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윽고 비탈이다. 수직에 가까운 비탈이니까, 겁먹은 여 등산객들은 오를 생각을 포기하고 갖고 온 김밥이나 까먹고 다시 하산한단다. 이 비탈은, 중간 중간 서 있는 참나무들을 타잔이라도 된 듯 잽싸게 잡아가며 올라야 한다. 그런 나무 잡기에 실수했다가는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 십상이다. 이런 험한 비탈 때문에 이 산을 오르는 게 재미있단 소문이 나고 그래서 등산객들이 몰려들면서 산그늘 마을이 번창하게 된 게 아닐까?

김 과장은 배낭끈을 다시 한 번 조이면서 잠시 쉬었다가, 마침내 비탈을 오르기 시작한다. 오를 때 손으로 잡는 참나무들 밑동에는 바위가 걸려 있는 경우가 많다. 위에서 굴러 떨어지다가 나무 밑동에 걸린 것들이다. 그런 바위들도 조심해야 한다.

나 참, 자살하려는 놈이 이런 조심까지.

어찌 됐건 이런 어수선한 비탈에서는 죽고 싶지 않은 김 과장이다. 정신없이 비탈을 다 올라왔다. 땀도 나고 기진했으므로 쉬어야 한다. 두 평 넓이의 너럭바위가 하나 있다. 김 과장은 배낭을 벗어서 그 바위에 놓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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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방에서 김장을 다시 할 때 박 사장은 소주를 마시기 시작한다. 크……. 목구멍을 넘어가자 위벽을 통해 온몸으로 퍼지는 알싸한 소주 맛. 저물녘에 저 산 위로 노을 지는 그 맛이겠다. 불그레하게 사방으로 번져나가다가, 끝내는 어둠으로 사라지는 노을의 맛.

박 사장은 아직도 오후의 햇살이 여전해서 두어 시간은 지나야 볼 수 있는 그 산의 노을을 잔으로 따라 마시는 듯, 취흥에 잠긴다. 사는 게 무어람. 이렇게 소주 몇 잔으로도 불콰해지면 되는 거지.

박 사장이 그러고 있을 때 산 중턱의 김 과장은 낙엽송 지대를 벗어나 생강나무와 아카시나무들이 많은 지대로 들어섰다. 이 부근은 산 위에서 굴러 내려온 바위에 맞아 꺾이거나 밑동이 눌린 나무들이 적지 않다. 눈도 곳곳에 남아 있다. 바위 밑이거나 나무 밑동의 그늘진 곳에 남은 건조한 눈들. 등산화에 밟히면 푸석 하고 속 빈 붕어빵 꺼지는 소리를 내면서 납작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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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닭갈비’ 집 박 사장은 그런 알지도 못하는 남자를 걱정하다가, 쳐들었던 오른손을 내렸다. 눈부시게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을 막느라 쳐들었는데 이제 저리기 때문이다. 갈증이 난다. 주방 쪽을 향해 소리친다.“아줌마아!”

아줌마는 주방 바닥에 앉아 김장하다가 박 사장이 부르는 소리에 두 손을 물에 씻은 뒤 냉장진열장부터 향한다.

“아줌마, 그거.”

뭐 그렇게 재촉하지 않아도 그녀는 안다. 진열장에서 소주 한 병과, 오이무침을 꺼내어 쟁반에 담아 들고 박 사장이 죽치고 앉아 있는 출입문 가까운 좌석―커다란 둥근 쇠판과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나무판―에 갖다 놓는다.

“술을 쪼금만 하세요.”라는 당부를 잊지 않던 그녀였는데 그냥 주방으로 되돌아온다. 박 사장이 소주라도 마시면서 속상한 마음을 달랠 수 있다면 그만도 다행이라는 생각에서다. 글쎄, 같은 여자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박 사장 사모님이었다. 여기 장사는 불황이지만 도시에 아파트를 두 채나 가진 부자인데다가 남편도 착하겠다, 애들도 서울에서 명문대학을 다니겠다, 모실 시부모도 없겠다…… 그런데 뭐가 아쉽다고 바람이 나? 그것도 단골손님으로 들르던 산악회 총무라는 연하 남자와 말이다. 여섯 살이나 어리다니, 그 남자는 고작 서른여섯 살이겠다. 우리 큰아들 나이밖에 안 되는 철부지 남자와 눈이 맞다니, 그건 다 너무 걱정 없이 살다 보니까 쓸데없이 걱정거리를 만든 경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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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닥 실처럼 가늘고 길게 나 있는 솔밭의 오솔길. 장비 없이 오직 사람들의 발길로 만들어진 게 틀림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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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소폰 연주자 둘이 나란히 서서 ‘어제 내린 비’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컴퓨터로 그 동영상을 지켜보던 K는 자기도 모르게 놀랐다. 다른 곳도 아니고 북에서 온 연주자들이 감성 짙은 곡을 연주하다니……. K는 그 가사를 잘 알고 있다.

‘어제는 비가 내렸네/ 키 작은 나뭇잎 새로/ 맑은 이슬 떨어지는데/ 비가 내렸네/ 우산 쓰면 내리는 비는/ 몸 하나야 가리겠지만/ 사랑의 빗물은 가릴 수 없네.’

마치 서울 어느 유명 카페에서 출장 온 연주자들처럼 몸을 흐느적이기도 하며 색소폰 연주에 심취해 있는 북에서 온 사람들. 살벌한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을 것 같았던 그들도‘사람’이었다. ‘어제 내린 비’의 촉촉한 감성에 젖어 있는 모습이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었다.

환갑 넘은 K가‘어제 내린 비’연주에 쉬 빠져든 까닭이 있다. K의 젊은 시절, 몇 번을 데이트해도 K에 대한 경계심을 조금도 늦추지 않던 여자가 있었다. 정확히는 K에 대한 경계심이라기보다 남자에 대한 경계심이라 봐야 했다. 그것은 자신을 지켜가며 좋은 남자를 맞으려는 여자의 본능이었다. 하지만 비가 촉촉이 내리던 그 날 거리에서, 여자는 K의 어깨에 자신을 기대었다. 몇 번을 데이트해도 항상 일정 거리를 두고 걷던 여자의 투항(投降)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K가 든 우산 속에 들어오지 않으면 여자는 비에 젖을 판이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거리에 촉촉이 내리는 비에 여자 마음이 이미 젖어 있었으니까.

“여보. 애 좀 봐요!”

아내가 방문을 열고 소리치는 바람에 K는 화들짝 놀랐다. 아내가, 며느리가 출근하면서 맡긴 손주를 데려오며 말을 이었다.

“장 좀 보고 올게.”

K가 하는 수 없이 동영상의 볼륨을 바짝 낮추고 손주를 인수받는데 웬 지린내가 풍긴다. 손주가 그 새 오줌을 쌌나 보다. 어제 내린 비 동영상에 촉촉하게 젖던 K는 한숨을 내쉬며 손주의 축축한 기저귀를 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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