기성회장님은 ‘사이다 한 박스를 버스 짐칸에 넣어 두었다.’고 그분한테 일러주었다. 그분은 어둠 속에서도 허연 얼굴로 고개 숙여, 배웅 나온 모든 분들께 인사드렸다. 정작 버스를 타는 우리는 그분까지 여덟 명인데 배웅한다고 나온 어른 분들은 이십여 명이나 되었다. 부모님들까지 따라 나온 때문이었다. 대합실이 좁아 밖으로 나와 선 어른 분들은 추워서 몸을 떨기도 했다. 새벽이면 냉기가 도는 가을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서울에 가 보는 애들이 대부분이었다. ‘크렁크렁’ 엔진 소리를 내며 버스는 어둠 속 거리로 출발했다. 밤잠을 설친 탓에 얼마 못 가 모두들 녹아떨어진 채, 버스가 움직이는 대로 흔들리며 서울로 가고 있었다. 두 시간 넘게 걸려 번잡한 서울 시내 한복판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아침식사를 한다고 눈에 뜨이는 식당부터 찾아들어갔는데 차멀미가 가라앉지 않았다. 밥공기를 앞에 두고도 숟가락을 들지 못하는 우리에게 그분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밥맛이 나지 않는 사람은 조금만 먹고 남겨도 좋습니다. 내가 이따가 빵을 살 테니까, 그 빵이라도 먹으면 되는 거지요. 오늘 여러분은 그저 소풍 왔다고 생각하고 그림 그리면 됩니다. 전국에서 그림 잘 그린다는 애들은 모두 온다지만…… 여러분 정도로 열심히 그린 애들은 별로 없을 테니까, 긴장만 하지 않으면 될 겁니다. 그저 성당 마당에서 그린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요.”

    우리 중 한 아이가 물었다.

    “망가진 다리 위에서 그린다고 생각하면 안 되나요?”

     “원, 웃기는 놈 같으니라고!”

     그분은 껄껄껄 웃었다.

     화창한 날씨였다. 덕수궁 안은 전국에서 모여든 그리기 대회 참가 어린이들로 바글바글했다. 우리 학교의 전체 어린이 숫자인 천 명에 가까울 듯했다. 그분이 대회본부에서‘참가 어린이 이름표’를 받아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그것을 조심스레 왼쪽 가슴에 달고서 각자 흩어져 그림 그리기에 들어갔다. 주어진 화제는 ‘가을 풍경’이었다. 그분은 내 곁에 와서 ‘바로 눈앞에 보이는 건물을 중심으로 그리면 된다.’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  

   “건물 주위로 단풍든 나무들이 있고 높고 푸른 하늘에는 구름도 두어 점 떠 있으니, 이게 바로 ‘가을 풍경’이 아니고 뭐냐?”

   ‘아하, 이래서 읍내 건물들의 앞이나 옆을 가까이에서 보고 그리도록 망가진 다리 위에서 그리기 활동을 했었구나!’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다소 비현실적인 화가의 풍모를 갖췄지만 우리 미술반 지도에 있어서는 그토록 치밀하고 철저할 수가 없는 그분이었다.

    전국적인 대회라 해서 참가 어린이들만 대회장에 들어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인솔한 선생님들이나 부모님들까지 들어와서 김밥이나 사이다를 먹으면서 참가한 어린이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중에도 어른 분들이 들여다보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었다. 그림에 몰두하느라 잘 듣지는 못했지만 ‘특상 감’이라느니 ‘맡아놓은 당상’이라느니‘소년 화가’라느니 하는 말들이었다. 그분 역시 간간이 내 주위를 오가고 있었다. 고개 들고 보지 않아도 그분만의 독특한 체취랄까 분위기가 있어서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분은 그리기에 몰입하는 제자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녀가고 있었다. 나는 그 동안 배우고 익힌 모든 역량을 대회본부의 확인 도장이 구석에 찍힌 켄트지 위에 남김없이 쏟아냈다. 대상으로 삼은 건물이 석조이지만 잿빛을 기본 바탕으로 칠해 놓고 부분적으로 흰색이나 검정색을 보탠 뒤 손가락 끝으로 문지르면서, 석조 건물 자체의 명암에 따른 입체감 살리기에 힘썼다. 그림이 완성되어 갈 즈음에는 어른 분들이 와서 탄복하는 소리들이 내 귓전으로 계속 들렸다. 마침내 나는 완성된 그림을 들고 본부석으로 향했다. 마감시간이 오 분 남짓 남아서, 그림을 제출하려는 애들로 긴 줄이 형성되어 있었다. 다른 애들 그림을 엿봤더니 유치한 수준이었다. 덕수궁 건물들을 엉성하게 그려놓고 여기저기서 노는 애들 모습을 그린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한결같은 단색이었다.

    나는 그림을 제출한 뒤 약속 장소인 분수대 물개 상 앞으로 갔다. 그분이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다른 애들도 와 있었다. 수많은 어린이들과 어른들이 분수대 주변에서 모이거나 떠나느라 소란스러운데도 그분의 낭랑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그분은 말했다.

   “나 참, 버스에서 사이다 박스를 내린다는 것을 잊고 말았구나. 미안하다. 내가 출장비 받은 게 많으니까 사이다를 두 병씩 사 주마. 그깟 놈의 사이다가 문제냐, 우리 미술반 모두가 상을 휩쓸 텐데!”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읍으로 돌아온 뒤의 얘기는 사실, 회상하고 싶지 않다.

    우리 미술반은 단 한 아이도 상을 받지 못한 것이다. 뜻밖의 참담한 결과였다. 돌아온 이틀 후, 특상부터 가작까지 입상자들 명단이 학교 이름과 함께 백 명 넘게 일간 신문에 실렸는데 단 한 명도 우리 학교 미술반은 뽑히지 못했다. 믿기지 않았다.

    입상자 명단 발표 후 우리는 그분을 볼 수가 없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분이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갔다 했다. 또 다른 소문으로는 몸의 병이 악화되어 급히 서울의 큰 병원에 입원했다고도 했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더는 그분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금요일 6교시 특활시간이 되었을 때 우리는 미술실에 모였다. 나까지 다섯 명이 출석했다. 한 명은 몸이 아파 조퇴했고 다른 한 명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스케치북을 꺼내놓지도 않고 앉아 잡다한 얘기들이나 나누었다. 그분에 대한 소문부터 재미있게 본 만화 얘기, 어느 반 화장실 벽에 그려져 있다는 이상한 그림 얘기 등을 두서없이 나누고 있었다. 십여 분 지났다. 앞쪽의 미닫이문이 반쯤 열리더니 교무과장 선생님이 나타났다. 교장 선생님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데, 운동장 조회 때 사회를 보다가 순서를 바꾸거나 할 말이 안 떠올라 허둥대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그 선생님은 문도 다 열지 않고 복도에 서서 얼굴만 미술실 안으로 들여놓은 모양으로 우리한테 말했다.

    “여기 미술반 맞지요? 내가 당분간 미술반 담당입니다. 뭐 미술이라는 게…… 뭔가 그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각자 만화를 그려도 좋고 낙서로 그려도 좋고, 여하튼 떠들지만 말고 조용히 그림 그리고 있으면 됩니다. 알았죠?”

    ‘알았죠?’에서 이상하게 높아진 그분의 어조에 우리는 겁먹고 힘차게 대답했다.

    “네에!”

     교무과장 선생님은 이번에는 어조를 바짝 낮추어 으르렁거리듯 말을 이었다.

    “내가 교무실에 있으면서 가끔씩 여기를 와서 살펴볼 겁니다. 그 때 아무 것도 안 그리고 장난치는 새끼는 각오해! ……알았죠?”

     “네에!”

     교무과장 선생님은 반쯤 열었던 미닫이문을 다시 닫고 사라졌다.

     

​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서울 덕수궁 사건이 도대체 납득이 안 되었었다. 거대한 사기를 당한 것처럼 황당하게 끝난 결과도 그렇지만, 의욕 넘치던 그분이 황황히 자취를 감추고 만 일까지 떠올려 본다면 도대체가 납득이 안 되는 덕수궁 그리기 대회 사건이었었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일까, 얼마 전 그 사건이 비로소 납득되었다. 그분은 우리한테 그림을 지도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잊었었다. 어린이 그림에 담겨져야 할 동심을 빠트린 것이다. 당시 일간 신문의 한 면을 가득 채웠던 입상 그림들만 봐도 기교보다는 천진난만한 동심이 넘쳐나고 있었다. 덕수궁 석조 건물이 투박하게 만화처럼 그려졌더라도 그 주위를 넘치는 즐겁고 산뜻한 색칠만으로도 그 그림은 충분했다. 어린이 그림이니까. 어린이는 동심을 가진 유일한 존재이니까.

    단순한 석조 건물을, 갖가지 기교를 동원해서 어른처럼 원숙하게 그렸던 우리 학교 미술반원들의 그림은 당연히 입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분이 기대를 걸었던 내 그림은 그런 어린이 대상 그리기 대회가 아닌,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그리기 대회에서나 적합하지 않았을까? 내가 그 날 덕수궁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때, 여기저기서 자유롭게 사이다도 마시고 김밥도 먹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던 무심한 애들의 모습이 바로 그 그리기 대회의 정답이었다. 그런 애들의 그림에는 천진난만한 동심이 담겨있을 수밖에 없었다.

   덕수궁 사건은 내게 정신적 상처를 준 게 분명했다. 특별한 교육을 내세우는 교대부속초등학교에, 미술반 활동을 조건으로 입학할 정도로 그리기에 재능을 보였던 나는 그 덕수궁 그리기대회 사건 이후로 그림에 영 흥미를 잃어버렸다. 같이 활동했던 다른 애들도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서로 궁금하지도 않을 정도로 우리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매주 이틀씩 한 가족처럼 붙어 다니며 그리기 활동에 매진하던 우리였었는데.

    그분은 우리에게 죄인일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생각도 해 본다. 의욕에 넘쳐서 열과 성을 다하여 그림을 가르치던 그분이 오랜 세월 뒤에‘만화를 그려도 좋고 낙서로 그려도 좋으니까 여하튼 떠들지만 마라’는 어느 시골학교 교무과장 선생님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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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한테 그 여자 얘기를 하려 하네. 오해는 말게, 내가 그 여자와 무슨 썸씽이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야. 단지 그 여자의 죽음에 대한 얘기이지.

물론 내가 죽인 것은 아니야. 그런데도 그 여자의 죽음에 내가 무관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망설이다가, 자네한테 얘기하기로 마음먹은 거네. 그러니까 혹 지루하더라도 다 듣고 나서 자네의 의견을 말해 주었으면 하네. 그뿐이네.

 

그 여자와 나는 한 동네에 살았네.

아니, 아무래도 부족한 표현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먼. 다시 표현하겠네.

그 여자네 가족과 우리 가족은 한동네에 살았네.

여기서, 우리 동네에 대해 잠깐 설명해야겠네. 우리 동네는 50여 채 집들이 들어선 단독주택단지라네. ‘근린생활시설’이라는 규정 아래 건축을 허용했기에 3층 집들을 지어서 1층은 상가나 사무실로 세를 주고 2, 3층에 주민들이 살지. 그 중 2층은 대개 둘로 나눠 두 가구에 전세를 주고 3층은 집 주인이 혼자 쓰는 형태가 대세야.

우리는 3층에 살아. 그러니까 집주인이지. 그 여자네는 어느 집 2층에 사는 세입자이지.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느 집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네. 그 여자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이 없었거든. 그런데 어떻게 한 동네에 산다는 것을, 그 여자네가 어느 집 세입자라는 것을 아느냐고?

그 여자네 아들과 우리 아들이 친한 친구 사이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알게 된 거지.

지금은 대학생들이지만 우리가 이 동네에 집을 짓고 이사 오던 때만 해도 두 아이는 인근의 같은 초등학교 어린이였지. 우리 아들이 3학년 때 전학 와서 배정된 학급에 그 아이가 있었던 거야.

한동네에 사는데다가 성격도 맞았던지 둘은 금세 친해진 듯싶더라고. 시험기간이 닥치면 서로의 집에 번갈아 묵으며 함께 밤새워 공부하기도 하는데, 부모 된 심정으로는 괜스레 장난치며 시간을 낭비할까 걱정스러웠지만 그런 일도 없이 둘 다 상위권 성적을 보였어. 말하자면 둘 다 양순한 모범생 단짝인 거지. 그러니까 우리 아들도 그 집을 스스럼없이 다녔고 친구 애 역시 우리 집을 가족처럼 드나들었나 보네.

그런 어느 날 그 애 집을 다녀온 아들 녀석이 문득 이러는 거야.

“아빠, 걔네 엄마가 이걸 묻던데? 너희는 3층을 혼자 다 쓰느냐고.”

다소 이상한 얘기라 나는 귀 기울였네.

“그래서?”

“그렇다고 답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숨을 내쉬는 게 무척 부러운 모양이시더라고”

그런 말을 전하면서 득의양양한 녀석의 얼굴 기색이라니……. 녀석은 뒤늦게 우리가 3층을 넓게 다 쓰는, 잘 사는 건물주란 걸 깨달으면서 어린 마음에 신이 났던 거야.

그 때 내가 처음으로 그 여자란 존재를 의식하게 된 듯싶으이.

우리 집 형편을 부러워하는 여자로구나, 그래서 짐작되던 것들을 구체적으로 물어 봤지.

“걔네 아버지는 뭐하는 분이시라더냐?”

“초등학교 선생님이래. 먼 시골에 있는 학교라서 차로 날마다 장거리 통근 하신다던데.”

“걔네 엄마는?”

“아무 것도 안 하셔, 그냥 집에서 지내시는 것 같아요.”

짐작이 맞았지. 여자네는 혼자 버는 집인 거야.

자네가 알다시피 우리 집은 맞벌이로 자리 잡은 경우이지. 내가 성장과정에서 워낙 궁핍하게 살아왔기에 ‘결혼하면 반드시 맞벌이해서 잘 살아봐야겠다’ 고 결심하고는 같은 교사인 아내를 중매로 만나 결혼한 것이거든. 한 사람 봉급은 없다 치고 몽땅 저금하면서 부부교사 13년 만에 3층 집을 지은 것이니, 성공한 셈이겠지.

집을 짓고 입주한 직후에 툭하면 한밤중에 밖으로 나와, 높이 선 어둠 속 우리 3층 집을 여러 번 올려다보며 건물주라는 것을 실감하려 애쓰던 기억이 있네. 화장실이 두 개나 있고 방이 세 개나 있는 34평 한 층을 우리 네 식구가 다 사용한다니 꿈만 같았지.

비좁은 서민 형 아파트에서만 살다가 막 벗어났거든.

그래서…… 17평 정도의 방 두 개에 세 들어 사는 그 여자는 우리 집에 대해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더구나 여자네도 우리처럼 아들 하나, 딸 하나까지 네 식구라니 말일세. 공교롭게도, 한동네에 살면서 식구 수도 같으니 비교가 되면서 그 여자는 한숨까지 내쉬었나 보네.

물론 이런 분석도 지금에야 해 본 것이지, 당시에는 별 생각이 없었네. 그리고 이쯤에서 내가 두려운 것은, 혹 자네가 내 얘기를 듣다가 ‘이 자식은 삶의 수준을 오직 평수로만 계산하는 저질이구먼!’하고 실망할까 두렵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네. 단지 그 여자의 죽음에 대한 내 입장을 해명하려다 보니 그렇게 얘기가 전개되고 만 것이네. 깊은 양해를 바라네.

 

그렇게 어느 날 아들 녀석이 전하는 말로써 ‘그 여자’를 알게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 여자를 보지도 못했고 어느 집에 사는지도 알지 못했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지만 내가 워낙 고된 인문계고교 교사생활을 하니까 그럴 심적 여유가 없었다고 봐야지. 격일로 야간자습 지도까지 하느라 밤 11시에나 귀가하는 생활이었으니 말일세.

아내는 비교적 시간의 여유가 있는 중학교 교사이지만 집안 살림까지 하느라 도통 쉴 새가 없었고.

그러니 초등학교 4년 동안(우리 아들이 3학년 때 이사 왔으니까) 아들들끼리 수시로 오가는 사이인데도 우리 부부는 그 여자네 집이 어디인지 몰랐던 거야. 같은 동네의 어느 집 2층일 거라는 인식은 있었으면서도 말이지. 각자 바삐 사는 시대라 하지만 우리 부부가 너무 무심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제 뒤늦게 드는구먼.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생활수준의 차이가 나니까 집안끼리 왕래하기가 어려웠던 게 아닐까 싶네. 맞다, 한 번도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지만 여자네 집과 우리 집이 집안 간 왕래를 갖지 못한 것은 알게 모르게 그런 생활수준의 차이가 벽으로 작용했던 것일 거야.

우리 쪽만 무심한 듯 지냈던 게 아니라 그 여자네 또한 무심한 듯 단 한 번의 방문도 없었으니 서로가 암묵적으로 그런 벽을 시인하고 지낸 게 아닐까?

 

얼마 후 아들들이 인근의 중학교까지 함께 진학하게 되었지.

선지원 후 추첨을 해서 중학교를 배정하는 방식이라 운이 나쁘면 먼 데 있는 다른 중학교로 배정받을 수도 있었거든. 그래서 가슴을 졸였는데 다행스레 두 아이는 인근의 같은 중학교로 배정되었던 거야.

아들이 가까운 학교로 계속 다니게 되었다는 것만도 복 받은 일인데 양순한 모범생 단짝과 변함없이 등교한다니 정말 이 동네에 자리 잡기를 잘 했다는 자찬이 절로 나오더군. 그렇게 중학교에 입학한 지 보름쯤 지나서인가 아내가 ‘신입생 학부모회의’에 갔다가 그 여자를 처음으로 만났다는 게 아닌가.

아내가 ‘다른 건 몰라도 첫 학부모회의는 꼭 가 봐야한다’는 생각으로 간신히 수업을 돌려놓고 가서 참석했는데 거기서 그 여자를 만났다는 게야. 내게 전하는 아내의 말은 이랬어.

“전체 학부모회의가 끝난 뒤 반별 모임으로 흩어질 때 어떤 여자가 다가와서 누구의 어머니가 아니시냐고 묻더라고. 그렇다고 답했더니 자기가 바로 같은 동네 단짝 친구의 엄마라고 밝히는 거야. 얼마나 반가웠던지! 내 얼굴에 낯익은 모습이 서려 있어서(웃음) 그럴 거라 짐작하고 인사 왔다는 거야. 우리는 각기 반이 달라서 긴 얘기는 나누지 못했지만 언제 한 번 꼭 시간을 내어 부모들끼리 만나자고 약속을 했지.”

“그 엄마는 아들을 닮지 않은 모양이지?”

“그래, 그 아이는 가냘픈 얼굴이지만 엄마는 수더분하고 둥글둥글한 게 맏며느리 생김이었어.”

그렇게 모처럼 ‘한 번 꼭 시간을 내어 부모들끼리 만나자’던 약속은 3년 뒤에나 이루어졌다네. 그러니까 한동네에서 산 지 7년여 만에 부모들끼리 얼굴을 봤다니깐.

 

글쎄, 얘기하다 보니까 아무래도 우리 부부가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네. 우리 부부는 그 여자네를 무시한 적도 없을뿐더러 그냥 살기 바빴을 뿐이라고 변명하고 싶네. 지나간 세월을 한 번에 묶어서 얘기를 하다 보니까 그런 문제점이 응축되어 나타난 거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비유하자면 넓은 바닥에 희미하게 서린 습기를 손바닥으로 한 번 쭉 훑자 보이지 않던 물방울이 축축하게 잡힌 식이라는 거지.

아니, 더 이상의 변명은 하지 않겠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이제 아들들은 중학생이 되면서 이번에는 영수학원도 같이 다니게 되었네. 밤낮으로 함께 공부하는 사이가 된 거지. 초등학교까지는 가끔씩 학습 준비물을 마련할 때나 푼돈이 드는 정도였지만 이제는 매학기 등록금에다가, 매달 학원비까지 제법 돈이 들기 시작하는 거였지. 자네도 알다시피 이 도시에서는 명문고로 손꼽히는 학교로 진학하기 위한 고입경쟁이 치열하지 않은가. 그러니 성적 상위권의 중학생들이라면 학교 공부와는 별도로 과외를 받거나 영수학원이라도 다니는 게 일반화되어 있지.

우리 집은 아들 위로 제 누나가 이미 고등학교를 다니는지라 학비가 두 배로 들기 시작했지만 별 부담을 느끼지 않고 생활해 나갔는데 그 여자네 집은 아무래도 생활비 부담이 컸을 것 같네. 게다가 여자 네는 딸애가 아들애의 한 살 아래였으므로 1년이 지나자 중학생이 둘인 집이 되었던 거야. 그러니 무척 힘들었을 수밖에.

그런 상황을 짐작케 하는 일이 그 즈음에 있었네. 아내가 외출했다가 우연히 그 여자를 보면서 벌어진 ‘사건’이지. 아내의 말로는 잠깐 은행에 다녀올 일이 있어서 거리로 나왔는데 그 여자가 있었다는 거야. 아내의 말을 옮기자면 이런 내용이었네.

“거리 모퉁이에 무슨 시제품인가 준다며 파라솔 하나 펼쳐놓고 서서 행인들한테 상품을 홍보하는 웬 직원들이 있었어. 내가 그 쪽으로 지나가려는데 갑자기 여직원 하나가 황급히 자리를 떠나 길가 건물로 들어가 버리더라고. 언뜻 옆모습을 보았는데 아무래도 걔네 엄마더라니까. 사실, 그 엄마가 그냥 그 자리에 다른 직원들과 있었더라면 나는 몰라보고 그냥 지나쳤을 거야, 워낙 평범한 얼굴이니 말이야. 그런데 그렇게 눈에 띄게 움직이니까 알아본 셈이지.”

“괜히 사람을 잘못 본 것 아니야?”

“아니야 분명해, 내가 눈썰미가 있거든.”

우리 부부는 더 이상 그 얘기를 진행하지 않았네. 자네도 잘 알다시피 날이 갈수록 서민들이 살아가기 힘든 경제난의 시대가 아닌가. 우리 동네도 이른 바 학군 하나는 좋은 동네이지만 상 경기는 싸늘해져서 1층에 있는 상점이나 사무실들이 하나 둘 망하는 바람에 1층을 빈 채로 두는 집들이 늘어가는 판이거든. 남편 혼자 벌어서 애 둘의 학원비까지 대며 살기에는 너무 힘든 시대인 게 분명해.

나는 묵묵히 텔레비전을 보다가 이런 한 마디를 아내한테 했던 기억이네.

“걔네 엄마를 그렇게 봤다는, 이런 얘기는 아무한테도 하지 마.”

“당신도 참, 내가 그렇게 생각이 좁은 줄 알아? 그런데 말이야, 걔 엄마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세상인데 왜 그리 놀라서 숨고 그러지?”

 

그게 아마도 아들들이 중학교 2학년 적의 일이지. 그 1년여 후에 마침내 우리 부부들은 만나게 되었다네.

아들들이 무난하게 이 도시의 명문고에 합격한 직후의 일이었지. 만남의 시작은 여자네 남편 분이 우리 집으로 전화를 한 거였어. 그날은 내가 마침 보충수업(겨울방학 중 보충수업)도 없어서 집에서 쉬는데 전화벨이 울린 거야. 수화기를 들었더니 약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먼저 인사하더군, 이렇게.

“전화로 불쑥 인사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저는 그 집 아드님 단짝 친구의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

“아이구, 반갑습니다. 제가 먼저 인사 드렸어야 하는데…….”

“아이고, 말씀 좀 낮추세요. 제가 한참 어린 사람이거든요.……”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참, 아버님도 교사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장거리 통근을 하신다면서요? 무척 힘드시겠어요.”

“뭐 찻길이 좋아져서 다닐 만하거든요. 제가 이렇게 전화로 말씀드리고자 하는…….”

용건인즉 이러했다. ‘이제 3월부터 아들들이 다닐 고교가 우리 동네에서 먼 데 있어서 그게 문제다. 그냥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라 할 수도 있겠지만 만원 버스에 시달리다 보면 몸도 지치고 공부에도 손해를 볼 것 같다. 그래서, 아들들을 자가용차로 실어 나르는 통학에 대해 논의할 겸 만나 뵈었으면 한다.’

그래서 부모들끼리 정식으로 인사도 나눌 겸, 근방의 가까운 생맥주 집에서 저녁 8시에 만나기로 한 거지. 눈이 녹아 얼어붙은 길을 조심스레 걸어서 그 생맥주 집을 찾아갔더니 여러 손님들 중 어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흔들어 아내를 맞더군. 그 여자였지. 과연 둥글둥글하고 수더분한 생김이더군. 물론 남편 되는 그도 함께 일어나서 나에게 몸을 숙여 악수를 청하는데 어쩜, 그 아들이 고대로 늙으면 이런 생김일 거라는 모습인 거야. 가냘픈 턱의 선에다가 선한 눈웃음까지…….

우리는 ‘아들들의 명문고 합격’부터 자축한 뒤 생맥주잔을 비우면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많이 나누었다네. 나는 다른 술은 못 마셔도 생맥주 하나는 좋아해서 500cc 너덧 잔은 기본이었는데 그 여자 또한 그렇게 잘 마시더라고. 자기 남편이 고작 반잔에 벌겋게 취하자, 그 때부터 ‘술에 약한 남편을 내조 한다’는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남편 술잔부터 갖다가 비우더라니까.

역시 술을 한 방울도 못하는 아내가 그런 나와 그 여자를 보고서 ‘두 분이 따로 다른 테이블에서 마셔야겠네요.’해서 모두 한바탕 웃기도 했지.

그가 나를 교직의 대선배 되실 거라 하여 나이를 따져보니까 딱 15년 차이가 나더라고. 그럼에도 동기인 아들들이 있는 것은 내가 만혼이었고 그는 조혼인 때문이었어. 33살 만혼에 37살이란 늦은 나이에 얻은 게 우리 아들이라면 그는 21살에 결혼하여 22살에 얻은 첫아이가 아들인 거야.

교육대학이 2년제일 때 졸업과 동시에 초등교사 발령을 받았고, 발령받고 나가자마자 결혼했다는 거야. 그러니 그런 일이 가능한 거지. 생맥주 한 잔도 다 못 비우고 수줍게 웃기만 하는 그와, 거침없이 술잔들을 비우며 환담을 이끌어가는 그 여자는 언뜻 성별이 뒤바뀐 착각마저 주었지. 그러나 뜻밖에도 두 사람의 매우 이른 결혼을 주도한 것은 그였으니, 정말 놀랄 일이지.

다소 길 수 있지만 그 여자가 생맥주에 취해서 늘어놓은 ‘결혼에 이른 얘기’를 이제 전하겠네. 그 얘기는 이상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가, 3년여 뒤 그 여자가 자살했다는 소식에 놀라던 밤에 다시 선하게 떠오르더라니까. 마치 다큐멘터리 영상에 깔리는 해설처럼 말일세. 그 얘기는 이러했네.

“이 이가 이렇게 숫기도 없고 여려 보여도 끈질기기가 보통 아니라니까요. 그러니까 고등학교 1학년 시절부터 시작해서 만 5년간을 저를 따라다닌 셈이에요, 마치 강아지가 주인을 졸졸 따라다니는 것처럼 말이지요(웃음). 내가 골목을 가다가도 느낌이 이상해서 뒤를 돌아보면 이이가 멀찍이 거리를 두고 멈춰서 바라보는 거 있죠? 내가 사실 그리 이쁜 얼굴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나를 보기만 하면 좋아서 말없이 마냥 따라 오더라니깐요. 정말 이상한 남자 아이였어요. 산골에서 나와 자취하며 학교를 다닌다는 남자 아이가 그런다니, 참……. 작은 읍이지만 남 고등학교와 여 고등학교로 따로 나뉘어 있었거든요. 그래서 친구들을 통해서 알아 봤더니 공부도 아주 잘하는 애라는 거예요. 거의 톱이라 하더군요. 그러니까 싫지는 않더라고요(웃음). 그렇다고 좋았다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그랬어요. 남자애가 뭐 박력도 없고 그저 말없이 따라다닐 뿐이니, 내가 딱히 무슨 감정을 가질 수도 없잖아요? 그러다가 졸업한 뒤 교대를 갔다는 소문만 들리고 2년인가 통 소식이 없더니 불쑥 3년째 되던 해 봄날 저희 집을 찾아온 거예요. 말쑥한 양복 차림으로 느닷없이 나타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는 ‘제가 현재 국민학교 교사입니다. 따님과 결혼하고 싶습니다.’라는 거지요. 그러니 부모님도 부모님이지만 제가 얼마나 놀랐겠어요? 사전에 나와 무슨 약속이 있었거나 만났던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지요. 그런데 여자 마음이라는 게 묘해서 그제야 이 이가 박력 있는 남자로 보이더라니까요. (웃음) 그래서 곧바로 결혼하게 되었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그즈음 집안 농사일을 거드느라고 무척 힘들었거든요(웃음). 참, 우리 결혼 얘기만 잔뜩 늘어놓았네. 그래, 두 분은 어떻게 결혼하게 되셨어요?”

그렇게 엉뚱한 결혼 얘기들이나 나누다가, 헤어질 무렵에 가까스로 아들들의 자가용차 통학 문제를 논의했지. 그 여자가 맥주 마시며 얘기하는 품을 보면 두어 시간은 가능할 술자리였지만 그가 술기운을 이기지 못해 꾸벅꾸벅 조는 바람에 급히 그 문제를 논의하고 헤어진 거야.

 

마침내 3월이 되면서 아들들의 자가용차 통학이 시작되었네.

아빠들이 한 학기씩 교대로 맡기로 했는데 먼저 여자네 남편이 시작했지. 그가 장거리 통근 길에 아들들 통학을 돕는 것이므로 새벽이나 다름없는 시간대에 움직여야 했는데 다행히(?) 그 명문고가 새벽같이 조조자율학습을 시행하니까 별 어려움이 없었지. 운전자들이 시계바늘처럼 움직이는 생활이 몸에 밴 교사들이니까 오죽했겠나, 단 하루도 자가용차 통학에 차질을 빚은 적이 없었다네.

그렇게 날마다 아들들을 통학시키는 사이까지 되었지만 다시 부부들끼리 만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네. 뭐, 각기 바삐 사는 가운데 생활방식도 다르니까 그럴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앞에서 말했듯이 두 집 사이에는 생활형편의 차이라는 ‘벽’이 있어서 그것을 넘기가 어려웠던 게 아닐까.

그 여자가 다른 먼 동네에서 통닭구이 집을 한 것도 그러한 ‘벽’의 맥락에서 봐야 되겠지.

그 또한 아내가 우연히 그 동네에 갔다가 그 여자와 마주치면서 알게 된 일이라네. 아내의 말을 옮기자면 이러했네.

“그 동네에, 예전에 함께 근무했던 선생님이 한 분 살거든. 그 분 댁을 방문할 일이 생겼는데 빈손으로 가기가 뭣해서 눈에 뜨이는 통닭구이 집에 들어갔더니 걔 엄마가 있는 거야. 노란 모자에 노란 제복을 입고 계시더군. 나를 보더니 얼마나 화들짝 놀라던지 내가 다 놀랐다니까. 내가 뭐라 묻지도 않았는데 ‘그냥 집에서 놀기 뭣해서 몇 달 전부터 가게 하나를 맡아 하고 있다’ 하더라고. 통닭이 다 된 뒤 값을 치르려 했더니 한사코 받지 않으면서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으니 들어 달라’는 거야. 뭐냐고 그랬더니 ‘내가 장사한다는 것을 우리 애들이 절대 모르게 해 달라’는 거지. ‘애들이 엄마가 돈 벌이에 나선 것을 알면 아주 싫어할 거’라나? 내가 ‘아니, 뭐 어때요? 열심히 사는 모습이 좋지 않아요?’했지만 내 말은 귀담아 들으려 하지도 않고 통닭 든 봉투를 내 손에 쥐어주고는 밖으로 떠밀듯이 내보내더라니까. 참, 그 엄마도……”

나는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었네. 몇 해 전에도 길거리에서 무슨 상품을 홍보하는 직원들과 있더라 하더니……. 아내는 말을 덧붙였어.

“그런데 그 동네에 다른 통닭구이 집들이 두어 집 더 있으니 장사하기가 녹록치 않을 듯싶더라고…….”

아내가 그렇게 통닭구이 집에서 그 여자를 본 때가, 아들들이 고3인 때였어. 마지막 학기인 2학기의 초였을 거야. 내가 자가용차 통학을 맡던 학기였는데 이 녀석들이 별스레 냉전 중이어서 운전하는 나까지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지. 무슨 일인지(하도 시시한 일이라 기억도 나지 않네) 단단히 삐쳐서 서로 외면하며 뒷좌석에 앉아 있다가 교문 앞에 다다르면 제 각기 옆문을 열고 내리는 식이었거든. 우리 집 앞에서 차를 출발하여 학교 앞까지 10여 분간, 6개월 동안 아침마다 그러고들 있으니 얼마나 짜증나는 차안이었겠는가. 처음에는 얼마간 그러다가 말겠거니 하고 내버려 두었지만 그렇게 한 달 두 달 석 달로 접어들어도 전혀 달라지지들 않더라고. 글쎄, 10년째 단짝인 녀석들이 그런 속 좁은 꼴들을 보이다니 말이나 되는 일인가?

수능을 한 달 앞두고도 그런 꼴들인지라 내가 운전하면서 냅다 야단도 쳤다네.

“이 한심한 새끼들아! 그런 불편한 마음으로 수능시험을 볼 거냐? 이제라도 어서 악수하고 화해해!”

그랬더니 마지못해 악수를 하더군. 그러나 그뿐이었어. 학교 앞에 도착하자 여전히 상대를 외면하며 교문으로 들어가더라니까. 나 참, 남자애들이 삐치면 여자애들 이상일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실감했다네. 얘기가 잠시 옆으로 샜나 보네.

그 여자가 통닭구이 집을 했다는 얘기까지 했었지?

아내가 염려했듯이 그 동네에 통닭구이집이 서너 개 있었다니 그 여자의 장사가 뜻대로 풀렸겠는가? 훗날 알게 되었지만, 여자는 그 가게를 1년 가까이 하다가 빚만 떠안고 그만 두었다는 거야.

이제 돌이켜보면 그 여자는 그 가게를 그만두면서부터 방황하기 시작한 듯싶네. 안타까운 일이지. 만일 그 가게가 잘 되었더라면, 아니 그렇게 나서지도 말고 차라리 쪼들리는 살림이라도 붙잡고 버텼더라면 파국으로 떨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있네. 자네가 이런 말을 하는 나를 ‘자기 편한 대로 배부른 소리 한다’고 나무랄지 모르지만, 내가 알기에 여자네 형편이 그런 대로 아껴가며 살만한 수준이었거든. 남편이 술 한 잔 못하는 성품이니 무슨 낭비를 하겠으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시골에 있는 시댁에서 철마다 농사지은 것들을 보내주어서 먹는 걱정 하나는 없는 집’이었다는데 말이야.

그 여자는 과욕을 부렸던 걸까?

참으로, 세상일은 그 어느 것 하나 사람 욕심대로 순순히 되지 않거든.

아들 녀석들의 공부 또한 그랬지.

3년 동안 아빠들까지 나서서 열심히 자가용차 통학을 시켜주었건만 수능시험에서 형편없는 점수들을 받고 말았으니 말이야. 한 때는 서울대나 연 고대 갈 거라는 애들이 그 모양이 되고 말았으니, 정말 세상일은 사람 욕심대로 순순히 되는 게 아닌가 보네.

아마도 녀석들이 그 이전부터 모의고사의 성적도 잘 나오지 않고 하니까 그렇게 신경들이 날카로워져서 냉전을 벌이고 그랬었나 봐. 녀석들은 중학교 때까지나 상위권 성적이었지, 명문고에 들어와서는 중하위권 성적 수준이었던 거야.

녀석들은 끝내 화해도 안하는 상태로 3학년을 마치고, 이 도시에 있는 지방대학에서 낮은 점수로 들어갈 과들을 찾아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네. 대입 전형과 고교 졸업을 앞둔 겨울방학의 분위기가 그렇게 엉망이었기에 양쪽 집 부모들은 졸업 기념 삼아 한 번 만날 생각조차 갖지 못한 것 같으이. 정확히 3년 전 겨울만 해도 ‘명문고 합격생의 학부모’라는 희망찬 표정들로 인근 생맥주 집에서 술잔들을 부딪쳤는데 말이야.

그 맥 빠진 겨울이 끝나갈 즈음에는 아들 녀석이 밝히기도 창피한 그런 과에 합격하고서,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으로 거실의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만 하고 있었지. 나는 한심해 보이는 녀석의 뒤통수를 지켜보다가 문득 생각난 김에 물었지.

“걔는 어느 과로 들어갔니?”

“몰라요……그 새끼, 이젠 친구도 아니야. 한동네 산 것 때문에 어울렸던 것뿐인데…… 얼마 전에 딴 데로 이사 갔다니까, 잘 됐지 뭐.”

“이사를 갔다고?”

“걔 여동생이 다니는 여고 부근의 임대아파트로 이사 갔대. 우리 동네의 다른 애한테 그런 얘기를 들었어. 걔네 부모가, 그 새끼가 대학을 잡치니까 이 제는 딸한테 올인하는 모양이래.”

“그런 너는, 대학을 잡치지 않았니?”

“…….”

녀석은 내 어조가 심상치 않으니까 컴퓨터를 끄고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더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 고는 소리라니, 초저녁부터 자빠져 자는 거지. 모든 게 10년 동안의 변화였네. 이 동네에 집 짓고 이사 와서 딱 10년 만에 ‘총명하기 그지없어 보이던 아들이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녀석’으로 바뀐 거야. 아아, 인생무상이라더니…….

 

그 한심한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서 아들 녀석은 여하튼 대학생이 되었네.

반년쯤 흘렀을까, 어느 평일에 서울에서 유학하는 딸애가 학교 축제기간이라고 내려왔는데 그 날 마침 내가 근무를 쉬는 날이었어. 개교기념일이었던 것 같네. 아들 녀석도 휴강한 날이라고 집에 있더라고. 그래서 남매를 데리고 오랜만에 도시 외곽의 횟집을 갔다네.

그 횟집에서 그 여자를 본 거지.

나는 사실 그 여자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으므로 그 여자가 다가와서 인사할 때 얼떨떨했다니까.

“안녕하세요.”

“누구……?”

아들 녀석이 얼른 끼어들어 일러 주었지.

“아빠, 내 친구 엄마이시잖아.”

“아이고, 죄송합니다.”

“아니 별 말씀을…… 제가 마침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서 식사하려고 왔다가 ……”

“아 네네, 그럼 어서 식사 하십시오. 저희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자의 얼굴은 대낮임에도 벌건데다가 소주 냄새도 나는 것 같더라고. 여자가 내게 인사를 마치고 돌아간 뒤 얼핏 고개를 돌려보니까 웬 얼굴 넓적한 사내와 단 둘이 식사하는 자리이더구먼. 아들 녀석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지.

“바람난 거야. 아마 내가 있으니까 소문을 낼까 봐, 그렇게 와서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는 거라고 일부러 말하고 가는 거예요.”

녀석이 이럴 때 보면 어릴 적의 총명함이 여전한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녀석한테 조용히 당부했다네.

“걔한테 이런 얘기하지 마라.”

“걱정 마세요, 사람은 누구나 비밀이 있는 것 아니겠어요?”

“이 놈의 새끼가 별 소리를……(웃음)”

우리 식구가 회를 열심히 먹는데 그 여자는 다시 내게 왔지.

“먼저 가 보겠습니다.”

“아, 네네.”

여자가 사내와 사라진 뒤 아들 녀석이 친구네 집 근황을 얘기하더구먼.

“걔가 집을 나와서 따로 자취하고 있어요. 엄마랑 툭하면 싸움이 나는 바람에 집에 못 있겠다는 거지. 엄마가 자주 술 냄새도 풍기며 늦게 들어오고 그런다니, 자식이라도 짜증이 날 수밖에 없잖아요? 뭐, 무슨 가게를 한다고 두어 번 돈만 날려서 걔네 아빠만 고생시켰다는데…….”

“너, 걔와 친구관계를 끊었다 하지 않았니?”

“다시 화해했어. 한 때 있었던 오해는 다 씻자고 술 한 잔도 나누었다니까. 사나이들 세계가 그런 게 아니겠어요?”

듣고 있던 딸애가 한 마디 했지.

"얘는 입만 살았어. 입으로만 대학을 간다면 최소한 연 고대 감인데 너무 아까워요.”

……그 여자는 그렇게 평일 한낮부터 외간남자와 어울리고 있었지. 아내한테 저녁 때 그 얘기를 하니까 이러더구먼.

“내가 전에 통닭구이 집 들렀던 얘기를 한 적이 있지? 그 얘기에서 빠진 게 있어. 그 때 그 가게를 들렀을 때에도 그 여자는 소주냄새를 피우고 있더라니까. 통닭 냄새가 진해도 내 코를 속이지 못해요. 글쎄, 장사도 잘 안 되고 하니까 혼자 가게에서 마신 것인지, 아니면 당신이 얘기한 어떤 남자와 마신 것인지는 몰라도 …… 그런 자세로 장사를 하니 그게 오래 갈 수가 있겠어? 딱한 여자야, 자존심만 강해 가지고…….”

이제 그 여자 얘기는 결말에 다가왔네.

낮에 횟집에서 그 여자를 본 지 서너 달 뒤인가, 나는 퇴근해서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거든. 지친 몸을 추스르고 있는데 갑자기 아들 녀석이 자기 방에서 창백한 낯으로 거실로 나오는 거야. 휴대폰 쥔 손을 부르르 떨면서 말일세.

“왜 그러냐?”

나는 놀라서 물었네.

“아빠, 걔네 엄마가 돌아가셨대!”

“무슨 소리냐?!”

“걔한테 전화가 왔는데 지금 도립병원 영안실에 있다고 좀 와 달래. 내가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나 봐.”

“그래, 어서 가 봐라. 그리고 다시 집으로 연락을 줘.”

“아빠, 택시 비 좀 줘요.”

그렇게 녀석이 허겁지겁 옷을 걸쳐 입고 나간 뒤 나 혼자 다시 소파에 앉아 있었다네. 아내는 회식으로 늦는다고 귀가하지 않았지. 두어 시간은 지났을 거야, 아들 녀석한테 전화가 왔어.

“아빠, 아무래도 제가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내야 할 것 같아요. 지금 병원 주차장으로 나와서 전화하고 있어요. 걔네 엄마가 농약을…… 먹고 돌아가셨대요”

그리고 아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지. 그러더니

“저한테…… 늘…… 잘 해주셨거든요.”

“그래, 그래. 너무 속상해 하지 마라. 아빠가, 엄마 오면 같이 갈게.”

통화가 끝나고 나는 텅 빈 거실에 혼자 앉아 있었네. 아내는 자정이 가까워야 들어오려는 모양이었어. 그 여자는 왜 농약을 먹고 목숨을 끊었을까? 아들 녀석한테 전화를 걸어 그 사유를 물을까 하다가 그만 두었네.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한 가정의 비극에 대해서 궁금증을 갖는다는 게.

나는, 아까 아들의 전화를 받느라 볼륨을 죽인 텔레비전의 영상이 제멋대로 혼자 노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앉아 있었네. 이상하게 낯선 느낌이 드는 3층 건물 속에 앉아 있었네. 1층이 빈 채로 몇 달째 사는 때문인가, 나는 아무래도 낯설고 텅 빈 구조물의 맨 위에 혼자 앉아 있는 거야.

그 여자가 어느 겨울에 생맥주 잔을 비우면서 늘어놓던 ‘결혼’ 얘기가 선하게 살아나더군. 그 얘기의 골목 풍경이 눈앞에 생생한 거야. 여자가 ‘내가 골목을 가다가도 느낌이 이상해서 뒤를 돌아보면 이이가 멀찍이 거리를 두고 멈춰서 바라보는 거 있죠?’ 할 때의 골목이지.

내가 예전에 시골에서도 근무한 적이 있었기에 그런 골목 풍경은 아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거든. 봄이 되면 개나리, 진달래들이 화사하게 피어서 꽃길을 이루는 골목이지. 좁아도 햇살들이 넘쳐나고 벌 나비들이 가득한 그 골목길을 천진난만한 여학생이 걷다가 문득 뒤돌아보네. 그러자 멀리 골목 끝에 숫기 없는 남학생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거야. 여학생이 혼잣말로 그러지. ‘왜 날 따라오지? 정말 이상하네. 나는 하나도 안 이쁜데……’

그렇게 둘이 꽃길 골목의 양끝에 서 있네.

 

자, 이제 그 여자 얘기는 끝났네. 자네가 눈치를 챘겠지만 바로 오늘 저녁 때 그 여자의 죽음을 얘기 들은 거야. 그래서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자네한테 전화를 건 것이네. 야심한 시각에 부담스런 전화를 걸어서 미안하기 그지없네.

아무래도 내가 그 여자의 죽음과 무관할 수 없다는, 비논리적인 생각이 자꾸 들어서 자네 의견을 들어보려 했지만 굳이 답하지 않아도 되겠네. 그냥 자네한테 전화 걸어서 얘기하고 싶었던 거야. 이제 조금은 가슴 속이 풀린 듯하네.

“띵동,띵동 ”

아내가 이제야 왔나 보네. 심장 약한 아내한테 어떻게 그 여자 얘기를 전하는 게 좋을까? 이거 하나만, 자네 의견을 말해 주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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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나가보면 줄지어 가는 자동차들, 걸어가면서도 스마트폰으로 통화하는 사람들로 조금도 쉬지 못하고 바쁘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자동차가 지금처럼 많지 않고 드물었지만 그리 바쁘지 않았다. 스마트폰이 없었어도 대화 못해 힘들지 않았다.

혹시 우리가 사서 고생하는 게 아닐까? 자동차와 스마트폰들을 너도나도 장만하게 된 후, 장만한 것들을 그냥 놀릴 수 없어 할 수 없이 바빠진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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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서울 덕수궁 사건이 도대체 납득이 안 되었었다. 거대한 사기를 당한 것처럼 황당하게 끝난 결과도 그렇지만, 의욕 넘치던 그분이 황황히 자취를 감추고 만 일까지 떠올려 본다면 도대체가 납득이 안 되는 덕수궁 그리기 대회 사건이었었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일까, 얼마 전 그 사건이 비로소 납득되었다. 그분은 우리한테 그림을 지도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잊었었다. 어린이 그림에 담겨져야 할 동심을 빠트린 것이다. 당시 일간 신문의 한 면을 가득 채웠던 입상 그림들만 봐도 기교보다는 천진난만한 동심이 넘쳐나고 있었다. 덕수궁 석조 건물이 투박하게 만화처럼 그려졌더라도 그 주위를 넘치는 즐겁고 산뜻한 색칠만으로도 그 그림은 충분했다. 어린이 그림이니까. 어린이는 동심을 가진 유일한 존재이니까.

    단순한 석조 건물을, 갖가지 기교를 동원해서 어른처럼 원숙하게 그렸던 우리 학교 미술반원들의 그림은 당연히 입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분이 기대를 걸었던 내 그림은 그런 어린이 대상 그리기 대회가 아닌,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그리기 대회에서나 적합하지 않았을까? 내가 그 날 덕수궁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때, 여기저기서 자유롭게 사이다도 마시고 김밥도 먹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던 무심한 애들의 모습이 바로 그 그리기 대회의 정답이었다. 그런 애들의 그림에는 천진난만한 동심이 담겨있을 수밖에 없었다.

   덕수궁 사건은 내게 정신적 상처를 준 게 분명했다. 특별한 교육을 내세우는 교대부속초등학교에, 미술반 활동을 조건으로 입학할 정도로 그리기에 재능을 보였던 나는 그 덕수궁 그리기대회 사건 이후로 그림에 영 흥미를 잃어버렸다. 같이 활동했던 다른 애들도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서로 궁금하지도 않을 정도로 우리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매주 이틀씩 한 가족처럼 붙어 다니며 그리기 활동에 매진하던 우리였었는데.

    그분은 우리에게 죄인일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생각도 해 본다. 의욕에 넘쳐서 열과 성을 다하여 그림을 가르치던 그분이 오랜 세월 뒤에‘만화를 그려도 좋고 낙서로 그려도 좋으니까 여하튼 떠들지만 마라’는 어느 시골학교 교무과장 선생님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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