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내린 눈이 창 밖 전깃줄에 붙어 있다. 아주 습한 눈인 게 분명하다. 이런 눈을  다른 건조한 눈과 구별해 부르는 우리 말 단어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북극지방의 에스키모들은 눈을 가리키는 단어가 수십 개라 한다. 습한 눈만을 가리키는 단어가 따로 있을 뿐만 아니라 그조차  여럿일 게 분명하다. 역시 언어는 환경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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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닭갈비’식당 안으로 들이치는 햇살이 길어졌다. 안 쪽의 냉장진열장까지 닿았다. 오후 네 시는 되겠지. 박 사장은 벽시계를 본다. 역시 오후 네 시 오 분이다. 도로 건너 산그늘 속에 있는 가게들의 불빛이 이 무렵에는 유난해 보인다.

기우는 햇살이 산의 서쪽에 강하게 달라붙으면서 산그늘의 어둠이 더욱 부각되니까 가게 불빛들이 유난하게 보이는 게 아닐까. 그건 산그늘 밖의 서녘 햇빛과 만나려고 몸부림치는 모양 같다.

내통하려고.

아내가 그 놈과 대낮에 도시의 모텔에서 만나 껴안고 뒹굴고 그러다가 시치미를 떼고 식당으로 돌아오고 그러는 줄은, 박 사장은 몰랐었다. 아내는 은행 일 따위를 본다고 정기적으로 도시를 다녀왔고, 박 사장은 그런가 보다 하고 식당만 지키고 있었다. 주인이 가게를 비우는 횟수에 비례해서 매상이 떨어지게 마련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온 마을 사람들에게 다 퍼진 ‘아내의 바람’소문인데도 혼자만 까맣게 몰랐던 건 이 식당만 도로를 건너 혼자 있는 탓이다. 웬만해서는 도로를 건널 일 없이 지내는 박 사장이니까.

그냥 집에서 살림이나 하라 할 것을, 식당의 인건비를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아내를 끌어들인 게 잘못이었다. 지금, 주방 아줌마는 모르고 있지만 박 사장은 이 식당을 도시의 아는 복덕방마다 부탁해 놓았다. 가격대가 맞으면 팔아 버리고 이 마을을 떠날 것이다. 애들 이름으로 사 놓은 도시의 아파트 두 채 중에서 한 채도 팔고 그러면 다른 데 가서 무슨 장사인들 뭣하겠나.

박 사장은 소주병이 다 비워졌으므로 다시 한 병을 갖다 마시려고 의자에서 일어나다가 콰당 넘어졌다. 주방에서 김장을 마쳐가던 아줌마가 허겁지겁 달려온다.

“괜찮아요.”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비틀대며 일어나는 박 사장이다.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오후만 되면 술타령인 사람이니, 딱하다. 쯧쯧쯧. 아줌마는 혀를 차다가 말한다. “고만 마시지요.”

“괜찮아요.”

하면서 박 사장은 그예 냉장 진열장으로 가서 소주 한 병을 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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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대는 키 작은 관목들이 대부분이지만 제법 큰 소나무도 두엇 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사실 이 곳으로 장소를 정하기도 간단치 않았다. 최소한도 집에서는 결행하고 싶지 않은 김 과장이었다. 결혼해서 십오 년째 살아온 지긋지긋한 공간이란 점도 그렇고, 아내가‘이 인간이 나가서 뒈지지 않고 이게 뭐야’하며 자기 시신을 타박할 것 같은 우려에서였다. 동네 야산을 생각했지만 사람들이 많은 거기서 남의 이목들을 피해 결행한다는 게 불가능할 것 같았다. 더구나 요즈음은 봄방학이라고 학생들까지 야산을 놀러 다니고 있었다. 결국 김 과장은 ‘지난 번 내린 눈이 여태 남아 있을’ 이 산을 결행 장소로 정하고 오후를 기다려 차를 몰고 온 것이다. 이 산을 전에 다녀본 자신의 경험에 의하면 사람들은 오전에 등산하지, 오후 들어서 하는 경우가 없었다. 오후 시간에 이 산 아래로 차를 몰고 온 이유는 그러했다.

김 과장은 위스키 병마개를 딴 뒤 우선 한 모금 맛을 본다. 왜 이리 써? 소주처럼 달착지근하게 쏘는 맛도 아니고, 이건 그냥 쓰다. 소주 사 올 것을 그랬나? 죽는 첫 번째 순서를 밟으면서도 이렇게 생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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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니까, 뜻밖에 비탈에는 눈이 없었다. 경사가 심하니까 내린 눈이 쌓일 수가 없었거나, 동쪽 비탈이라서 아침마다 햇빛을 받으면서 다 녹았을지도 모른다.

7부 능선에서 8부 능선 사이가 될 이 너럭바위 부근에는 눈이 허옇게 남아 있다. 비탈을 오르기 전에 만났던 건조한 눈도 아니다. 얼음처럼 된 단단한 눈이다. 이런 눈밭에 싸리나무, 철쭉나무들이 이파리 하나 없는 앙상한 몸체들로 남아있다. 김 과장은 배낭을 연다. 그 속에는 아까 니슈퍼에서 산 위스키와 음울한 목적을 위해 준비한 밧줄이 꽈리를 튼 꼴로 들어 있다. 계획은 다 서 있다. 우선은 위스키로 만취한 뒤에 부근의 벼랑 위에서 몸을 던지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든든한 나무그루를 찾아서 가지에 밧줄을 건 뒤 목을 맬 계획이다. 두 가지 자살 방법을 설정해 놓았으니 이제는 선택만 남았다.

벼랑은 여기서 삼사 미터를 나아가면 나타난다. 벼랑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까마득하게 산기슭이 보인다. 술김에 눈을 감고 벼랑을 뛰어내린다면 까마득한 허공으로 몸이 떨어지면서…… 산기슭의 바위들에 부딪치며 산산조각이 날 테다. 그게 내키지 않으면 그냥 이 부근에서 나무를 찾아 목을 매면 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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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화창한 날들이 20여 일 이어지자 동네 근처 산의 눈이 대부분 녹아버렸다. 드물게 남아있는 두어 군데 눈은 이 겨울의 마침표일까, 쉼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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